# 48.
출연 중인 드라마의 해외촬영을 핑계 삼아 하와이에서 실컷 선탠과 유흥을 즐기다 막 귀국한 미랑은 마중을 나온 로드 매니저의 차에 올라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간간이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그 날 오후의 날씨만큼이나 쾌청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그녀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의 종방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드라마의 연출을 맡고 있던 윤PD가 차기 작으로 기획 중에 있는 초특급 대하드라마에 주연만큼 비중 있는 역할을 그녀에게 배정하기로 철석같이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랑이 데뷔한 이래로 주목받는 신인이니 어쩌니 하는 기사들은 그녀가 소속된 매니지먼트 사에서 일간지 기자들에게 슬그머니 돈 봉투를 찔러주면서 만들어낸 거품에 불과했던 터라 현재 그녀가 출연 중에 있는 아니 겨우 얼굴을 내비치는 정도의 드라마 한 두 개와 그 동안 찍었던 서 너 개의 삼류급 광고출연 경력을 가지곤 언제 그 살벌한 연예판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장되어 버릴 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런 저런 구실로 하룻밤의 수청을 요구하는 이른 바 파워를 가진 늙은 너구리들까지 여러 번 상대해 주었건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챤스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녀였다. 헌데 이번 하와이 로케 중 그녀는 마침내 천금같은 기회를 쟁취하기에 이르렀다.
윤PD가 꽤나 젊은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유부남이었던 탓에 혹여라도 소문이 불거질까봐 나름대로 조심스럽긴 했지만 해외 로케라는 상황이 미랑에겐 꽤 유리하게 작용했다. 하와이에서 머무는 3주 동안 거의 매일 밤 미랑은 윤PD의 숙소를 남몰래 찾았고 겪어보니 정말 색골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윤PD는 첫 날부터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맞았다. 그러니까 결국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 조건으로 처음 비중 있는 역할을 얻어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천성은 그런 식의 거래가 조금도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나이든 남자들의 기름기 잔뜩 낀 뱃살과 탐욕스런 눈빛이 불결하게 느껴졌을 뿐.
인간성이야 어쨌거나 대박 드라마 생산기라는 별명이 붙은 윤PD가 기획한 초특급 드라마에 주조연급 배역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설레임으로 한껏 고무돼있던 미랑은 자신의 아파트에 돌아와 샤워를 끝낸 후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따라 가지고 거실 소파에 느긋이 길게 누워 로드 매니저에게 시켜서 사 들고 온 스포츠 일간지를 펼칠 때까지 내내 쾌청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말... 말도 안 돼!"
일간지 일면을 장식하고 있던 사진 한 장과 기사 헤드라인이 활 모양으로 가지런히 다듬어놓은 그녀의 눈썹을 구겨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신문 모서리를 거머쥐고 다시 기사에 시선을 집중했다.
'레드비트 은선우의 숨겨둔 진짜 연인?'이란 커다란 활자 아래 원거리에서 몰래 찍은 것인 듯 사진 속 인물이 작고 매우 선명한 편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분명 선우가 어떤 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계란형의 작고 하얀 미랑의 얼굴을 보기 흉할 만큼 일그러뜨리도록 만든 것은 선우와 나란히 걸으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가 바로 희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희원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선우의 얼굴은 또 어떠한가. 방송을 통해 보아왔던 모습과 선우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팬클럽을 만들어 쫓아다니며 줄곧 보아왔던 그의 모습을 모두 통털어 되짚어봐도 그토록 밝고 환하게 웃는 선우를 본 적이 없던 미랑이었다.
"희원이 이 기집애......! 네가 감히 선우오빠를......"
팍!
소리나게 신문을 구겨 접은 미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는 느낌에 미랑은 거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버렸지만 가슴속의 작열감은 조금도 가셔지질 않았다.
미랑의 조부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집안은 소위 방귀 꽤나 뀐다는 세도가였다. 하지만 독자로 귀염만 받으며 천방지축으로 자라난 그녀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집안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뭐하나 하는 일없이 물려받은 재산만 흥청망청 탕진하는데 소일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래도 미랑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그럭저럭 유복한 환경을 유지할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엔 슬슬 바닥난 재산이 가족들의 생활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비롯 그녀의 엄마와 그녀 자신, 또 그녀의 오빠 이렇게 가족 네 사람 어느 하나 사치에 물들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었지만 씀씀이를 줄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주먹질과 가출을 밥먹듯 하던 미랑의 오빠 태준은 어느 날엔가 아예 깍두기 아저씨들의 대열에 합류하더니 지금은 젊은 두목 소리를 듣는 위치에까지 등극(?)해 완전한 음지 속 사람이 되어버렸고 곧 죽어도 자존심 깎이는 일만큼은 참아낼 수 없었던 미랑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내 기울기 시작한 살림형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사치를 부리며 속내를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여전히 유복한 부잣집 외동딸 노릇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에 콧대가 미랑 못지 않게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그녀의 엄마는 그랜저를 몰고 다니며 남몰래 파출부 노릇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때문에 미랑이 죽어라고 연예인이 되고자 기를 썼던 이유엔 타고난 그녀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인 까닭도 있었지만 실제 제 일 목표는 어쨌거나 돈이었다.
하지만 사춘기적 소녀의 감상에서 우러난 나름대로는 순수해 보이는 동기도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가 동경하고 숭배하던 은선우,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것이었다. 아니 미랑은 어떻게든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바보 멍청이 같은 계집애가 끼어 들지만 않았다면 선우오빠랑 내가 이렇게 꼬이는 사이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지금 그 사진 속에서 그와 나란히 웃고 있는 사람은 내가 되었을 거라구!'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우연하게 같은 반이 되었던 희원. 그녀는 미랑이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부터 미랑에게는 넘치게 호의적이었고 미랑은 바보스러운 그녀의 성격을 이용해 친구가 아니라 마치 하녀처럼 그녀를 거느리고 다녔다. 하지만 미련 곰탱이라고 놀려도 배시시 웃기만 하는 정말 미련 곰탱이 같은 희원은 그런 미랑을 철석같이 친구로 믿고 고교를 졸업한 이 후에도 내내 공주처럼 군림하는 미랑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미랑은 한 번도 그런 희원을 고맙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바보 같은 성품을 이용만 했을 뿐이었다. 속으로는 늘 그녀를 경멸하고 증오하면서.
그랬다. 미랑은 희원을 내내 증오해 마지 않았다. 왜냐면 그 미련 곰탱이 같은 바보가 공주 같은 자신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녀처럼 자신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주제에 왠지 미랑이 그녀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일찌감치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찢어지게 가난한 주제에 늘 햇살처럼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최고로 풍족하게 지내던 시절의 미랑의 얼굴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늘 희원의 주변엔 사람들이 넘쳐 났다. 학생이며 선생이며를 가릴 것 없이 그녀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보다 빈티 나고 외모 또한 보잘 것 없는 그녀를 더 공주처럼 우러르고 떠받들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미랑은 희원에게 심술을 부렸지만 천성이 정말 미련 곰탱이인 그녀는 그런 심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랑은 그래서 점점 더 하녀처럼 희원을 부려먹는 것으로 그 분풀이를 대신했다.
헌데 어느 날 보니 자신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녀 노릇을 하던 계집애가 난데없이 자신의 왕자님을 먼저 꿰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뒤에서 뭐라고 자기 험담을 했는지 선우는 자신을 사람 취급도 않으려 든다.
'채희원.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네가 내 뒤통수를 쳐?! 그리고 은선우, 네가 얼마나 잘 나서 날 무시하는지 모르겠지만 널 강제로라도 내 것으로 만들 거야.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도록 만들어 줄 테니 두고 봐!'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미랑은 구겨 쥐고 있던 신문을 바닥에 내팽개치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거실을 서성대다 뭔가를 찾는 듯 장식장 서랍을 거칠게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뜯어놓고 한 두 개피밖에 꺼내 피지 않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아낸 그녀는 조급해 보이는 동작으로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골초였던 그녀가 피부관리를 위해 독하게 마음 먹고 반년 넘게 끊었던 담배였다. 그녀는 라이터를 켜서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담배 연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뿜으며 선우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무슨 속셈으로 네가 자꾸 그 여자를 나와 엮어서 폭로 운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 겁날 거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까 맘대로 해 봐. 그런 일로 연예계에서 매장 당한다 해도 난 아쉬울 거 없으니까.'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뭔가... 더 확실한 올가미가 필요해. 은선우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맬 수 있는 뭔가가!'
미랑이 처음 은밀한 뒷조사를 통해 선우와 나연희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둘 사이의 관계가 생모와 친자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선우의 조부에 의해 남 몰래 키워 온 지고지순한 사랑과 그 분신인 두 남매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내쫓김을 당한, 한 때 은막의 여왕이었으나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술집 마담의 신세로 초라하게 전락해 버린 그야말로 비운의 여인인 나연희를 친아들인 은선우가 매정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터뜨린다면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그에겐 대단한 치명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랑은 그것이 선우를 옭아맬 수 있는 단단한 올가미가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선 너무도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인기 따위 아니 연예인으로서의 장래따위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너무도 냉소적인 그의 태도에 미랑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가 지금 그가 올라서 있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부질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으면서 미랑은 이렇게 저렇게 돌려 선우의 마음을 계속 떠보았지만 요지부동 콧방귀도 안 뀌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미랑만 발을 동동 구르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미랑은 얼음처럼 구는 그에게도 분명 찌르면 꼼짝 하지 못할 약점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여전히 그의 뒤를 캐고 있는 중이었다.
'꼭! 반드시 찾아낼 거야! 널 이대로 희원이년한테 고이 보낼 줄 알아? 가질 수 없다면 부서뜨리기라도 할거야!'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장식장 유리창에 신경질적으로 비벼 끄는 그녀의 입가에 잔인해 보일만큼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