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 (44/75)

  # 44.

  "공연이 몇 번 더 남은 거야?" 콩나물국을 훌훌 마시던 준희가 문득 성진과 선우를 향해 물었다.

  "두 번. 순이야, 오이 무침 남은 거 더 있어?" 준희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꾸하며 성진이 바닥난 접시를 희원에게 들어 보였다.

  "아, 그게 다였는데." 오이를 여섯 개나 썰어서 무쳤는데도 금세 다 떨어져버리자 희원이 미안한 기색으로 성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쒸, 선우 저 자식 혼자 꼭 한 번에 몇 젓가락씩 집어먹어 버려서 그렇다니까." 성진이 빨간 오이무침 국물 자국이 번져있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선우에게 눈을 부라렸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잖아. 거 밥 좀 조용히 먹읍시다. 다른 반찬도 많구먼." 성진의 눈총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선우가 깍두기 두 개를 한꺼번에 집어다 아드득거리며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성진오빠, 내일 오이무침 많이 해서 오빠 것만 다른 접시에 많이 담아줄게요." 희원이 달래듯 성진에게 말했다.

  "역시 이 오빨 생각해주는 사람은 순이 밖에 없구나. 순이야, 내일은 정말 꼭 그렇게 해줘야 해."

  "그럼, 곧 신곡준비에만 박차를 가하면 되겠구나." 성진의 어리광 섞인 표정에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는 얼굴하며 준희가 선우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야지. 준희 너 우리가 공연에 매달려있는 동안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구나." 선우가 준희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 좀......" 

  "근질근질하긴 뭐가. 선영이 아줌마 뒤꽁무니 따라 다니느라 정신없던 놈인데." 성진이 톡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이거 왜 이래, 형. 나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놈이라고." 준희가 반박했다.

  "오오오오, 그러셔!" 준희의 코앞에 짓궂은 얼굴을 들이밀며 성진이 놀리듯 말했다.

  "아, 저리가! 입에서 마늘냄새 나잖아! 어휴." 

  "칫, 지는 김치 안 먹었나 뭐. 에잇, 그래 어디 맛 좀 봐라! 하아, 하아......" 

 준희가 코를 잡고 뒤로 물러나 앉으며 얼굴을 찌푸리자 성진이 꾸역꾸역 준희에게 더욱 몸을 기울이며 그의 코앞에다 마구 입김을 내뿜었다.

  "우웩!"

 희원이 악동처럼 구는 성진의 모습을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 선우가 그녀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연습실로 도시락 좀 싸 가지고 나와라."

  "예?"

  "엥? 네가 웬일이냐, 은선우? 나도 아니면서?" 

 평소 도시락이나 간식 따위의 먹거리를 싸 가지고 나오라는 주문은 늘 성진의 몫이었던 터라 뜬금 없는 선우의 도시락 주문에 희원, 성진, 준희 모두는 다소 의아하다는 얼굴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따끈따끈 맛나게 잘 싸 가지고 나와."

 제일 먼저 아침 식사를 끝낸 선우는 물 한 모금으로 입을 가신 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을 뒤로하고 식탁을 떠났다. 선우가 그렇게 주방을 나가자 성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뇌까렸다.

  "저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지? 호오... 별 일이네."

 고개를 연신 갸웃대는 성진을 바라보며 희원 역시 의아스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똑 부러지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잔잔한 수면 위에 소리 없이 퍼져 가는 동심원처럼 그렇게 그녀의 마음 속 전체로 번져나갔다. 아마도 그것은 희원을 향해 한결 두터워진 친근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그녀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리라. 봄은 아직 멀었건만 그녀의 가슴속엔 따뜻한 훈풍이 불어왔다.

 희원이 그 어느 때 보다 각별한 정성을 쏟아 마련한 도시락을 성진과 선우 앞에 열어놓았을 때 그들과 따로 떨어져 근처에서 배달되어온 짜장면을 먹고 있던 단원들이 부럽다는 듯 한 마디씩 했다.

  "여어, 누구는 맨날 짜장면만 먹어서 얼굴까지 까매질 지경인데 형님들은  좋겠수다."

  "그러게. 부럽다, 부러워. 아, 나도 희원씨처럼 참하고 요리도 잘하는 그런 여동생 하나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야."

  "난 요리 못해도 좋아. 그냥 희원씨처럼 귀여운 여자친구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들의 농담조의 궁시렁거림을 들으며 선우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평소엔 하지도 않던 주문을 뜬금없이 희원에게 요구한 이유는 잠시라도 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과 그녀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받아 들 때의 흐뭇함 외에도 왠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석 같은 희원의 존재를 은연중에 자랑하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유치하다고 비웃으며 코웃음쳤을 남자들이 가진 일종의 과시욕 비슷한 감정이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이 예쁘고 알토란 같은 여자가 바로 내 여자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쳐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회를 봐 희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에도 늦지 않으리라 여기며 선우는 근질근질한 마음을 다스렸다. 

 "야, 너희들! 세상에서 제일 추접스러운 게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거야. 다들 지 복이려니들 하고 먹던 짜장면이나 마저들 먹어라. 면발 불는다! 이런 여동생은 뭐 아무나 두는 줄 알어." 

 성진이 장난스럽게 찝쩍대는 단원들을 향해 보란 듯이 동그랑땡 하나를 집어들어 입안에 톡 털어 넣고 쩝쩝거리며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을 때  조금 전 갑자기 입맛이라도 잃은 듯 채 반도 먹지 않은 자신의 그릇을 일찌감치 한 쪽으로 밀어놓은 지윤이 팔짱을 낀 채 어슬렁어슬렁 세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희원씨라고 했죠? 좋겠어요. 가정부를 이렇듯 정말 여동생처럼 아껴주는 주인을 만나서. 안 그래요?"

  "......!"

 지윤의 목소리엔 분명 비아냥거림이 가득했지만 희원을 비롯한 두 남자들 모두는 즉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지난 번 단원들에게 희원을 가정부가 아닌 성진의 친척 여동생으로 소개했었는데 지윤이 어떻게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후후. 내 예감이 맞았군.'

 그러나 실상 지윤은 희원이 가정부라는 사실을 정말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치로 추측만 하고 있다가 오늘 은근 슬쩍 한 번 넘겨짚어 보았을 뿐이었는데 놀라움에 휩싸인 그들의 반응으로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것을 절로 증명 받은 셈이었다.

  '흥. 한낱 가정부 주제에 오빠들이 잘 대해주니까 제 분수도 모르고 정말 동생이라도 된 양 여지껏 시치미를 뗐다 이거지. 순한 척 하면서 속으론 앙큼한 계집애로군. 바보 같은 선우 오빠도 저런 내숭에 속고있는 게 틀림없어!'

 여자의 육감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나 지윤처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여자라면 더더욱. 이미 직감적으로 선우가 희원에게 빠져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있던 지윤은 선우가 희원과 같이 있는 모습만 보아도 아니 같이 있는 상상만으로도 타오르는 질투심을 가누기 어려웠다. 특히나 지금처럼 선우가 만면 가득 흐뭇한 기색으로 희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자 그녀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올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직 나이도 창창해 보이는데... 난 희원씨가 좀 안돼 보이네. 돈을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지만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가정부로 주저앉아 지내는 거."

  "야, 하지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선우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다소 경직된 얼굴로 지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지윤은 선우가 희원을 편들고 나선다는 생각에 발끈하며 그 전까지 짐짓 웃는 얼굴을 가장하고 있던 태도 따윈 내던져버리고 가시 돋힌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말이 틀려. 그렇잖아. 젊은 아가씨가 뭐 할 짓이 없어서 그런 비천한 일을......"

 짝!

 지윤이 채 말을 맺기도 선우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갈겼다.

  "오... 오빠." 뺨을 부여잡은 채 노기 어린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윤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인해 커질 대로 커졌다.

 아무런 말없이 지윤에게 푸른 불꽃이 튈 것처럼 차갑게 타오르는 시선을 던지고 있던 선우는 이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사태를 그저 벙찐 표정으로 관망하고 있는 희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채희원!"

  "......" 

 선우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 기쁘다든지 뭐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이 너무도 황망한 마음으로 선우와 지윤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희원은 느닷없는 선우의 부름에 곧장 대꾸도 하지 못했다.

  "채희원! 너 일어나."

  "예...에?"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어찌되었거나 자신으로 인해 선우로부터 뺨을 맞은 지윤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희원이 서슬 퍼런 선우의 목소리에 찔끔해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그녀가 채 몸을 다 펴기도 전에 억센 선우의 손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긴다 싶더니 앗 하는 순간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고는 그의 입술로 희원의 동그랗고 도톰한 입술을 덮어버렸다.

  '선,선,선...... 옵......'

 벼락같은 그의 키스에 중심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희원을 선우가 더욱 힘주어 끌어안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을 통째로 삼킬 듯 강렬했던 키스를 아쉬운 듯 끊으며 고개를 들고는 반쯤 넋이 빠진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다른 이들을 향해 큰 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희원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아니면 이 여자 절대로 넘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선우가 고개를 돌려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경악에 휩싸인 표정을 하고 붙박이듯 서 있던 지윤을 쏘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함부로 대하지도 마시구요. 만약 그럴 시엔 상대를 불문하고 이 은선우, 절대로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우가 누굴 빗대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윤은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보고 있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선우와 희원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이내 쌩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연습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 때 연습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싶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선우의 난데없는 키스와 갑작스런 고백을 받고 도저히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던 희원이었다.

  "아... 전 이만......"

 급기야 희원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정신을 수습하고 다리가 휘청거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 연습실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간신히 연습실을 벗어난 희원이 혼신의 힘을 다해 평소보다 열 배는 길게 보이는 복도를 막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희원을 뒤따라 나온 선우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절로 고개가 돌아간 그녀의 시야에 사춘기 시절 그녀가 머리 속에 상상해 보았던 그 어떤 로미오보다 멋진 남자가 오로지 그녀 자신만을 바라보며 애틋하고도 간절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왠지 자꾸만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행운과 맞닥뜨린 사람처럼 그녀는 행복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었다.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는 그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 때 다시 선우가 등뒤에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더니 쉰 듯한 음성이었지만 그녀의 가슴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흔들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널 놓치는 실수... 하지 않을 거야."

 모든 심신의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특히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가파르게 뛰고 있는 심장 때문에 온 몸에 산소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 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시피 하던 그녀가 한계를 느끼고 풀썩 주저앉으려 할 때였다. 돌연 선우가 그녀를 돌려세우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번쩍 안아 든 후 선반처럼 튀어나온 복도 유리창 창틀에 그녀를 털썩 앉혔다. 

 그리고... 그... 별무리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고 있지만 태양의 열기를 가진 그 눈빛을 희원은 그 때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소리 없는 밀어를 속삭이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 서야 확연히 깨달았다.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아프도록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희원아, 내가 널 사랑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랑한다, 채희원. 사랑한다." 

 그 때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단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선우의 박력 있는 고백에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성진은 결국 올 것이 왔군 하는 얼굴로 연습실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미소 띤 얼굴로 손뼉을 쳐주었다.

 하지만 희원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사랑한다 채희원 사랑한다 채희원 사랑한다 채희원......이라는 선우의 목소리만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정신없는 회오리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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