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선우가 춘천까지 자기를 찾아올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꿈꾸어 본 적도 없었다. 저녁 공연까지 있었는데 얼마나 서둘러 이 곳에 온 것일까? 그는 그저 갑작스런 충동으로 그녀를 찾아 춘천까지 내려온 것일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그녀를 놀래주려고 미리부터 계획하고 있던 것일까. 그에겐 얼마든지 즐겁고 화려한 파티가 즐비 할텐데 어째서 힘들게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일까.
반가움과 설레임 뒤로 이런 저런 궁금증들이 두서없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희원의 맘속에 아주 희미하기는 하나 어떤 기대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설마 오빠가 날......?'
선우와 나란히 어깨를 하고 상점을 나오면서 희원은 다시 한 번 발그레해진 얼굴로 살그머니 그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사람. 그녀의 조심스러운 기대가, 희망이 어긋난다 한 들 어떠리.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희원은 그와 이렇게 단둘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이라 여겼다.
'그래. 오늘 밤은 그냥 마음 놓고 꿈을 꾸는 거야. 내일 아침 일어나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그런 꿈이라 해도 오늘만큼은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꿈을 꿀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희원은 불현듯 선우를 향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선우오빠. 나... 오빠한테 팔짱 좀 껴도 돼요?"
선우는 다소 놀란 듯 양 눈썹을 살짝 치켜 뜨더니 이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아주 기분 좋은 기색이 역력한 그런 웃음이었다. 이윽고 그가 희원을 향해 한 쪽 팔을 살짝 들이밀고는 짐짓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주신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아가씨."
두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장식등이 아롱거리는 거리를 연인처럼 다정하게 나란히 팔짱끼고 걷는 동안 서로의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고 있었는가를. 설레임과 뿌듯한 흥분으로 얼마나 가슴 벅차 올라 했는가를.
"서울 야경에 비하면 별로 볼품없죠?"
춘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야경도 보고 바람도 쐴 겸 자주 찾는 구봉산 휴게소 앞 벤치에서 춘천시의 단촐한 야경을 내려다보던 희원이 옆에 앉은 선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볼품없긴. 화려함은 덜하지만 아기자기 하고 소담스럽기만 한데. 훨씬 더 평화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서울야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들 생각 안 해요. 난 여기 태생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요."
선우는 다시 야경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희원을 돌아보며 추위로 인해 그녀의 코가 빨개진 모습이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혼자 나즈막히 뇌까렸다.
'바보야, 너랑 있으면 그 어떤 경치도 내 눈엔 세상 최고로 보인다는 건 모르지?'
"에에 엣취!"
"이런, 많이 추운가 보구나 희원이." 선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아뇨, 견딜만 해요." 희원이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되겠다, 이거라도 위에 걸쳐."
"됐어요. 싫어요. 그러다 선우오빠야 말로 감기 걸려요. 며칠 있다가 또 공연도 해야 되면서."
선우가 다급하게 벗어주려던 외투를 억지로 다시 끌어다 입히며 희원이 만류했다. 그러자 선우가 외투 한 쪽을 활짝 들추고는 희원을 향해 말했다.
"그럼... 자, 이리 들어와."
"예에?"
"뭐해, 바람 들어온다. 빨랑 들어와. 어서." 선우가 턱짓으로 외투 안쪽을 가르키며 채근했다.
"아, 저기..."
"저기는 무슨... 얼른 들어오라니까."
선우는 당황스러워 하는 희원의 어깨를 와락 끌어다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에 바짝 붙이고는 외투 한 쪽으로 그녀를 덮어주었다. 그의 품속은... 아아... 너무도 따뜻했다. 그의 온기로 인해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늘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향기가 야릇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나... 왜 이렇게 엉큼한 애가 돼버렸지...? 그치만... 자꾸 자꾸 가슴이 설레는 걸 막을 수가 없는 걸...... 아아... 그냥 이대로 꽁꽁 얼어붙어 버렸으면 좋겠다...... .......'
선우와 희원은 겨울 바람 속에서 야경 감상을 하느라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다소 한적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아담한 통나무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실내는 생각보다도 훨씬 따뜻하고 안락했다. 그것은 카페 내부에 보기 좋게 설치된 벽난로 때문인 듯 싶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지라 좀 외지다 싶은 위치에 자리잡은 카페였지만 아늑하고 번잡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찾아든 커플들이 서너 쌍 보였다. 선우와 희원은 마침 벽난로 가까운 자리가 비어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주하듯 달려가 그 쪽 테이블 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마실까?"
"난 따뜻한 코코아."
"그래? 그럼 나도 같은 걸루 마셔야지."
벽난로 앞에 앉아 따끈따끈한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희원과 잠시 담소를 나누던 선우에 눈에 문득 비어있는 그들의 옆 테이블에 통기타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걸 발견한 선우는 손을 흔들어 카페 주인을 불렀다.
"저기 세워져 있는 통기타를 잠시 써도 될까 해서요."
"예,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헌데 혹 레드비트의 은선우씨... 아니십니까?" 카페 주인이라기 보다 근처에서 텃밭을 일구는 농사꾼처럼 보이는 인상 좋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예. 맞습니다."
"아이구, 이런 영광이. 이거 나중에 저희 손님들한테 이런 얘길 하면 아마 한 사람도 믿지 않을 겁니다." 누빔천으로 만든 개량 한 복을 소박하게 입은 몸집 좋은 주인 아저씨가 껄걸 웃더니 곧 통기타를 가져다 선우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저... 괜찮으시다면 기념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물론 거절하셔도 괜찮으니 부담 갖지는 마시고요."
"괜찮습니다. 여긴... 왠지 저한테도 두고두고 추억에 남을 장소가 될 것 같거든요."
왠지 의미심장한 눈길로 희원을 바라보며 선우가 미소 띤 얼굴로 대꾸하자 카페 주인은 만면에 함빡 웃음을 띠며 카운터 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아마도 카메라를 가지러 가는 길인 듯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왠지 그와 통 어울려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디지털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와 선우의 사진을 한 장 찍고는 이내 희원에게 부탁해 자신과 선우가 나란히 앉은 모습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흐뭇한 얼굴로 거듭 인사를 하고 작은 바 안쪽으로 돌아간 카페 주인은 이내 오디오의 볼륨을 완전히 줄인 후 선우에게 사인을 보냈고 그 때 까지 기타를 집어들고 작은 소리로 잠시 튜닝을 하던 선우가 그에 답해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갑자기 잦아든 오디오 소리에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손님들의 시선이 이내 튜닝을 하고 있는 선우에게 쏠리기 시작할 때 까페 주인 아저씨가 손바닥을 크게 두 번 마주쳐 주의를 끈 후 덩치에 걸 맞는 우렁찬 목소리로 선우를 소개했다.
"자 자, 여러분.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저희 카페에 유명한 레드비트의 멤버 은선우씨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그 분께서 노래 한 곡을 자청해서 부르시겠다고 하니 우리 모두 박수로 환영해 줍시다."
그 때까지 선우의 존재를 까맣게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손님들 모두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되어 선우를 주목했고 이내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낮은 탄성을 내지르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너무 능수 능란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선우의 간결한 인사말에 사람들은 다시 박수를 보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고개 숙여 답례를 해 보이곤 다시 의자 위에 앉은 뒤 희원을 돌아보며 조금은 멋적은 듯 빙긋이 미소 지었다. 스타답지 않은 진솔한 미소였다.
"아아, 으흠... 아, 이상하네. 갑자기 왜 떨리지?"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후 실제로 선우가 살짝 뺨을 붉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수줍어하는 선우의 모습이라니.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신선한 감흥을 맛보며 희원은 조금은 짓궂은 시선으로 선우를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선우의 뺨이 좀 전 보다 더 붉어지는 모습에 희원은 그만 키들거리고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씨, 웃지마. 분위기 잡는 데 방해되잖아."
"뭐해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희원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노랜... 사실 너를 위해 부르는 노래야."
"예?"
"아, 그러니까 내 말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너한테 주는 노래라고."
"아....."
예상치 못했던 선우의 말에 희원은 할 말을 잃고 그저 그의 두 눈동자를 마주 보기만 했다. 그의 눈동자 가득 그 동안 희원이 보아왔던 그 어떤 때보다 따뜻함이 넘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가 쉽사리 해독해 낼 수 없는 모호함도 함께 일렁거리고 있었다. 왠지 그녀의 마음속에 보랏빛 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게 하고 무지개빛 광채가 가득한 언덕으로 이끄는 듯한 신비로운 일렁임이었다.
이윽고 선우가 그렇듯 희원과 얽혀있던 시선을 조금도 풀 의사가 없는 듯 요지부동한 자세로 노래를 시작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I hope you do believe me
당신이 부디 날 믿어주길 바래요
I'll give you my heart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I love you And you alone were meant for me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
Please give your loving heart to me
제발 당신의 사랑을 제게 주세요
And say we'll never part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말해주세요
I think of you every morning
매일 아침 당신 생각을 해요
Dream of you every night
매일 밤 당신 꿈을 꾸어요
Darling I'm never lonely
난 결코 외롭지 않아요
Whenever you're in sight
당신이 내 곁에만 있다면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I hope you do believe me
당신이 부디 날 믿어주길 바래요
I've given you my heart
내 마음을 당신께 드렸어요
속삭이듯 시작한 노래는 후렴구로 갈수록 애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노래의 음률을 따라 희원에게 고정한 그의 시선이 차츰 따뜻함의 경계를 넘어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을 만큼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별무리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고 있지만 태양의 열기를 가진 눈빛.
희원은 주술에라도 걸린 양 그의 강렬한 시선에 붙잡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끊임없이 그녀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는 듯한 그의 눈빛이 희원을 묶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오로지 희원만을 향한 소리 없는 밀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안 살풋한 설레임을 지나 가파르게 상승한 흥분의 정상에서 그녀는 불현듯 자신을 향한 선우의 감정을 조금씩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나 체온이 상승하면서 그녀는 다시 손을 풀어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그녀의 아찔함은 곧 어떤 스릴감으로 이어졌다. 고공낙하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평범한 감정의 기복을 초월하는 두려움과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뒤범벅된 짜릿한 전율이 그녀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들이 인상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서로의 눈빛에 도취되어 마주 앉아 있을 때 주인아저씨처럼 투박하지만 푸근한 느낌을 주는 통나무 창가엔 마치 어떤 예시라도 되는 것처럼 검은 하늘로부터 순백의 축복이 소리 없이 내려와 쌓이기 시작했다.
희원의 엄마 윤여사와 동생 효진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 희원을 따라 함께 들어온 선우의 얼굴을 다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괜찮으시다면 저 좀 여기서 재워주십시오, 어머니."
"어, 어, 어머니...?!"
급기야 눈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휘둥그렇게 눈을 뜬 효진이 경악에 찬 신음과 가까운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자신의 엄마에게 대뜸 어머니라는 호칭을 서슴없이 내놓는 선우의 번죽에는 희원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드, 들어와요."
희원이 레드비튼가 머시깽인가 하는 가수들의 일을 돕고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윤여사는 대한민국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그렇게 인기가 많은 연예인-두 사람이 집에 들어오기 바로 전까지 효진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에 알게된 사실이지만-이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 어째서 여기까지 희원을 쫓아내려 왔으며 밤늦은 시각 실례를 무릅쓰고 집까지 따라 들어왔는지 영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지만 그저 희원과 선우 두 사람의 눈치만 슬슬 살피며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차라도 좀... 들어요.."
조그만 찻상에 고아한 느낌의 다기를 격식 있게 차려나온 윤여사가 선우 앞에 찻상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 때까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왠지 마냥 흐뭇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선우는 아담하고 평범했지만 윤여사의 살림 솜씨를 말해주듯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어있는 거실을 둘러보며 앉아 있다가 윤여사가 내온 찻상을 받기 위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그가 천천히 차를 마시는 동안 윤여사와 효진은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선우를 주시하다 문득 문득 선우와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얼른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룹으로 데뷔한 이래 그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 덕분에 어딜 가나 일반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성가실 정도로 받아왔던 그였지만 지금 선우는 효진모녀의 시선이 유쾌하기만 했다.
"희원아, 그럼 이... 손님은 재원이 방에서 주무시라고 해." 여전히 곁눈질로 선우를 의식하며 윤여사가 희원을 향해 말했다.
"네, 엄마."
그 때까지 선우를 향한 윤여사와 효진의 집요한 시선을 다소 난감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희원이 대답했다.
곧 걸레를 하나를 들고 군대에 가 있는 남동생 재원의 방으로가 바닥을 깨끗하게 훔친 후 이부자리를 깔고 있는 희원을 따라 선우가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동안 말없이 서서 희원이 이부자리 까는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는 불현 듯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상한 생각으로 혼자 얼굴을 붉혔다.
"보일러를 틀긴 했는데 오랫동안 비워놨던 방이라 조금 더 있어야 따뜻해 질 거예요."
"어어... 난, 난 괜찮아."
"좀 전에... 엄마랑 효진이 때문에 민망하셨죠. 선우오빠가 그냥 이해해 주세요. 갑자기 제가 웬 남자랑 함께 집에 들어와서 엄마도 사실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마침 아빠는 고모댁에 볼일 있다고 가셔서 안 계시지만 아빠까지 계셨다면 선우오빠가 좀 더 곤욕을 치뤘을는지도 몰라요." 희원이 미안한 기색으로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도 뵜으면 좋았을텐데."
"후훗."
"왜 웃어?" 선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희원을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빠가 보기보다 번죽이 좋은 것 같아서요. 처음 보는데도 금방 어머니, 아버지 하면서 말예요."
"아아... 그거. 글쎄... 왠지 너희 가족들한텐 처음부터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
희원은 잠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카페에서 경험했던 아찔한 스릴감과 다시 한 번 맞닥뜨렸다. 순식간에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희원은 얼른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오며 선우에게 밤 인사를 했다.
"그, 그럼. 선우오빠 잘 자요."
"그래, 너두."
재원의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희원은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랴부랴 방문을 닫은 뒤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펄럭거리는 심장으로 인해 가빠진 호흡을 추스렸다.
"뭐해? 누가 쫒아 오기라도 해?"
어렸을 적부터 희원과 방을 함께 쓰던 효진이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으려다 말고 자신의 언니를 이상한 눈길로 돌아보며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냐. 아직... 안 잤구나."
희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효진에게 대꾸하고 효진의 침대 옆에 엄마가 벌써 준비해 놓은 이부자리로 파고들었다.
"아아 따뜻하다."
얼굴까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희원이 기분 좋게 읊조렸다. 그 때 효진이 침대 위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그런 희원을 내려다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뭐야, 언니! 그냥 그대로 자는 건 아니겠지?"
"졸려."
"난 안 졸려."
"그럼 나가서 성탄 특집 영화라도 봐. 나홀로 집에 2편 하는 것 같더라."
"누가 심심해서 그런대? 그러지 말고 얼른 설 좀 풀어봐. 은선우가 여기까지 왜 언니를 찾아온 거야?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글세. 그 이유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야, 점 점 더 수상해. 그렇다고 은선우가 언니한테 별다른 맘이 있어서 그럴 일은 만무하고 말이야... 으흠......"
'그러게 말야. 나도 오늘까지 그럴 일은 절대로 절대로 만무하다고만 생각했어.'
희원은 자신의 심장이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함을 의식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는 어떤 희망의 불씨가 여차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이불을 꼬옥 끌어 덮고 눈을 감는 것으로 그 불씨를 그녀 안에 가두어 두고자 했다.
"정말 아무리 머릴 굴려봐도 이해가 안 간단 말야, 이 상황이. 언니, 뭐해! 정말 그렇게 자버릴 거야!"
"효진아, 잘 자. 언니 잔다."
잠들기 전까지 효진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별의 별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임을 잘 알고 있는 희원은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이불 속에서 희원은 살그머니 눈을 떴다. 분명 자신은 지금 이불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희원은 꼭 자신이 공중에 붕붕 떠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원은 피식 하고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드는 순간까지 그렇게 나사 하나 풀린 사람마냥 실실 웃고 또 웃었다.
그 때 재원의 방에 누워있던 선우는 점점 따뜻해져 오는 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기분 좋은 아늑함과 푸근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잠자리가 바뀌면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그였건만 지금은 순식간에 나른한 졸음의 엄습을 받았다.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그의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채 일 분이 지나기 전에 선우는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어떤 때보다 깊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