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 (41/75)

  

# 41.

  "아아, 으흠... 이, 이거... 이 것 좀 달아줄래요?"

  "어? 아아... 그, 그래."

 희원은 어색한 순간을 모면을 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은색별을 불쑥 선우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마법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멍한 얼굴의 선우가 얼떨결에 그 별 장식을 받아들며 어눌한 말투로 대꾸했다. 희원은 그 때까지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선우의 팔이 이윽고 풀리자 호흡곤란을 일으킬 것만 같았던 숨을 소리 없이 고르며 선우가 방금 전까지 자신을 휘감고 있던 그의 팔을 쭈욱 뻗어 트리 꼭대기에 별 장식을 다는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아직 채 달지 않은 나머지 장식들을 서둘러 작은 상자에 주섬주섬 집어 담기 시작했다.

  "아직... 장식이 덜 끝난 거 아닌가?" 선우가 물었다.

  "내일... 내일 또 하죠, 뭐." 

 선우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희원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의 돌발적인 상황에서 선우는 해일처럼 들고일어난 음흉한(?) 충동의 엄습을 받았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지만 그의 시도가 결국 불발로 돌아가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대신 선우의 마음속엔 그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한 어떤 확신이 자릴 잡았다. 자신을 향한 희원의 마음이 그와 같다는 확신!

  "저녁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런가... 나 라면 하나만 끓여줄래?"

  "라면...요?" 여전히 선우와는 눈을 맞추지 못하면서 희원이 모기 만한 소리로 대꾸했다.

  "응. 끓여 줄 거지?" 왠지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선우가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희원은 곧 준비하겠다는 대답을 남기곤 마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 들어가고픈 듯한 표정으로 쪼르륵 주방을 향해 총총 걸음 쳐갔다. 선우는 그런 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큭큭 거리다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 대신 막 희원이 안으로 사라진 주방 입구를 잠시동안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곧 그녀를 뒤따라갔다.

  "라면이 어디 잘 끓고 있나?"

  '헉!'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냄비 앞에 지켜서있던 희원은 자신의 등뒤로 바짝 다가선 선우가 그녀의 양어깨에 지긋이 손을 얹자 속으로 숨을 삼켰다. 그리고 어찌나 눈을 크게 떴는지 눈동자가 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때 선우는 희원이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디 보자... 끓기 시작할 땐 이렇게 한 번 저어줘야지."

  '읔!'

  "그래야 면발이 골고루 잘 익는 법이지."

 선우가 그녀의 어깨를 짚고 있던 한 손을 어깨 너머로 가져가 이 번엔 젓가락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잡고는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라면 가락을 휘휘 저으며 왠지 은근한 말투로 나즈막이 입을 열자 희원은 등뒤에 밀착 되어 있던 그의 단단한 가슴이며, 그녀의 손을 감싸쥐고 있는 그의 손, 그리고 목 언저리를 살살 간지르는 그의 숨결 때문에 당장이라도 야릇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아참, 계란... 계란 넣어야지."

 희원은 계란을 가져온다는 핑계로 선우의 품(?)에서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음을 신께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희원은 그 자리에서 화르륵 몸을 사르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었다.

  "그럼, 천천히 드세요, 선우오빠"

  "뭐야, 넌 어디 가게?" 부랴부랴 간단한 상차림을 마치고 주방을 나서려는 희원을 향해 선우가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장식... 생각해 보니까 그냥 오늘 다 끝마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아하하."

  "야, 궁상맞게 혼자 앉아 먹기 싫어. 내가 라면 다 먹을 때까지 여기 앞에 앉아있어."

  "......"

  "뭐해? 얼른."

  "예에."

 그렇게 해서 희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신 히죽거리고 있는 선우 앞에 마주 앉아 그가 라면 냄비를 천천히, 별나게도 아주 천천히 비우는 모습을 멀쑥한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는 저녁 공연을 마치고 선우는 촌각을 다투는 사람처럼 급히 서둘러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 때 까지도 무대의상을 걸치고 분장 하나 지우지 않은 채 다른 단원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성진을 향해 말했다.

  "형, 그럼 나 먼저 간다."

  "어, 그래. 재밌게 놀다와."

  "전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갑니다. 다들 나중에 연습실에서 뵈요." 선우가 다른 단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성탄절 잘 보내요, 선우씨. 그나저나 어디 좋은 데 가나 봐."

  "그러게.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나보네."

  "하하.모두들 성탄절 잘 보내시구요. 아, 지윤아. 너도 성탄절 잘 보내라."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탄인사를 건네고 막 걸음을 떼려던 선우의 시선이 지윤과 마주치자 그는 지윤에게도 웃으며 성탄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뭐가 또 토라졌는지 지윤은 찬바람이 쌩도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런 지윤의 모습을 선우는 웃음으로 넘겨 버리곤 서둘러 분장실을 빠져 나와 극장 뒤편 출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춘천으로 가주세요."

  "언니...요?"

 희원의 동생 효진은 늦은 시각 불쑥 찾아와 자신의 언니를 찾는 장신의 남자를 수상쩍게 바라보며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집을 맞게 찾긴 했나보네. 희원이 오늘 여기 왔죠?"

  "예... 그렇긴 한데... 누구... 시죠?"

 하필 골목길을 비추는 보안등 한 개가 나가는 바람에 대문 앞이 다소 어둑 어둑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효진은 희원을 찾는 낯선 사내를 꼼꼼히 훑어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우와. 우리 언니 쑥맥인 줄 알았더니 능력 좋네. 어디서 이런 킹카를... 그나저나 어쩜 이렇게 은선우랑 꼭 닮았다냐? 우리 언니 복 터졌네 복 터졌어.'

  "효진씨 맞죠? 희원이 동생분. 만나서 반가와요, 나 은선우라고 해요."

 효진은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건네 오는 선우의 얼굴과 또 그가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뜨악한 얼굴로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은선우라고... 뭐야, 이름도 똑같잖... 아니, 뭐라고?! 은, 은, 은선우?!!!'

 내내 의심쩍은 얼굴로 빈틈없이 자신을 훑어보던 효진이 돌연 경악하는 표정으로 입만 뻐금 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선우가 웃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신원 확실하죠? 나... 언니 좀 만나보러 왔는데 지금 어디 있어요?"

  "아, 아, 아... 그게... 저 정말 은선우씨 맞아요?!"

  "예에. 제가 바로 그 은선우 랍니다."

  "오오오, 우리 동네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아니다! 진짜 경사는 우리 집안에 난 거지. 오오, 선우오빠. 저 오빠 열렬한 팬이예요. 오오......"

 효진이 갑자기 선우의 손을 와락 부여잡고 감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자 다소 뻘쭘해진 선우가 다른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아하하, 고, 고마워요. 근데... 언니는......"

  "아니 그런데 선우오빠가 우리 언니 같은 사람은 왜 찾아오셨죠?"

 조금 냉정을 되찾은 효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언니 같은 사람...이요? 언니가 어떤 사람인데요?" 선우가 다소 장난기 실린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호랑이도 안 물고 갈 별종이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형광등에, 사오정에, 골동품 냄새 폴폴 나는 천연기념물 주제에 고집은 드럽게 세잖아요 또."

  "하하하하하. 어쩜 그렇게 나랑 생각이 똑같아요?"

  "언니를 조금만 겪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 있어요."

 선우는 누가 언니 동생 아니랄까봐 희원이랑 눈매며 입매 콧날까지 쏙 빼닮은 효진과의 대화의 너무도 유쾌했지만 이내 자신이 그 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효진에게 다시 희원의 소재를 물었다. 

  "아아... 좀 전에 답답하면서 바람이나 쐰다고 시내로 나갔어요?"

  "시내?"

  "네, 명동요. 하지만 바닥이 그렇게 넓지 않아서 못 만나는 일은 없으실 거예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효진씨. 그럼, 나중에 또 봐요."

 선우는 희원의 소재를 알아내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뜨며 효진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골목을 달려나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몽롱해진 시선으로 응시하던 효진은 대문 고리를 부여잡으며 반쯤 넋이 빠진 사람처럼 혼자 뇌까렸다.

  "나중에 또 봐요... 나중에...또 봐... 오오... 선우오빠......"

  희원은 그녀에게 친숙하고 정겨운 명동 골목을 하릴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 쌍쌍족이거나 혹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희원은 괜스레 개밥에 도토리 신세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괜히 혼자 나왔나? 머리핀이라도 사준다고 꼬셔서 효진이라도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봐.'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성진과 선우는 이브날 까지 공연이 있어서 바쁠테고 목하 열애중이신 준희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해서 춘천집으로 내려온 희원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그래도 외로운 크리스마스는 되지 않을 것이므로.

 간만에 나와본 명동 골목엔 상점들 대부분이 아기 자기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아 성탄절 분위기 물씬 났지만 희원은 여전히 흥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마음 먹고 나온 길에 금방 되돌아가기도 뭐하고 해서 희원은 이 상점 저 상점을 어슬렁거리며 아이쇼핑 삼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이 시디는 얼마예요?"

  "만 2천입니다."

  '호오... 비싸네.'

 괜스리 사지도 않을 물건을 집었나 놓았다 하며 돌아다니던 희원이 어느 순간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등뒤를 돌아다 보았다. 

  '응? 이상하네. 꼭 누가 쫓아다니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효진이가 날 놀래켜 주려고 따라왔나? 아냐, 그 기집앤 추운 걸 제일 질색하니까 그럴 리는 없을 거야.'

 희원은 그저 자신의 괜한 착각이려니 여기며 다시 걸음을 옮겨 악세사리며 의상소품들을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점포 한 가운데에 놓인 길다란 매대 위에 색색깔의 머플러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이 눈에 그녀의 눈에 들었다. 그녀는 곧 매대로 다가가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든 핑크색 앙고라 머플러를 집어들어 자신의 목에 둘러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가 휙 풀어지더니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목에 팔을 감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 거보다 겨울엔 늑대 목도리가 제 격이지."

 놀라움 속에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선우가 있었다.

  "선우오빠! 여, 여긴 어떻게?!"

  "이렇게 혼자 궁상떨고 있을 게 뻔해서 내가 하루 구제해 주려고 왔다. 고맙지?!"

  

 선우의 너무도 뜻밖의 출현으로 한동안 넋 빠진 사람처럼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서있던 희원은 이내 반가움과 설레임으로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 안 반가워?"

  "아뇨... 반가와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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