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수영은 인기척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 현관 문을 열고 있었다. 그것도 안에서.
그러나 그의 의식을 포함해 온 몸 전체가 솜으로 만들어진 늪에 반쯤 씩 잠겨 있는 것처럼 나른하고 묵지근했기 때문에 그는 잠시 동안 혼란가운데서 뻑뻑한 머리를 굴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누가 집안에 있는 거지?
아아... 누구......
맞다! 채린이!
몸은 여전히 반수면 상태처럼 무겁기만 했지만 화들짝 정신이 났다.
어제 밤. 채린과의 고별주......
후후. 지금 생각해 보니 우스운 짓이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은 어울리지도 않은 센티멘탈에 빠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채린이 어째서 지금까지 여기에......?
혹시?!
그녀가 따라 주는 술을 몇 잔 받아 마시던 것을 끝으로 그 다음 기억이 없다. 수영은 그녀를 불러 빨리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문간에 서서 한동안 돌아오질 않는다.
도대체 날도 추운데 문을 열고 뭘 하는 거지?
아침바람에 누가 찾아오기라도 한 거야?
이내 수영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밖을 향해 소리쳤다.
"야, 밖에 누구야?!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야?!"
하지만 그녀로부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울컥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그는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두통이 몰려오고 있었다.
한 쪽 팔을 이마 위에 괸 채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이윽고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소리와 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은 힘들게 의식을 가다듬으며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파랗게 질려 서있는 그녀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은 그저 추위로 인한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수영은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 이상한 예감을 읽어냈다.
"누구였지? 방금 찾아왔던 사람... 누가 찾아왔었지?"
"......"
그녀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없자 수영은 그의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다가섬을 느꼈다.
"말해. 누구였지?"
"그 여자. 당신이 결혼하려는 바로 그 여자."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아주 빠른 어조로 그렇게 대답을 내뱉곤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희원...이? 희원이가 왔다갔단 말이야?"
채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냥 돌아갔지? 네가 돌려보낸 거야? 엉?!"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 대꾸가 없는 채린의 얼굴을 노기 띤 표정으로 쏘아보던 수영이 이내 그녀가 자신의 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모습을 새삼스레 훑어보곤 경악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돌변했다.
"너..."
무참히 얼굴을 일그러뜨린 수영이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방으로 뛰어 들어가 정신없이 옷을 주워 입더니 바람처럼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갑자기 달려든 채린이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수영을 제지했다.
"벌써 갔어요!"
"이 손 놔. 안 놔?"
"수영씨."
짝.
수영의 손이 날아 그녀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그리고 이내 다급한 몸짓으로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내 말, 내 말 좀 들어봐, 수영씨."
그러나 채린은 집요하게 수영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절박한 얼굴로 매달렸다.
"비켜, 당장!"
"할 말...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요."
"난 너한테 더 이상 들을 얘기 같은 거 없어."
"사랑해요, 수영씨. 나 장난 아니었어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런데?"
채린은 소름 끼치도록 냉혹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영에게 공포심에 가까운 전율을 느끼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사랑 고백따위 코웃음 칠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마지막 남은 히든 카드를 던질 차례였다.
"나 당신 아이 가졌어."
"뭐?!"
"4개월 째야."
동공이 팽창될 대로 팽창된 수영의 눈동자가 한동안 뚫어져라 채린을 응시하더니 이내 오싹할 정도의 냉기를 내뿜었다.
"네가 이제 와서 내게 왜 이런 가증스러운 수작을 부리는 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잘 못 봤어, 한채린. 내가 여자 관계를 가질 때의 철칙 일 조가 그런 멍청한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야. 아마도 네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군."
"날 그런 여자로 취급하지마! 당신과 교제하는 동안 다른 남자는 없었어!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피임에 철저한 사람인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그 날. 그 날 당신은 실수라면 실수를 저질렀어. 내가 바에서 만취해 있던 당신을 내 아파트로 데려갔던 날 말이야. 잡아떼고 싶다고 해도 사실은 사실이야."
마치 상처받은 짐승처럼 위험스러워 보이면서도 구슬퍼 보이는 얼굴로 채린이 내뱉듯 던진 얘기가 모두 끝났을 때 수영은 정신이 아뜩해 오는 기분을 느꼈다.
채린은 그 날을 말하고 있었다. 희원의 생일날. 의식을 잃은 희원을 드라마틱하게도 선우가 찾아와 업고 가버린 날. 왠지 구질구질한 기분을 이기지 못해 거리를 배회하다 단골 바에서 폭음을 하곤 필름이 끊겨버린 그 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뿔싸!
수영은 속으로 낮은 신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하고 싶었지만, 채린을 헤픈 여자라고 더 몰아 부쳐대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사실은 사실이었다. 채린은 지금 자신에게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예계 생활 같은 거 얼마든지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 나 당신과 그리고 태어날 우리 아기... 이렇게 셋이서 단란한 가정 꾸리며 그렇게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어, 수영씨."
다시 절박함이 묻어 나는 말투로 채린이 흐느끼듯 애원했다.
수영은 온 몸의 기운이 쭈욱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휘청거리듯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한 순간에 그가 조바심 치며 꿈꿔왔던 희원과의 미래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잠시동안 눈물로 얼룩진 채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무릎에 팔을 괴고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소록. 소록. 소로록.
그 해 들어 처음으로 쏟아지는 눈, 그것도 탐스러운 함박눈이 분주히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의 머리 위에서 자연이 내리는 마지막 축복인양 그렇게 성스럽고도 정결한 군무를 소리없이 연출하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잿빛 구름 때문에 아직 때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해가 질 것처럼 어둑어둑한 거리 곳곳에 금가루를 뿌려놓은 꽃송이들처럼 아련하게 반짝거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점점 거세어지는 눈발 사이로 동화 속에 들어와 앉아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러나 만약 그게 현실이라면 수영은 분명 슬픈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는 장면으로 끝나는 슬픈 동화......
커피숍의 아담한 유리 테이블을 마주하고 건너편에 앉아있는 희원의 표정은 단호했다. 여지껏 한 번도 희원의 얼굴에서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그의 연락을 피하기만 하던 그녀가 자진해서 먼저 수영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부터 예감한 것이었지만 돌이키기엔 불가능할 만큼 마음의 결정을 확고히 내린 그녀의 얼굴이 지금 수영에겐 너무나 아프다.
수영은 차마 그녀의 그런 표정을 계속 쳐다보고 있기가 힘들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한동안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초조한 기색으로 헤매이던 그의 시선이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에 가 꽂혔다. 하필. 그의 가슴이 다시 쿡쿡 쑤셔왔다. 희원에게 건넨 결혼반지였다.
"나한테만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선배. 그 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래요. 처음엔 배신감 때문에 선배 원망만 했었어요. 하지만 나에 대한 선배의 마음이 절대로 가식만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또..."
"희원아, 모두 오해야. 그 날 채린이가 너한테 무슨 소릴 지껄였는진 모르지만 걘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야. 너 정말 모르겠니? 너 정말... 내 맘 몰라?"
희원이 그와 연락을 끊고 지낸 일주일 남짓 동안 정말 마음이 아플 만큼 수영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파리한 얼굴에 거뭇거뭇 자란 수염이 가뜩이나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더욱 초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지금 희원 앞에서 절망적인 얼굴로 애원하다시피 하고 있는 그의 입술은 일주일 내내 얼마나 속을 태우고 있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싹 메말라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불끈 뭉클한 것이 치밀고 올라왔지만 연민은 연민일 뿐이었다. 그녀는 칼자루를 쥔 이가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자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리기 직전과 같은 비장함으로 한 번 더 무장하기 위해 한껏 마음을 다잡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선배의 마음이 어떤 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선배가 한채린씨와 아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예요. 본심이었든 실수였든 그것 역시 이 마당에 중요하지 않아요. 선배는 분명 채린씨에게 책임질 행동을 했고 남자라면 응당 그 책임을 회피해선 안 된다고 믿어요, 난. 자신의 아이까지 갖은 여자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말하는 선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도 선배 받아들일 수 없어요."
희원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강경한 말투에 수영은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 쥘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희원은 자신 앞에 놓여있던 반지 상자를 수영 앞으로 밀었다.
"이거... 돌려드려요, 선배. 난 임자가 아닌 듯 싶어요."
수영은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희원이 자신 앞으로 밀어놓은 상자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기만 했다. 표면상으로 그의 모습은 고요해 보였지만 그 때 그는 가슴을 인두로 찍어 누르는 듯한 고통을 신음 소리 하나 터뜨리지 못한 채 속으로만 삭이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해요, 선배. 나 먼저 일어날게요."
희원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외투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수영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말이 모두 옳았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남자를 희원은 절대로 받아들 수 없는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후후후.
문득 그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 날 무책임하고 방만했던 행동들에 대한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루는 건가? 후후. 후후후후. 정말 꼴 좋게 됐구나, 김수영! 꼴 좋아!'
"야, 뭐야?!!! 이 기사, 이거 뭐야?!"
"뭔데, 뭔데 또."
무슨 기사를 읽었는지 조간 신문을 읽다 말고 앉은자리에서 1미터는 족히 튀어 오른 듯한 성진을 쳐다보며 준희가 물었다.
"한채린이 결혼 기사 났는데 상대가 김수영이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뭐?!"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일간지의 한 면을 손으로 가르키는 성진에게서 선우가 급히 신문을 빼았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연실색한 얼굴로 선우 옆에서 같이 한채린의 결혼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준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뇌까리곤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순, 순이... 순이 지금 어딨냐?" 성진이 갑자기 목소리를 잔뜩 낮추더니 준희를 향해 물었다.
"어어... 위층에서 욕실 청소 중인 것 같..."
"성진오빠, 왜요?"
"뜨아!"
준희가 성진의 물음에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하게 대꾸를 하던 중 불현듯 희원의 목소리가 끼어 들자 성진과 준희는 무슨 죄라도 짓다 걸린 사람들처럼 기암을 하며 소파 위로 나자빠졌다.
"뭐예요, 들?"
희원이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실룩거리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흘겨보며 물었다.
"아니... 그게 저 말야......"
"나한테 뭐 찔리는 거 있죠? 빨랑 자수해서 광명 찾아욧!"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성진과 준희가 버벅거리자 희원이 더욱 수상쩍다는 얼굴을 하며 다가서자 문득 선우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 소파 위에 앉히더니 무서워 보일 만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다그치듯 물었다.
"이 기사는 뭐지?"
그 때까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희원은 선우가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미는 신문에 시선을 돌린 후에야 그 까닭을 알았다. 성진과 준희가 희원의 출현에 왜들 그렇게 당황했는지 또 선우가 왜 그렇게 화난 사람처럼 흥분해 있는지를.
"아아....."
"아아... 라니. 고작 그게 다야? 뭔가 할 말이 있을 거 아냐?"
자신과 결혼할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피식 웃으며 희원이 내뱉은 소리라곤 고작 '아아'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다였고 그녀의 그런 초연한 태도에 선우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당장 자초지종을 낱낱이 말하라고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그렇게 됐어요. 아무래도 선배랑 나... 인연이 아니었나 봐요."
세 사람이 기다리던 뭔가 속시원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신문 기사 속에 채린의 사진과 나란히 실린 수영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는 희원에게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 오늘도 모두 수고들 했어요. 공연이 거듭 될수록 다들 몰입도도 높아지고 좋아요. 다음 공연에서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은 열기로 몰입해 봅시다. 이상!"
연출 선생의 격려 멘트에 이어 단원들끼리 서로를 격려하는 박수를 끝으로 분장실에 모여있던 출연진들 모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각기 흩어졌다. 평소 패턴으로 보아 그들 가운데 곧장 집으로 귀가하는 이는 아주 드물 것이다. 대부분 그들은 함께 기거하거나 혹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취향에 따라 대포집으로 향하거나 호프집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날 성진은 공연을 계기로 친해진 몇 몇 단원들과 함께 동행하기로 했지만 선우는 휴식을 핑계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형은 택시 타고 와. 나 먼저 들어간다.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요."
"어머, 선우씨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예요."
"언제 꼭 합석토록 하겠습니다."
서운해하는 단원들에게 과장되게 허릴 굽혀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고 돌아서려는데 그 때까지 무리 가운데서 뾰루퉁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지윤이 앞으로 나서며 선우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오빠, 요즘 정말 이러기야. 공연이고 연습이고 끝나기만 하면 득달같이 집으로 쪼르르르. 아니 집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놨어?"
"어떻게 알았냐? 집이 온통 꿀 밭이다, 왜?"
"어유 정말.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오빠 없음 나 심심하단 말야."
이내 지윤은 그의 팔짱을 꽉 끼고 매달린 채 있는 대로 코맹맹이 소릴 내며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선우는 기분 상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풀어내고는 콧등을 한 번 찡긋해 보이곤 급기야 자릴 떴다. 지윤은 멀어져 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성진을 향해 물었다.
"선우오빠 혹시 연애하는 거 아니예요?"
"글세. 집이 애인이라면 모를까... 아아... 또 모르지. 집안에 감춰둔 애인이라도 있는지."
성진이 너스레를 떨 듯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넘기며 내뱉은 대답에 다른 단원들은 그저 실없는 우스개 소리라 여기고 미소를 지었지만 지윤의 눈동자엔 일순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광채가 파르륵 일었다.
선우가 집안에 들어섰을 때 희원은 거실에 자기 키보다 훨씬 큰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놓고 나뭇가지 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매다느라 여념이 없었다.
"왔어요? 어, 성진오빤?" 주먹만한 초록색 구슬 하나를 막 매달고 난 희원이 돌아보며 물었다.
"단원들이랑 한 잔 하러 갔어. 준희는?"
"방앗간에요."
"방앗간?"
"준희오빠 방앗간이 어디겠어요?" 이 번에는 지팡이 모양의 사탕을 가지 끝에 고정시키던 그녀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아아... 선영씨네 집."
선우는 그렇게 대꾸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에 그녀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생각해보니 웃기도 더 잘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겉으론 드러나게 표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영과의 결혼이 무산되고 난 뒤의 희원은 분명 어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린 소녀 같기만 하던 그녀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에 문득 문득 애잔한 우수가 안개처럼 서리곤 하는 모습이 그랬고 자주 허공 중에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지곤 하는 모습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희원의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선우는 모순되게도 아주 상반되는 감정을 함께 맛보곤 했다. 안타까움으로 인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져옴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그녀의 그런 모습이 점점 더 그에게 여자로 다가와 온몸이 찌릿찌릿 거릴 만큼 야릇한 가슴 떨림을 느끼곤 하는 것이었다.
"여엉차....."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별 하나를 나무 꼭대기에 걸으려는 듯 그녀가 있는 대로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키엔 역부족인 일이었다. 발돋움을 해보다 해보다 여의치 않자 그녀는 이내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애를 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우습고도 한편으론 너무도 귀여워 선우가 도와줄 생각도 않고 팔짱을 낀 채 그저 구경만 하고 서있자 은근히 선우가 다가와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희원은 계속 곁눈질로 그를 흘금거리기만 하다 그가 제자리에서 꿈쩍도 않자 토라진 얼굴로 나즈막이 궁시렁 거렸다.
"정말 못됐어. 뻔히 보면서도 도와줄 생각도 않고."
결국 그의 도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디딜 것을 찾기 위해 그녀가 막 몸을 돌린 순간 희원은 어느 틈엔가 그녀의 등뒤로 다가서 있던 선우의 가슴 한 가운데에 얼굴을 콱 부딪히고 말았다.
'앗!'
그리고 갑작스럽게 부딪힌 반동 때문에 뒤로 휘청거리는 그녀를 선우가 재빠르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희원은 다시 선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아예 선우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 버리고 말았다.
'선우오빠 냄새다.'
헌데 희원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그의 향기에 도취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과..... 계속 듣고있다간 최면에라도 걸릴 듯한 그의 심장 박동 소리......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 그런데 그 주술성 짙은 박동 소리가 점점 가파른 리듬을 타고 있다. 왜지?
희원은 그제서야 고개를 쳐들고 선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선우의 눈동자가 묘한 빛깔로 짙어져간다. 그대로 빨려 들어갈 듯한 눈빛...... 아아... 그는 어째서 계속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는 걸까?
갑자기 야릇한 상상이 그녀의 뺨을 아니 그녀의 전신을 타오르게 만들었다.
아..... 어떡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