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 (39/75)

  

# 39.

  

 "희원아, 이거 어때? 장모님이 좋아하실까?"

 희원은 수영이 들어 보이는 블라우스를 돌아보았다. 연보랏빛 니트 원단에 보랏빛 자수와 자수정빛 구슬이 달린, 보통의 부인네들 이라면 누구든 한 눈에 맘에 들어할 만한 스웨터였다. 그녀는 또 한 번 수영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의 엄마는 그런 선물을 탐탁치 않아 할 것임을 잘 알기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왜? 별로야?"

  "수영씨."

 수영의 이름을 나즈막히 부르며 그에게 다가 선 희원은 옷걸이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분명 부담스러워 하실 거예요. 원래 남한테 값비싼 선물 같은 거 가만히 앉아 맘 편하게 받으시고 할 줄 모르는 분이예요. 아빠도 마찬 가지시고요."

  "그건 경우가 남일 때 얘기지. 내가 어디 남이냐? 곧 사위가 될텐데."

 서슴없이 그녀의 엄마를 장모님으로 칭하며 희원의 조심스러운 만류 따윈 조금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의 수영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 자신감이 한 풀 꺾인 듯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좀 찔려서 더 그래. 너랑 결혼 서두르고 싶은 마음에 식장하고 드레스까지 다 예약해 놓구 인사 가려니까 너무 죄송한 생각이 들어서. 순서가 원래 그게 아닌 거잖아. 그러니까 희원이 너도 잔말 말고 협조하기다. 알았지?!"

 수영이 희원을 향해 매력적인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싱긋 웃자 괜스리 옆에 서있던 매장 여직원이 그런 수영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게 잘난 남자가 하자면 하자는 대로 따를 일이지 무슨 타박이냐고.

 그러나 희원은 자기 부모님들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첫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에 값비싼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가는 수영을 오히려 마땅치 않게 여기실 거란 우려 속에 그를 만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수영의 얘길 듣고 보니 그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부모님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수영이 새삼 다시 보이기도 했고.

 해서 희원은 썩 마음이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정한 수준에서 그녀의 동의하에 선물을 구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영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고집대로 결국 부모님들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동생 효진 그리고 군대에 가있는 남동생 재원의 선물까지 모두 쇼핑을 마치고 난 두 사람은 백화점 근처의 일식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야아, 오늘처럼 쇼핑이 즐거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뽀오얀 김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녹차잔을 양손으로 마주 잡고 후후 김을 불어내던 수영이 문득 기분 좋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런 수영을 마주 보며 희원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우리 신혼집에 들일 가구며 살림살이들 사러 다닐 땐 얼마나 즐거울까?!"

 잠시 허공을 응시한 채 상상만으로도 흐뭇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던 수영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왠지 미안해 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헌데 우리 신혼 집 갖는 건... 좀 뒤로 미뤘으면 하는데. 한 육 개월 뒤쯤으로 말이야. 그 때까지 그냥 내가 살던 방배동 빌라에 들어와 살자면... 서운하겠지?"

  "선배. 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혹... 선배 집에서 반대하는 것 때문에...?"

  "아니, 아니. 그건 상관없고. 우리 같이 프랑스로 가자."

  "예? 프랑스요?!" 갑작스런 수영의 얘기에 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전부터 섭외 들어온 일이 있었거든. 그동안 답변을 미루고 차일 피일 했었는데 결혼해서 우리 둘이 같이 가게 되면 좋겠다 싶어. 그렇게 되면 희원이 넌 하고 싶어하던 분야의 공부 얼마든지 좋은 환경에서 할 수 있게 될 거구. 좀 갑작스런 얘기이긴 하지만 괜찮겠지?"

  "정말... 갑작... 스럽긴 하네요."

 갑작스런 프랑스 행이라. 그녀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당장은 실감 나지 않는 얘기였다. 하지만 넌즈시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수영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혼자 골똘히 상념에 빠져든 희원은 차라리 결혼과 함께 프랑스로 가게 된 것이 아주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영의 말처럼 그녀가 원했던 공부도 실컷 할 수 있고 또... 선우를 하루 빨리 잊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희원이 네 생각은 어때?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취소할......"

  "아뇨. 저도 좋아요. 정말 잘 된 것 같아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다행이고. 너무 갑작스런 결정이라 난 혹시라도 네가 내켜하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걱정했는데 잘 됐다."

 내내 희원의 심중은 어떨지 우려 섞인 눈빛으로 조심스레 살피고 있던 수영의 얼굴에 환한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희원은 그런 수영의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의사 하나 하나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얼마나 자신에게 집중해 있는 지를 새삼 깨달으며 고마움을 넘어서는 뭔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선배는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구. 내게 상처를 주지도 않을 거야. 선배와의 결혼, 정말 잘 결정한 일이야, 채희원. 아주 잘한 일이야.'  

 그리고 그 날 저녁 식사시간 내내 희원은 그녀의 마음이 온통 선우에게로만 향해 있느라 평소에는 잘 보지 못했던 수영의 자상한 배려들을 새록새록 체감하면서 밥을 먹었다. 코스에 따라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에게 먼저 접시를 밀어주고 소스를 챙겨주고 하는 그의 모습이 새삼스럽고도  감동적이었다. 때문에 그 날 밤 집 앞까지 배웅해 준 수영이 이제 굳나잇 키스 정도는 해줘도 되는 사이가 아니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을 때 희원은 크게 마음을 다잡고 그의 뺨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하지만 하필 그 광경을 선우가 자신의 방 창가에서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희원은 꿈에도 몰랐다.

 1초나 되었을까? 희원의 따뜻한 입술이 수영의 뺨에 머물던 시간이.

 그러나 그녀의 입술이 어디에 얼마간 머물렀느냐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조금만 농도 있는 수영의 애정표현이 있을라치면 다람쥐처럼 빠져나가곤 하던 그녀가 먼저 그에게 키스를 해주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집을 향해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수영은 자신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흐뭇함으로 인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어린 소년이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예기치 못했던 입맞춤을 받은 기분이 그럴 것 같았다. 그토록 바람둥이로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가져왔었다는 사실이 본인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희원에게 느끼는 감정은 실로 특별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분 좋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그렇게 히죽 히죽거리며 집 앞에 당도한 수영은 갑자기 취기가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으로 문 앞에 서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여길 찾아오구."

  "연락이 되야 연락을 하지. 작정하고 내 전화 피하는 사람한테 수가 있나."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수영을 바라보며 뾰루퉁하게 입 끝을 모으던 채린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꾸를 내뱉었다.

  "나 오늘 피곤해. 들어가자마자 곧장 자려던 참이었어. 용건있으면 다른 날 만나자." 

 찬바람이 도는 태도로 채린을 외면한 채 수영이 문에 열쇠를 꽂으며 그렇게 말하자 문득 채린이 열쇠를 쥐고 있는 그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왠지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자기한테 이미 까인 거 알아. 하지만 그냥 이대로 헤어지긴 섭섭해서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고 온 거야. 그래. 고별주라고 하면 되겠네."

 아마도 그의 집 문 밖에서 꽤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손위에 얹은 채린의 손은 얼음장같았고 추위로 인해 입 또한 굳은 듯 말투 또한 어눌했다.

 조금은 아니 실은 많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채린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켜본 바로 그녀는 수영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저 연예판에서 인기와 돈에만 혈안이 되어 함부로 몸을 굴리는 가볍고 천박한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에 약한 순정파라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타입에 가까웠다. 자신이 아닌 그녀에게 정말 진실한 남자를 만났더라면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는 여자였다.

  "봐. 여기 내가 이렇게 술까지 준비해 가지고 왔잖아."

 결국 수영은 차마 그녀를 매몰차게 문전박대할 수가 없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집으로 들였다.

  "자, 건배!"

  "뭐야, 넌. 술은 네가 마시자고 해 놓고 나는 벌써 몇 잔 짼데 넌 건배 소리만 하면서 고사 지내기냐?"

 스스로 쿨하게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찾아온 채린의 권주를 그녀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던 수영이 물었다.

  "실은 나 지금 술 마시면 안 되는 병이 좀 있어서......"

  "그래?"

 말끝을 흐리는 채린의 눈빛에 묘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수영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긴 그 때 수영은 이상하다 싶게 갑자기 오르는 술기운을 가누지 못해 눈조차 제대로 뜨기 어려운 지경으로 곤두박질 쳐가고 있었다. 

 수영은 자꾸 아름아름해져 가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 쳐보았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채 품기도 전에 그는 이내 앉은 자세로 고개를 떨군 채 야릇하고 몽롱한 기분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그런 수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채린의 입가에 비릿한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이제 바보처럼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 역할은 사양이야. 김수영. 날 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 준비중이시라고. 흥, 누구 맘대로!' 

 지이잉. 지이잉.

 아침 준비를 위해 마악 자기 방을 나서려던 희원은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 소리에 걸음을 돌렸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서 메시지가 온 걸까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희원은 이내 수영으로부터 온 문자메시지를 읽고 이내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급한 일이 생겼어. 당장 이리 와 줘.'

 밑도 끝도 없는 짧막한 메시지였지만 그랬기에 더욱 급박한 느낌을 받은 희원은 곧 그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희원은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며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메모를 식탁 위에 남겨두고 부랴부랴 집을 나와 수영의 빌라로 향했다. 그의 집으로 가는 동안 몇 번 더 그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저런 나쁜 상상으로 초조함이 점점 극에 달할 무렵 희원은 마침내 그의 빌라 앞에 다다랐다.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희원은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리고 문 앞에 붙은 초인종을 연거푸 몇 번씩이나 눌러댔다.

 이윽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

 너무도 뜻 밖에 탤런트 한채린이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어제 수영이 입고 있었던 셔츠만을 달랑 걸치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기분의 엄습을 받으며 희원은 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동안 그녀를 마주보고 서있기만 했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와 입가에 번진 립스틱자국을 정신없이 번갈아 보면서 그렇게.

 그러다 희원은 불현 듯 집안에서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야, 밖에 누구야?!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야?!"

 왠일인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희원은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으며 절망감이 아닌 두려움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인지 칼날 같이 예리한 겨울 바람에 한동안 부대끼고 서있던 탓인지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처음부터 묘한 시선으로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던 채린을 등지고 돌아선 후 부랴부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봐요, 잠깐만!"

 이내 채린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희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시라도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 봐, 잠깐!"

 희원을 급하게 따라나온 채린의 손에 붙잡혀 희원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채린은 여전히 셔츠 한 장만 걸친 차림새였고 맨발이었다. 그리고 왠지... 아까와는 다르게 가슴 한 구석이 찡해질 만큼 절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문자. 내가 보낸 거예요."

  "......"

  "수영씨 당신한테 양보할 수 없어요. 나... 그 사람 아이 가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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