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 (36/75)

# 36.

 꾸릴 짐이랄 것이 대단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2주 간의 병원 생활동안 사용하던 간단한 소지품과 내의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집어넣은 희원은 길다란 머리칼을 정성 들여 빗은 뒤 거울 앞에 놓인 두 개의 헤어핀 중 어느 것을 집어들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하나는 성진이 사다 준 별스럽게 큼지막하고 오색찬란한 큐빅들로 번쩍거리는 불가사리 모양의 핀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진이 사다 준 핀이 너무 유난스럽다며 눈쌀을 찌푸리던 수영이 그 뒤에 사다 준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의 은색 핀이었다.

 희원은 성진이 사다 준, 불가사리의 다리 하나마다 각기 다른 색상의 큐빅이 촘촘히 박혀 있는 커다란 핀을 집어들고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 핀을 볼 적마다 수시로 깜짝 놀랄 만큼 튀는 패션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다니는 장난기 가득한 성진의 얼굴이 떠올라 늘 그렇게 절로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평소 취향과는 걸맞지 않은 그 핀이 다른 어떤 핀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수영이 사다 준 은색 핀으로 머리칼을 고정시켰다. 곧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올 수영의 기분을 그런 사소한 일 하나로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희원은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더를 젖히고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풍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을씨년스런 바람을 맞으며 간신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몇 안 되는 마른 잎들이 스적대는 모습이 위태롭고 안쓰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영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벌써 가방 다 챙겨놨구나. 내가 금방 갖다와서 한다고 그냥 두라니까."

  "후훗. 제 속옷이 대부분인데 어떻게 그래요."

  "아핫. 그런...가?"

 희원이 키득거리며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수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병원에서 의식을 차린 이후 한동안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가 이젠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듯 종종 예전처럼 웃는 모습을 이렇게 내비치곤 한다. 수영은 그런 그녀의 미소가 햇살처럼 느껴졌다.

  "옷도 다 갈아입고 머리도 빗었고 이제 나갈 준비 다 됐어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너무도 기쁜 마음에 희원의 얼굴엔 그야말로 봄날의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절로 퍼졌다. 입원기간 내 수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직도 수척한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에 화색이 떠오를 만큼 밝은 미소를 보자 수영은 좀 전의 안도하던 심정과는 달리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시큰시큰 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이나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나 싶은 마음에.

 조바심으로 잠시 흐려졌던 표정을 이내 수습한 그가 희원의 양어깨를 잡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희원아, 잠깐. 여기 좀 앉아볼래. 출발하기 전에... 네게 할 말이 있어."

 다소 의아해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희원을 수영은 살며시 침상 위에 앉힌 뒤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달칵.

 희원의 눈앞에서 작은 상자가 열리고 순백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휘황찬란한 빛을 쏟아내는 순간 갑자기 수영이 병실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으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줘, 희원아."

  비록 약냄새 풀풀 풍기는 병실 안에서의 프로포즈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낼 리 없었지만 중세의 기사들이 그러했듯 고전적인 방법으로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진지한 얼굴로 구혼하는 수영의 모습에 희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얼굴을 붉힐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당장.. 대답해 주지 않아도 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 시각 이후부터 내 심장은 조금씩 조금씩 졸아들기 시작할 테니까."

  "선...배....."

  "이런 데서 이렇게 무드 없이 프로포즈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한테 좀 더 근사하게 프로포즈하고 싶었거든. 헌데... 너 이대로 그 집에 보내고 나면 또 얼마간은 얼굴 보기 힘들어 질텐데... 근데 자꾸만 그 사이에 널 영영 놓쳐버리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나 왜 이렇게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는지. 안 그럴려구 하는데도 자꾸 마음이 급해져서 지금 이렇게 프로포즈하는 거야. 이런 나... 내가 생각해도 많이 우습다는 거 알아. 하지만 희원이 니가 조금은 이해해 주길 바래."

 희원은 말없이 수영의 두 눈동자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조금은 쑥쓰러운 듯, 멋적은 듯 하면서도 그의 말처럼 그녀를 놓치게 될까봐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눈빛... 또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함이 가득 넘치는 눈빛......

  "선배... 나..."

  "행복하게 해줄게. 정말이야. 나...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너한테 솔직히 다 얘기할게. 그동안 나 심심풀이로 만나는 여자들 많았어. 말 그대로 재미삼아 그렇게 말야. 사실 나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거든. 하지만 희원이 너를 만나고 나 처음으로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됐다. 너를 통해서. 하지만 다 떠나서... 이제 내 눈엔... 너 밖에 안 보인다, 희원아. 사랑한다." 

 집에 있었다면 분명 호들갑스럽게 희원을 맞아주었을 성진은 선우와 함께 보름 앞으로 다가온 첫 공연 준비로 연습실에 가 있었다. 대신 수영의 고집으로 희원을 마중오지 못했던 준희가 다소 미안한 얼굴로 집안에 들어서는 희원의 가방을 받아들며 그녀의 귀가를 반겼다.

 수영은 준희에게 희원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현관 앞에서 곧장 발걸음을 돌렸고 준희는 차를 타고 오느라 적잖이 피곤한 안색의 희원을 걱정하며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무조건 아무 생각 말고 푹 쉬기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준희가 방을 나간 후 희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다소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을 휘이 둘러보았다.

  '잘 있었니?'

 다시는 못 돌아오는 줄 알았어라는 말을 나즈막히 읊조리며 희원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다시는 못 돌아오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 지옥같은 순간에는. 

 그러나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감수하고 수영이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내 주었고 그 덕분에 희원은 지금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 수영은 희원에게 평생 그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생명의 은인이었다.

 희원은 병원에서 가지고 온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수영에게 받은 조그만 상자를 꺼내 살며시 뚜껑을 열어 보았다. 

 왠지 생명력이 결여되어 보이는 창백한 병실 안에서도 그 찬란한 빛을 잃지 않던 다이아 반지가 여전히 생생한 찬란함을 간직한 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잘... 생각해 주길 바래.'

 수영이 희원에게 그 말을 건넬 때의 간절한 눈빛이 떠올랐다.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순백의 다이아몬드 반지 위에 그의 신실한 눈빛이 교차되어 희원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병실에서 그 어떤 여자라도 가슴 떨리지 않을 수 없는 멋진 남자로부터 그토록 진지한 사랑의 고백과 함께 그의 청혼을 받았을 때 희원은 그저 놀랍고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영선배라면... 그라면 희원을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나 희원은 온 마음으로 수영의 청혼을 기껍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그녀를 향한 수영의 마음이 어떤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원은 그의 마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선우의 존재를 두고 망설임 없이 수영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수영을 기만하는 일이 될 터였다.

 혼란이 가라앉지 눈빛으로 희원은 다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어찌되었든 조만간 그녀는 마음을 정해야 하리라.

 피로감을 느끼며 침대 위에 몸을 뉘인 희원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그녀의 마음속에서 선우를 향한 감정을 정리하리라고.

 희원이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기에 성진과 선우는 연출 선생으로부터 겨우 허락을 받아 간만에 일찍 귀가를 했다. 

 희원의 컨디션에 아직 거창한 외식은 무리라고 여긴 그들은 소문난 맛집 몇 곳을 돌아다니며 포장이 가능한 음식들을 잔뜩 사들고 와 집에서 조촐하게나마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성진은 희원의 귀가로 인해 여느 때보다 들뜬 모습으로 두 세 배는 더 너스레를 떨었고 조금은 서먹하리라 여겼던 선우도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기에 희원은 정말 간만에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중간중간 가족이나 다름없게 느껴질 만큼 담뿍 정이 들어버린 그들과 함께 다시 한 집에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마워 주책없이 눈물이 솟구치기도 했지만 희원은 그제서야 비로소 진짜 안정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 날 저녁 레드비트 하우스는 다시 푸근한 온기와 활발한 생기로 가득 찼다. 희원은 세 사람들로 인해 안정을 되찾았다고 느꼈지만 그들 셋 모두는  희원의 귀가를 계기로 다시 한 번 그녀의 존재가 없는 레드비트 하우스가 얼마나 쓸쓸하고 생기 없는 곳인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다음 날 희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만류하는 준희를 겨우 설득해 잠시 외출을 나왔다. 

 성진이 사준 트렌치코트를 단단히 여며 입고 칼라깃까지 높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따라 변덕을 부린 날씨 탓에 희원은 뼈 속을 에이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택시에 올랐다.

  "대학로로 가주세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들을 내다보고 있자니 집을 나서기 전부터 스산했던 그녀의 마음이 이내 침울해지고 말았다.

 희원은 연습실에 잠깐 들른 후 수영을 만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수영의 청혼을 거절할 자신도 없는 바에야 굳이 시간만 질질 끌어서 그의 애를 태울 필요는 없다고 여긴 희원은 오늘 수영을 만나 청혼 승낙의사를 밝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수영의 청혼을 승낙하기 이전에 딱 한 번 선우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마음의 정리를 위해 무슨 의식이 필요한 것도 아닐진대 희원은 마치 의식을 치루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수영을 만나러 가기 전에 꼭 한 번 선우를 보고 싶었다. 먼발치에서 남모르게 조용히.

 숨어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잔뜩 주의를 기울이면서 희원은 조심스럽게 연습실 안을 엿보았다. 지난 번 보다 인원수가 몇 배는 더 많았지만 그 속에서도 희원은 금방 선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아직 그의 순서가 아니었던지 선우는 다른 단원들의 연습광경을 열심히 주시하면서 가끔씩 그와 나란히 서있던 지윤에게 고개를 숙여 뭔가 얘기를 주고 받곤 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희원은 선우와 지윤과의 사이가 특별한 것이든 아니든 나란히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여전히 마음이 상하는 자신을 책했다.

  '그래. 처음부터 불가능한 꿈인 줄 너도 알았잖아. 그는 말 그대로 별 같은 존재야. 아름답지만 결코 내 손에는 닿을 수 없는 그런 별 말야. 그런 사람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들에 감사해야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를 동생처럼 여겨준 것만도 얼마나 큰 행운인데.

 선우오빠... 나 오늘로 이제 오빠를 향한 짝사랑... 접어야 될 것 같아요. 지금 나... 수영선배한테 가요. 선배한테 청혼 승낙까지 하고 나... 계속 오빠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왔어요. 이제 더는 오빠... 바라보지 않을 거니까 작별인사 하러요. 우습죠? 아직 조금은 더 오빠랑 한 집에서 살 거면서. 선우오빠... 아플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행복했어요. 오빠를 알게 되서... 고맙게 생각해요.'

 어느 한 순간 선우는 까닭 모르게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지윤이 물었다.

  "오빠, 어디 안 좋아. 왜 그렇게 안색이 창백한 거야, 갑자기."

  "아, 아니야. 그나저나 나 잠깐  찬바람 좀 쐬어야 겠다. 선생님 찾으시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좀 전해줘."

 말을 마치자마자 휘적휘적 걸어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못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왠지 숨이 막힐 듯한 답답증을 느끼며 그저 찬바람을 좀 쐬어야 겠다는 생각에 복도로 나와 선 선우는 곧장 창가로 유리창을 열어 젖히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폐부 깊숙히 냉랭한 공기를 들여 마셔보아도 어쩐 일인지 그의 답답증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눈쌀을 찌푸리며 무심히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선우의 눈에 문득 희원처럼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희원...이?'

 그 순간 선우는 앞 뒤 재지 않고 번개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복도 끝을 향해 달리고, 마흔 개쯤 되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달리고,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렸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희원아!"

  "어머머, 사람... 잘 못 보셨나봐요."   

  

  "아아... 죄, 죄송합니다."

 꼭 그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붙잡고 보니 조금도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째서 그토록 닮지 않은 사람을 희원으로 착각할 수 있었는지 선우 자신도 황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맥빠진 걸음으로 되돌아오는 길에도 선우는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연신 주위를 돌아보며 걸었다. 마치 어딘가에... 멀지 않은 어딘가에 정말로 희원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극단건물 앞에 거의 다다라서도 선우는 자꾸만 미련이 생겨 걸음을 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마른 가지만 앙상해져 버린 마로니에 나무가 바람에 몸을 떨고 있는 모습만이 스산한 그의 마음에 울적함을 더해 줄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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