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 (34/75)

  

# 33.

 묵지근한 두중감을 느끼며 희원이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할 때까지도 그녀는 눈꺼풀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나 되는 양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그 탓에 먼저 깨어난 청각이 뒤를 이어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신경들을 묘하게 자극하는 쇳소리를 감지해냈다.

  쉬쉿.

  찰칵.

  쉬쉿.

  찰칵.

 아직 혼미한 상태였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아남을 느끼며 희원은 마침내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어딘가에 나있는 유리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고 있던 희미한 달빛으로 인해 간신히 칠흑 같은 어둠을 면하고 있는 휑한 공간이었다. 한기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희원은 자신의 양손이 뒤에서 결박당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깨어나셨군."

  "거... 거기... 누.. 누구세요?"

 딸칵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이 부셔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작스레 환하게 불이 밝혀진 탓이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린 채 눈을 껌뻑거리던 희원은 이내 불빛에 적응된 시선을 목소리의 주인공이 앉아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 검은 색 점퍼에 검은 색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오늘 오후 마지막으로 보았던 차림 그대로의 지훈이 그녀에게서 3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의자에 걸터앉아 그의 오른 손 안에든 가늘고 날렵해 보이는 칼날을 위험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그녀의 청각을 자극하던 소리는 지금 지훈이 그의 오른 손안에서 마치 프로펠러처럼 돌리고 있는 칼날들이 냈던 소리들임에 틀림없었다. 희원은 몰랐지만 그것은 두 개로 갈라진 손잡이 안에 칼날이 접혀 들어가 있는 형태로 기술적인 손놀림으로 나이프를 접었다 폈다할 때 마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발리송이라는 칼이었는데 전등갓조차 씌워있지 않은 채 허공 중으로 길게 늘어진 전기줄 끝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는 백열등 불빛을 정면으로 받을 때면 그 예리한 칼날은 가슴 서늘한 광채를 반사해 내곤 했다.

 심장이 옥죄어 오는 기분으로 잠시 동안 쉿쉿 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섬찟한 칼날에 정신을 빼앗겼던 희원은 이내 기브스가 둘려있어야 할 그의 오른 팔이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발치에서 너저분한 잡동사니 나부랭이와 함께 뒹굴고 있는 붕대조각들과 위장을 위해 쓰였던 듯 보이는 하얀 마분지 조각들을 발견했을 때 희원은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도 아주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지훈씨...? 지훈씨 맞죠? 왜 저한테 이런 짓을 한 거죠?"

 남아있는 용기란 용기를 다 끌어 모은 후 가까스로 입을 뗀 희원이었지만 휑뎅그레한 공간을 울리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듣기에도 애처로울 지경으로.

  "그래. 물론 그게 궁금하시겠지. 도대채 왜 내가 이 음침한 곳에 납치되어 와있는 걸까..."

 납치. 그렇다. 지훈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인정했듯 그것은 명명백백한 납치였다. 하지만 그가 왜?

 잠시 말끝을 흐리고 앉아 희원을 응시하던 지훈이 그 때까지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손놀림을 멈추고 일어나더니 천천히 희원을 향해 걸어왔다. 바닥 여기 저기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접힌 종이박스 위에 모로 눕혀져 있던 희원은 그가 다가옴에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마취기운과 양손의 단단한 결박으로 인해 생각만큼 거동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지훈이 모자를 벗어 던지고는 한쪽 입 끝을 치켜올리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싸늘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게다가 그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란!

  "선우씨가 지금 이런 네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분노로 인해 그의 두 눈동자에선 활화산처럼 불꽃이 타오르겠지. 거기다..."

  "하악!"

 불쑥 지훈이 그의 오른 손에 들려있던 나이프를 펼쳐들며 예리한 칼끝을 희원의 뺨에 갖다대자 차가운 쇠붙이에서 전해져오는 서늘함과 공포감이 한데 어우러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작은 흠집 하나만 내놓아도 그의 심장은 갈가리 찢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할테지. 후후후......"

  "다다... 당신... 선우오빠랑 무... 무슨 관계죠?"

 하지만 희원은 공포심으로 인해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의 순간에도 지훈의 입에서 선우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때문에 그녀는 또 한 번 있는 대로 용기를 끌어 모아 지훈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가능하면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물었다.

  "하아, 그래.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거야. 당장 오줌이라도 쌀 듯이 벌벌 떨더니만 선우란 이름 하나에 기절초풍할 만큼 순식간에 정신을 추스리시는군. 그래, 그래. 이해가 가. 이해가 가고 말고."

  "도대체 뭘 노리고 날 납치한 거죠? 윤지훈씨. 당신은 도대체 누구예요?"

  "나? 내가 누구냐고?"

 희원의 질문이 끝나자 지훈은 예의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더니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옆으로 쭈욱 편 자세로 좀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의자 곁으로 다가가며 히스테릭하게 대꾸했다.

  "세상에서 은선우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또 가장 많이 증오하는 사람."

  "뭐... 뭐..라구요?"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훈이란 존재에 대해 희원의 혼란은 시시각각 가중되어 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혼란에 지훈은 보란 듯이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자. 여기... 그가 있어."

 지훈은 어느 새 간이 의자 뒤편으로 가 서 있었다. 그는 그의 가슴께 정도까지 늘어진 전깃줄에 매달려 있던 백열등을 들어올려 그와 마주하고 있던 벽면을 서서히 비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그건...!"

 빛의 사각 지역이라 어둠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벽면 전체가 선우의 크고 작은 사진으로 빽빽하게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 모습이 지훈의 손놀림에 따라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둠에 묻힌 망망대해 속에서 차례차례 떠오르는 빛의 섬처럼 그렇게 드러나는 선우의 모습을 경악 속에서 지켜보던 희원은 한 쪽 벽면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마터면 크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순간이었지만 그곳에 진짜 선우가 와서 서 있는 줄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크기 만한 마네킹에 입혀진 것은 모두 희원의 눈엔 너무도 익숙한 선우의 옷가지들이었다. 하다 못해 몇 달 전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유독 희원이 속상해 했던, 선우가 가장 아끼던 모자까지 씌워져 있었다.  

  '스... 스토커?!'

 희원은 그제서야 지훈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말로만 듣던 스토커였던 것이다. 그것도 사람을 납치 감금까지 할 정도로 아주 위험한. 

  "비록 이렇게 내 껍데기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날 정신병자처럼 취급해도 난 하나도 외롭지 않았어. 은선우.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으니까. "

 마치 진짜 선우라도 대하고 있는 양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마네킹을 바라보며 지훈의 독백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여자들을 경멸했어. 아무리 수많은 스캔들을 터뜨리고 다닌 그 라지만 난 알고 있었어. 그 중 누구에게도 선우씨는 마음을 준 적이 없다는 걸.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지. 그에게 미모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거야. 그런 그가... 아아... 난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자기 감정에 겨워 선우의 옷을 입고 있던 마네킹을 쓰다듬느라 그가 들고 있던 백열등을 손에서 놓자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허공 중을 마구 휘저으며 흔들거리던 전등불빛은 음산한 건물 내부의 여기 저기에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들을 소리 없이 드러내놓았다 삼키곤 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가득 찬 희원의 시선은 오로지 지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공중그네를 타듯 왕복운동을 하는 백열등 아래 가장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넋빠진 얼굴을 하고 마네킹에 달라붙어 서있던 지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심으로 인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희원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흐느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그러나 희원은 얼른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삼켰다. 지훈이 어떻게든 그녀의 존재감을 깨닫지 못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그녀의 실낱같은 희망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것이었다. 

 문득 어둠 속에서 형형이 빛나고 있는 그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뼛속 깊은 곳까지 사무칠 듯한 음산한 목소리로 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니가 나타나면서 선우씨가 변했어. 니가 나타나면서!"

  

 이내 살기등등한 외침소리로 변한 그의 목소리에 있는 대로 주눅이 든 희원은 눈물을 삼키며 조금이라도 뒤로 더 물러나 앉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이 나타나면서 선우가 변했다는 그의 얘기 따윌 곱씹어보고 자시고 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순간 지훈은 갑자기 광기에 사로잡힌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또 다른 벽면에서 미친 듯이 사진을 뜯어 내리기 시작했고 곧 그가 뜯어내린 사진들을 희원의 발치에 흩뿌렸다. 

 충분치 않은 조명과 눈물로 흐려진 시야였지만 희원은 금방 그 사진들 속의 인물이 자신과 선우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거기엔 놀이 동산에서 선우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며 마트에서 같이 장을 보던 모습, 주차장에 세워둔 차안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모습, 언젠가 시사회 장 밖에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선우의 모습도 있었다. 그렇게 사진으로 보니 두 사람의 모습은 연인 사이로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꽤나 다정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장소, 그런 상황에서 선우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희원은 눈물이 몇 배는 더 왈칵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지훈이 그 동안 두 사람의 행동거지를 그렇듯 세세하게 뒤쫓고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배신! 그건 배신이야! 명명백백한 배신이라구!"

 뒤이어 광기에 사로잡힌 그의 발작은 좀 더 심각한 행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네킹을 향해 예의 그 예리한 나이프를 미친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희원의 눈앞에서 선우의 옷가지들이 무참히 난도질당하자 그녀는 마치 선우가 난도질당하는 것과 같은 공포를 느끼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비명을 질렀다.

  따르...

  "여보세요?"

 하루 24시간을 꼬박 전화통 옆에 붙어서 지내다시피 하는 선우가 전화벨이 채 한 번을 울리기도 전에 황급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 실장님. 네... 죄송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사무실에서 온 전화로구나."

  "응. 삼 일 이상 연습 빠지는 건 무리라고."

  "......"

 전화벨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의 방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왔던 성진 역시 선우와 마찬가지로 맥빠진 얼굴을 하고는 이내 쇼파에 주저앉았다.

  "경찰에선 여지껏 아무 연락 없는 거지? 아 씨, 도대체 그 사람들은 허구헌 날 그런 일로 밥 벌어 먹고 살면서 벌써 며칠 짼데 단서 하나 못 잡고 뭐하는 거야?! 야, 수영인가 그 자식, 그 자식한테도 별다른 소식 없어."

  "없어." 

 희원이 말도 없이 사라진 지 사흘 째. 그 며칠 사이 놀라우리 만치 얼굴이 상한 선우가 양미간을 찌푸리자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운 그늘이 그의 만면에 드리웠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져 찾아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드는 선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챈 성진이 선우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이치며 말했다.

  "너 며칠 째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어떻게 희원이를 찾아내겠다는 거야. 정신차려, 은선우."

 희원이 실종되었다는 소식 앞에 선우가 보인 반응으로 희원을 향한 선우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뒤늦게사 깨달은 성진의 충격 역시 적지 않은 것이었지만 현재 상황은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심한 자식."

 자신의 머리를 감싸쥔 채 선우가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성진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부산스럽게 현관문이 열리더니 컵라면을 사러나갔던 준희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핏기가 가신 안색으로 뛰어들어오며 소리쳤다.

  "이 것 좀 봐!"

 휘둥그레진 눈으로 준희를 올려다보던 성진과 선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사색이 되어 내미는 종이 한 장을 받아 들여다보곤 기암을 하고 말았다. 거기엔 양손과 양발을 결박당한 채 초췌한 몰골로 쓰러져 눈을 감고 있는 희원의 사진과 잡지에서 오려낸 글자들로 만들어진 짧막한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었지만 세 사람 모두를 기암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너덜너덜하게 붙은 글자들로 이루어진 메시지였다.

  '은선우. 너의 배신을 내 손으로 응징하겠다.'

  "희원인 안 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선우는 상처받은 야수가 분노에 찬 포효소리를 내지르듯 으르렁거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잠시 휘청거리고 말았다. 사흘 째 끼니는커녕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않고 속만 태우던 그에게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와 공포가 현기증을 몰고 왔던 것이다.

  "선우형! 괜찮아?"

  "괜, 괜찮아."

  "그러게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뭘 좀 먹어둬야지. 아무래도... 이건 미치광이 스토커의 짓인 것 같아. 우선 경찰한테 연락부터 하자. 선우형은 진정부터 좀 하구."

  "그래, 선우야. 경찰한테 연락부터 하고 우리끼리도 차분하게 되짚어보자. 그러니 우선은 진정하고 앉아라."

 미칠 듯한 심정에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직접 온 시내를 다 뒤져서라도 희원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 굴뚝같은 선우였지만 그는 성진과 준희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다시 소파 위에 순순히 앉았다. 

  '침착하자, 은선우. 희원일 구해내기 위해선 우선 냉정부터 찾아야 돼. 그래, 은선우.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그 때 레드비트 하우스에서 이 백여 미터쯤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는 지훈이 원거리 망원경을 접고 있었다. 잠시 전까지 그 망원경을 이용해 레드비트 하우스의 거실 안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던 지훈은 자신이 그들의 안마당에 던져놓고 온 봉투가 준희 손에 의해 개봉되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선우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망원경을 접어 케이스에 담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그의 미소는 이내 패배감으로 가득한 쓰디쓴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 시각 수영 역시 언제 울릴지 모르는 전화기를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꼬옥 쥐고서 초조한 표정으로 거실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는 전화는 경찰서로부터 걸려올 전화는 아니었다.

 사흘 전 희원의 행방을 묻는 선우의 전화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수영이 선우를 다그쳐 곧 희원이 감쪽같이 행방불명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의 충격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었다. 선우와의 통화를 끝낸 후에도 한 동안 불안감에 떨기만 하던 그는 그러나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곧장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빈틈없는 잔일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강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을 찾는 일이나 뒷조사 따위엔 경찰보다 그의 능력이 한 수위라고 수영은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비서만 믿고 기다리기에 수영은 너무도 애가 탔다. 그는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로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사람 찾는 일엔 귀신도 울고 갈 만큼 도통했다는 전문가 한 사람을 고용했다. 물론 그가 이 전 고객들로부터 의뢰 받은 일이란 주로 돈 떼어먹고 잠적한 사람들을 찾아주는 게 주 업무인 듯 했지만 아무튼 그 쪽 방면으로는 꽤 믿을만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박실장님, 사소한 정보라도 알아낸 게 있으면 꼭 바로 바로 연락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비용 걱정은 조금도 마시구요."

 그러나 자신을 박실장이라고 불러달라는 그에게 희원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한 지 사흘이나 지난 그 날까지도 그에게선 별다른 정보나 희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믿고있던 강비서 쪽도 실정은 마찬가지였다.

 문득 거실 유리창을 통해 올려다 본 하늘은 어딘가 음산한 빛을 띤 탁한 잿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괜스리 마음만 더 산란해 지는 것 같아 수영은 신경질 적으로 커튼을 닫은 후 주방으로 걸어갔다. 입안이 깔깔해 뭘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통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있던 수영은 대신 자꾸만 갈증이 났다. 아마도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입안이 바싹 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디스펜서에서 물을 한 컵 받은 후 막 한 모금 들이키다 말고는 너무도 쓰디 쓴 맛이 느껴져 얼른 개수대로 달려가 입안에 머금고 있던 물을 다 뱉어냈다. 

  

  "퉤! 퉷!"

 그 때 문득 그에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려왔다. 수영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제끼고 얼른 귀로 가져갔다.

  "아, 박실장님.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수고해 주십시오."

 박실장과의 통화 후 수영은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얼굴에 떠올리며 다시 강비서에게 연락을 취했다.

  "강비서, 나야. 박실장이란 사람이 학원 근처에서 용케도 목격자 한 사람을 찾아낸 모양이야. 강비서가 그 쪽으로 사람들 좀 보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봐. 응. 곧바로 연락 주는 거 잊지 말구. 그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희원이 부시시 눈을 떴을 때는 어스름 해가 지기 시작하는 때인 것 같았다. 창고의 용도로 지어진 건물인 듯 창문이라곤 환기를 목적으로 겨우 만들어놓은 컴퓨터 모니터 만한 들창이 마주 보는 양 벽면에 겨우 한 개씩 붙어있는 게 다였지만 그나마도 그 유리창을 통해 희원은 낮밤의 구분 정도는 할 수가 있었다.

 고요함 속에 잦아든 사위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자 희원은 한기로 인해 굳어진 몸을 힘들게 일으켜 지훈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분명 그는 부재중인 듯 했다. 그리고 그의 부재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결박당해 있던 사람의 얼굴에는 걸맞아 보이지 않는 생기가 문득 떠올랐다. 어떤 기대감에 일렁이는 그녀의 시선이 저 건너  편 벽면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칸막이도 없이 그저 뻥 뚫려있는 지라 그녀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반대편 벽면까지 족히 30미터는 되는 거리에 있었지만 희원은 그 곳에 자리잡고있는 낡은 책상 위에 분명 흰색 전화기 한 대가 놓여있는 것을 진작부터 눈여겨보아 두었었다. 하지만 한 시도 지훈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희원이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그곳으로 납치해 온 이후 그는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실험용 모르모트가 된 기분을 느낄 만큼 이상한 눈빛을 띤 채 줄곧 그녀를 관찰하거나 가끔씩 미친 듯 사진을 찍어대거나 하는 통에 전화기 가까이는 커녕 지금의 자리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조차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부재가 분명함을 희원은 확신했다.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는 가운데 그녀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다가 정신적으론 두려움과 절망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희원은 결국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쓰러져 있어서는 안 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는지도 모르는데. 기어서라도 저기 까지 가야 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희원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자신의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간 찬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 있었기에 구르는 일조차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 중간 노도처럼 들고일어나 그녀를 휩쓰는 현기증을 가누기 위해 희원은 한참동안씩 숨을 몰아쉬며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덜컹.

  '하앗!'

 희원이 목표한 지점까지 십 여 미터 정도를 남겨 놓았을 때 문득 유리창을 때려부수는 듯한 소리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희원은 곧 그것이 들창에 부딪힌 돌개바람 소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시 구르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구르기 전부터 이미 뻣뻣해져있던 그녀의 몸은 낡아빠진 책상 앞에 도착할 즈음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인해 얼얼하다 못해 차츰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 34. 

 탕.

 탕.

 들창을 두드려대던 돌개바람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시시각각 더욱 험악한 기세로 연신 유리를 깨부술 것처럼 몸을 부딪혀 왔다. 한기와 어지럼증으로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희원은 그러나 꽤 한참동안 기를 쓴 끝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 몸을 일으켜 낡은 책상 위에 간신히 기대어 설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숨을 몰아쉬며 아찔함을 가라앉힌 그녀는 허리를 숙여 얼굴로 전화 수화기를 옆으로 내려뜨리곤 귀를 가져가 보았다. 

 뛰이.

 신호음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전화선이 죽어있으면 어쩌나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몸을 굴려오는 동안 내내 그것이 걱정이었던 희원이었다.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언제 지훈이 다시 들이닥칠 지 모를 일이었다. 희원은 다시 얼굴과 몸을 이용해 행여라도 전화기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바닥으로 떨어뜨린 후 돌처럼 굳은 발가락을 전화기 버튼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웬일인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즉시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너무도 긴장해 있던 나머지 갑작스레 그 누구의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다 못해 희원은 그토록 고대하던 전화기를 앞에 둔 채 범죄신고 전화번호인 112조차도 생각나지 않았다.

  

  '선우오빠... 선우오빠... 어떡하면 좋아요... 전화번호가... 전화번호가 기억나질 않아. 아아... 침착해야지. 그래... 침착해... 다른 번호는 몰라도 선우오빠 번호는 기억이 날거야... 그래... 집중하자... 선우오빠 전화번호는... 그러니까... 011... 44.. 아... 생각이 나질 않아... 오빠 도와줘요!'

 다급한 마음에 거추장스런 눈물만 흘러내렸지만 이내 그녀의 머리 속에 전광석화처럼 선우의 전화번호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그래....."

  딩동 딩 댕동...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던 선우는 불현듯 울려오는 핸드폰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다급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열어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선우오빠, 잘 지냈어요?"

  "누구....."

 희원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던 선우는 이내 그녀가 아닌 낯선 목소리의 출현으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예요. 미랑이."

  "......."

  -"어머, 아무리 반갑지 않아도 그렇지. 그렇게 묵묵부답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러나 만약 미랑이 그 때 선우의 표정이 얼마만큼 험악하게 변하고 있는 가를 알았더라면 그토록 촐싹 맞은 목소리로 지껄이진 못했을 것이다.

  "나 지금 너랑 말장난하고 있을 기분 아니거든. 그만 끊자."

  -"야, 은선우. 나도 너랑 말장난이나 하려고 전화 한 거 아냐. 너한테 중요한 용건이 있다구."

  

 미랑은 선우가 마치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며 내뱉는 말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덤비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당돌한 말투로 맞섰다.

  "너랑 나 사이에 중요한 용건 같은 건 없어. 내 입에서 험한 소리 나가기 전에 끊자."

 미랑의 대답 따윈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선우가 속으로 험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핸드폰을 막 접으려는 순간이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문득 그의 손놀림을 멈추게 만들었다.

 -"나연희씨... 가게에 다녀오는 길이야, 나."

 선우의 핸드폰 번호를 가까스로 떠올린 희원은 다시 전화기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손으로 눈물을 훔칠 수조차 없었던 그녀는 몇 차례 눈을 세게 깜박이는 것으로 자신의 눈에 고인 눈물을 털어 내고 발가락으로 전화버튼을 누르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른 몸을 숙여 수화기에 귀를 댔다.

 뚜. 뚜. 뚜.....

 그러나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안타깝기 그지없게도 통화중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순간 절망감이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온 몸을 허물어뜨릴 듯 휘감겨 들었지만 희원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연거푸 전화를 걸어도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것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통화중 신호음뿐이었다.

  "흐흑... 오빠... 전화 좀 받아요... 흑......"

 그러나 그녀의 애처로운 흐느낌 소리를 선우는 끝끝내 듣지 못했다. 

 곱은 발가락으로 전화버튼을 누르느라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희원의 등 뒤로 어느 틈엔가 소리 없이 다가선 지훈이 각목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바람에 그녀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만 전화기 옆으로 고꾸라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그 주소... 정확한 거야? 알았어. 나도 지금 곧장 출발할 테니까 강비서는 경찰에도 연락하고 애들 좀 보내. 응. 내 걱정은 말고. 아, 글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빨리 경찰에나 연락해."

 강비서와의 통화를 끝낸 후 수영은 부랴부랴 집을 나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정신없이 차를 몰아가면서 수영은 강비서를 통해 알아낸 정보가 정확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는 강비서가 불러준 대로 급하게 써 갈긴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엑셀 위에 놓인 발에 좀 더 힘을 가했다.

  '수영도련님. 아무래도 찾으시는 아가씨께선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던 윤지훈이란 남자에게 납치 당하신 것 같습니다. 알아본 바로는 그 자도 사흘째 학원에 나오지 않고 있다는군요.'

 강비서와의 통화내용을 되새김질하며 수영은 바싹 타들어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떤 놈인지 내 손으로 죽여주마!' 

 주소에 적힌 동네에 도착한 수영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동산 앞에 잠시 차를 멈춘 뒤 주소지의 정확한 위치를 물은 다음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부동산 직원이 알려준 대로 오른 편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던 언덕 배기 중간에서 차를 주차시킨 뒤 좁다란 골목을 요리 조리 돌며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촤악.

 한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희원은 뭔가 섬찟한 기분 속에 부시시 눈을 떴다.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누군가 바닥에 연신 물을 쏟아 붓고 있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코를 찌르는 듯 강렬한 석유냄새가 그녀의 머리 속에 날카로운 경보음을 울리도록 만들었다.

  "지, 지훈씨. 지금... 뭘, 뭐하고 있는 거예요?"

  "이젠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처음부터 이렇게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일."

 커질 대로 커진 희원의 눈망울에 불길함이 번져가는 것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지훈이 갑자기 키득거리기 시작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어. 나도 같이 동행할 테니까. 으흐... 으흐흐... 흐흐......"

 차라리 무시무시하고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편이 훨씬 나아 보일 것 같았다. 희원은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하고 키들거리는 지훈의 모습을 바라보며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시초에 불과했다.

 앗 소리도 낼 틈 없이 그는 순식간에 켜든 라이터를 그의 발 밑으로 떨구었고 석유로 흥건하게 젖어있던 바닥이며 벽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요! 아아아아악!"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향해 다가드는 화염 앞에 양손과 양발이 결박당한 채로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며 꿈틀대는 희원의 노력은 너무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두 눈과 콧속이며 목구멍을 가차없이 공격하는 매캐한 연기로 인해 흐느끼는 일 조차 고욕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극단의 공황으로 몰았던 것은 라이터를 바닥에 떨구는 순간 그의 몸뚱이 자체가 하나의 불기둥으로 화해 이리 저리 비틀거리며 미칠 듯이 내지르던 지훈의 비명 소리였다. 

  "아악! 아아아악!"

 두 손이 자유롭기만 하다면 희원은 무엇보다 먼저 그녀의 귀를 틀어막았을 것이다. 그렇게 희원은 지훈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따라 그녀 역시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며 또 다시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 정말 이대로 죽는 가봐. 오빠... 선우오빠...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한 번 해보는 건데... 선우오빠... 오빠......'

  "희원아, 정신 차려! 희원아!"

  "오... 빠아......"

  "희원아, 나야 수영이! 괜, 괜찮니?"

  "서, 선배... 나...... 쿨럭 쿨럭."

  "이제 괜찮아! 자, 여기서 나가자."

 수영은 자신이 너무 늦지 않게 당도했다는 사실에, 아직 희원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점점 더 기세가 험해져 가는 불길 속을 희원을 안아들고 뛰쳐나왔다. 

 그가 희원을 안고 무사히 건물을 막 빠져 나왔을 때 언덕 중턱에서 여러 대의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대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같이 가!"

  "미안해, 먼저 가봐야 겠어!"

 경찰로부터 희원의 소재가 파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우는 성진과 준희를 뒤로한 채 바람처럼 그의 오토바이에 올랐다. 일 분 일 초가 화급한 마당에 세 사람이 함께 차로 움직이는 일조차 선우에겐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건물입니다. 언덕 정상에 가까운 유일한 건물이거든요. 창고용도로 쓰이다 버려진 가건물인데 범인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범죄에 이용할 작정을 하고 들어간 듯 합니다. 워낙 인적도 드물고 하니......'

 한 순간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어떤 미치광이가 희원에게 언제 어떻게 무슨 짓을 저지를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자동차 사이를 비집으며 번개처럼 오토바이를 달린 끝에 선우는 그리 오래지 않아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오토바이로 한 달음에 언덕을 올라간 선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전소되기 직전의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거대한 잿더미였다.

  "희..."

 선우는 지금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이 광경이 부디 꿈이길 바랬다.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 하느님!"

 그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린 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믿을 수 없어. 이건 꿈이야. 희원이... 내 손으로... 그래... 시체라도 찾아내겠어.'

 눈물을 참기 위해 있는 대로 눈을 부릅뜬 선우는 불더미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 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길다란 소방 호스를 언덕 중턱에서부터 끌고 올라온 소방대원 한 명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뭐하는 겁니까, 지금?!"

  "들어가 봐야 합니다! 찾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미쳤나?!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놓으십시오. 전 꼭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이 봐! 빨리 이 쪽으로. 여기 이 사람 좀 말려!"

 선우를 만류하던 소방대원은 제정신이 아닌 듯 자꾸만 불더미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하는 그를 혼자 막아내기가 어려웠던지 뒤따라 소방 호스를 끌고 속속 도착하고 있던 다른 소방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여길 지금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겁니까?"

 소방대원이 한 명이 더 합세해 선우를 끌어 말리고 있을 때 마침 성진과 준희가 소방대원들의 뒤를 이어 그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만다행의 희소식을 선우에게 들려주었다.

  "선우야, 희원이 무사하대. 수영이 그 자식이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서 지금 둘이 병원에 있단다." 만면에 안도의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성진이 말했다.

  "그... 그게 사실이야?"

  "그래, 선우형. 그러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병원으로 가보자."

  

 준희가 마른침만 삼키며 여전히 반쯤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선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후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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