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 (33/75)

  

# 32.

  "내가 좀 들어다 줄까?"

 막 세탁기에서 탈수가 끝난 빨래들을 희원이 양동이에 다 옮겨 담았을 때 조금 전부터 세탁실 문가에 하릴없이 기대 서 있던 선우가 물었다.

  "아니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요 뭐."

 희원은 담담히 사양의 뜻을 표하며 혼자 양동이를 들고 선우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 희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우가 이내 그녀를 뒤따랐다.

 그가 현관 밖으로 나와 섰을 때 희원은 벌써 안마당에 걸린 빨래줄에 세탁한 옷가지들을 널기 시작하고 있었다. 

  "야아,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는구나." 현관 앞 계단을 내려서며 선우가 짐짓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네요." 

 희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성의하게 들릴만큼 짧막하게 대꾸하자 선우의 양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다.

 역시.

 선우는 요 며칠 희원이 분명 의식적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연습실을 찾아왔던 그 날 이 후부터 줄곧. 

 성진과 준희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지만 분명 선우를 대하는 태도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변화가 있었다. 남들 눈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미묘한 그런 변화였지만 선우는 너무도 선명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은선우. 행동 똑바로 하고 다녀라. 괜히 주변 사람 헷갈리지 않게.'

 지윤으로 인해 본의 아니 게 약속을 저버린 꼴이 된 그 다음 날 연습실로 향하는 차안에서 불쑥 성진이 내뱉은 말이었다. 선우는 그 시간 이후 곰곰히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지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누가 오해하든 말든 상관 없다고 여겨왔던 선우였지만 그 날 성진의 입에서 '주변 사람 헷갈리지 않게'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선우는 퍼뜩 희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오해해도 상관없는 선우였지만 희원은 달랐다. 

 만약 그녀가 자신과 지윤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면?

 헌데 그 날 이후로 선우는 왠지 희원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아찔함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녀가 정말 오해하고 있다면?

 해명을 해야할까?

 해명을 한다면 뭐라고 어떻게?

 그렇게 해서 선우는 조바심을 치며 며칠동안 희원의 주위를 배회했다. 구차한 건 딱 질색인 선우였지만 정말로 희원이 자신과 지윤의 사이를 오해라도 하고 있다면 그는 희원에게 구차한 해명이라도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통 틈이 나질 않았다. 최근 들어 연습 시간이 늘어나고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자 희원과 마주칠 짬이 그리 많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한가하게 그녀와 단둘이 얘길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내기란 당연히 더 어려웠다. 그녀가 의식적으로 선우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선우는 빨래를 널고 있는 희원의 근처로 다가가 잠시 어슬렁거리다 그녀를 돕는 척 양동이에 든 빨래를 하나 집어들고 서툰 솜씨로 빨래 줄에 걸었다. 그러자 희원은 말없이 그가 널었던 빨래를 다시 끌어내더니 공중에다 대고 두어 번 탁탁 턴 뒤에 다시 줄에 걸었다.

  "널기 전에 이렇게 대강 주름을 펴주는 게 좋아요."

  "아아... 그렇구나. 빨래 너는 것도 식이 있었네." 

 선우가 머쓱한 말투로 희원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또 다른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

  '야, 은선우. 너 언제부터 이렇게 샌님이 됐냐? 할 말 있음 머뭇대지 말고 얼른 해, 임마. 등신처럼 쫄아서 이렇게 조바심만 치지 말구!'

  

 선우는 희원의 옆에 나란히 서서 빨래 널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를 흘깃 돌아본 후 먼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에헴... 저기... 그 날 저녁 땐... 미안했다. 그게 말이야..."

  "그 날 저녁요?" 희원이 다시 빨래 하나를 공중에 대고 탁탁 털어 내며 뜬금 없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물었다.

  "있잖아... 그 날. 니가 만두 싸가지고 연습실에 찾아왔던 그 날."

  "아아... 그런데 갑자기 그 날 저녁이 뭐 어쨌다고요?"

 희원이 뭐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느냐는 투로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자는 선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내친 김에 할 말은 다 해야 했다.

  "본의 아니게 내가 약속을 어긴 꼴이 되서... 미안... 하다고. 사실은 그 날..."

  "아니예요. 우린 그 날 선우오빠가 안 올 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았는 걸요, 뭐."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선우를 외면한 채 그렇게 말하는 희원의 모습에 선우는 왠지 땅이라도 꺼져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안 올 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았다니. 무심한 투로 내뱉는 그녀의 말 속엔 선우에 대한 불신감 아니 아예 그에겐 처음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듯한 그녀의 심중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그렇게 대책 없이 함부로 염문이나 뿌리고 다니다간 언젠가 큰 코 다칠 날 있을 거야.'

 문득 선우가 스캔들을 낼 때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충고하던 성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이거... 였나?'

 선우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말없이 희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여자문제에 관해 방종하게 굴었던 대가를 이런 식으로 받는 모양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하게 희원의 오해를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희원..."

  "야아, 이렇게 보니까 순이 엉덩이도 제법 빵빵한데. 그림 좋다!"

 선우가 다시 말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언제 나왔는지 츄리닝 바람의 성진이 현관 앞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키들거리고 있었다.

  "무슨 그림이 좋다는 거예요?" 

  "와우, 엉덩이만 화면에 그득하네, 그득해!" 

 희원의 물음에 대꾸할 생각은 않고 성진은 핸드폰만 내려다보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키득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 사진... 찍었죠?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챈 희원이 손을 멈추고 성진을 향해 되물었다. 아마도 폰카메라로 그녀의 뒷모습을 찍고 있었던 듯 했다.

  "오우, 34? 35?"

  "빨랑 지워욧!"

  "시로. 이렇게 참신한 작품을 내가 왜 지우냐? 어디 인터넷에라도 올릴까?  흐흐흐." 희원을 향해 핸드폰 액정 화면을 흔들거리며 성진이 놀리듯 말했다.

  "이리 내욧."

  "시로 시로."

  "아휴, 정말. 이리 내라니까요.!"

 희원은 얼굴을 붉히며 결국 현관 앞에서 깡총거리고 있던 성진을 잡기위해 달려갔고 성진은 나 잡으면 용치하고 혀바닥을 낼름거리며 요리 조리 희원을 피해 안마당을 몇 바퀴 뺑뺑 돌다 집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희원 역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후우......"

 그렇게 해서 혼자 안마당에 남게된 선우는 깊게 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 틈이 나질 않는 구나. 틈이."

 학원 수업이 끝난 시각 수영은 신발 앞 코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면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희원의 뒤를 쫓아 천천히 차를 몰고 있었다. 문득 희원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떨구더니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고는 혼자서 뭐라고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희원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수영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수영은 자신의 맘속에서 그녀를 향한 이루 말 할 수 없는 애정이 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빠아앙.

 수영이 희원 가까이로 다가가 불현듯 클랙션을 울리자 갑자기 정신이 든 듯한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곧 수영의 차를 발견했다. 수영은 조수석 문을 열고 아직도 다소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뭐야, 다 큰 숙녀가 한 길에서 넋을 놓고. 그러다 누가 훌쩍 업어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구. 얼른 타라."

 수영의 너스레에 희원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순순히 차에 올랐다.

  "왜 그렇게 시무룩해 있어. 내가 요즘 바빠서 며칠 안 바래다 줬다고 그런 건 설마 아닐 테지?"

  "아니, 아니에요."

  "그래? 그렇담 실망이구. 야아, 언제 희원이가 내가 안 바래다 줬다고 삐지고 토라지고 하는 모습 좀 구경할 수 있을까?"

  "후훗. 선배도 참..."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그래야 우리 희원이 답지. 방글방글표 희원이."

  "방글방글표요? 무슨... 주방용 세제 이름 같잖아요."

  "그런 세제도 있었어?"

  "네."

  "흠... 그래도 난 그게 좋은데 방글방글. 후훗."

  "요즘 전시회 준비로 바쁠 텐데 나 때문에 일부러 온 거... 아니죠?"

  "맞는데."

  "......"

  "또 심각한 표정은... 희원아,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낼 수 없을까?"

  "네. 괜찮아요."

  "으응?! 웬일이지. 그렇게 순순히 승낙을 해버리니까 이상하잖아."

 수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희원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 두 오빠는 공연 연습 때문에 늦을 거구... 아무튼 저녁 준비 안 해도 되니까 시간 괜찮아요."

  "그래? 정말 잘 됐네. 사실 기대 않고 있었는데 횡재라도 한 기분인 걸."

 희원은 그런 일로 싱글벙글하는 수영을 돌아보며 내내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짐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왜...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요?"

  "오늘 내 생일이거든. 너랑 같이 저녁도 먹구 축하도 받구 그러구 싶어서."

  "네에? 그런 거라면 진작 좀..."

  "임마, 내 생일 몇 일이니 알아서 준비해라... 하고 낯 간지러워서 어떻게 그러냐. 걱정마. 선물 같은 거 준비 못했다고 맘 안 써도 돼. 그냥... 넌 같이 있어주기만 하면 돼."

  "......"

 아무리 수영의 말이 그렇더래도 희원은 맘이 편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생일을 알아내서 선물에 파티에 그가 얼마나 그녀의 생일날 공을 들였는지 기억하고 있는 희원으로선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그의 생일이었다.

  "혹시 몰라서... 그래도 근사한 곳으로 예약은 해놨어."

  "선배. 그 예약... 취소해도 되는 거죠?"

  "응? 응... 그야 가능은 하지. 하지만 왜..."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선물도 준비 못하고 내가 대신 선배한테 생일상 차려주고 싶어요."

  "생일...상?"

 직접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다는 희원의 말이 너무나도 뜻밖이었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수영의 얼굴에 이내 묘한 우수가 번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가 손수 차려준 생일상을 받아본 적 없던 수영이었다. 그가 평생동안 받아본 생일상은 모두 돈으로 사들인 그런 것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근사한 식당에서 먹는 게 더 낫겠죠?"

 수영에게서 대꾸없자 희원은 자신이 괜한 소릴 했나보다하는 표정으로 수영의 낯빛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구... 나 태어나서 누가 손수 차려준 생일상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너무 감동해서......"

 아닌 게 아니라 희원을 돌아보며 대꾸하는 수영의 눈빛엔 감동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희원은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저렇듯 귀하신 부잣집 도련님이 어째서 여지껏 손수 차린 생일상을 못 받아 봤을까. 난 형편이 어려울 때도 비록 미역국에 호박전뿐인 상이었지만 그래도 엄마의 마음이 담긴 생일상을 받곤 했는데. 그러고 보면 돈이 많다고 다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닌가 봐.'

  "그럼, 우선 우리 장부터 보러 가요. 오케이?"

  "오케이!"

 수영과 희원은 가까운 백화점으로 직행해 지하 수퍼에서 잔뜩 장을 보았다. 희원과 나란히 카터를 밀고 다니면서 수영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싱글벙글거렸다. 그런 수영의 모습을 보며 희원은 문득 마트에서 우연히 선우를 만나 같이 장을 보던 날이 생각나 마음 한 구석이 시려왔지만 얼른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수영의 생일날 어떤 이유에서든 우울한 표정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글쎄, 오늘의 주인공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시기만 하라니까요."

 수영의 집에 도착해 장 봐온 것들을 모두 주방에 내려놓은 후 희원은 극구 자신도 돕겠다는 수영을 주방 밖으로 내몰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이야. 정말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결국 희원은 진심 어린 수영의 태도를 거스르지 못하고 요리준비에 그를 동참시키는 것으로 실랑이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선배는 우선 이 것들부터 깨끗이 씻어 주세요."

  "오케이.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사실 희원으로선 주방 일에 서툰 수영이 크게 도움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을 간간히 바라보며 희원은 덩달아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선배, 거기 당면 좀 익었나 봐줘요."

  "어 알았어."

  "계란 세 개만 풀어줄래요?"

  "오케이!"

  "저기 큰그릇에 여기 이 재료들 좀 담아주세요."

  "넵."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수영의 보조(?)를 받아가며 희원이 부지런히 손을 놀리자 어느 새 뚝딱 거한 요리상 하나가 차려졌다.

  "와아!"  

  "자아, 오늘의 주인공께서는 여기에 앉으시와요." 

 상차림을 완벽하게 끝낸 식탁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있는 수영에게 희원이 의자 하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서 앉아요. 많이 시장하죠?"

  "내가 한 일이라곤 사실 돕는다고 하면서 방해만 한 게 다 인데 어떻게 금방 기적처럼 이런 상이 차려졌을까? 와아,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아휴, 그 정도 감탄이면 이제 예의는 다 차리고도 남았으니까 얼른 드시기나 하세요."

  "그래, 알았어." 그제서야 활짝 웃는 얼굴로 자리를 잡고 앉으며 수영이 말했다.

  "배고파요. 선배가 먼저 수저를 들어야 저도 먹죠."

  "아아... 그래."

 이미 차고 넘치게 감동을 받은 수영의 얼굴엔 홍조까지 떠올랐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뿍 담긴 생일상을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수영은 왠지 목이 메이는 느낌이었다.

  "와아! 정말 맛있다."

  "거기 계란 지단은 선배가 푼 계란으로 만든 거예요." 

 어린 애처럼 와아, 와아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수영을 미소 띤 얼굴로 쳐다보며 희원이 말했다. 그런데 수영이 이 번엔 갑자기 탄식을 했다.

  "레드비트 멤버들은 매일 이렇게 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진수성찬을 매일 어떻게 먹어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상차림이 이런 거지." 희원이 달래는 투로 대꾸했다.

  "그래두. 야, 채희원. 지금 니가 받는 월급 세 배 줄게 내 밥 좀 안해줄래?"

  "그거 스카웃 제의예요? 미안하지만 세 배 정도 가지곤 어림없어요. 최소한 열 배... 정도라면 모를까. 호홋."

  "열 배고 스무 배고 니가 원하는 만큼 정말로 줄 수도 있어."

 해파리 냉채 한 젓가락을 막 입으로 가져가려던 순간 문득 그의 말투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희원이 눈을 크게 뜨고 수영을 건너다보았다. 웃음기 없는 그의 표정에서 그가 결코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희원을 알았다.  

  "억만금을 준대도... 난 못 떠나요. 그건... 내가 어려울 때 오빠들한테 정말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예요." 그러자 이내 그녀 역시 심각해진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대꾸했다.

  "훗. 나도 알아. 내 제의가 부질없다는 거. 그냥 농담이었으니까 그렇게 심각한 얼굴할 거 없어. 아, 넌 어째 그렇게 맹꽁이냐. 무서워서 농담도 못한다니까." 수영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선배도 참. 선배야 말로 나 이런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면서 아직도 적응이 안 되요?" 희원 역시 금세 수영이 말하는 방글모드로 돌아와 지지 않고 다시 대꾸했다.

  "어휴, 그렇게 이죽거릴 줄도 아네?" 

  "몰랐죠? 아마도 선배가 저에 대해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게 많을 걸요."

  "그래, 또 뭐가 있는..."

 수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문득 거실에 두었던 그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잠깐..."

 거실로 나와 핸드폰을 들어보니 채린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주방을 힐긋 돌아보며 얼른 핸드폰에서 밧데리를 빼내 버리곤 다시 주방으로 되돌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수저를 들었다. 수영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처럼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채린이 식탁 의자에 풀썩 주저 않으며 신경질 적으로 뇌까렸다. 그리고 다시 수영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젠 아예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녀는 수영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자신이 정성 들여 손수 장만한 음식들을 돌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상해. 요즘 들어 나를 피하고 있는 게 분명해.'

 씨근덕씨근덕 숨을 몰아쉬며 생각에 잠겨있던 채린이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식탁 위에 가득한 음식 접시들을 싱크대로 가져다가 접시 위의 음식들을 모두 쓸어 버렸다. 

  '나쁜 사람. 자길 위해 손수 음식까지 장만했는데.'

 음식들을 쓸어버리느라 분주한 그녀의 손등을 타고 어느 틈엔가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저어기... 희원씨. 이름이 희원씨 맞죠?"

 한 주의 마지막 수업이 있던 금요일 희원이 간만에 영서와 담소를 나누고 헤어져 학원 밖으로 막 나와 섰을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어눌한 목소리로 희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돌아보니 희원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윤지훈이란 남학생이었다. 같은 반 학생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반에서 가장 감각이 탁월하고 실력이 뛰어난 그의 이름을 희원도 모르지 않았다.

  "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희원의 시선이 제일 먼저 그의 오른 팔에 쏠렸다. 그날 그는 갑자기 오른 팔에 기브스를 하고 왔다. 

  "저...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이런 부탁... 좀 그렇긴 한 데 마땅히 누구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요."

  "예?"

  "제가 실은 어제 실수로 오른 팔을 좀 다쳤거든요. 기브스를 해서 그런지 크게 아프지도 않고 해서 그냥 평소대로 화구를 모두 챙겨왔는데 생각보다 팔이 너무 아파서요. 가방이며 화구며 도저히 집까지 들고 갈 수가 없을 것 같네요. 택시를 타도 저희 집까지는 조금 비탈을 올라가야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저 좀 집까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동네 여기서 그리 먼 편은 아니거든요."

 희원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역시 난감하기 짝이 없는 표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망설였다. 여학생이라면 몰라도 아무리 집 앞까지만 이라고는 하나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남자를 바래다 주는 게 옳은 지 어떤지 쉽사리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심성 여린 그녀는 매몰차게 지훈의 부탁을 거절을 하기도 어려웠다. 오죽하면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할까 싶었다. 게다가 지훈은 평소에도 유달리 창백한 얼굴에 왜소한 체구를 가진 터라 마치 여자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아니 어지간한 여자들보다도 여리고 가녀린 인상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처지가 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역시... 제가 무리한 부탁을 했나보군요."

  "저... 집이 여기서 그리 먼 동네는 아니라고 하셨죠?"

  "네."

  "알겠어요, 그럼. 집 앞까지 제가 가방이랑 화구랑 들어다 드릴게요."

  "정말... 고마워요. 또 죄송하구요."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희원은 지훈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그의 말처럼 그가 살고 있는 동네는 학원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다만 택시에서 내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을 걸어서야 그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헌데 가까스로 지훈의 집 앞에 도착한 희원은 왠지 의아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집이라고 지칭한 그 곳은 을씨년스러워 보일 만큼 외지고 한적한 장소에 우뚝 서있는 허름한 가건물이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기 보단 버려진 건물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지훈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런 기색을 애써 억누르며 자신은 그만 돌아가 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희원이 막 지훈을 향해 돌아서려던 때였다.

  "흡!"

 그녀 뒤에 서있던 지훈이 다짜고짜 뭔가로, 손수건 같은 것으로 희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경악감을 채 느낄 새도 없이 희원은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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