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자아, 성진씨 동생분 덕에 우리들 입이랑 뱃속이 호강을 했으니 그 기운으로 다시 빡세게 한 번 돌아봅시다!"
역시나 연륜이 있어보인다고 생각했던 호피무늬 헤어밴드의 여자는 일반 단원이 아닌 춤을 지도 하는 안무가였다. 그녀는 도시락 다섯 개를 깨끗이 비우고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단원들을 향해 드럼스틱처럼 생긴 나무봉 두 개를 딱딱 맞부딪히며 다시 연습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오빠들."
희원은 혹여라도 자신의 존재가 연습에 방해가 될까봐 얼른 빈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그러자 선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도로 간이 의자에 앉히며 입을 열었다.
"구경 좀 하면서 기다려라. 길어야 한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야. 너 이 뮤지컬 공연하는 건 봤어도 연습하는 건 구경 못해봤을 거 아냐. 그렇게 지루하진 않을 거야. 모처럼 나왔는데 같이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그래 그래, 순이야. 힘들게 만두까지 싸가지고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면 섭하지. 주말이라 그렇게 늦게 끝나진 않을거야. 기다릴 수 있지?" 성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제가... 여기서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요?" 우려섞인 어조로 희원이 물었다.
"당연하지.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 맘 푹 놓고 구경해. 물론 이 멋진 오빠 밖에 눈에 안 들어오겠지만. 하.하.하." 성진이 양손을 허리에 짚고 턱을 치켜들며 잘난체 하듯 말했다.
"그게 아니고 오빠만 봐달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후훗."
"거기 두 사람 빨랑 빨랑 안 오구 뭣들 하세요!" 저 쪽에서 안무가가 큰 소리로 성진과 선우를 채근하고 있었다.
"으크. 빨랑 가자, 선우야. 난 연출 선생보다 저 아줌마 성질 부릴 때가 젤루 무서워."
성진은 희원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곤 부랴부랴 단원들이 모여서있는 장소로 총총히 걸어갔다.
"선우오빠 안 가요? 빨리 가보세요."
희원은 어쩐 일인지 곧장 성진을 뒤따르지 않고 멀뚱히 서있는 선우를 향해 걱정스런 시선을 던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아무튼 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알았지?!"
"네에. 얼른 가보세요."
선우는 뭐가 그렇게 미덥지 못했는지 희원에게 한 번 더 다짐을 받은 후에야 성진을 뒤따랐다.
연습은 거의 두 시간 정도가 더 진행되었는데 성진과 선우가 이런 저런 모션을 지도 받는 광경과 뮤지컬 전문 단원들의 짧막 짧막하지만 현란한 춤 장면들을 구경하느라 희원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를 만큼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연습의 시작을 알리던 때와는 반대로 안무 지도 선생은 지도봉 두 개를 모아 한 쪽에 내려놓는 것으로 연습의 끝을 알렸다. 성진과 선우, 그리고 가끔씩 희원에게 묘한 시선을 던지곤 하던 지윤을 포함한 단원들은 안무가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많이 기다렸지? 입구에 가서 기다려. 우린 세수 좀 하고 옷 갈아입은 후에 나갈게." 선우보다 몇 걸음 앞장서 걸어오던 성진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희원에게 말했다.
"네, 그럼 입구에서 봐요."
자리에서 일어난 희원은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아직 연습실을 벗어나지 않은 나머지 단원들과 안무가에게 인사를 했다.
"저어...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아, 그래요. 잘 가요, 희원씨. 오늘 정말 너무 너무 고마웠어요." 안무 선생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덕분에 정말 입이 호강했습니다, 희원씨. 담에 또 구경오세요."
"물론 빈 손으로 오셔도 환영입니다!"
"아, 저 김민성 방년 26세. 집에 가서 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희원씨. 저 아까 농담 아니었습니다."
희원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한 뒤 먼저 연습실을 나와 건물 입구로 향했다. 밖은 이미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와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에 물든 오렌지색 마로니에 나무와 은행나무들을 바라보며 제법 싸아한 밤공기를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마로니에 공원 주변엔 대낮처럼 아니 어쩌면 대낮보다 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성진이 희원의 등을 툭치며 선우와 함께 나타났다.
"뭘 그렇게 넋을 빼고 보냐?"
"아아... 사람들... 구경했어요. 전 세상에서 젤 재밌는 구경이 사람구경인 것 같아요."
"나도 그래. 특히 여자 구경."
"아휴 너무 속 보여요."
"속보이긴. 본능에 충실한 거지."
"알았어요, 알았어."
"음... 우리 오늘 저녁은 뭘로 먹을까?" 선우가 물었다.
"난 햄버거 빼고 다 좋아요." 희원이 히죽 웃으며 대꾸하자 선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햄버거는 무슨... 모처럼 외식인데 아무렴 이 오빠가 이쁜 우리 순이한테 햄버거같은 거나 먹일 까봐." 성진이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처럼 외식인데 햄버거 사주는 사람도 있어요." 희원이 냉큼 다시 대꾸했다.
"뭐어? 어떤 자식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그 딴 짠돌이 놈하곤 상종도 말아라."
"큭큭큭, 그 짠돌이가 지금 성진오빠 옆에 서 있거든요. 오빠가 한 마디 좀 해주세요."
"뭐어?"
성진이 놀란 표정을 하며 선우를 돌아보자 그는 부러 딴청을 피우느라 허공중에다 대고 양 손 바닥을 부딪히며 있지도 않은 모기 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성진은 그런 선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 때 세 사람은 모르고 있었지만 복도 끝에 서서 싸늘한 시선으로 줄곧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지윤이 새된 소리로 선우를 부르며 걸어왔다.
"아, 다행이다. 선우오빠가 벌써 가버렸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어, 지윤아.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왜?"
"오빠 나 실은 아까 오후부터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거든. 내색하면 괜스리 다른 단원들 연습하는데 까지 지장 줄까봐 그냥 꾹꾹 참고 있었는데... 지금 현기증도 나고 두통이 너무 심해서... 오빠가 내 대신 운전 좀 안 해줄래?"
"어어... 그래?" 순간 선우는 선뜻 대꾸를 못하며 희원과 성진을 돌아보았다.
"오빠한테 미안해서 택시를 탈까 했는데 그럼 불안해서 가는 동안 눈도 못 감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안 될...까?"
지윤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선우를 한 번 더 공략했고 결국 그녀는 승리했다.
"어쩌지. 아무래도 저녁은 두 사람끼리 먼저 가서 먹어야겠는데." 선우가 성진과 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하는 수 없지. 알았다." 성진이 마지못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디든 먼저 가서 핸드폰 해. 내가 지윤이 바래다주고 시간 되면 그리로 갈게. 지윤아, 네 차는 어딨는데."
"응, 가까운 데 자리가 없어서 찻길 건너 편 주차장에 세워뒀어."
"그래, 얼른 가자. 형, 그럼 희원이 좀 부탁해. 희원아, 기다리란 소린 내가 해놓고 미안하게 됐다. 성진이형이랑 먼저 가 있어."
말을 마친 선우가 지윤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걸음을 떼며 지윤을 향해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야, 그렇게 몸이 안 좋으면서 안무선생한테 말하고 먼저 들어가지 왜 미련을 떨었어."
"이것도 단체생활인데 어떻게 내 생각만 해. 아, 성진오빠. 그럼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희원...씨? 성진오빠 동생분도 안녕히 가시구요. 미안해요, 제가 본의 아니게 방해가 됬네요."
대단한 중병환자라도 된 듯 엄살기가 뚝뚝 흐르는 태도로 선우에게 기대고 있던 지윤이 성진과 희원을 돌아보며 작별인사를 건네왔다.
"아, 아니예요. 안녕히 가세요."
희원은 고개 숙여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성진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먼저 입구를 떠나는 선우와 지윤의 뒷 모습을 보며 희원은 깔깔한 휘오리 바람이 가슴 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싸아한 통증을 느꼈다. 지윤의 어깨를 팔로 감싸안고 걸어가는 선우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성진오빠한테 나를 부탁한다고? 내가 언제 나 좀 책임져 달라고 그랬어? 부탁하긴 뭘 부탁해. 칫!'
"야, 잘 됐다. 안 그래도 우리 둘이 데이트 한 번 하려구 했었는데. 선우 고 놈 잘 빠졌지 뭐냐. 희원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기왕이면 비싼 걸루. 이 오빠가 오늘 거하게 한 턱 쏘마."
성진이 선우가 지윤에게 그랬 듯 희원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말했다. 희원은 갑자기 머리 속이 먹먹해 지는 기분이었다.
"저 여잔 누구예요? 선우오빠랑... 아주 가까워 보이던데... 새 여자친구?"
"하지윤이라고 마리아 역 맡은 앤데 선우랑은 전부터 좀 알던 사이래. 동생 친구라나 뭐라나."
"그렇군요."
건물 입구를 벗어나 잠시 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던 두 사람은 마로니에 공원을 가로질러 주차장에 다다랐다.
"야, 특별히 생각나는 거 없으면 차라리 우리 호텔 뷔페로 갈까? 뷔페에 가면 이 것 저 것 골고루 다 있으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구. 어때?"
"좋아요."
보통 때 같았으면 좋아서 팔짝 뛰는 시늉이라도 할 희원이었지만 선우의 부재로 맥이 빠져있던 그녀는 성진에 대한 예의로 간신히 웃는 얼굴을 하며 대꾸했다.
"그래, 얼른 출발하자!"
시내의 한 호텔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2층에 자리잡은 뷔페식당으로 올라갔다. 희원은 몰랐지만 그 호텔 뷔페는 다른 호텔 뷔페에 비해 꽤 수준 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기도 했는데 그런 만큼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내국인 반 외국인 반 정도의 비율로 식당 좌석이 거의 다 차있었다.
"와아, 이젠 음식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먹을지 고민인데요." 희원이 감탄스런 얼굴로 눈 앞에 즐비한 뷔페음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오, 이 넘치는 음식들! 난 역시 뷔페 체질인가봐." 성진은 감탄을 넘어 감격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막상 성진과 함께 보도 듣도 못했던 고급 음식들을 하나 하나 맛보며 허기를 채워가니 희원의 우울한 기분도 조금씩 사라졌다. 하지만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까지도 그녀는 짬짬히 손목 시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선우 녀석 기다리는 거면 기다리지 마라. 그 녀석 못 와."
너무도 단정적으로 말하는 성진의 태도에 희원은 다소 의아한 얼굴로 한 동안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진 앞에서 자신이 너무 티나게 선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나 싶은 생각에 그 시각 이 후로 더 이상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나온 김에 우리 아이쇼핑이라도 할까?"
식사를 다 마친 후 성진은 희원의 손을 이끌고 근처 쇼핑센터의 명품관으로 향했다. 2층으로 분리된 명품관에는 문외한인 희원도 한 두 번 쯤은 들어보았음직한 이름들의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 상품들로 가득했다. 그것들은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고급스러운 실내의 은은한 조명 아래서 한결 같이 격조 있는 광채를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 보자... 우리 순이한테 잘 어울리겠다."
그 중 버버리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던 성진이 하도 유명해서 아예 버버리코트라는 고유명사처럼 굳어진 버버리 상표의 트렌치 코트 하나를 꺼내들며 말했다.
"한 번 입어봐."
"에? 아이... 살 것도 아닌데 눈치 보이게 뭐하러 입어봐요."
"야, 당장 안 사더라도 자꾸 눈에 익혀야 안목도 생기고 하는 거야. 빨랑 입어봐라."
성진의 채근이 하도 강경해 희원은 하는 수 없이 그가 내미는 트렌치 코트를 마지못해 받아 엉거주춤 몸에 걸쳤다. 그러자 패션감각으로 치자면 어지간한 디자이너 뺨치는 수준의 성진이 다가와 허리께 달린 벨트를 모양새 있게 묶어주고 옷섶을 여며준 뒤 거을 앞으로 그녀를 끌었다.
"근사한데. 분위기 정말 죽인다. 그치?"
비싼 옷이라고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아닌 게 아니라 희원의 눈에도 옷이 쫘악 잘 빠진 게 정말 한 분위기가 물씬 났다.
'버버리 코트 버버리 코트 말로만 들어봤지 이렇게 오리지날 버버리 코트는 처음 보네. 호오... 그래. 확실히 폼이 나긴 나는 것 같네. 그런데 도대체 이런 옷은 얼마나 할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아니 그 이름도 유명한 버버리 코트의 실루엣을 감상하고 있는 동안 성진은 어느 새 겨울용 모직 코트 하나를 새로 들고 왔다.
"이것도 이쁘다, 순이야. 한 번 입어봐라."
"오빠... 됐어요." 희원이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매장 직원쪽을 힐금거리며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야, 괜찮아. 매장에선 원래 이 것 저 것 내키는 대로 입어 보구 그냥 나가는 경우가 더 허다해. 눈치 볼 필요 없다니까... 어서 입어보기나 해. 잘 어울리나 보자. 아이 쇼핑이 다 이런 재미로 하는 거지."
성진의 강요 아닌 강요에 못이긴 희원이 그가 새로 들고 온 모직 코트로 갈아 입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 까 좀 전까지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매장 직원이 접대용 미소를 함빡 머금은 얼굴로 다가왔다.
"어머,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데 사이즈가 좀 큰 것 같아 보이는데 좀 작은 사이즈로 갖다드려 볼까요?"
"네."
희원의 입에서 막 아니오라는 대답이 튀어나오기 바로 직전 성진이 먼저 대답을 가로챘고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사이즈의 코트를 희원에게 내밀었다. 하는 수 없이 직원이 건넨 코트로 갈아입은 희원에게 다가가서 성진은 자상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다시 그녀의 옷 매무새를 꼼꼼히 살펴본 뒤 직원을 향해 말했다.
"같은 사이즈로 그레이 칼라 좀 줘 보시겠어요? 아... 그리고 네이비 칼라도."
직원이 행거 앞에서 사이즈를 찾고 있는 동안 희원은 성진을 향해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짓으로 입구를 가르키며 그만 나가자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성진은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머플러까지 몇 개 들고 와 즐거운 얼굴로 희원에 목에 감았다 풀렀다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 칼라가 제일 잘 어울리네." 성진이 희원으로부터 두 세 걸음 뒤로 물러 서서 말했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베이지도 괜찮지만 그레이가 제일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속 모르는 매장 직원이 성진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희원은 괜스리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며 한시 바삐 매장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으로 입고 있던 코트를 부랴 부랴 벗었다. 그 때였다.
"이 트렌치 코트랑 방금 그 모직 코트랑 계산해 주세요."
어느 새 희원이 제일 처음 입어보았던 트렌치 코트를 다시 들고 서서 성진이 직원을 향해 말하자 직원은 진짜 함빡 웃음을 띠며 성진으로부터 받아든 트렌치 코트와 그레이칼라의 모직 코트를 들고 계산대로 앞장 섰다.
"오빠... 뭐하시는 거예요?"
아무리 성진이어도 설마 저 비싼 옷을 두 개 씩이나 자신에게 사 줄 일은 만무하다고 여긴 희원이 영문을 묻는 얼굴로 나즈막히 속삭였다. 그러나 성진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카운터 앞의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로 해주세요."
"네, 손님."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계산대를 넘겨다 본 희원은 가히 천문학적인 가격을 확인하고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아마 입에 잔뜩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성진이 카드전표에 사인을 마쳤을 때 직원이 얼른 다른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저 유성진씨 팬이거든요. 괜찮으시면 여기다도 사인 한 장만......"
성진이 싱긋 웃으며 직원이 내민 종이를 받아 사인을 한 뒤 다시 건네주자 다소 앳되어 보이는 그 직원은 금새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성진을 따라 매장을 나설 때 희원은 여전히 그들을 쫓는 직원들의 시선 때문에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희원은 아이쇼핑이나 하자던 성진이 누굴 주려고 그 비싼 옷을 두 개씩이나 샀을까 하는 궁금증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그녀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지 않아 금세 풀렸다.
버버리 매장을 나온 성진이 더 이상 다른 매장은 둘러볼 생각이 없어졌는지 성진의 차가 주차되어있던 호텔로 이어지는, 쇼핑센터의 비교적 한산한 뒤쪽 출입구로 희원의 손을 이끌고 나와선 문득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트렌치 코트를 꺼내 희원에게 걸쳐 주며 말했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하네. 입고 가자."
"오빠...?"
"자, 이것도 받아. 오빠가 주는 선물이다."
성진이 희원의 손에 나머지 쇼핑백까지 들려주자 너무도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은 희원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성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희원을 바라보며 성진은 정말 친오빠라도 되는 양 자상한 얼굴로 매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꼼꼼하게 희원의 옷섶을 단단하게 챙겨주면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거면 이 번 가을하고 겨울은 춥지 않게 날 수 있겠지?"
"오... 오빠... 그럼 이 걸 다 나 주려고......?"
"희원아."
성진이 왠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희원의 이름을 불렀다. 여지껏 희원의 진짜 이름으로 희원을 불러본 적이 없는 성진이었기에 그녀는 더더욱 의아한 기분이 되어 성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평소의 그답지 않게 왠지 진지한 표정으로 희원을 잠시 마주보던 성진이 왠일인지 낯빛을 흐리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선우 그 자식은... 그냥 포기해라. 너만 상처 받을 거야."
전혀 예기치 못했던 성진의 발언에 희원의 눈은 더더욱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언제 눈치챈 것일까?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비친 적 없던 성진이었다. 그래서 여지껏 선우를 향한 희원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희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성진이... 그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짜식, 놀라긴. 이 오빠가 우리 순이를 얼마나 아끼는 데 그것도 모를까봐."
아니라고 잡아떼고 자시고 할 짬도 없이 어찌된 영문인지 희원의 두 눈엔 왈칵 눈물부터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는 성진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그래서... 내가 선우오빠 때문에 맘 상해하고 혼자 상처받을 까봐... 그래서 이 번 가을하고 겨울이 남들보다 더 추울까봐 걱정이 되서... 이렇게 값비싼 외투를 두 개씩이나 안겨주면서도 마음이 안 좋아서 오빠답지 않게 저렇게 흐린 얼굴을 하고......'
"흑..... 흐흑......"
흐느낌이 새어 나갈까봐 입술을 깨물었지만 희원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 번 터져 나온 흐느낌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쉽사리 멈추어 지질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는 창피함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선우로 인해 애를 태웠던 기억들과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성진의 따뜻한 마음 때문에 싸아한 아픔과 울컥하고 치미는 감동이 교차하면서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엉....."
"나 아까 단원들한테 한 소리 농담 아니었어. 난 이제 니가 남 같지 않다. 진짜 여동생 같다니까. 그래서 넌 내가 직접 좋은 남자 찾아서 소개시켜 줄거야. 희원이 너처럼 진짜 알토란같은 그런 놈으루다가 말이야.
성진이 한 팔로 희원을 감싸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너무도 다정한 그의 말투에 희원의 눈물은 더더욱 그칠 줄 몰랐다.
한편 지윤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선우는 그녀의 차를 주차장에 주차시킨 뒤 곧장 택시를 타고 성진과 희원이 먼저 도착해 있다고 연락이 온 호텔 뷔페 식당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지윤의 아파트에서 그 호텔까지는 택시로 20분 정도면 족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선우가 지윤의 차에서 내려 인사와 함께 차키를 건네려던 순간 지윤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휘청거렸다.
"안되겠다. 니 집 몇 층이냐?"
결국 선우는 휘청거리는 지윤을 부축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빠,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들어가자 마자 약부터 먹고 한 숨 푹 자라."
지윤의 아파트 안에 들어선 선우는 그녀의 방 침대에까지 그녀를 부축해 들어가 그녀를 눕혀준 뒤 비상약이 있는 장소를 물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한 숨 자면 저절로 낫겠지 뭐."
"현기증으로 비척거릴 정돈데 저절로 낫겠냐. 안 되겠다. 나가면 근처 어디 약국이라도 있겠지. 기다려. 내가 몸살약이라도 사올게."
"미안해서 어떡해 오빠."
"미안하면 오늘만 아프고 내일부턴 아프지 마라. 알겠냐?!"
선우는 부랴부랴 아파트를 나와 근방을 두리번거린 끝에 약국 한 곳을 발견했다. 그는 약사에게 대강의 증상을 설명해 주고 간단한 몸살약을 건네받은 후 뛰다시피 하여 다시 지윤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자, 몸살약이야. 그리고 여기 물."
지윤은 힘없는 손길로 약과 물을 받아든 후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겨우 겨우 약을 먹었다. 선우는 그녀를 부축해 다시 침대에 뉘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약 먹었으니까 한 잠 푹 자고 나면 훨씬 나을거야. 난 이제 그만 가봐야 될 것 같다. 혼자... 있을 수 있지?"
"오빠... 나 잠들 때까지만 있다 가주면 안돼. 난...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슬프더라."
지윤이 선우의 손을 잡으며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 선우의 마음은 벌써 성진과 희원이 있는 뷔페식당으로 달음질치고 있었지만 아플 때 혼자 있기 싫다는 그녀의 말에 선우는 순간 혼자 유학 중에 있는 나영의 얼굴이 떠올라 차마 그녀를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 잠들 때까지 있어줄게."
그렇게 선우는 지윤의 침대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가 잠들 때까지 앉아있었다. 지윤은 선우가 보기에 잠이 든 것 같아 내내 잡고 있던 손을 빼려고만 하면 도로 그의 손을 끌어당기곤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그녀도 약기운 때문인지 결국 잠에 곯아떨어졌고 그제서야 간신히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선우는 그 길로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뷔페식당에 도착했다는 성진의 전화를 받은 후 대략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선우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 뒤 잴 틈 없이 그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택시 안에서 선우는 먼저 성진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밧데리가 떨어진 모양인지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메시지만 연거푸 흘러나올 뿐이었다. 거기다 어찌된 일인지 신호음이 가는 희원의 핸드폰 역시 도통 받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희원의 핸드폰은 주인의 건망증으로 인해 그녀의 방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또 막히기 시작이네."
선우가 눈쌀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택시기사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부터 차가 멈춘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아저씨, 어디 샛길 같은 데 없어요. 저 지금 무지 급하거든요."
"호텔까지는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손님. 혹 샛길이 있다해도 손님이 보다시피 어디 차선이나 바꿀 수 있겠습니까."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차창 밖을 내다보던 선우가 지갑을 꺼내 들며 다시 택시기사를 향해 말했다.
"그럼, 여기서 내려주세요."
도로 한 복판에서 하차한 선우는 빽빽하게 정체되어 있는 차들 사이를 요리 조리 돌아서 곧 인도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인도에 올라서자 마자 호텔이 있는 방향을 향해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하도 정신없이 달리는 통에 행인들 몇 몇과 부딪히기도 했고 덕분에 미친 놈 취급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쌀쌀한 밤기온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만큼 달리고 또 달렸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마치 주문이라도 거는 것는 처럼 선우는 자신에게 암시를 걸며 뛰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쉬지 않고 달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선우는 비로소 호텔 앞에 당도했고 머뭇거림 없이 뷔페식당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갔지만 이미 두 사람은 그 곳에 있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선우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후우......'
크게 한 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호텔 입구로 발길을 되돌리는 동안 선우는 지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을 등지고 나올 때 분명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던 희원의 눈망울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호텔을 나선 선우는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 주변을 한 번 휘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택시 한 대가 선우 앞에 당도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택시에 올랐다. 하지만 택시가 막 큰길로 접어들기 위해 호텔 정문 앞에서 우회전 깜박이를 켠 채 잠시 멈춰 있을 때 그 뒤쪽으로 성진과 희원이 호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우는 안타깝게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