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선우는 유리창 밖으로 마로니에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복도에 서서 지윤이 내미는 캔커피를 받아들며 말문을 열었다.
"너 미국에 있다는 얘기는 나영이한테 들었는데 니가 이 공연에 출연하게 된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요? 사실 저... 아직 공부가 다 끝나서 온 건 아니예요."
"그래? 아까 연출 선생이 뮤지컬 전문 배우라고 널 소개하더니 아마 실력 때문에 러브콜을 받았나보구나."
그 때까지 창 밖을 응시하고 있던 지윤은 글쎄 그럴까요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짓더니 이내 묘한 눈길로 선우를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공연에 레드비트 멤버들의 출연이 거의 확실시 하다고 들어서 저도 캐스팅 제의 수락한 거예요. 선우오빠 얼굴 보려구요."
"하하하. 그래?"
지윤의 말을 가벼운 농담쯤으로 여긴 선우는 그저 유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선우의 기억에 그녀는 어릴적 부터 유난히 도전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지윤은 선우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던 그의 동생 나영과 어릴 적부터 오랜 단짝 친구사이였다. 때문에 유학 중에 있어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나영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선우는 지윤을 보자 마치 나영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참, 미국에 있을 때 나영이랑도 몇 번 만났다는 얘긴 나도 들었다."
"그랬어요. 사실 나영인 캘리포니아에 있고 전 뉴욕에 있었으니 만남 한 번 갖는 게 맘처럼 쉽진 않더라구요. 그래도 틈틈히 전화 통화는 자주 했어요. 얼굴은... 올 연초에 본 게 마지막이네요. 그 때가 한국의 설날이었는데 왠지 그냥 보내기 쓸쓸하다고 해서 제가 비행기타고 나영이한테 휙 날아갔죠."
"나 얼마 전에 나영이랑 통화했는데 그 때 니 얘기 전혀 못 들어서 아깐 정말 많이 놀랐다."
"제가 일부러 오빠 놀래켜 주려고 나영이한테 아무소리 말라고 신신당부 했었거든요. 입에 지퍼 꽉 채우고 있으라고. 이렇게요."
지윤은 손을 입 가까이로 가져가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해보이곤 환하게 웃었다. 좀 전까지는 몰랐는데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보았던 앳된 얼굴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얼핏 선우의 머릿 속을 스쳤다.
"그나저나 우리 몇 년만에 보는 거지? 지윤이 너 많이 달라졌다. 숙녀티도 제법 나고. 아깐 그냥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치, 오빤.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숙녀 운운해요. 촌스럽게. 이래뵈도 저 산전수전 다 겪고 알 거 다 아는 나이라구요."
"팩 하고 잘 토라지는 성질은 여전한 거 같은데?"
"선우오빤... 저 이제 선우오빠의 그런 놀림에 토라지고 하는 애 아니예요."
"아니긴. 니가 아무리 화장발, 조명발로 위장하고 있어도 내 머리 속엔 옛날에 너 코 찔찔 흘리고 다니던 모습 다 그대로 남아있다."
"어머머. 내가 언제 코를 찔찔 흘렸어요. 오빠네 집에 처음으로 놀러 갔을 때가 중학생 때였는데. 농담도 잘해."
선우가 빙글거리며 슬쩍 농담을 던지자 지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끈하며 말했다. 그런 지윤의 반응을 보자 선우는 진짜 그녀의 어린 시절 때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영의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선우 앞에서 얼굴만 붉힌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지만 지윤은 달랐다. 도도하게 보일 만치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똘망똘망한 시선으로 뚫어질 듯 그를 쏘아보곤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선우의 무뚝뚝한 말 한 마디에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바락바락 대들기 일수인 그녀였던 것이다.
"아무튼 저 그 때 오빠 짝사랑 했던 거 알아요?"
"그랬니? 난 니가 걸핏하면 바락바락 대들고 화난 사람처럼 굴길래 나한테 대단한 원한이라도 있는 가 했었는데."
"하여간 오빠 무디고 무심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근데 요새도 그렇게 살아요?"
"그 성격이 어디 가겠니."
"그래가지고 어디 장가나 들겠어요. 안되겠다. 내가 짬짬이 오빠 성격개조 좀 시켜줘야지."
보일락 말락한 미소를 떠올리며 지윤이 공원 벤치 옆에 서있던 커다란 은행나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윤씨! 오선생님께서 찾으시는데요."
"네에! 어머 휴식시간이 벌써 끝난 모양이네. 오빠도 같이 들어갈거죠?"
"응."
그러자 선우의 대꾸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냉큼 그에게 팔짱을 끼고 종종 걸음을 치며 연습실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연습실 문 앞에 다다르자 그녀는 얼른 선우의 팔에 끼었던 자신의 팔을 빼내곤 먼저 연습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소 황당함을 느낀 선우는 이내 픽하고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너도 제멋대로인 성격은 여전하구나.'
그러나 선우는 지윤과 함께 연습하는 날이 거듭될수록 그녀가 자기 일에서만큼은 철저한 프로란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유학 기간 중간에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뮤지컬 배우로서의 그녀는 보기 드물게 근성 있는 연기자였다. 첫 대면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지윤을 썩 탐탁지 않게 여기던 성진도 그 점만큼은 순순히 인정했다.
"분명 걘 뮤지컬배우로 대성할 거야."
"그래. 그 생각만큼은 나도 동감이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성진과 선우는 지윤이 배우로서 대성할 재목이라는 부분에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성진은 지윤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뭔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걔가 마음에 안 들어. 뭐랄까... 너무 강해. 물론 나도 여자가 나긋나긋하기만 바라는 타입은 아니지만 암튼 하지윤 그 앤... 느낌이 별로야."
"걔가 좀 지나치게 도도해 보이는 면은 있지. 하지만 알고 보면 귀여운 구석이 많은 얘야."
좌회전 신호를 받고 운전대를 꺾으며 선우가 두둔하는 투로 말했다.
"어련하시겠냐. 하지만 아무리 걔가 나영이랑 절친한 친구래도 은선우 너 너무 티나게 싸고도는 거 아니냐? 이젠 극단 사람들도 슬슬 너희 두 사람을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아. 그건 알고 있냐?"
어느 새 성진과 선우가 공연 연습에 참여한 지도 3주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지윤은 틈만 나면 선우 옆에 달라붙어 속이 뻔히 다 보이는 아양을 떨거나 어리광 섞인 투정을 부렸고 어찌된 일인지 선우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그런 그녀의 행동들을 다 받아주고 있었다. 선우의 성격을 잘 아는 성진으로선 시시때때로 아연실색을 할 정도였다.
"맘대로들 생각하라고 그래. 어차피 자기네 멋대로들 생각하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게 인간이란 존재잖아."
선우는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가 제멋대로 구는 지윤의 행동을 조용히 받아주는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동생 나영으로부터 입버릇처럼 친구 지윤이 큰 의지가 되어준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선우에게 지윤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존재 이를테면 은인 같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니 감정이 뭐든 하여간 너무 티나지 않게 신경쓰는 게 좋아."
"잘 알았수, 형. 그러니 형도 쓸데없는 걱정은 붙들어 매슈. 피부미용에 안 좋으니까 말야. 안 그래도 피곤해서 그런지 요즘들어 뽀얗던 형 피부가 조금씩 거무튀튀해 보이는 게... 눈에 다크서클도 생긴 것 같구......"
"뭐? 다크써클? 어디, 어디?"
경악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백미러를 잡아 돌려 자신의 눈매를 열심히 살피는 성진을 돌아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던 선우는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가을바람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거리고 있는 거리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선우는 자신의 마음까지 스산해 지는 기분을 느꼈다. 20여 년 가까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유일한 삶의 의미와도 같던 여동생 나영이 불현듯 몹시도 그리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희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영아. 나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 생겼다. 축하해 줄래?'
희원 생각을 하자 잠시 스산했던 기분은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훈훈한 온기가 가득 차오르며 선우의 입가엔 절로 뿌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희원씨, 방금 점심 먹었는데 뭘 그렇게 만들어요?"
희원의 칼질 소리를 들은 준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서며 물었다.
"오늘 토요일이라 수업도 없겠다, 간식이나 좀 만들어서 두 오빠들 연습하는 데나 찾아가 볼까 하구요. 준희오빠도 같이 갈거죠?"
"어어... 나는......" 절로 손이 뒤통수로 올라가며 준희는 선뜻 대꾸하지 못했다.
"또 선영 언니 만나기로 했구나. 뭐예요. 정말. 요즘 준희 오빠한테 나 배신감 마구 느끼는 거 알아요. 아무리 연애에 푹 빠져있어도 그렇지. 성진오빠랑 선우오빠도 연습이다 회식이다 맨날 늦는데 오빠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데이트 하느라 맨날 늦구. 아웅, 소외감 느껴."
희원이 부러 서운한 시늉을 하며 툴툴거리자 준희는 금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그, 그러게 말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버렸네요. 아이, 이거 희원씨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아휴, 됐네요. 보는 내가 되려 미안해서 농담도 못하겠네. 농담이었어요. 농담. 배가 쪼매 아픈 건 사실이긴 하지만."
희원이 장난스럽게 콧등에 주름을 잡아 보이며 대꾸하자 안절부절 못하던 준희의 표정은 그제서야 다소 누그러졌다.
"근데... 간식으로 뭘 만들어 가려구..."
"만두나 좀 해가려구요."
"만두?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요? 우리 엄마 말이 만두는 손이 많이 가서 만들기 힘든 않은 음식이라던데." 준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명절 때처럼 많은 양을 만들 땐 그렇지만 간단하게 한 끼 먹을 정도의 양이라면 생각보다 수월해요."
"와아... 이거 아쉽네. 나 만두 되게 좋아하는데."
"피이... 데이트 가는 사람 건 없어요."
"약속 취소하고 희원씨나 따라 갈까."
"됐네요. 내가 아무렴 준희오빠 몫 안 남겨 놓을까봐."
"으흐흐. 그럴 줄 알았지."
"대신 재미있게 놀다와야 되요. 알았죠?"
"오케이!"
머지않아 준희는 먼저 외출을 하고 희원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빠른 솜씨로 만두를 빚었다. 보통 주말엔 연습이 일찍 끝나곤 하지만 성진과 선우는 몇 몇 단원들과 좀 더 남아 부족한 부분을 보충연습 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십 인분 정도의 분량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빚은 만두를 찜통에 찌고 도시락에 담고 하니 어느 덧 세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서둘러야 겠네. 연습실 까지 한 시간은 걸릴텐데.'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 희원이 연습실에 도착해서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니 예상대로 거의 네 시가 다 되어있었다.
문이 활짝 열려있어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기 때문에 희원은 생각보다 쉽게 연습실을 찾아냈다. 연습실을 빼고는 대부분 비어있는지 그녀의 시선이 닿을만한 곳에 있는 다른 장소들은 쥐 죽은 듯 고요할 뿐이었다.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낯익은 반주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복도를 걷고있는 그녀의 발소리쯤은 쉽사리 묻힐 정도였지만 그래도 희원은 발끝을 살짝들고 살금살금 연습실을 향해 다가갔다.
연습실 앞에 다다랐을 때 희원은 문가에서 고개만 빠끔히 들이밀고 조심스럽게 안을 둘러보며 성진과 선우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어디에 있어도 금방 눈에 띌 두 사람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수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땀을 닦는 모습을 발견했다.
"누굴... 찾아오셨나요?"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희원이 뒤를 돌아다보니 젊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물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아... 예. 성진오빠랑 선우오빠를 좀 만나..."
"어, 이게 누구야? 순이 아니야? 야, 너 말도 없이 어떻게 왔어?"
두 남녀를 향해 희원이 채 대꾸를 마치기도 전에 성진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성진 오빠."
낯선 장소에서 두 사람을 보니 별나게 반가운 기분을 느끼며 희원도 활짝 웃었다.
"정말 아무 소리도 않다가 갑자기 왠일이냐?"
"일부러 깜짝 놀래켜 주려구 말 안 했죠. 여기... 간식 좀 싸왔어요."
"이야, 역시 우리 순이가 최고구나." 도시락을 받아드는 성진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어, 이게 다 뭐야?" 성진의 뒤를 따라온 선우가 도시락을 쳐다 보며 물었다.
"아, 선우오빠. 연습 많이 고되죠. 힘내라고 응원 나왔어요."
"그것도 빈 손이 아니고 이렇게 간식까지 싸들고 나오셨단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특한 것. 에구, 에구, 기특하기도 하지."
성진이 이뻐죽겠다는 표정으로 에구 에구 소리에 맞춰 희원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자 순간 선우의 숯검댕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는 얼른 그런 기색을 감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처럼 주말인데 한가하게 좀 쉬지 뭘 이런 걸 싸오구 그러냐. 배고프면 뭐든 사서 먹으면 되지."
어찌보면 진심으로 희원을 생각해서 하는 말 같기도 했지만 희원은 차라리 선우가 성진처럼 기특해 해주는 편이 훨씬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 뭘까? 기대된다. 순이가 특별히 준비한 거면 뭐든 특별히 맛난 걸텐데."
하지만 희원은 성진이 마치 생각지도 않은 선물 상자를 받아 든 아이처럼 잔뜩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도시락에 대고 코를 킁킁 거려보기도 하고 심지어 귀까지 대보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금방 유쾌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성진이 형, 거기 뭡니까. 뭔가 맛있는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 거 같은데 설마 우릴 모른 척 하시는 건 아니겠죠?"
연습실 안에 옹기 종기 모여있던 대 여섯 명의 단원들 중 한 사람이 손마이크를 만들어 짐짓 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십 인분 정도 예상하고 싸왔어요."
단원들 쪽으론 등을 돌리고 서있던 성진이었기에 맘놓고 희원에게 나눠 먹기 싫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에게 희원이 작은 소리로 그렇게 속삭이자 성진은 금방 얼굴을 펴고 돌아서더니 단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대꾸했다.
"아, 그야 당연하지! 이 엉아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니다!"
그 순간 성진의 뒤에 서있던 희원과 시선이 마주친 선우가 양 손으로 자신의 목을 거머쥐며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해보였고 희원은 소릴 죽이기 위해 애쓰며 키득거렸다.
성진과 선우를 포함해서 연습 중이던 사람은 모두 여덟이었기 때문에 둥그렇게 둘러앉은 그들 앞에 도시락을 내려놓을 때 희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나 마음 한켠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와아!"
다섯 층으로 쌓아온 도시락 뚜껑을 하나 하나 열 때마다 성진은 물론이거니와 단원들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 만두 설마 이거 다 직접 만들어 오신 건 아니겠죠?"
좀 전에 손마이크를 만들어 외쳤던 바로 그 젊은 남자 단원이 감동스러워 하는 빛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체구는 마른 듯 해보였지만 그도 성진처럼 먹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 듯 보였다.
"우리 순이는 직접 만드는 거 아니면 취급 안해."
마치 자신이 싸온 것인양 괜스리 목에 힘을 주며 성진이 대신 대꾸했다. 성진의 말투로 보아 그 곳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단원들은 성진보다 모두 연하인 듯 했다.
"아하핫, 순이요? 이름이 뭐랄까... 참 토속적이시네요." 복도에서 봤던 남녀 중 붉은 헤어밴드를 하고 있던 남자단원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그냥 내가 붙인 별명이야. 뭣들 해. 어서들 먹자구." 성진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제일 먼저 만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와아. 꿀맛이네."
"꿀맛은... 이것이야 말로 만두의 진수를 보여주는 맛이구만... 캬아, 죽인다. 죽여."
"어머 어머 정말 너무 맛있다. 나 어렸을 적 시골 살 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꼭 그 맛 같애. 어쩜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솜씨가 좋아요?"
"순이씨라고 했나요? 저 방년 26세. 신체건강하구요 제 앞으로 24평 짜리 아파트 하나 있구요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있습니다. 밤일은 특히 더 자신 있습니다. 당장 저한테 시집오시면 안될까요?"
"민성씨, 뻥 까지마. 24평짜리 아파트 그거 전세라매. 그리구 밤일에 자신 있다니. 지난 번 여친한테 자기 그거 딸려서 까였다며."
와하하하하하.
방년 26세라는 성은 모르고 이름은 민성이라는 남자 단원의 익살스런 청혼과 호피무늬 헤어밴드를 두른 다소 연륜 있어 보이는 여자 단원의 딴지로 인해 연습실은 잠시 웃음 바다가 되었다.
희원은 그녀가 만든 만두를 우물거리며 대부분의 단원들이 성진에 버금갈 만큼 별스럽게 과장된 그러나 재미난 칭찬의 말들을 한 두 마디씩 거드는 모습에 배우를 하는 사람들은 같은 표현을 해도 훨씬 재미나고 감칠맛 나게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윤아. 넌 왜 안 먹어. 야, 너도 다가 앉아서 좀 먹어."
선우의 목소리에 잠시 동안의 상념에서 깨어난 희원은 그의 시선 끝에 있던 한 여자 단원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 혼자만 젓가락을 들고 있기만 한 채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응. 난 별로 생각이 없네."
"너 만두 싫어하니? 조금 아까 배고프다고 간식이라도 먹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지금은 생각 없어."
"야, 연습 계속하려면 기운 없어서 안 돼. 그러지 말고 얼른 다가앉아서 좀 먹어. 만두가 이거 되게 맛있다."
선우가 연거푸 권했지만 왠지 토라진 듯 입술을 뾰족이 모은 채 그녀는 끝까지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희원은 멍한 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도대체 저 여잔 누구길래 천하의 얼음왕자 은선우로부터 저토록 과분한 배려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희원의 시선이 문득 다른 단원들을 향했을 때 그녀는 그들 사이에 감돌고 있는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분명 선우와 지윤이라는 여자에게 의식적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뭐지, 이 분위기는?'
희원은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돌아다 보았다. 헌데 그녀 역시 희원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희원은 당황하여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뭔가 거북한 기분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 스멀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선우오빠. 근데 저 아가씬 누구야?"
"응? 어어... 얜... 저어......." 갑작스런 지윤의 질문에 선우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가정부예요. 레드비트 오빠들한테 고용된 가정부요."
희원이 선우 대신 나서서 망설임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순간 선우가 고개를 홱 돌려 희원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희원 역시 지지 않고 선우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아아... 가정부..."
가정부란 말에 지윤은 왠지 싱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다른 단원들은 다소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은 채 옆에 앉은 동료들과 말없는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성진이 갑자기 희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호탕하게 웃더니 지윤과 다른 단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하. 우리가 요즘 얘를 하도 부려먹었더니 선우랑 나 들으라고 괜히 하는 소리야. 실은 얜 희원이라고 내 친척 동생인데 촌수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 뭐냐 호칭이 무지 복잡해서 선우가 아까 버벅거린거야. 무슨 당숙에 팔촌에 다시 고모에 어쩌구 하면서... 솔직히 그건 나도 정확히 잘 기억 못하거든."
"아아... 그런 거 였군요. 희원씨라고 했나? 아이, 아가씨 연극 배우 해도 되겠다. 얼굴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어쩌면 그렇게 시치미를 똑 떼고 진담처럼 농담을 해요."
"그러게 말야. 나도 깜빡 속을 뻔 했잖아. 하하핫."
"우리 희원이가 원래 보기보다 재주가 무지 많은 애 거던. 하여간 너네들 혹여라도 우리 희원이 한테 눈독들 들이지마. 얜 내가 곱게 모셔놨다가 내 눈에 꼭 드는 놈 나타나면 그 놈 한테 시집 보낼 거니까. 알아들 들었지."
"에이,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요. 자기들 끼리 눈맞으면 땡이지."
"마자 마자."
"어허, 너네들 자꾸 그러면...... 나... 똥침 놀거다."
"아구 성진형님, 제발 그 무서운 똥침만은... 제발...."
성진이 세 명의 젊은 남자 단원들과 너스레를 떠는 동안 희원은 의식적으로 선우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그가 줄곧 희원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희원은 일부러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지윤은 줄곧 선우와 희원을 번갈아 가며 주시하고 있었다. 귀신도 울고 갈만큼 민감한 그녀의 감각들은 두 사람의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