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뒤척.
풀썩.
뒤척.
풀썩풀썩.
침대 위에 몸을 뉘인지 족히 한 시간은 넘었음 직한 동안 희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애꿎은 이불과 베게만 풀썩거리고 있었다.
베게 하나를 무릎 사이에 끼운 채 모로 누워있던 그녀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 사이의 베게를 빼내버리고 똑바로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그러나 한결 두터워진 고요함 속에서 그녀가 머리 속에 담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있던 영상들은 더욱 더 선명해 질뿐이었다.
마치 영화장면의 하이라이트를 연속된 장면으로 이어서 보여주는 것처럼 총천연색 퍼레이드로 지나가는 선우의 모습들 때문에 마땅히 수면에 들어가 있어야 할 그녀의 세포들은 여전히 차렷 자세로 기립해 있는 중이었다.
딱.
그녀는 머리맡의 스탠드를 켠 후 조도를 가장 어둡게 해놓고는 다시 똑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침침한 가운데서도 천장에 붙은 벽지 무늬는 알아볼 만 했다.
'그래. 요 끝부터 조 끝까지만 저 꽃무늬를 헤아리기로 하자. 아마 다 헤아리기도 전에 난 잠들어 있을거야. 그래.'
규칙적으로 배열된 앙증맞은 꽃무늬들을 그녀가 천천히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날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의 헤아림은 이내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아냐, 아냐. 다시 다시. 이건 무효야, 무효. 첨부터 똑바로 시작한 게 아니잖아. 그래... 처음부터 제대로 다시 시작해 보자. 음...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그녀는 아예 이불 밖으로 팔을 꺼내놓고 검지 손가락을 들어 매우 신중한 자세로 꽃무늬들을 처음부터 다시 헤아려 나가기 시작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마침내 마지막 꽃무늬가 좋아한다는 말로 끝이 나자 그녀는 비로소 개운한 표정이 되어 살포시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그러쥐고 다시 머리끝까지 끌어 당겼다.
"그래서. 그게 바로 그 영광의 상처란 말이지?"
성진이 턱짓으로 다소 부어오른 선우의 한 쪽 입매를 가르켰다.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아아, 국물 정말 시원하다."
성진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대꾸한 선우는 연신 국물을 입에 떠 넣었다. 희원이 선우의 해장을 위해 특별히 정성들여 끓인 북어국이었다.
"췟. 지들 둘이만 나가서 영화 보구 외식하구. 그러니까 벌받은 거다. 알아?"
"억울하면 오늘 준희랑 둘이 나갔다와. 나가서 영화도 보구 외식도 하구. 집은 희원이랑 내가 둘이 보고 있을테니까."
"으씨. 저게 끝까지 사람 놀리구 있네. 야, 순이야. 너말야, 언제 시간 내서 꼭 나랑 둘이만 놀러가자. 나가서 우리끼리만 재밌게 놀다 들어오는 거야. 알았지?"
"예에."
희원은 어린애처럼 서운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성진의 모습을 쳐다보며 한편으론 매우 미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 준희야. 선우한테 그 얘기 해줬어? 공연 얘기 말야."
"아, 그거. 어젠 그럴 짬이 없어서 못했지. 성진형이 얘기해."
"뭔 공연?" 아예 국그릇을 손에 들고 후루룩 거리던 선우가 무심한 투로 물었다.
"야, 너랑 나랑 졸지에 뮤지컬에 출연하게 생겼다." 성진이 다소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선우의 물음에 대꾸했다.
"뮤지컬?"
"그래, 뮤지컬. 어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신곡 발표는 잠시 미루고 대신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 만드는 뮤지컬에 출연하라신다."
"신곡 발표 늦춰지는 거야 상관없지만 난데없이... 무슨 뮤지컬?"
"그것도 다 PR의 일종인 거지 뭐. 다른 출연진들은 두 달 전부터 벌써 연습에 들어갔댄다. 주연배우 캐스팅만 슬슬 지연되고 있던 모양이야. 듣자하니 우리쪽 말고 더 버드 애들한테도 섭외가 들어갔었던 모양이더라. 기분 나쁘게. 저울질 당한 셈이지 뭐. 아무튼 기획사 측에선 나름대로 꽤 달가와하는 눈치더라고. 돈 한푼 안들이고 PR효과는 만빵이라는 계산에서지."
"벌써 연습에 들어갔다면... 작품이 뭔데?"
"응. 지저스크라이스 수퍼스타. 작품은 맘에 들더라. 롹오페라 아니냐."
"정말요? 정말 오빠들이 지저스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 출연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 잠자코 성진과 선우의 대화를 듣고있기만 하던 희원이 지저스크라이스트 수퍼스타란 말에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놀라며 물었다.
"응. 너도 그 작품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짜식. 롹에는 관심 없었다면서 그 롹 오페라는 좋아했던가 보네."
성진이 희원에게 슬쩍 눈 흘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흐흐... 그게 그렇게 됬네요. 그래도 요즘엔 저도 광팬까지는 아니어도 오빠들 덕분에 롹에 많이 심취해 사는 거 성진오빠도 알잖아요."
"그렇긴 하지. 물론 그게 다 이 오빠의 넘치는 카리스마의 영향 아니냐."
순식간에 코맹맹이 소릴 내팽개친 성진이 실제 흡입력 넘치는 목소리를 과장되게 연출하며 짐짓 심오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우자 희원은 또 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되물었다.
"물론 주인공 역할이겠죠?"
"말밥이지. 지저스에 역에 나 유.성.진. 유다역에 은.선.우. 캬아, 캐스팅 죽인다. 그치?"
"아... 미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와아. 얼마나 멋질까요? 참, 그런데 왜 준희오빠는 출연 않는거죠?"
얼굴에 홍조까지 띤 채 백일몽에 빠져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희원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준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연히 준희에게도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지. 하지만 숫기 없는 저 녀석이 죽어도 자기는 못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아마도 준희역으로 제의가 들어왔던 빌라도 역은 다른 사람한테 맡겨질 거야."
성진이 성마른 목소리로 혀를 차며 준희 대신 대답했다.
"숫기 문제가 아냐. 선우형이야 베이시스트라지만 어디 보통 보컬 실력이우? 하지만 난 문제가 다르지. 형들도 알잖아. 나 노래엔 젬병이라는 거. 그 캐스팅 제의 솔직히 예의상 들어온 거야. 만약 내가 뮤지컬에 출연한다면 그건 진짜 뮤지컬 배우들에 대한 모독이 될 거라구."
"그래두... 아쉽네요. 오빠들 셋 모두 한 무대에 섰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희원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희원씨가 이렇게 열광할 줄 알았으면 앞 뒤 가리지 말고 나도 그냥 출연한다고 할 걸 그랬나봐요."
"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기획사에다 당장 전화해줄까?"
"됐어, 성진이형. 그냥 해본 소릴 가지구."
비록 준희가 함께 출연하지 않아 아쉬웠지만 희원은 선우와 성진이 무대를 누비며 뿜어낼 카리스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와아... 정말 멋질거야, 두 사람. 지저스와 유다. 그 얼마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냐구. 성진오빠의 흡입력 있는 목소리로 지저스를 연기하고 선우오빤... 지저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유다 역이라니... 오옷, 얼마나 멋질까!'
그 날 아침 식탁에서 두 사람이 뮤지컬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얘길 들은 이후로 희원은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성진과 선우는 극단 연습실로 연기와 안무지도를 받기 위해 첫 연습을 나갔다.
최고 인기스타이자 주연 배우라는 특혜 때문에 두 사람은 다른 출연진들보다 뒤늦게 연습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표면적었든 진심이었든 두 사람을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날 또 다른 주연, 마리아역으로 유학을 마치고 지저스 공연에 맞추어 며칠 전 귀국했다는 하지윤이라는 뮤지컬 전문 배우가 두 사람에게 소개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지윤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장이었지만 춤으로 다져진 듯 보이는 탄탄한 체구 전체에서 사람을 압도할 법한 에너지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성진과 선우를 향해 그녀가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재기 가득한 눈망울을 빛내며 두 사람을 똑바로 쏘아볼 때였다. 선우의 얼굴에 돌연 놀라움의 표정의 떠올랐다.
"어? 너... 지윤이?"
"저 알아보시겠어요, 선우오빠?"
"아니 두 사람 초면이 아닌가보네."
성진과 선우에게 지윤을 소개시켰던 연출자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끼어들었다.
"네. 뭐 그럭저럭." 지윤이 야무져 보이는 입매를 살짝 끌어올리며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잘 됐군. 연기라는 게 배우들간의 호흡이 중요한 만큼 가급적 친밀감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어쨋거나 보아하니 두 사람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 것 같은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고 이제 그만 연습에 들어갑시다. 오케이?"
"네, 선생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을 마친 지윤은 선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소개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서기 전의 위치로 냉큼 달려갔다.
"자자, 다들 좀 전에 연습하던 씬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박선생, 음악 다시 켜고 안무지도 해주세요."
연출자는 손뼉을 두 번 치는 것으로 잠시 흐트러져있던 단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곤 성진과 선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오늘 첫 날이니까 우선 옆방으로 가서 이런 저런 설명부터 듣도록 하지."
말을 마친 연출자가 옆방으로 두 사람을 인솔해 가는 동안 성진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생각했다.
'호오... 하지윤이라... 보통내기가 아니겠어. 헌데 선우녀석은 쟤랑 또 무슨 관계람? 선우를 쏘아보는 시선이 영 심상치 않던데 말이야. 이거 이거 요즘 좀 잠잠하다 했는데 얼마 못 가 또 이 녀석 거하게 스캔들 한 방 터뜨리는 거 아냐? 에혀. 그걸 누가 장담하리. 나도 모르겠다.'
성진과 선우는 연출자로부터 극의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지에 관한 설명과 가창력에 비해 부족할 것이 분명한 연기와 춤 연습을 어떻게 진행할 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본격적인 연습은 다음 날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연출자와 함께 다시 방을 나왔다.
"난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 봐야겠네. 자네들도 생각있으면 다른 출연진들 연습하는 모습이나 구경하던지 마음대로들 하게." 연출자가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전문 분야가 아니니 단원분들 연습하는 모습이라도 열심히 봐야 조금이라도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성진이 다소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자 선우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긴 하지. 그럼, 들어들 가세."
성진과 선우는 연습실 한 쪽 벽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아서 단원들이 연습하는 광경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주로 군무 장면이 대부분이어서 연습실 안은 율동에 몰입한 단원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휘유, 열기가 대단한데."
자신의 양 무릎에 팔을 괸 자세로 진지하게 연습광경을 지켜보던 성진이 나즈막한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군."
"참, 근데 저기 저 쪽에 마리아 말이야. 너랑은 무슨 사이야?"
"사이는 무슨... 그냥 좀 아는 얘야."
"너... 공연도 시작하기 전에 설마 또 한 방 터뜨리는 건 아니겠지?"
대답 대신 피식 하고 실소를 머금는 선우를 성진은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여자 좋아하기로 치면 누구 못지 않은 성진이었지만 천하의 바람둥이로 소문날 만큼 대책없이 함부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선우에게 언젠가 그로 인해 큰 코 다칠 날 있을 거라고 그는 틈날 때마다 주의를 주곤했다. 하지만 그의 주의 따위는 아랑곳 않고 늘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선우였다.
"어휴, 그래. 니 인생이니 니가 알아서 해라."
성진은 그렇게 한 마디 이죽대고는 다시 단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머지않아 단원들에게 잠깐 동안의 휴식 시간이 허락되었을 때 여자 단원들 몇 몇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 곁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평소에 열렬한 팬이었어요. 유성진씨, 은선우씨 여기에다 싸인 좀 해주세요."
"저두요, 저두."
그녀들은 오늘 두 사람이 연습실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준비한 양 새 노트와 두툼한 싸인펜을 내밀며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사인을 부탁했다. 성진과 선우는 그들과 함께 공연할 이들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성의 있는 태도로 그녀들이 내민 노트에 사인을 해주었다.
"저는 여기 티셔츠에 부탁드릴게요. 아우 근데 실지로 보니까 두 분다 훨씬 더 미남들이다."
"그러게요. 어쩜... 머리결들도 너무 고우시네요. 샴푸 뭐 쓰세요?"
"그냥... 빨래비누를 씁니다. 하하하."
"어머머 어쩌면 농담도 그렇게 귀엽게 하세요. 오호호홋."
성진이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농담을 하자 여자 단원들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숨이 넘어갈 듯 깔깔거리고 있을 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막달라 마리아역의 지윤이 선우를 내려다보며 천성적으로 비음이 강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 오빠. 지금 잠깐 나 좀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