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 (29/75)

# 28.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희원은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선우의 노래와 연주가 끝난 직후 손님들은 그에게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아낌없이 보내고 있었다.

 콧수염 사장 아저씨의 멋진 칵테일 플레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서너 평 남짓한 스테이지에서 매일 밤 이루어지는 라이브가 평소 호평을 받고 있어서 일까 100평이 훨씬 넘어 보이는 그 까페는 다소 외진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명소로 소문난 곳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의 모든 자리가 만석이었다.

 왠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던 희원은 까페 안을 그득 메운 손님들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곤혹감을 느끼느라 선우가 언제 그녀의 옆자리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야!"

  "옛?!"

 급작스런 선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희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돌아보자 다소 컴컴한 실내 분위기 때문에 정확하리라는 확신은 없지만 왠지 뿌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이는 선우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뭐야, 예의상이라도 뭐 멋지다, 끝내준다 이런 말 한 마디쯤 건네줘야 되는 거 아니냐?"

 방금 그 노래 순전히 너 한 사람을 위해 부른 건데 라는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선우가 짐짓 볼멘 소리를 가장한 채 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희원이 보여준 태도는 그의 기대 이상으로 눈물 나게(?) 고맙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아참... 너무 멋졌어요 선우오빠. 너무 끝내줬어요."

  짝짝짝짝짝.

 실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혼란 가운데 희원이 반사적으로 인사치레를 하며 기가 막힐 정도로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타이밍에 박수까지 쳐대자 선우의 고개가 갑자기 아래로 푹 떨어졌다. 허걱! 아참... 이라니.

  '이런... 내가 생각해도 너무 썰렁하다 이건. 멍충이 채희원. 꼭 티를 내요, 티를!'

 선우의 반응에 희원은 자신이 내뱉은 어벙한 멘트며 바보 같은 박수까지 모두 다시 주워담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 정말인데... 나 진심으로 한 말인데......"

  

 얼마나 서운했으면 저렇게 계속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까. 

 희원은 그녀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감히 엄두도 못 낼 수퍼 울트라급 헛다리를 짚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선우의 옷소매를 슬쩍 끌어당겼다.

  "오빠... 선우오빠아... 서운... 했어요? 에이... 그런 게 아닌데......"

  "큭, 쿡..."

 요상하게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갑자기 선우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싶더니 이내 그가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핫! 야, 채희원. 여기 봐봐. 여기. 지금 내 눈가에 눈물 고인 거 보이냐. 으하하하!"

 박장대소하고 있는 선우의 눈가에는 정말 눈물이 다 괴어 있었다. 사실 희원에게 멋지게 보일 요량으로 맘먹고 한 분위기 잡았던 선우였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그녀의 어리버리한 반응이란. 너무도 예상 밖이었고 그의 기대와는 사뭇 어긋났지만 그래도 선우는 웃느라 눈물이 날만큼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희원이 정말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으하하핫."

  "뭐야 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주위의 시선엔 아랑곳 않은 채 박장대소하고 있던 선우와 도대체 뭣 때문에 그가 웃고있는지 채 영문을 모른 채 뻘쭘해 있던 희원의 곁으로 콧수염 사장이 다가오며 물었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형."

  "아니긴. 아주 재미난 얘기 거리가 있는 것 같던데?" 콧수염 사장이 새로 들고 온 맥주 몇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여기 이 평범해 보이는 이 아가씨가 사람 되게 웃기는 재주를 가졌거든." 

 유쾌한 표정의 선우가 말했다.

 그러나 정작 사람 되게 웃기는 재주를 가졌다고 지목된 본인은 지금 누구 얘길 하고 있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둥그런 눈을 천진스레 껌벅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날 밤 선우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콧수염 사장은 아예 두 사람 테이블에 자릴 잡고 앉아 그 날 선우의 연주와 노래가 캡이었다는 칭찬을 서두로 요즘 연예계판이 돌아가는 얘기며 언더 그라운드 밴드들에 대한 얘기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간간이 손님 가운데 선우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선우는 어느 때보다 흔쾌한 표정으로 사인을 해주었다.

 물론 희원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거의 늘 레드비트 하우스에서 멤버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희원은 멤버가 아닌 또 다른 지인을 대하는 선우의 태도나 말하는 모습들을 보며 신선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중간 중간 스테이지 위에서 희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노래를 부르던 선우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잠시 혼란스러운 기분이 반복재생 되곤 했다. 아무리 해석하고자 노력해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선우의 불가해한 시선은 순간 순간 그녀를 미궁 속으로 빠뜨렸다.

 시시각각 술이 거나해지기 시작한 선우와 콧수염 사장의 대화가 문득 선우의 과거사로 흘렀고 희원은 콧수염 사장으로부터 선우가 무명이었던 시절 처음 그 곳 카페에서 기타연주를 시작했던 때의 얘기를 재미난 입담으로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 성질머리가 어찌나 쌀쌀맞고 고약했는지... 그 당시 우리 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여대생 한 명이 있었거든. 활발하고 꽤나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지 아마."

  "형. 그만 하시우."

  "걔가 선우를 아주 많이 좋아했는데 성격도 화통한 애가 몇 달 동안 내색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다 하루는 크게 용기를 내서 데이트 신청을 했더랬지."

  "아 참, 다 지난 과거사는 왜 들추고 그래."

  "그런데 이 놈이 어찌나 얼음장같은 얼굴로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며 무안을 주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민망할 지경이었다니까. 물론 그 아인 다음 날부터 우리 집 아르바이트를 관뒀지. 꽤 괜찮은 애였는데 말야."

 선우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콧수염 사장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얘기를  이어갔다.

  "헌데 말이야, 선우야. 너 오늘 보니까 왠지 예전이랑은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인다."

  "그래? 후후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실소만 흘리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희원이 생각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요즘 선우오빠... 분명 내가 처음 봤을 때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게 다 아가씨 덕분인가 보죠?"

  "네? 아아... 아니예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예요."

 콧수염 사장이 불쑥 내뱉은 말에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이런... 제가 숙녀분께 결례를... 한 건가?" 

 콧수염 사장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슬슬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난처한 기분을 느낄 때 콧수염을 그렇듯 문지르는 것이 그의 습관인 듯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선우가 갑자기 희원의 목을 와락 끌어당겨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얹으며 콧수염 사장을 향해 되물었다.

  "어때, 형. 우리 희원이 내 신부감으로 잘 어울려 보여?"

  "켁... 켁...!" 

 선우의 팔에 목이 감긴 때문도 있었지만 희원은 그만 선우의 말에 놀라 마른기침을 해댔다. 선우에게서 풍겨 나오는 술냄새가 그녀의 콧속을 자극했다. 희원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술냄새가 싫지는 않았지만 장난치듯 거듭되는 그의 행동과 농담들엔 슬슬 화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아아주 자알 어울린다."

 콧수염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고 선우에게 대꾸하면서 콧수염 사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도통 요즘 여자들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저 조그만 아가씨가 얼음 왕자의 심장을 접수한 진짜 임자인 듯 하다고.

  "저... 잠시 화장실 좀......" 

 희원은 자신의 목에 감겨있는 선우의 팔을 힘주어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선 불이 훤하게 밝혀진 바로 향했다. 왠지 불편한 기분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일어나 총총히 자릴 뜨긴 했지만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커녕 컴컴한 실내 안에서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가 어느 방향이었는지 조차 얼른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텐더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물은 후 그가 친절한 태도로 가르쳐 준 방향을 향해 걸었다.

 붉은 문이 달린 칸막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희원은 변기 뚜껑을 내려 덮은 후 그 위에 주저앉아 우울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두 아저씨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잘들 노시라구 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희원이 짝사랑해 마지않던 선우로 부터 마치 그녀 자신만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만큼 그렇게 오롯이 황홀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하늘을 날 듯 기쁘기는커녕 외려 심난스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멀쩡하고 건강한 그녀를 일시에 심장병 환자처럼 만들어 버리곤 하는 그의 달착지근한 말투며 스킨쉽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선우에겐 모든 것이 장난일 것임이 분명한 행동들 하나 하나에 맨정신으로 가사상태에 빠져 버린 듯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기에서 비롯된 행동들일 뿐인데.... 그 때마다 이렇게 바보처럼 흔들려서 어떻게 살래, 채희원. 응?'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가슴이 아픈 만큼 괜스리 화도 났다.

 자신에게. 그리고 선우에게도.

 덜컥. 또각또각. 또각또각.

 발소리로 들어보아 두 명의 여자가 화장실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각기 희원의 옆 칸과 그 다음 칸에서 볼일을 본 후 세면대 앞에서 만나 손을 씻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평소 남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는 휘원이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목소리는 좁은 화장실 내부의 타일 벽을 왕왕 울리며 희원의 귓전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야, 근데 그 여자 애 말이야. 은선우랑 합석한 걔. 스타일도 그렇고 영 은선우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러니?"

  "누가 아니래니. 난 은선우가 노래하는 동안 내내 그 여자애만 쳐다 보길래 호기심에 유심히 뜯어봤거든. 근데 어째 영......"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닐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냥 귀여워하는 동생쯤이나 뭐 그런 사이일 수도 있고."

  "맞아 맞아. 그런 사이라면 수긍이 좀 갈까. 연인으로 보기엔 영 아니지?"

  "그렇다니까. 혹 또 모르지 순전 바람둥이로 소문난 스캔들 메이커 은선우가 아까 걔 그 독특한 분위기에 잠시 혹 했는지도. 호호홋."

  "독특한 분위기? 촌스런 분위기란 얘기지? 까르르르."

  "야 야, 나 어때 보여? 이 정도면 지금 당장 은선우한테 가서 작업 한 번 걸어봐도 될 만 하지?"

  "넌 텃어. 은선우 눈에 띄고 싶으면 지금 두르고 있는 명품 다 벗어 던지고 촌티 패션으로 갈아입고 와."

  "정말! 아우 낭패다. 우리 집에 촌스러운 옷은 한 장도 없는데."

  "오호호홋"

 두 여자들은 화장실을 나서는 내내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희원은 그녀들이 밖으로 나간 뒤 조금 터울을 두고 칸막이 문 밖으로 나와 세면대 앞에 섰다. 시원스럽게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에 한참동안 손을 문질러 씻은 뒤 정면에 달린 커다란 거울을 무심결에 올려다보았다. 보기에 가련할 지경으로 풀죽어 있는 여자애 얼굴 하나가 화날 만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살면서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초라해 보이기는 처음인 듯 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라도 자신이 초라한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그녀였다. 희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한 번 내쉬곤 거울 앞에서 돌아선 후 맥빠진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런데 그녀가 까페 내부로 연결되는 조그만 통로를 지날 때였다. 바로 옆 남자 화장실 입구에 서있던 왠 남자 하나가 갑자기 휙 앞으로 튀어나오며 희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앗! 왜... 왜 이러세요?"

 샐러리맨처럼 보이는 얌전한 차림의 사내는 그러나 완전히 술에 만취한 듯 초점 없는 눈동자를 게슴츠레하게 뜨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점점 희원에게 다가들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나랑 2차 안 갈래? 응? 가자."

  "비, 비켜 주세요. 전 일행이 있어요."

  "비싸게 굴지 말고... 우리... 2차 가자, 귀여운 아가씨야."

 두려움으로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오들오들 떨며 희원은 어떻게든 상대를 피해 통로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비틀거리고 있는 사내였지만 용케도 희원의 앞을 요리 조리 잘도 막아서며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덮쳐들 수 있을 정도로 다가들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아저씨..."

  "내가 뭘 어쨌다고 귀여운 아가씨이... 응? 자, 이리와. 같이 나가자."

  "끼아악!"

 급기야 사내가 고꾸라지듯 희원에게 달려들면서 그녀를 끌어안으려 할 때였다. 

  뻐억!

 어느 틈엔가 나타난 선우가 눈에 불꽃을 튀기며 사내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 자식이 누구한테 함부로..."

  퍼억!

 갑작스런 펀치에 통로 한 쪽으로 나가 떨어졌던 사내는 그러나 만취한 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얼른 몸을 세우더니 역시나 많이 취해 있던 선우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자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선우가 다시 사내에게 한 방을 날렸고 이 번에 사내는 아예 바닥으로 나동그라져 버리고 말았다.

  "선... 선우오빠. 그만 해요."

  

 너무도 돌발적인 상황이라 경악감에 휩싸여 눈물만 흘리던 희원이 정신을 수습하고 선우의 팔에 매달리며 그를 만류했지만 선우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희원의 손을 뿌리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은 뒤 연거푸 주먹질을 해댔다.

  "니가 죽을려고 눈이 뒤집혔구나. 엉?!"

  "선우오빠, 그만... 이제 그만 해요!"

 술에 취한 탓에 많이 둔해진 손놀림이었지만 선우는 희원의 만류 따윈 아랑곳 않은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뿐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달려온 콧수염 사장 외 까페 종업원들이 몰려들어 완력으로 선우를 떼어낼 때까지 그는 씨근덕거리며 주먹질을 멈추려 들지 않았다.

  "뒷처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희원씨랑 얼른 돌아가. 괜스리 기자들한테 가십거리만 제공하게 될까 걱정이다. 네 차는 내일 내 밑에 애들 시켜서 돌려보낼 테니 차 키는 나한테 주고."

 콧수염 사장이 부랴부랴 대기시킨 택시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미안해, 형." 

  "미안하긴. 그 손님이 먼저 맞을 짓을 한 걸. 아무튼 걱정 말고 얼른 들어가라. 희원씨, 많이 놀라셨죠? 우리 집엔 처음 걸음인데 이거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서 어쩌죠?"

  "아, 아니예요. 어쨋든 저 때문에 생긴 불상사인데 제가 오히려 죄송할 따름이예요."

  "그런 생각 마시고 다음에 꼭 선우랑 또 놀러오세요."

  "예에."

 선우와 함께 택시에 오른 희원은 차가 출발할 때까지 거듭 거듭 콧수염 사장을 향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야."

 택시가 출발한 뒤 한동안 잠자코 있던 선우가 문득 희원을 돌아보며 입을 떼었다.

  "아까 말야. 나 멋지지 않았냐? 뭐랄까... 그... 숙녀를 비호하는 정의의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느냐고."

  "......"

  "어라? 이거 감사 인사는커녕 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냐, 너?"

  "물론 고맙죠. 하지만... 그렇게까지 주먹질을 해댈 필요는 없었잖아요. 만취한 사람한테."

  "그 자식은 맞아도 싼 놈이야. 그래야 정신 차리고 담 번에 또 안 그러지."

  "그래도요... 너무 심했어요."

  "야, 싸고 돌 놈을 싸고 돌아. 나도 그 자식한테 맞았어. 너 여기... 나 맞은 데 안 보이냐? 봐, 봐."

 선우가 희원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시위하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세히 보니 선우의 입가 한 쪽이 살짝 찢어졌는지 마른 핏자욱이 보였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희원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아마도 보통 때 같았으면 희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날 왠지 희원은 선우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희원아. 요기 좀 호오 하고 불어주라."

  "네?" 닭살스런 선우의 태도에 희원이 아연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요기... 니가 호오 하고 불어주면 훨씬 덜 아플 거 같은데."

  

 손가락으로 부은 입매를 가르키며 선우가 다시 희원의 얼굴 가까이로 턱을 들이밀었다. 허나 희원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멀뚱 멀뚱 그런 선우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우가 다시 볼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너 사람 차별하냐? 성진이 형한테는 걸핏하면 잘만 해주더니."

  "징그러워요."

  "뭐?! 으씨. 성진이형은 안 징그럽고 난 징그럽다?"

  "네."

  "야아. 그러지 말고 나도 한 번만 호오 해주라."

  "싫대두요."

 희원은 선우를 외면하고는 차창 너머의 정면을 응시하며 다소 쌀쌀맞은 어투로 짧게 대꾸했다.

  "야."

  "......"

  "야아."

  "......" 

  "순이야." 

 그러나 선우는 희원의 새침스런 태도엔 아랑곳 않고 오히려 더욱 느물거릴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팔로 희원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본격적으로 조르기를 시작했다. 

  "순딩아."

  "희원아."

  "채희원."

 팔로 치는 것도 모자랐는 지 이 번에는 길다란 다리를 건들거리며 희원의 무릎을 툭툭 쳐댔다.

  "아가."

  "애기야."

 희원의 무시에도 불구하도 선우의 끈질긴 조르기가 막무가내로 계속 되자 내내 잠자코 운전만 하던 택시기사가 급기야 한 마디 하기에 이르렀다.

  "아가씨. 거 왠만하면 한 번 불어주시구랴."

  "옛?! 아아... 예에."

  "거 봐라. 큭큭큭."

  

 택시기사의 말에 짐짓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희원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큭큭거리고 있는 선우를 돌아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그녀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뾰로통하게 모으고 있던 입술을 한 쪽으로 씰룩거리곤 선우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완벽한 라인을 자랑하는 그의 턱을 과감하게 확 그러쥐고는 자신의 얼굴 앞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아얏!" 

  "호오 해달라면서요."

  "그래도 너무 터프하잖아."

  "불까요 말까요?"

  "당근 불어줘야지."

 마지못해 해준다는 듯 부러 과감한 척 그의 턱을 그러쥐고 가까이 다가가려던 희원은 순간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 그의 입매 앞에서 고장이라도 난 듯 시시때때로 제 뜻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심장이 또 다시 말썽이었다. 

 고혹스럽게도 붉디 붉은 그의 입술이, 산이 또렷한 윗 입술과 그보다 도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아랫입술이 가까이, 조금씩 가까이 그녀의 입가로 다가들고 있었다.

  '고문... 고문이 따로 없다니까!'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킨 후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호오... 호오......"

  "네 입에서 파인애플 냄새가 나... 흐으... 좋다....."

  "그... 그건 아까 파인애플 주스를 마셔서......"

 스르르륵.

 문득 선우의 고개가 희원의 어깨로 떨어져 내렸다.

  '선우오빠...?!'

  "나... 파인애플 원래 안 좋아하는데... 앞으론 좋아하게 될 것 같다... 흐..... 좋다... 정말... 좋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몇 마디를 더 웅얼거리던 선우는 이내 희원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희원은 심란스럽게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선우의 귓가에까지 울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한동안 숨을 참아야 했다. 숨을 참는 동안 심장이 안 뛰는 것도 아니란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라도 해야했다. 

 희원은 살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아기처럼 잠이 든 선우의 머리칼과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생전 처음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가 규칙적으로 숨을 내쉴 때마다 술냄새도 폴폴 풍겨왔지만 그것마저 달콤하기 짝이 없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마 선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눈쌀을 찌푸렸을 것이었다. 

  '병... 병이다, 희원아. 병이야. 후우......'

 그 때 택시기사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백미러로 흘금거리며 생각했다.

  '택시기사 생활 23년 동안 보다 보다 저런 닭살 커플은 또 처음이군.' 

  집 앞에서 택시를 멈춘 희원은 내내 그녀의 어깨를 베게 삼아 곤하게 자고 있던 선우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흔들어 깨웠다. 차에서 내려 집 안마당에 들어서도록 선우는 여전히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기에 희원은 그 커다란 덩치의 선우를 끙끙거리며 부축해야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소리를 듣고 내려온 준희가 두 사람을 맞았다.

  "어휴. 술냄새. 선우형 술 많이 마셨구나."

  "어어, 준희구나. 그래. 내가 오늘 좀 마셨지?"

  "성진오빠는요?"

  "피부미용 운운하며 벌써 취침에 들어가셨지. 어, 근데 선우형 얼굴... 뭐야? 다쳤어?"

  "어, 별거 아냐. 아... 오늘 기분 좋다. 그럼, 나 먼저 올라간다. 준희야 잘 자라."

  "어어... 그래 형. 형도 잘 자."

  "아차차... 희원이. 우리 희원이."

 준희에게 밤인사를 하고 잠에 취한 걸음으로 느릿느릿 두 계단 정도를 올라섰던 선우가 희원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내려오더니 갑자기 희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희원아. 너두 잘 자. 좋은 꿈꾸고. 알았지?"

 하더니 말을 마침과 동시에 느닷없이 희원의 뺨에 입을 맞추곤 황망해 하는 희원과 준희를 뒤에 남겨두고 다시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사라졌다.

  "선우형...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홍당무보다 더 새빨개진 얼굴로 서있는 희원을 향해 준희가 있는대로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아, 아니요... 아... 일이 있긴 있었죠."

 희원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이 제발, 부디 빨리 가라앉기를 모든 신의 이름으로 간절히 빌면서 최대한 차분한 어투로 자신으로 인해 까페에서 벌어졌던 사고 이야기를 준희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준희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의 표정은 희원으로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준희는 곧 그의 표정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투로 혼자 뇌까렸다.

  "선우형이 결국... 자기 마음을 깨달은 모양이지."

 그는 희원을 건너다 보았다. 기색으로 보아 그녀는 여전히 그녀를 향한 선우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희원씨."

  "네?"  

  "피곤할 텐데 희원씨도 얼른 들어가 자요."

  "예에."

 준희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기로 했다. 선우의 마음이 좀 더 확실해지면 희원이 그 사실을 절로 깨닫게 될 날이 머지 않아 돌아오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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