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 (28/75)

   

 # 27.

  "참, 그나저나 성진오빠랑 준희오빠 저녁은 어떻게 하구요." 

 선우와 영화 시사회에 같이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있던 희원은 이내 집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저녁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하루쯤 알아서 챙겨 먹을 수도 있지.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들은 제가 선우오빠랑 영화 보러가는 거 알고는 있나요?"

  "아니, 아직. 지금 전화나 한 통 해주지 뭐."

 말음 끝냄과 동시에 선우는 곧장 집으로 전화를 연결시켰다. 

  "준희구나. 나 지금 희원이랑 같이 있거든. 우린 들를데가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으니까 너랑 성진이형이랑 오늘 저녁은 알아서 챙겨 먹어라... 응... 아, 내가 모처럼 우리 동생 순이한테 오빠 노릇 좀 할까해서 영화 한 편 보여주려 가는 길이다. 하. 하. 하."

 선우가 별스럽게 오빠노릇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능청맞은 웃음까지 흘리자 희원은 왠지 꺼림칙한 얼굴로 그런 선우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의 아이스맨도 저렇게 느끼하게 웃을 줄 아는구나. 으아아...'

 그 동안 혼자 통화를 끝내버린 선우가 다시 희원을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준희가 자기넨 알아서 챙겨먹을테니 핑계김에 실컷 놀다 들어오라고 하더라."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야 맘이 좀 놓이네요. 그런데 전 영화 시사회 같은 건 첨인데 선우오빤 어때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가능하면 초대된 시사회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이야."

  "그럼, 여지껏은 성진오빠랑 준희오빠랑 같이 다녔겠네요? 오빠들이 서운해 하는 건 아닐까?"

  "......"

 선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시사회때마다 늘 새로 바뀐 여자친구들과 동행해 왔었다는 얘길 차마 희원 앞에서 이실직고 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시사회 같은 덴 연예인들이 많이 초대되어 오기도 한다면서요?"

  "응. 때에 따라 많은 경우도 있고... 별로 많지 않은 경우도 있고 해. 또 어떤 시사회는 아예 일반인이 허용 안되는 경우도 있기도 하고."

  "그렇구나. 그럼 오늘 시사회는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시사회인가요 어떤가요?"

  "아마... 그럭저럭 초대된 연예인들이 꽤 있다고 들은 것 같애."

  

 선우의 얘길 듣고나자 희원은 문득 자신의 차림새에 신경이 돌아갔다. 다른 연예인들도 많이 참석하는 시사회라면 분명 선우와 안면이 있는 사이의 연예인들도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한채린보다 더 예쁜 여자 연예인들이 선우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네올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희원은 불현듯 자신의 옷차림새가 부쩍 신경이 쓰였다.

  '수영선배한테 선물로 받은 멋들어진 원피스라도 입고 왔으면 좋았을텐데..... 이왕이면 오늘 시사회 간다고 미리 언질이라도 좀 줄 일이지. 선우오빤 아무튼 알아줘야 해.'

 희원이 그렇듯 속으로 아쉬움을 삼키는 동안 차는 이윽고 시사회가 예정되어있는 극장 앞에 다다랐다.

 극장 안에 들어서고 보니 대기실 안엔 일반인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이 곳 저 곳에서 생각보다 낯익은 연예인들이 제법 눈에 많이 띄었다. 그 중 일부는 끼리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고 몇몇 일반인들 무리에 둘러싸여 싸인을 해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선우도 극장 안에 모습을 드러낸지 얼마 못되어 중간 중간 그를 알아보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었다. 그러나 상영시간에 거의 맞추어 도착했기 때문에 선우와 희원은 곧 배치받은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영화의 상영시작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선우 오빠. 이런 시사회 같은 데선 팝콘이나 콜라 같은 거... 먹으면 안되는 거죠?"

  "안되긴. 그런게 어딨어. 왜? 너 팝콘 먹고 싶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아니긴. 니 얼굴에 오빠 나 팝콘이랑 콜라가 너무 너무 먹고 싶어요 라고 찐하게 써있는 데."

  "아하하... 그렇게... 티가 났나?"

  "기다려. 이 오빠가 사다주마." 

  

 희원은 커다란 키를 꺼부정하게 접고 객석 사이로 빠져나가는 선우의 뒷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큭큭. 저럴 때 보면 선우오빠도 꽤 자상해 보인다니까. 음... 그러고보니 선우오빠 같은 대스타한테 팝콘 심부름을 시키다니...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게 기분 만점인데. 오호홋!"

 선우는 영화 상영을 위해 비상등을 제외한 실내등이 모두 꺼질 때쯤 커다란 팝콘 상자와 콜라를 끌어안고 간신히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야, 하마터면 엉뚱한 여자 옆에 가서 앉을 뻔했다."

  "큭. 정말요?"

  "그렇다니까. 그런데 어찌나 화장을 독하게 했던지... 영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공포체험을 한 기분이다."

  "후훗, 오빠도 참."

  "자, 실컷 먹어라."

  "고마워요, 선우오빠."

 팝콘 상자를 건네 받으며 희원이 배시시 웃자 선우도 부드럽게 마주 웃어주었다. 그런 선우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희원은 어제의 다짐 따윈 자꾸만 까먹게 되버리고 말았다.

  '바부탱이, 채희원. 어제의 굳은 결심은 어디다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안된다. 안되. 부디 정신을 추스리거라, 채희원아!'

  

 공포영화의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신작이었지만 초반부는 그저 평범한 가족 영화쯤으로 보일만큼 평화로운 분위기가 줄곧 이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열심히 팝콘을 축내고 있었다. 그러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부지런히 팝콘 상자 속을 드나들던 두 사람의 손이 어느 순간 세차게 맞부딪히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놀랄 만큼 강렬한 전류가 두 사람의 손과 팔을 타고 각각의 심장을 강타했다. 희원이 먼저 움찔 놀라며 얼른 손을 빼내려 할 때였다. 문득 선우의 손이 희원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다른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손을 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더니 그 위에 팝콘 한 줌을 가득 얹어주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다소곳이 접어주는 것이었다. 

 그저 별 것 아닌 동작이었을 뿐이라고 여길 수 있었지만 희원은 그 순간이 그처럼 황홀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잠시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던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 선우가 희원쪽으로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귓속말로 나즈막히 속삭였다.

  "희원아. 많이 먹어."

 자기 때문에 당장 숨을 쉬기도 어려운 사람한테 먹긴 뭘 많이 먹으라는 건지. 하지만 선우는 말을 다 끝내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희원의 귓볼 언저리에서 그의 고개를 거두어들일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휴우... 더워. 실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더운거야. 벌써부터 난방을 하는 것도 아닐텐데...'

 얼굴이 아니 온몸이 화끈 달아오른 것도 모자라 희원의 이마며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지경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는 희원에게서 떨어지기는커녕 아예 그녀의 어깨에 팔까지 두르는 것이 아닌가!

  '읔!' 

 그 날 시사회에서 상영한 영화는 결국 콧구멍으로 보았는지 귓구멍으로 보았는지 아무튼 거의 집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희원은 나중에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영화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여간 인파와 더불어 관람실 밖으로 빠져나올 때 선우가 희원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냐?"

  "아, 예... 좋았... 어요."

  "그래? 난 별루였는데."

  "아하하... 뭐 한편으론 그런 것 같기도 하구..." 

  "어, 희원아. 먼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누구한테 잠깐 인사 좀 하고올게. 1분이면 돼. 알았지?"

  "예에..."

 말을 마치자마자 선우는 부랴부랴 어떤 남자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희원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먼저 극장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선우를 기다리며 입구에 서있는 동안 희원의 앞으로 서너명의 유명 탈렌트들이 지나쳐 갔다. 역시나 한결같이 출중한 외모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후훗. 다들... 공작새 깃털처럼 화려하군."

 희원이 그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혼자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그녀의 뒤에서 억센 두 팔이 그녀의 어깨를 와락 감싸 안는 바람에 희원은 꺅하고 외마디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놀라긴."

  "선우오빠?"

 희원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반사적인 동작으로 그의 팔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선우는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꽉 감싸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전혀 그녀를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빠... 놔... 놓으세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겁나냐? 어때서? 남녀사이도 아니고 가족 같은 사이끼리 친근감 좀 표시하는 것 가지고 누가 욕이라도 할까봐 걱정이냐?"

 주위는 아랑곳 않은 채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선우는 희원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래도..." 희원은 내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선우를 떼어내기 위해 급급했지만 선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스캔들이라도 날까봐? 그럼 이렇게 해명해 주면 되지. 아하, 그 아가씨는요 저희 집 안에 새로 들어온 수양 딸이거든요. 그래서 저를 눈꼽만큼도 남자로 생각지 않는 그런 아가씨랍니다... 이렇게. 어때?"

 선우의 그런 너스레에 희원은 그만 그의 팔을 풀기 위해 낑낑거리던 행동을 멈추고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물론 그녀의 속내란 것이 한편으론 그의 팔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의 팔이 계속 풀리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던 것도 사실이었다.

  "참, 아까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니?"

  "아아... 별 건 아니구요. 여기 서있는 동안 유명한 탤런트들 몇 사람이 제 코 앞으로 지나가는 걸 봤거든요. 꼭 공작새 깃털처럼 화려하구나... 라고 중얼거린 것 뿐이예요."

  "왜, 부러워서?"

  "네. 조금은요..."

  "바보."

 문득 선우가 한 쪽 팔을 풀고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감싸쥐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보도록 만든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넌 니 자신이 그 공작새 깃털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

 희원은 선우의 말에 그저 의아한 빛을 가득 담은 눈으로 선우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를 올려다 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때보다 진지하고 신실해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의 본심을 꿰뚫어 보기가 쉽지 않은 그런 눈빛이기도 했다.

  "야, 배고프다. 우리 저녁 먹으러 가야지. 뭘 먹을까?"

 선우가 얼른 저녁 식사로 화제를 돌릴 때였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불청객의 목소리가 오붓했던 두 사람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출현했다.

  "두 사람. 연애해?"

 그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은 희원이 먼저 경악감에 휩싸여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그날 시사회에서 보았던 어느 연예인보다 화려한 치장을 휘감은 미랑이 떡 버티고 서서 아니꼬운 듯한 시선으로 선우와 희원을 흘기고 서있었다.

  "미랑아."

  "누군가 했더니. 또 너냐?" 선우가 대놓고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요. 그 정도로 제가 달갑지 않으신가 보죠, 선우 오빤?"

  "싸이코가 아닌 이상 당연한 반응 아닌가?"

  "햐 참, 기가 막혀. 은선우씨! 내가 댁한테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절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거죠?"

  "그 쪽이 나한테 직접적으로 잘못한 건 없지. 하지만 왜 사람이 살다보면 주는 거 없이 미운 사람이 있는 법이잖아. 내 경우엔 말이야 그 쪽이 나한테 그런 상대거든. 그러니까 왠만하면 어디서 부딪히더라도 아는 척 좀 하지 말아줄래. 부탁한다. 희원아, 식욕 떨어지기 전에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선우는 놀라우리 만치 냉정한 태도를 보이며 서늘한 미소까지 머금은 얼굴로 미랑에게 조곤조곤 대꾸를 해주고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희원의 어깨를 감싸안고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선우와 희원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미랑은 이 번에도 역시 혼자 발만 동동 구르며 분을 토해낼 뿐이었다.

  "야, 이강혁! 너 은선우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던 거 왜 아직까지 종무소식인데?! 나 미쳐서 꼭지 도는 거 보고 싶어! ... 뭐?! 그거 사실이야? 그리고 또... 응... 응... 야, 너 왜 그걸 이제 알려주는 거야! 뭐라구? 연애하느라 바빴다고? 너, 이강혁. 지금 어디야. 너 나 지금 놀려먹는 거 재미있어 죽겠지? 너 기다려. 당장 쳐들어간다. 지금 니 옆에 있는 년. 그 년도 같이 기다려라. 알았어?!"

 미랑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폴더를 내리누르며 소름끼칠 만큼 차디찬 미소를 머금었다.

  '내 예감이 적중했군. 은선우와 나연희가 친자와 생모 사이라 이거지. 스캔들 따윈 콧방귀도 안뀌는 은선우가 나연희와의 관계만큼은 유독 남처럼 유지하고 싶었던 이유라... 제대로 옭아매려면 좀 더 깊이 캐내 볼 필요가 있겠어.'

  "에앵... 이게 뭐야. 근사한 저녁 사준대놓고 겨우 햄버거?"

 희원이 삼단 짜리 햄버거 하나를 버겁게 들고 조수석에 앉아 다소 울상을 지으며 선우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왜. 너 이거 안 먹어봤냐? 이 햄버거 맛 진짜 죽이는데 너 모르는구나."

  "햄버거야 나 혼자서도 사 먹을 수 있지만 어디 내가 선우 오빠한테 저녁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한가 뭐..."

 여전히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뿌루퉁해 있는 희원을 돌아보며 선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대꾸했다.

  "걱정마. 앞으로 그 기회... 종종 있을테니까."

  "네?"

  "그러니까 울상 짓지 말고 얼른 먹으라고."

 희원은 옆자리에 앉은 선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 새 그 커다란 삼단짜리 햄버거를 성큼 성큼 맛있게 베어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희원은 고개를 갸웃한 채 그런 선우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상도 하지. 오늘 선우오빠가 통 이해하기 힘든 소릴 자꾸 하네. 그렇다고 꼬치꼬치 내가 캐묻는 다고 선선히 설명해 줄 성격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생각은 그만하고 배도 고픈데 좋아, 너 삼단! 기다려라. 내가 곧 접수해주마! 얍!'

 그러나 저녁 식사를 차안에 앉아 햄버거로 떼운다고 궁시렁거렸던 희원의 서운함은 섣부른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너나 할 것이 게걸스럽게 햄버거를 먹어치운 뒤 선우가 희원을 아주 분위기 좋은 라이브 까페로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선우가 무명시절부터 오랜 친분을 쌓아온 그런 까페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 곳 주인으로 보이는 콧수염 아저씨와 선우는 만나자마자 다정하게 부둥켜안고 한동안 등을 두드려 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선우 이 자식. 이게 석 달 만이냐, 넉 달 만이냐?" 

  "미안해, 형. 내가 요즘 너무 잘 나가잖아."

  "어쭈. 갈수록 넉살만 늘어 가지곤. 어? 근데 오늘은 왠일로 처자까지 다 동행을 하시고...?"

  "아, 이 쪽은 내가 동생처럼 여기는 친구야. 희원아 인사드려. 여기 사장님이자 내 오랜 지인이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채희원이라고 해요."

  "이런, 어디서 이렇게 예쁜 동생분을... 야, 은선우 솔직히 말해. 동생처럼 여기는 친구라니... 좀 수상쩍다."

  "에이... 왜 이래, 형. 그냥 좀 넘어갑시다."

  "오호... 점점 더 수상해 지는데. 희원씨라고 했죠? 선우가 우리 까페에 여자분 데리고 온 거 정말 처음이거든요."

 왠지 의아스러운 기분으로 선우를 돌아보니 왠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계면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고 있는 모습이 희원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사춘기 소년 같은 수줍은 인상을 강하게 풍겨왔기 때문에 희원은 또 다른 느낌의 설레임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왔으니 한 곡 땡기고 갈거지?"

  "물론."

  "손님들이 좋아서들 난리일거다. 아참, 여자친구분도 동행이신데 어때? 이왕이면 핑계김에 귀한 네 보컬 솜씨도 오랜만에 선사해주고 가는 게."

  "보컬...?"

  "그래. 희원씨, 선우 노래하는 거 들어본 적 있어요?"

  "오빠가 노랠...요?"

  "없구나. 그럼 이참에 선우 한 번 졸라봐요. 노래 한 번 불러주는 거 무지 비싸구는데 어쨌거나 녀석 노래 실력... 처음 들어본 사람들한텐 상상을 초월할 정도거든요."

  "그 정도...예요?" 

 희원은 그저 선우가 출중한 베이스기타 솜씨 하나로 라커가 되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뿐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베이시스트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기타를 치면서 노랠 부르는 모습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은선우. 부를 거지?"

 까페 사장이 포기하지 않고 채근하자 다소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선우가 문득 희원을 한 번 돌아보더니 결국 흔쾌히 사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케이! 그럼 먼저 목들 좀 축이시고 잠시 후에 내가 스테이지로 가서 소개하면 냉큼 나오기다."

  "알았어, 형. 대신에 우리 꼬마 아가씨한텐 근사한 안주 접시 하나 꼭 안겨줘야 해. 술에 알러지가 있어서 한 방울도 못 마시거든."

  "그으래? 안됐군. 내 간만에 직접 솜씨 한 번 발휘해서 입에 짝짝붙는 칵테일 한 잔 대접해 줄랬더니. 좋아, 대신에 숙녀분께는 주방장한테 최고로 근사한 안주 한 접시 준비하라고 할게."

 콧수염 사장은 말을 마치고 난 뒤 두 사람을 향해 눈 한쪽을 찡긋해 보이곤 바 안으로 향하는 간이문을 열고 들어가 칵테일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콧수염 사장이 화려한 동작으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하자 까페 안에 앉아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희원 역시 테크노 음악에 맞추어 현란한 기교를 구사하며 칵테일을 만드는 사장의 솜씨에 온통을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 저기서 그의 동작 하나 하나가 이어질 때마다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선우와 희원 역시 그 열기에 동참했다. 그야말로 유능한 칵테일 플레이어의 솜씨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멋진 쇼를 완성한다 것을 희원은 그곳에서 처음 실감했다.

 하지만 희원이 진짜 기다리고 있는 쇼는 따로 있었다. 

 콧수염 사장의 배려로 테이블 다리가 휘어질 만큼 풍성하게 장식된 커다란 안주 접시를 받은 후 선우는 특제 칵테일로 잠시 목을 축이고 나서 사장의 부름에 따라 스테이지 위로 올라갔다. 

 이미 사장의 소개로 까페 안의 손님들은 선우에게 실내가 떠내려갈 듯한 박수갈채로 열렬한 환영의 표시를 했다. 선우는 사장에게 건네받은-아마도 그 까페에서 연주할 땐 늘상 이용하는 것처럼 익숙해 보이는 어쿼스틱기타 하나를 끼고 의자에 자릴 잡고 앉은 후 박수갈채를 보내준 손님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곧장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Saying I love you is not the words I want to hear from you 

("사랑해" 라는 말은 내가 네게서 듣고 싶은 말이 아니야) 

It's not that I want you not to say, 

(니가 그 말 하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but if you only knew how easy it would be to show me how you feel 

(단지 니가 니 느낌을 보여주는 게 얼마나 쉬운지를 안다면..) 

More than words is all you have to do to make it real 

(말 뿐만이 아니라는 게 진실을 위해 니가 해야할 모든것이야) 

Then you wouldn't have to say that you love me 

(그렇다면 넌 사랑한다는 말 할 필요 없을 거야) 

Cos I'd already know 

(난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What would you do if my heart was torn in two 

(내가 만약 내 사랑이 두동강 나 버렸다면 뭘 할건데?) 

More than words to show you feel that your love for me is real 

(말 뿐이 아닌, 날 위한 니 사랑이 진실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What would you say if I took those words away 

(만약 내가 모든말을 그대로 덮어 버린다면 뭐라고 할건데?) 

Then you couldn't make things new just by saying I love you 

(그렇다면 넌 사랑한다는 말만 가지고는 어떤 것도 못할걸) 

More than words 

(말 그 이상으로..) 

More than words 

(말 그 이상으로...) 

 막간에 촉촉히 젖은 듯한 선우의 눈빛이 더욱 짙어지면서 희원을 향해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허스키와 미성을 섞어놓은 듯한 묘한 보컬로 다시 노랠 부르기 시작했다.

Now I've tried to talk to you and make you understand 

(난 네게 말하고, 또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어) 

All you have to do is close your eyes 

(넌 그저 눈을 감으면 돼) 

And just reach out your hands and touch me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날 잡아) 

Hold me close don't ever let me go 

(날 꼭 잡아주고 떠나보내지 마) 

More than words is all I ever needed you to show 

(말 뿐이 아닌 것, 니가 내게 보여줬으면 했던 전부야) 

Then you wouldn't have to say that you love me 

(그러면 넌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할 필요 없어) 

Cos I'd already know 

(난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선우의 노래가 모두 끝날 즈음 희원의 심장은 통제력을 잃고 미친 듯이 펄떡 거리고 있었다. 

 스포트 라이트 아래서 검푸른 머리를 늘어뜨리고 묘한 미소를 띤 채 노래를 시작한 이후로 선우는 단 한 순간도 희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그가 부르고 있는 노랫말을 통해 그녀에게 어떤 애틋한 메시지라도 전달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까페 안을 채우고 있던 다른 손님들도 그녀를 향한 선우의 시선을 의식했던 모양인지 언제인가부터 그들은 희원쪽을 흘금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심장 박동수를 유지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칵테일 한 방울도 그녀의 입술에 닿지 않았건만 희원의 정신은 자꾸만 까무룩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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