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그 날... 잘 들어갔니?" 수영이 물었다.
"예에."
수영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꾸를 한 뒤 희원은 왠지 그늘져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수영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젠... 왜 안나왔어요? 어디 아팠어요? 좀 수척해 보여요."
"그래?"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 마주 앉은 이 후 내내 수영은 다소 침울한 얼굴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의식적으로 희원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 생일날... 많이 걱정하셨죠? 그 날 저도 왜 제가 갑자기 그렇게 의식을 잃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걱정할까봐 어제 계속 선배 핸드폰으로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되더라구요."
"......"
수영은 말없이 희원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 보아하니 선우가 그녀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수영은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흥. 고상한 척은.'
그 날의 상황을 이용해 선우는 얼마든지 희원에게 김수영이란 인간이 비열하고 저급하다는 인식을 새겨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로 인해 수영은 오히려 오장육보가 다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날 밤 자신의 존재따윈 완전 개무시 한 채 희원을 업고 나가던 선우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미안하다. 실은 그 날 니가 마신 그 과일주스... 내가 거기에 샴페인을 좀 섞었거든." 수영이 자조적인 미소를 띤 채 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희원이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수영을 건너다 보았다.
"그냥... 심각하게 생각 안 했거든. 솔직히 말해 설마 했었어. 네 반응이 정말... 그 정도일 거라고는 말이야."
"......"
수영이 자신의 음료에 그런 장난(?)을 쳤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희원은 순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수영이 그런 장난을 했을 리 만무하다고 여긴 희원은 오히려 그 날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수영이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푸훗!"
"...?"
희원으로부터 원망 섞인 질타를 예상했던 수영은 급작스레 웃음을 터뜨린 희원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설마 그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모르고 장난 한 번 쳐볼랬다가 되게 놀랐겠다, 선배. 큭. 쿡쿡쿡."
"넌..."
수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한동안 킥킥거리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채희원. 너란 애는 정말 누굴 나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니? 의심할 줄도 몰라?! 아니면 내가 네 선배니까...그저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날 그렇게 무조건 믿는 거야?'
또 한 번 수영의 마음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웃지마. 바보 같아 보인다."
볼멘 소리를 해야할 당사자는 오히려 희원일텐데 스스로도 적반하장격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며 수영이 되려 희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선배. 설마 내 걱정하느라고 수척해 진 건... 아니죠?"
"그랬으면 어쩔 건데."
"에이 설마. 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너무 많이 미안하죠. 난 그 날 선배한테 과분하리 만치 선물도 많이 받고 멋진 생일 상도 받고 했는데..."
"아. 참... 안 그래도 여기 이거 받아라. 네 가방이야. 네 핸드폰도 가방 안에 들었어."
"고마와요, 선배."
수영은 배시시 웃으며 자신에게 가방을 건네 받는 희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선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안하다, 은선우. 나... 바보 멍텅구리같은 저 녀석 정말 탐나거든. 그래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을 생각이야. 아무래도 고상하신 은선우씨께서 점잖게 포기하는 쪽이 더 빠를 것 같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준희 오빤요?"
평소와 달리 준희 대신 성진이 현관문을 열어주자 희원이 물었다.
"그 녀석 아까 전에 지 애인 전화 받고 바람처럼 나갔다."
"애인요?"
"있잖아. 그 아줌마."
"어, 그 분 서울에 올라오셨대요?"
"뭐 아예 서울로 발령 났다나봐."
"어머 잘 됐네요. 그 분 지방에 계시는 바람에 준희 오빠가 서울이랑 오르 내리느라 고생스러웠을 텐데."
"글세. 잘 됐다고 해야 하나." 반색하는 희원과 달리 성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혀를 끌끌찼다.
"준희네 집에서 알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텐데."
우려 짙은 성진의 태도에 희원도 더 이상 반색만 하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준희가 몇 년 째 일편단심하고 있는 상대는 준희보다 네 살 연상의, 애까지 하나 딸린 이혼녀였기 때문이었다.
"그 아줌마가 무슨 죄냐. 사실 따지고보면 준희 혼자 좋아서 설치는 건데." 성진이 소파에 풀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럼... 정말 그 분은 준희 오빠한테 전혀 마음이 없단 얘긴가요?"
"글세. 그거야 남녀 관계의 문제고 또 두 사람의 문제이니까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그 아줌마가 준희를 피하는 건 사실이야. 그 여자가 지방 연구소로 발령 나서 가게 된 것도 준희네 집에서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고. 아휴, 아무튼 골치 아픈 관계라니까. 준희 녀석은 하필..... 하여간 그 녀석 고집은 아무도 못 말려. 보기엔 순둥이 같기만 해도 말이야. "
그 여자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늘 안타까운 듯이 혀를 차는 성진이었지만 희원은 그렇게 어려운 사랑을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준희가 새삼 더 멋져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준희오빠 다워. 아무튼 무조건 난 준희오빠 편이야.'
"야, 하여간 너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왜 안 오나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준희 얘기하다 깜빡 잊어버렸네."
문득 성진이 어두웠던 표정을 바꾸며 희원을 향해 말했다.
"예?"
"순이야, 여기... 여기 등 좀 박박 긁어봐라."
성진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러덩 뒤집은 후 희원을 향해 등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아휴, 난 또 뭐라고... 어디요? 요기요?" 희원은 피식 웃음 짓고는 성진의 등에 손을 얹고 물었다.
"아아니... 거기서 왼 쪽."
"여기요?"
"다시 오른 쪽... 응, 그래 거기쯤인 거 같애... 응...."
바로 그 때 두런두런 하는 얘기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선우가 그 광경을 보곤 눈쌀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희원과 성진이 친오누이 사이처럼 아니 어떨 때보면 마치 애인사이라도 되는 양 사이좋게 붙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하루 이틀도 일도 아니었건만 허옇게 드러내놓은 성진의 맨 등에 바싹 붙어 앉아서 허물없이 그의 등을 긁어주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선우의 눈엔 새삼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벅벅 좀 긁어봐라. 옳지... 그래."
발소리를 죽이고 희원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선 선우는 그녀가 놀라지 않을 만큼 어깨를 살며시 잡아끌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와 함께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뭐하냐. 아예 전체적으로 한 번 시원하게 긁어봐라."
성진이 채근하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선우가 성진의 등짝에 열 손가락을 올리더니 미친 듯이 긁어대기 시작하자 급기야 성진이 비명을 올렸다.
"아아악!"
"으하핫! 왜? 시원하게 긁어보래매."
"으씨, 너 뭐야. 순이보고 긁으랬지 누가 너더러 긁으랬어! 아호, 아파랏!"
성진이 난데없이 출현한 선우를 돌아보며 울그락 붉그락 해진 얼굴로 따지듯 말했다.
"순이가 긁는 것 보다 아무래도 기운 좋은 내가 긁는 게 더 시원하지 않겠수?"
"씨잉... 시원하긴 뭐가 시원해. 등을 기운으로 긁냐. 나긋나긋 손으로 요령있게 긁어야 시원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순이도 어엿한 처잔데 외간남자 등짝이나 긁어주고 하는 거 좀 그렇잖아."
선우가 소파 앞 탁자위에 놓여있던 석간신문을 펼쳐들면서 웃음기 없는 말했다.
"뭐, 외간남자? 내가 순이한테 왜 외간남자냐?"
성진이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상하게 군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소 샐쭉해져서는 석간을 뒤적거리고 있는 선우를 흘기며 말했다.
"그럼, 형이 뭐 순이 오빠나 애인이라도 되?" 여전히 신문에다 시선을 고정한 채 선우가 대꾸했다.
희원은 그 때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생각했다.
'엥? 난 괜찮은데 선우오빠가 왜 그러지? 성진이 오빠가 외간남자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음... 그냥 덩치만 큰 남동생정도라면 모를까...큭큭.'
"암튼 저 자식은 가끔씩 말도 안돼는 트집 잡는 게 취미라니까. 야, 그리고 순이가 어떻게 우리한테 여자냐구 했던 사람은 너 아니었냐. 그런데 오늘은 난데없이 순이도 어엿한 처자네 뭐네 하면서 내외라도 하라는 식이니 니 말 도통 앞뒤가 안 맞잖아. 안 그래?"
성진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희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른 선우에게 시선을 던지며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뭐? 선우오빠가 나에 대해 그런 소릴 했었다고? 난 여자로 여기지도 않는다? 흥, 아무리 선우오빠 주변에 차고 넘치는 여자들처럼 쭉쭉빵빵한 미인은 못된다고 해도 나도 엄연한 숙녀라고욧! 쳇, 너무해. 그러니까 어제도 결국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서 아기나 하나 만들자는 둥하는 겸연쩍은 소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더 거로군. 좋아! 나도 이제 날 여자로도 여기지 않는 선우오빠한테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거야. 나도 앞으론 절대루 선우오빠 남자로 안 여길거야. 두고 봐. 정말 그럴거라구!'
"뭐, 뭐냐. 너 그 눈빛은?"
순간 희원의 따까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선우가 신문을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기며 다소 찔끔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녜요. 아무것두." 하지만 말과 달리 희원은 팽 토라진 얼굴로 선우를 외면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뭐... 불만 있음 솔직히 말해라." 신문 위로 두 눈동자만 빠꼼히 내놓고 선우가 은근히 희원의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제가 여기서 머무는 동안요... 성진오빠든 준희오빠든 그리고 선우오빠든 저도 남자로 생각지 않을 거 거든요. 그래야 서로 편하죠. 안 그래요? 그러니까 선우오빠도 오늘처럼 그렇게 괜한 배려 새삼스럽게 안해주셔도 되요. 그냥 여지껏 그래 오셨던 것처럼 부담 없이 막 대해 주세요."
"뭐? 막? 내가 언제 널 막 대했냐?" 선우가 갑자가 신문을 촤악 소리나게 접어 한 쪽으로 치우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희원에게 되물었다.
"음... 내 표현이 기분 나쁘셨구나. 내 말 뜻은 그러니까 서로 가족이나 동성처럼 여기고 편하게 지내면 좋겠다... 뭐 그런 뜻이었는데. 왜요? 선우오빤 싫으세요?"
희원이 내내 샐쭉했던 표정을 바꾸어 마치 선우를 놀리기라도 하는 양 반달눈을 하고 웃으며 말했다.
'웃...뭐지? 내가 뭔가 소리 없이 뒤통수를 맞고 있는 듯한 이 기분은...'
"싫긴... 나도 좋지... 편하고..." 사실 통 맘에 없는 소릴 하느라 다소 머뭇대며 선우가 대꾸했다.
그리고 그 때 까지 두 사람의 묘한 실랑이를 지켜만 보고 있던 성진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큭큭큭. 지금 보니까 천하의 은선우도 순이한테 꼼짝 못하는 구석이 있었구먼. 야, 이거 신선한 발견인데. 잼있어. 아아주 잼있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연습실로 올라온 선우는 먼저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인 후 어느 새 희원이 단정하게 정리해 둔 악보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악보 몇 장을 대강 넘겨보던 그는 손놀림을 멈추고 어느 덧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훗. 순딩이 인줄로만 알았더니 그렇게 토라질 줄도 아네.'
그는 저녁 식사 전 거실에서 희원이 팽하고 토라진 얼굴로 선우에게 톡 쏘아붙이듯 얘기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한동안 선우를 어려워만 하던 그녀가 어느 새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구김살 없이 웃을 줄도 알고 그에게 제법 농담도 건넬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선우는 그녀의 그런 변화가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기회만 된다면 와락 달려들어 으스러지게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부지불식간에 그에게 성큼 여자로 다가선 희원의 존재가 이젠 날이 갈수록 그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선우는 뾰루퉁한 얼굴로 제법 삐진 내색을 감추지 않던 희원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슬며시 혼자 미소를 지었다.
"짜식....."
그 시간 희원은 아래층에서 열심히 다림질을 하던 중이었다. 부지런한 손놀림에 따라 옷가지들은 하나 둘씩 반반하게 주름이 펴지고 있었건만 그녀의 얼굴엔 그러나 내내 구겨진 표정이 펴질 줄 몰랐다.
"쳇. 나도 그 정도쯤의 자존심은 있는 사람이네요. 날 여자로도 생각지 않는 남자한테 누가 계속 목매고 있을까봐, 헹! 나도 차려입고 나가면 여자로서 그렇게 빠지는 인물은 아니구만. 좋아. 은선우. 아이스맨! 나도 당신 이제 남자로 취급 안 해. 두고 봐. 쳇, 쳇. 쳇!"
그러나 비맞은 중처럼 혼자 궁시렁 거리며 마치 선우 대신 그의 옷가지에 분풀이라도 하듯 다리미로 벅벅 문질러 대던 희원이 문득 고개를 갸웃하더니 걷어온 마른빨래들을 뒤척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네. 그러고보니 선우오빠 티셔츠 한 장이 안 보이잖아?'
희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레시를 켜들고 컴컴한 안마당으로 나가 마당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바람 때문에 빨래줄에서 혹 티셔츠 한 장이 마당 어딘가로 날아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도 선우의 티셔츠 한 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꼭 누가 집어간 것처럼 선우 오빠 티셔츠 한 장만 달랑 없어지다니.'
얼마전 쯤에도 하필 선우가 아끼던 모자 하나가 빨래줄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었던 일이 있었다. 희원은 그 때의 일을 함께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근방에 좀도둑이라도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앞으론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겠다.'
어두컴컴한 안마당에 혼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희원은 문득 한기를 느끼곤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냉큼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음 날 희원은 드로잉 수업 중에 강사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은 일로 잔뜩 고무되어 친구 영서와 잠시동안 기분 좋은 담소를 나눈 뒤 다소 상기된 얼굴로 학원을 나섰다. 그런데 뜻 밖에도 학원 바로 앞에 선우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모습에 희원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 지고 말았다.
'엇! 분명 선우 오빠 차가 맞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수석 유리창이 내려가면서 운전석에 앉아있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열린 조수석 창 쪽으로 몸을 숙이며 큰 소리로 희원의 이름을 불렀다.
"채희원 학생! 이제 수업 끝났냐?"
"선우오빠가 여긴 웬일이예요?"
"우선 얼른 타라. 여긴 주차 구역이 아니라 더 머뭇거리다간 딱지 떼일지도 모르니."
"아..."
무슨 영문인지는 아직 몰랐지만 어찌됬거나 선우가 학원으로 희원을 찾아 왔다는 사실에 그녀는 순간 어제의 결심 같은 것은 물거품처럼 잊어버린 채 마냥 들뜬 마음으로 선우의 차에 올랐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예요?" 희원이 안전벨트를 끌어매며 다시 선우에게 되물었다.
"오빠가 우리 동생 순이한테 영화 한 편 보여주려구 이렇게 데리러 왔지."
"예에? 영화...요?" 놀라움과 기대감으로 순간 희원의 눈은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사실 전에 받아둔 시사회 초대권이 있어서. 너 공포영화 좋아한다고 그랬었지?"
"그런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지나는 소리로 한 번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누굴 부담 없이 막 대한다는 소릴 듣고 이제라도 좀 만회해볼까 해서 그런가보지."
선우의 말에 희원은 다소 미안한 생각도 들고 또 감격스럽기도 한 마음에 슬쩍 얼굴을 붉히며 선우를 돌아보았다.
"자, 출발한다." 선우가 싱긋 웃음을 날리더니 곧 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았다.
수영의 람보르기니 만큼은 아니었지만 미끈하게 잘 빠진 선우의 은색 스포츠카가 이내 학원 앞을 스무스하게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때 차 안에 있던 선우와 희원 두 사람은 학원 건물 옆으로 난 조그만 골목길 안쪽에 몸을 숨기고 서서 너무도 주먹을 세게 쥐고 있던 나머지 하얀 손등위로 파란 핏줄이 섬찟하도록 불거져 나온 손을 부르르 떨며 줄곧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존재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