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 (26/75)

   

# 25.

 영서의 말에 따르면 그 날 수영은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그녀도 모른다면서. 희원은 영서와 나란히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십 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영서는 희원이 메고 있던, 준희에게 선물 받은 크로스 백을 보고 감탄하면서 매우 부러워했다. 하지만 희원은 어제가 그녀의 생일이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세 멤버들로부터 받은 선물 이야기며 또... 수영과 있었던 이야기도.

 영서와 헤어져 귀가하는 길에 희원은 집 근처 대형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거의 바닥난 청소용 세제와 부식거리를 사기 위해서 였다. 대형 마트 안은 저녁 시간대가 가까워 오는 때라 근처에서 장을 보러 나온 주부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희원이 커다란 카터 하나를 끌고 능숙한 운전 솜씨로 진열대 사이를 사이를 누비며 청소용 세제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돌아보면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희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카터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때 희원은 진열대 반대편 끄트머리에서 그녀와 나란히 카터를 끌고 걸어가는 사람을 얼핏 보았다.

  '응?! 설마.....'

 카터를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희원이 다시 카터를 끌고 앞으로 나아갈 때 또 다시 진열대 건너편을 휙 지나가는 그 사람의 옆 모습을 얼핏 보였다. 검은 바지에 하얀 티. 그리고 검은 모자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장신의 남자를. 

  '내가 잘못 본 거 겠지.'

 하지만 희원은 카터를 좀 더 빠르게 몰아 진열대 다음 칸으로 향했다.

 휙.

 그가 슬쩍 다음 칸 진열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희원은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카터를 밀었다.

 휙.

 또 놓쳤다.

 희원은 그를 따라 잡기 위해 이번엔 진열대 반대편으로 카터를 몰았다.

 드르르륵.

 진열대 끄트머리까지 왔을 때 그러나 기대했던 그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드르륵.

 대신 이 번엔 그가 희원이 방금 출발했던 방향에서 카터를 몰고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그녀를 놀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원은 부랴부랴 카터의 방향을 꺾어 그 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이 번에도 역시나 그는 그 곳에 없었다.

 드르르륵. 

 이 번엔 진열대 너머에서 바쁘게 굴러가는 카터의 바퀴 소리가 들렸다.

 희원은 재빨리 다음 칸 진열대로 향했다. 그렇게 희원은 뜻하지도 않은 술래잡기를 시작한 것이다. 부산스럽게 울리는 바퀴소리와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가는 그 남자의 그림자를 쫓아.

 하지만 한참동안 수 십 칸은 되는 진열대를 종횡무진 정신없이 누비던 희원은 어느 순간 문득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다는 자각을 하곤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 바보처럼......'

 희원은 걸음을 돌려 다시 청소용 세제가 빼곡이 늘어서 있는 진열대를 향해 나아갔다. 진열대 앞에 다다랐을 때 희원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메모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날 잊지 말고 구입해야할 품목들을 꼼꼼히 기입해 놓은 메모지였다.

  '유리창 닦는 세제...'

 희원이 유리창 청소용 세제들이 진열된 앞에 바짝 붙어 서서 두 가지 상품을 놓고 어느 것을 살까 비교 중 일 때였다. 누군가 희원의 등뒤로 슬그머니 다가서더니 진열대에서 세제 하나를 집어드는 척 하며 그녀에게 바싹 몸을 밀착시키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란 희원이 꼼짝할 생각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는데 그녀의 뒤에 서있던 보이지 않는 상대가 이 번엔 그녀의 귓볼에 입술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대고 따뜻한 입김을 내뿜으며 나즈막히 속삭였다.

  "요즘엔 국산도 좋아."

 너무도 낯익은 음성에 되려 더욱 놀란 희원이 고개를 홱 돌린 순간 자칫했다간 입술이 부딪혔을지도 모를 만큼 가까운 거리에 검은 색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친 선우의 얼굴이 있었다. 

  '선우오빠!'

 하지만 희원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선우의 수려한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은 그렇게 마주 얽혀있었다. 

 우연이었을까? 문득 선우의 시선이 희원의 얼굴을 훑어 내리다 그녀의 입술에 고정된 것은. 그 때 희원은 그녀의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전류가 자신의 두 눈동자를 통해 고스란히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하고 조바심을 쳤다.

  "어디 보자... 유리창 닦는 세제, 고무장갑, 수세미, 표백제......"

 여전히 희원의 등뒤에 바싹 붙어 선 채 선우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그녀가 들고 있던 메모지를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 하나를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희원의 귓가에서, 뺨에서, 목덜미에서 선우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오자 그녀의 모든 감각세포들이 작은 날벌레로 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부산스럽게 파드득거리며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럼, 아까..." 간신히 입을 뗀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의식한 희원이 얼른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선우오빠 맞죠?"

  "누구?" 

 선우가 짐짓 시치미를 떼고 되묻자 희원이 한 걸음 물러서며 그의 차림새를 살핀다. 길고 늘씬한 다리에 타이트하게 꼭 맞는 블랙진과 하얀 니트티셔츠. 그리고 말총머리를 감추고도 남을 만큼 깊게 뒤집어 쓴 벙거지형의 검은 모자. 검은 선글라스.

  "치... 맞잖아요."

 희원이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선우는 대답 대신 양 쪽 입끝을 매력적으로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선우오빠가 여긴 웬일이예요?"

 말 그대로 그 시간 그 장소에 나타난 선우의 출현은 참으로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바람 쐬러 나왔지." 괜스리 이 물건 저 물건을 집었다 놨다하며 선우가 대꾸했다.

  "바람...요? 바람은 밖에서 쐬는 거 아닌가?" 

  "야, 너 장 안 봐? 여기만 계속 있을거야?" 

  "아참, 그렇지. 오늘은 살 물건도 많은데 내 정신 좀 봐."

  "자, 여기."

 희원이 퍼뜩 정신이 난 듯 다시 유리용 세제를 향해 돌아서려고 하자 선우가 국산 메이커 세제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요즘엔 국산도 좋아."

 선우가 건네준 세제를 받아 카터에 내려놓으며 희원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음엔 또 뭐랬지? 수세미? 고무장갑? 아, 또... 그건 어디에 있나?"

  "그건 저 쪽에..."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근처를 기웃대는 선우에게 희원은 손가락으로 다른 블록을 가르켜 보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선우의 출현이 의아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얼른 그 쪽으로 가자."

 빠르게 말을 마친 선우는 코끝에 걸쳐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모자 밖에다 끼고는 희원이 끌고 다니던 카터를 냉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밀고 가기 시작했다.

  "뭐해? 안 따라오구."

  "예? 아, 예."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라도 된 것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장을 보게 되었다. 

 "시금치, 콩나물... 두부하고 또..."

 세제류와 청소용품칸에서 식품부쪽으로 걸어가며 희원이 메모지를 읽는 모습을 넌즈시 돌아보는 선우의 입가엔 왠지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다. 문득 선우의 시선을 의식한 희원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돌려 흘깃 그를 바라보는 모습에 선우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제 뺨에 혹 뭐가 묻었나요?" 저으기 당황스런 얼굴로 희원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그럼... 왜..."

  "지금 자세히 보니까 니 옆모습 되게 웃기게 생겼다."

 다음 순간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대빨 내밀며 생각했다.

  '핏, 그럼 그렇지. 설마 선우오빠가 다른 생각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겠어. 암튼 채희원. 형광등, 사오정으로도 부족해 오바의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고 싶냐. 냉수 먹고 속차려라. 아참, 당장은 냉수가 없군. 뭐.. 그럼 속부터 차리고 냉수는 집에 가서 나중에 마시지.'

 소리 없이 혼자 궁시렁 거리는 동안 야채들이 즐비한 냉장칸에 다다랐다. 희원에겐 익숙한 필드(?)인지라 그녀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 걸음을 멈춘 뒤 비닐 포장이 씌워진 푸른 채소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근처에서 어정거리던 선우도 채소 한 단을 집어들고는 희원에게 다가와 말했다.

  "야, 이게 훨씬 싱싱해 보이고 좋잖아."

  "아니예요. 겉모양은 이래 뵈도 이게 훨씬 좋은 거예요." 희원이 자신이 고른 시금치를 카터에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그건 여기저기 구멍도 많고 이파리가 너덜너덜 하잖아."

  "유기농이라서 그런 거예요."

  "유기농?"

  "선우오빠 손에 들린 건 벌레 먹은 데도 없구 줄기도 훨씬 실해 보이는 게 좋아 보이지만 그건 다 농약을 뿌려 키운 거라 그런 거예요."

  "그, 그래?"

 희원이 설명이 끝나자 선우는 들고 있던 시금치 다발을 아무 데나 휙 던져버린다.

  "안돼요, 그럼."

  "뭐가, 또?"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놔야죠."

  "쳇. 여기나 거기나."

 희원은 비맞은 중처럼 궁시렁거리며 자신이 던지듯 내려놓은 시금치 다발을 꾸부정한 자세로 마지못해 집어다 제 자리에 갖다 놓고 있는 선우의 모습을 쳐다보며 그에게도 저렇게 귀여운 면이 있었나하고 생각했다. 희원에게 선우는 늘 맞추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하필 맞추기 피곤한 타입의 선우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도 참 특이한 취향이지 싶기도 했다. 

  "아유, 까닥하다간 못 살 뻔했네."

 달랑 한 모가 남아있는 두부를 냉큼 들어다 비닐봉지에 넣으며 희원이 말했다.

  "이게 유기농 콩으로 만든 두부라 아주 인기가 좋거든요."

  "또 유기농?"

 희원은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선우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때 였다. 희원의 뒤에서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한 발 늦었구먼. 이 새댁이 들고 있는 것이 마지막 한 덩인가보네. 아, 그러게 이 영감탱구야, 쪼매 빨리 걷자는데 무슨 양반 타령은 제길..."

 희원이 돌아보니 팔순이 다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옆에 서있는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주며 빈 두부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망구야. 그 두부엔 뭐 금가루라도 들었다든?"

  "모르면 잠자코나 계슈. 이건 보통 콩으로 만든 두부가 아니라니께. 맛있다고 잘 자실 때는 언제구."

 얼떨결에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두 노인들의 입싸움을 지켜보고 서있던 희원이 들고 있던 비닐 봉투를 할머니에게 내밀며 말했다.

  "저... 저는 내일 다시 와서 사면되거든요. 이거... 할머니께서 가져가세요."

  "으응? 아니 새댁 그래도 되겠수?"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희원이 내민 두부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럼요. 괜찮아요."

  "아유, 고마워서 어쩌까나. 어린 새댁이 마음 씀씀이가 곱기도 하구먼" 

  "과찬이세요, 할머님."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로 희원을 쳐다보던 할머니의 시선이 문득 그녀 옆에 서있던 선우에게로 향했다.

  "신혼부부가 함께 장 보러 나온 모양이구랴. 차암 보기 좋구먼."

  "예에? 아하하... 그게 아니구요 저흰......" 

  "아니. 그런데 신랑은 무신 남정네가 낯짝이 요리도 곱게 생겼는가?" 할머니가 선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남정네 낯짝이 요따구로 생기면 본디 꼴값을 하는 것인디. 쯔쯔. 거그다 허우대도 훌쩍 크고. 하기사 여그 난쟁이 똥자루 만한 우리 영감탱구도 낯짝 하나 반반한 거 개지고 소시적에 기집들 꽤나 울리고 댕겼으니께."

  "쿨럭." 선우가 마른 기침을 했다.

  "에헤엠."

 그리고 그 때까지 할머니 뒤편에서 잠자코 서있던 할아버지가 마침내 불편을 기색을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물론 그 와중에 선우의 표정 또한 볼 만했다. 그 광경을 보며 희원은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보게나. 여그 새댁같이 이뿌고 참한 색시 두고 딴 맘 품으면 못 쓰는 거 알재? 조강지처 버리고 잘 되는 놈 못 봤다니께. 그러니 거시기 단속 잘 하시게."

  "쿨럭." 이 번엔 희원이 얼굴을 붉히며 마른 기침을 했다.

  "이 할망구가 노망이 났나. 아, 젊은 사람들 앞에서 망령 그만 부리고 어여  가세."

  "알았수. 아무튼 새댁 고맙네그랴. 둘이 천상배필로 보이는구먼 아들 딸 낳고 사이좋게 오래 오래 잘들 사시게. 그럼, 우리 먼저 가보겠수."

  "아, 예. 살펴들어 가세요."

 희원과 선우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멀어져가는 두 노인들의 뒷 모습을 쳐다보았다. 노인들이 마침내 잡화류 매장쪽으로 향하는 코너를 돌아가자 그 때까지 잠자코 서있던 선우가 큭큭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 할머니도 참... 아깐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네."

  "후훗. 그러게 말예요."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바람 꽤나 피우셨던 모양이네. 지금 봐선 전혀 그렇게 뵈지 않던데."

  "그러게요.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 가네요."

  "야, 그나저나 너랑 나랑 부부로 오해받는 게 이 번이 벌써 두 번째다."

  "정말... 그러네요."

 다시 선우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기 시작한 희원의 뺨이 복숭아빛으로 살포시 물들었다. 그녀는 슬쩍 선우의 옆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는 희원과 부부로 오해받았다는 사실을 그닥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쾌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내내 빙글거리고 있었다.

 희원의 맘속에 또 다시 부질없는 희망이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우리가 정말 부부 사이라면... 난 선우오빠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이고 선우오빤 더할 나위 없이 멋지고 든든한 나의 남편이자 나만의 남자가 되서 이렇게 나란히 장도 보러 나오고 요리도 같이 하고... 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은 어느 덧 장보기에 여념이 없는 엄마의 등에 업혀 손가락을 빨고 있던 한 어린 아기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계속 되었다.

  '저렇게 예쁜 아기도 낳아서 기르고... 선우오빠를 닮은 아기는 얼마나 이쁠까!'

  "야, 채희원. 너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냐?"

  "에엣?!"

 급작스런 선우의 목소리에 갑자기 상념에서 깨어난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놀라는 거 보니까 내 말이 맞나보네. 너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냐고 그랬다." 

 몸을 굽혀 희원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민 선우가 그녀의 심중을 꿰뚤어 보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뭘... 뭘요?" 

 붉어진 얼굴로 희원이 당황하며 되묻자 선우가 고개짓으로 좀 전까지 희원의 시선이 머물러있던 아기쪽을 가르키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어기 저 애기. 너 저 애기 보면서 무슨 생각했어?"

  "예? 아니... 그냥 저..."

  "희원아. 우리도 저런 애기 하나 만들까?"

  "예에?!"

 희원은 선우의 차에 앉아 차창 유리 너머로 선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묶어 트렁크에 집어넣은 뒤 선우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다시 마트 입구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마트 입구 한켠에 붙어있는 작은 아이스크림 매대에 도착한 선우가 판매원에게 원하는 아이스크림을 손가락으로 가르켜 보이는 모습이며, 또 판매원이 아이스크림을 퍼내는 동안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기다리는 모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하고 아이스크림 두 개를 받아드는 모습들을 단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주시했다. 

 문득 언젠가 놀이공원에서 희원을 위해 두 번씩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던 선우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지금 저 멀리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들고 부지런히 걸어오는 선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희원의 마음속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또 한편으론 그런 행복감에 비례해 선우가 진짜로 그녀만의 남자였으면 하는 강렬한 열망이 똬리를 틀고 있기도 했다.

  '희원아. 우리도 저런 애기 하나 만들까?'

 당연히 농담이란 걸 알았지만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그렇게 숨막힐 정도로 가까이 들이밀고 선우가 그런 말을 할 때 희원은 꼭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 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수줍고 부끄러운 차원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고문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아마도 그 때 그 곳에 아무도 없이 단 둘만 있었다면 희원은 뒷생각하지 않고 선우의 목에 두 팔을 휘감은 채 미친 척 키스를 퍼부었을지도 몰랐다.

  '후후. 다행이야. 아무도 없는 곳에 단 둘만 있지 않았다는 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정신 나간 상상을 정말 실천에 옮겼을지도 몰랐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아휴... 만약 그랬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구. 으아, 생각만으로도 진땀이 난다.'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옥외 주차장에 빼곡이 주차된 차량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선우의 기분은 아주 그만이었다. 사소한 일에 불과했지만 희원을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걸어가는 지금의 그의 모습이 선우는 마음에 들었다. 여지껏 어떤 상대에게도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던 선우였다. 

 물론 선우는 오래 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딱 한 번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단 온통 감정적 혼란으로 점철된 하나의 전쟁에 가까웠다. 사랑이란 미명 아래 그저 서로를 할퀴고 상처 주고 피 흘리고 한 기억 밖에 남지 않는 뒤틀린 사랑이었다. 어떤 안락감이나 위안, 유쾌함이나 온화함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 불모지와도 같이 황량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희원, 그녀의 존재는 달랐다. 얼음장처럼 굳어있던 그의 마음을 그녀의 따스함, 온화함, 명랑함, 순수함들로 가랑비에 옷 적시듯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해체시켜 버린 그녀의 존재는 선우에게 있어 처음으로 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을 깨닫게 해 준 최초의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우의 인생 전체를 짓누르고 있던 불신감에서 비롯된 두려움, 그 그늘을 거두어 간 햇살같은 여자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선우는 조인트 콘서트장의 휴게실로 우연히 찾아든 희원의 어벙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된 그 순간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었던 것 같았다. 

 선우는 자못 생경한 기분이기도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무런 구속감 없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에 가까운 만족감을 맛보았다. 그녀에게라면 왠지 아무런 조건 없이 그가 가진 걸 다 내주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희원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의 차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서늘한 초가을의 저녁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발걸음처럼 가볍고 그의 기분처럼 상쾌한 바람이었다. 

  '훗. 바람을 쐬긴 쐬는군.'

 희원에게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했던 말은 물론 거짓 핑계였다. 그저 잠시나마 그녀 가까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순전히 계획적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처지였지만...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기엔 눈치 봐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 

 시시각각 선우의 마음이 간구 하는 것은 바로 그 것이었다.

  "받아. 근데 오는 동안 바람 때문에 조금 녹았다."

 운전석 문을 열고 희원에게 먼저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선우가 말했다.

  "괜찮아요."

 반갑게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희원이 반달 모양의 눈을 하고 웃었다. 선우는 언제나 그렇듯 불평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먹고 출발하자." 

  "네."

 아이스크림 때문일까? 선우는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는 희원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 정말 맛있다." 

 놀이공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할짝할짝 핥아먹고 있는 희원의 빨갛고 귀여운 혓바닥에 문득 시선이 고정된 선우는 괜스리 찔끔해졌다. 그의 맘속에 불쑥 야릇한 충동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병이 깊군.'

 그 때 선우쪽을 흘깃 돌아보던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어, 아이스크림 떨어진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우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려 그만 선우의 바지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저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원이 부랴부랴 자신의 가방 안에서 티슈를 꺼내들고는 얼른 선우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크!'

 그저 선우의 옷에 묻은 얼룩을 얼른 닦아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다가든 희원이 그의 허벅지 안 쪽까지 점점이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꼼지락거리며 닦아내는 동안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있었다.

  "돼, 됐다. 그만 닦아."

 어지간한 포커페이스의 선우도 그 순간만큼은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감출 재간이 없었다.

  

  "빨 때 빨더라도 대강은 닦아야죠."

 괜스레 혼자 낯빛을 붉히고 있는 선우의 사정을 알리 없는 희원은 야무지게 접어든 티슈로 열심히 그의 허벅지를 문질러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희원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선우는 아이스크림 따위는 당장 아무데나 내던져 버리고 그녀의 작은 어깨를 안아 올린 후 분명 딸기 아이스크림 향이 폴폴 나고 있을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에그, 그러게 얼른 얼른 핥아먹을 일이지... 대강 닦였네요."

 희원이 그의 다리에서 손을 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을 때 선우의 입에선 가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뭐예요. 또 녹아서 흘러 내릴려구 하잖아요. 오빠 그거 먹기 싫어요? 먹기 싫음 나 주던가."

  "뭐? 내가 먹던 걸?" 당혹감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선우가 다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싫다."

  "왜요?"  

  "그렇게 되면 내가 너한테 간접 키스할 기회를 허락하는 거잖아. 그래서 싫어."

  "치이."

  "차라리 찐하게 진짜 키스를 한 번 하고 말지."

  "예?"

 있는 대로 눈이 커진 희원을 향해 선우가 바싹 다가들더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아이스크림 먹다가 키스해 본 경험 있냐?"

  "쿨럭!"

  "없나보구나. 나도 없는데."

 묘한 눈빛을 띤 채 자신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선우를 향해 무방비 상태였던 희원이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 외에 달리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있었겠는가. 그저 말을 잇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의 모습을 짓궂은 심정으로 바라보던 선우가 이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나 앉더니 또 다시 흘러내리기 일보직전의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아이스크림 맛 좋다!"

  "......"

 선우는 딸기 아이스크림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아이스크림 먹는 일에 열중하는 척 하는 희원을 흘깃 돌아보며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 까지. 서두르지 말자, 은선우. 천천히 가는 거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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