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 (24/75)

# 23.

  "자, 그럼 이제 사랑하는... 후배 희원이의 생일 파티를 시작해 볼까?"

 어느 사이 수영이 전원을 켠 오디오에서 말초신경에 착착 감겨오는 달착지근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파티 테이블과 희원 스스로도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고혹스러운 차림에 분위기나는 음악까지 가세하니 그녀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들뜨는 기분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묘한 설레임이 아지랑이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선배...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과분한 생일상은 제 평생 처음이예요. 고마워요, 선배."

 홍조 띤 얼굴로 수영을 바라보는 희원의 눈동자 가득 감동에 겨운 빛이 역력하자 수영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만족스러웠던 것은 변신에 가까운 희원의 차림새가 기대 이상으로 그녀에게 잘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안목은 틀림이 없지. 남들이 못 보고 지나치는 진흙 속의 진주라도 난 놓치는 법이 없거든. 후후후.' 

 유독 굴곡이 선명한 윗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던 수영이 다시 대꾸했다.

  "희원이가 기뻐하니 나도 기쁜 걸. 조금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6시도 거의 다 되었으니 우선 식사부터 하도록 할까."

 수영이 음식 접시들을 덮어두었던 은제 뚜껑을 들어내는 동안 희원은 준희에게 7시까지 귀가하겠다고 했던 약속이 다시 떠올라 손목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5시 53분.

  '어느 새 시간이 벌써 이렇게... 택시를 타도 아무리 빨라야 30분은 족히 걸릴 텐데... 이걸 어쩌나. 내 생일이라고 선배가 정성 들여 마련한 자린데 예의상 서둘러 일어날 수도 없고.'

 희원은 잠시 고민 끝에 수영의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같이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출발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되면 약속한 7시보다 30분 정도 귀가가 늦어질 테지만 그 정도는 오빠들이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수영이 희원을 위해 특별히 주문했다는 음식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만큼 아주 근사하고 훌륭했다. 하지만 희원은 식사 중간 중간 자신도 모르게 손목 시계를 흘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아 그런 희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수영의 눈빛에는 점점 싸늘함이 감돌았다.

  '채희원. 도대체 너란 애는 정말... 값비싼 선물공세에 깜짝 파티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나.'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거니?"

 희원이 깜짝 놀라 수영을 건너다보니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수영이 희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 아... 아니요..." 희원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바보... 거짓말 같은 거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주제에. 괜찮아. 솔직히 말해 봐."

  "실은... 오늘 오빠들이랑 단합대회 겸 가족회의라나... 뭐 그런 걸 하기로 했거든요."

 수영의 부드러운 어조에 다소 안심이 된 희원은 그냥 사실을 털어놓는다.

  "단합대회? 가족회의? 니 생일 파티가 아니고?" 수영이 눈썹을 활처럼 치켜세우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들은 오늘이 제 생일인지 몰라요." 희원이 웃으며 대꾸했다.

  

 모를 리가. 수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단합대회다 가족회의다 하는 것은 그저 구실일 뿐 실은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이 희원을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음을 수영은 금세 간파했다.

  '후후후. 그렇다면 더욱 더 희원이를 순순히 보내줄 순 없지.'

  "그래? 그럼... 생일 케이크에 촛불 끄기 순서를 빨리 서둘러야 겠구나." 수영은 그의 속내를 숨긴 채 시치미를 떼고 희원의 귀가를 위해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척을 했다.

  "괜찮아요, 선배. 그렇게까지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7시 정도까지는 더 머무를 수 있어요." 

 희원 딴에는 수영의 기분을 생각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수영의 자존심에 더욱 기스를 낼 뿐이었다. 그러나 수영은 그런 기분을 감춘 채 희원이 촛불을 불어 끌 때 웃는 얼굴로 박수를 쳐주고 다정한 얼굴로 생일 축하해 희원아라고 말해 주었다.

  "어때? 샴페인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겠지?"

  "아아뇨, 선배. 미안해요. 술은... 한 모금도 안 돼요. 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은근한 눈빛으로 수영이 샴페인을 권하자 희원이 정색을 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래? 음... 그래도 건배 한 번 안 하고 지나가긴 좀 서운한데. 그렇다고 애들하고 장난하는 것처럼 맹물 잔을 부딪힐 수도 없고. 아, 잠깐 기다려 봐."

 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히 거실을 벗어난 후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냉장고에서 칵테일 된 열대 과일 쥬스와 소다수를 꺼냈다. 목이 긴 크리스탈 쥬스잔에 쥬스와 소다수를 적당히 섞어 넣은 뒤 수영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샴페인 한 병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디... 이 마법의 약이 과연 어떤 효과를 내는지 한 번 볼까? 후후후.' 그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쥬스 잔에 샴페인을 조금 따라 부었다.

  "자, 열대 과일 쥬스야. 이거라도 마셔." 수영이 시치미를 떼고 희원에게 샴페인이 든 쥬스 잔을 건넸다.

  "와, 색깔이 참 곱네요. 열대 과일 쥬스요? 냄새도 참 향기롭다." 

  "그럼, 이제 건배할까. 희원이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건배!"

  "건배!"

 수영은 자신의 입가로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희원이 쥬스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옆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향기로운 과일 향을 음미한 뒤 쥬스를 몇 모금 들이키더니 입맛을 다시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소다수를 좀 섞었어. 칵테일 되서 나온 쥬스인데 너무 농도가 진한 거 같아서 말야."

  "아니요, 맛있어요... 뭐랄까... 아주 향기롭고 독특한 맛이네요."

  "그럴 거야. 여행 다녀온 친구가 직접 가지고 들어온 거니까."

  "아... 그렇구나..."

 색다른 맛을 좀 더 음미해 보려는 듯 다시 쥬스를 몇 모금 더 들이키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넌즈시 건너다 보던 수영은 한 쪽 입 끝을 끌어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오늘 이렇게 근사한 생일 보내게 해줘서 정말 뭐라고 고맙단 얘길 해야할지....."

  "채희원. 니가 그렇게 깍듯이 예의 차려 말할 때마다 정나미 떨어지려고 하는 거 알아? 남처럼 왜 그래?"

  "그래두요... 너무 고마워서 그러죠......"

  "그렇게 고마워?"

  "네에..."

  "그럼, 답례로 요기다 뽀뽀 한 번만 해봐라."

 수영이 눈을 감고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말하자 희원은 얼굴을 붉힌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뭐해? 니가 안 하면 내가 확 달려들어서 해버린다."

  "선배..."

  "자, 그러니까 니가 얼른 해. 내가 못 기다리고 덤벼들기 전에."

  

 눈을 감은 채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웃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한동안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던 희원은 망설임 끝에 수영에게 다가가 그의 뺨에 살짝 입맞춤을 해주곤 화들짝 물러났다.

  "에이... 뭐야 이거 시시하게 정말..."

  "선배. 저,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요. 내일 학원에서 뵈요." 

 부끄러움 때문인지 현기증 기운이 느껴질 만큼 화끈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희원은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아, 참. 이 옷이랑 구두 내일 돌려드려도 되는 거죠?"

  "돌려줘?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주는 생일 선물인데."

  "예?! 제 생일... 선물요? 하지만..."

  "하지만은 또 뭐가 하지만이야. 내 선물이 그렇게 맘에 안 들었니?"

  "아뇨. 그게 아니구... 이렇게 과분한 선물... 왠지..."

  "과분하긴 뭐가 과분해. 자꾸 그 딴 소리하면 나 진짜 화낼거다."

  "고마와요... 선배."

  "그래, 그 말 한 마디면 돼."

 옷이며 구두며 핸드백이며 어마 어마하게 비싼 고가품임을 모르지 않기에 희원은 사뭇 당혹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한 표정으로 잠시 주저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웬일인지 걷잡을 수 없는 현기증이 몰려들어 희원은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다.

  "희원아!" 수영이 황급히 다가와 희원의 팔을 부축했다.

  "선배....." 그녀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물들이 그 형체를 잃고 색깔만 남아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겠다. 내가 냉수 좀 가져올게."

 희원을 소파로 데려다 앉힌 후 수영이 어디론가로 급히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괭괭거리며 귓가를 울렸다. 희원은 점점 까무룩해지는 의식의 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들린 가방을 열고 힘겨운 손놀림으로 가방 안을 더듬었다.

  '여.. 여기 있다... 오빠... 선우 오빠.....'

 바람 앞에 촛불인 양 꺼질 듯 꺼질 듯 위태로이 지탱하고 의식의 끝자락 속에서 희원은 마지막 힘을 다해 핸드폰을 열고 단축 버튼을 눌렀다.

 한동안의 신호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신호음을 자르고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희원의 가물거리는 의식을 두드린다.

  "여보세요."

  "선.. 선우... 오빠..... 선우... 오빠아..."

  "희원이니? 희원이구나! 너... 어디야 지금?!" 

  "오빠... 선우....."

  "희원아! 희원아!"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마침내 의식을 놓친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이 스르르 빠져나가 쇼파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선우가 희원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녀의 생일 선물을 사들고 막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던 참이었을 때였다.

 힘없이 그녀와의 통화가 끊겨 버린 후 선우는 입안이 바싹 바싹 타들어감을 의식하며 희원의 핸드폰으로 연거푸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역시나 희원의 소식을 모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안절부절치 못하는 심정으로 곰곰히 희원의 행방을 추리해보던 선우의 머리속에 번뜩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순간 선우를 전율감에 빠뜨렸다.

  '이 자식. 정말 너라면... 가만 두지 않겠어.'

 선우는 다시 다급한 손놀림으로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아, 세계 일러스트 학원 전화번호 좀 알려주십시오."

 잠시 후 전화번호 하나를 부랴부랴 메모지에 받아 적은 선우는 다시 핸드폰 버튼을 바삐 눌러 희원이 다니고 있는 학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세계 일러스트 학원입니까?"

 수영은 침대 가에 서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희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다소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주스 잔에 샴페인을 조금 섞어 보았지만 저 정도의 효과를 낼 것이라곤 사실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후훗'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천하의 김수영이 별의 별 쇼를 다 하는구나. 야, 김수영. 너한테 쟤가 뭐냐. 너한테 채희원이라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애가 도대체 뭐길래 네 자존심까지 구겨가며 이렇게 차지하고 싶어 안달을 치는 거냐구.'

 사실 수영은 그동안 희원에 대한 감정 정리가 잘 되지 않아 계속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마주치게 된 고교 후배. 귀엽고 때묻지 않아 보이는 그녀에게 수영은 단지 평소처럼 유희 삼아 작업을 건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영은 자꾸 그에게는 낯선 감정들의 느닷없는 습격에 당황스러워 해야만 했다.

 잔잔한 설레임. 유쾌함. 포근함. 문득 문득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마음. 뒤에서 살포시 감싸 안아주고 싶은 충동.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영원토록 그녀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욕구가 무엇보다 그에겐 낯설고 생경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수영은 희원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넘겨주며 나즈막히 속삭였다.

  "지금 너를 가질까? 그럼 넌... 바보처럼 순진하기만 한 넌 나한테서 달아나지 못할 테지. 니가 아무리 은선우를 사랑한다고 해도 넌 결코 나한테서 달아나 은선우에게 갈 수 없을 거야. 넌 원래 그렇게 바보니까. 하지만 이렇게 바보를 사랑하게 된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 버린 걸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왠지 이런 식으로 널 갖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야. 김수영이란 인간... 원래 그런 거 따지는 인간이 아니었거든. 아무래도... 널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나도 정말 바보가 되어 버렸다 보다, 채희원. 후후."

 수영은 이불을 끌어다 희원에게 살짝 덮어주고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는 흑과 백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쪽에선 흰 옷을 입은 천사가 잘한 결정이라고 박수를 쳐주었고 다른 한 쪽에선 검은 옷을 입은 악마가 당장이라도 되돌아가 그녀를 안으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그는 그 길로 곧장 욕실로 걸어 들어가 한참 동안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샤워 가운만을 걸친 채 욕실을 나와 주방 한켠에 마련된 미니 바에서 로열살루트 50년산을 꺼내 잔에 따랐다.

 수영이 로열살루트의 향을 음미하며 스트레이트로 조금씩 홀짝거리고 있을 때였다.

 딩동.

 불현듯 초인종이 울렸다.

 그 시간에 누굴까하며 의아한 얼굴로 일어나 수영이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렸다. 그리고 비디오 도어폰으로 다가가 벨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수영의 얼굴이 돌연 싸늘하게 굳어졌다. 

  '저 자식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도어폰에 비치고 있는 선우의 얼굴은 꽤나 격앙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자 울화가 치미는 듯한 얼굴을 하고 연거푸 초인종을 눌러대고 있었다. 

 수영은 고개를 삐닥하게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 그런 선우의 모습을 잠시동안 지켜보다가 이내 현관문을 열었다.

  "은선우씨가 여긴 웬일이십니까?" 

  "희원이 여기 있지?! 그 애 지금 어디 있나?"

 숯검뎅처럼 짙은 눈썹 두 개가 거의 맞붙을 지경으로 선우가 미간을 몹시 찌푸리며 수영을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희원이... 여기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선우를 향해 수영은 마치 조소를 던지듯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선우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듯 이를 악물고 재차 물었다.

  "니가 분명해. 너... 희원이가 술 못 먹는 거 알면서 장난질 쳤지. 그렇지? 희원이 어딨어. 말 안해?!"

 도대체 선우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것일까? 수영은 순간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희원이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선우에게 연락을 했던 것일까? 수영은 경악감으로 되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좋아. 니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지." 

 선우가 성난 눈빛으로 수영을 노려보더니 이내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섰다.

  "저 쪽... 내 방에 있습니다." 수영이 선우를 향해 고개짓으로 자신의 방을 알려주었다.

 선우는 머뭇거림 없이 곧장 수영의 방으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희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희원아..."

 선우가 희원의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그녀를 흔들어 보았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일으킨 후 그의 등에다 들쳐업고는 방을 나왔다. 

 선우는 거실에 서있던 수영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서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막 밖으로 나서려 할 때 그 때까지 잠자코 서서 선우의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던 수영이 말문을 열었다.

  "고의는 아니었으니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은선우씨."

 그러나 선우는 수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무런 대꾸 없이 밖으로 나갔다. 

  "야, 뭐야? 순이 얘 왜 이래?!"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선우형?"

 희원에게 깜짝 파티를 열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성진과 준희가 잠든 것처럼 선우의 등에 업혀 있던 희원을 아연실색한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김수영... 그 자식 집에서 데려오는 중이야."

  "뭐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진과 준희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한 마디였다.

  "자고 일어나면 깨어날 거야. 먼저 방에다 좀 눕혀야 겠어."

 계단을 오르며 선우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성진과 준희는 여전히 아연한 얼굴로 희원을 업은 채 계단을 오르고 있는 선우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선우와 희원의 모습이 이층으로 사라진 뒤 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야." 준희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선우 저 놈... 무쟈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던?"

  "응. 그래."

  "김수영 그 자식이 우리 순이한테 무슨 농간을 부린 게 틀림없어."

  "......"

 선우에게 아니 희원 본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뭐라 얘기할 거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준희는 잠자코 서서 다시 두 사람이 사라진 이층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희원의 방에 다다른 선우는 조심스레 희원을 침대에 눕히고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없이 희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희원에 대한 걱정과 수영에 대한 분노로 미친 듯이 펄떡거리던 그의 가슴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의식을 잃어 가는 와중에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희원의 목소리로 인해 학원에 전화를 걸어 어렵게 수영의 집주소를 알아내고 미친놈처럼 차를 몰아 수영의 집에 당도할 때까지 선우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거기다 샤워 가운차림으로 현관문을 열던 수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선우는 당장이라도 수영에게 달려들어 그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온 몸의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었다. 그러나 희원을 찾아냈다는 안도감으로 인해 선우는 가까스로 그 분노을 삭일 수가 있었다.

 선우는 조심스레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희원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져 보았다. 그의 손끝을 타고 희원의 체온이 느껴져 오자 선우는 그제서야 무사히 그녀를 찾아 데려올 수 있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희원아... 널 잃어버리게 될 까봐... 정말 무서웠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만큼 무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너 때문에... 나 정말 많이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와락 희원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선우는 대신 조심스럽게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천천히 그녀의 이마로부터 입술을 떼어낸 뒤에도 선우는 선뜻 일어나지를 못하고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희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의식을 잃은 채였지만 다소 열이 올라 발그레한 두 뺨과 붉은 입술이 몸살나게 자극적으로 보였다. 순간 이성에 의해 움직이던 그의 의지는 한낱  초개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는 몸을 굽혀 좀 더 희원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들었다. 아기처럼 쌔근덕 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새나오는 열에 들뜬 듯한 숨결이 선우의 피부에 전해져오자 지독스럽게도 아찔한 느낌이 인정사정 두지 않고 그를 엄습해왔다. 

 하지만 선우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한 가지 명령에 따라 붉고 뜨거운 희원의 입술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포개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시작된 그의 키스는 희원의 입술과 그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마법에라도 걸린 듯 보이지 않는 불꽃을 사르며 한결 뜨겁고 열정적인 키스로 돌변했다. 머리 속이 하얗게 사위어 버린 선우는 짜릿한 쾌감이 이끄는 대로 희원의 두 입술을 정신없이 유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뭔가 해갈되지 않은 욕망의 몸짓처럼 꿈틀대던 그의 혀가 매끄러운 희원의 이 사이를 서서히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이 잠든 채 미동도 않는 희원의 혀를 찾아낸 순간 그는 잠시 경직된 채 숨까지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난 뒤 놀랍게도 깊은 잠에 취해있을 희원이 마치 선우의 키스에 응답이라도 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율감에 사로잡힌 채 희원에게서 몸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희원은 여전히 깊은 수면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다만 뭔가 힘겹게 말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꿈결 속을 헤매이는 사람이 반수면 상태에서 아주 나즈막하게 웅얼거리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선우 오빠... 선우 오빠......"

 선우는 자신을 부르는 희원의 웅얼거림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속삭임처럼 들렸다. 그의 가슴 가득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벅차 올랐다. 그리고 선우의 두 눈에 문득 뜨거운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그는 희원의 작고 하얀 손을 자신의 두 손안에 살며시 포개어 잡고 마치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생각했다.

  '희원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난...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희원아.'

 잡고 있던 희원의 손에 가만히 입을 맞추는 선우의 시야가 마치 안개가 서린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선우가 성난 야수와도 같은 표정으로 희원을 들쳐업고 현관문 밖으로 사라진 뒤 수영은 미니 바로 돌아와 연거푸 로열살루트를 스트레이트로 몇 잔 더 들이켜 보았지만 커다란 돌덩어리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답답함은 가셔지질 않았다.

 넋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한동안 빈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수영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욕실 앞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았던 옷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다. 

 충동적으로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던 수영은 한참동안 집 근처를 허적허적 배회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그가 즐겨 찾던 단골 바로 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친숙한 바텐더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가? 나... 즐겨 마시던 걸로 한 잔. 아니 오늘은 보드카가 좋겠군. 그냥 병째로 줘."

 수영의 요구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바텐더는 그러나 프로다운 태도로 개인적인 호기심을 얼른 접고는 스미노프 보드카 한 병을 말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마치 술에 원수라도 진 사람처럼 독한 보드카를 연거푸 들이켜 대는 수영의 모습을 그가 불안스레 주시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수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 오, 채린이구나. 나? 으흠... 가만있어 보자...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더라? 하하핫. 갑자기 여기 이름이 왜 생각이 안 나지? 그냥... 내 단골 술집...... 그래. 와라.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안 말리는 게 내 좌우명이거든. 아... 그게 아니구나. 가는 여자 안 붙들고 오는 여자 안 막는다고 해야지... 후훗... 후후후... 뭐? 무슨 소리. 나 안 취했어, 채린아. 하나도 안 취했다고... 그래... 이따 보자."

 채린이 바에 도착했을 때 수영은 이미 만취한 상태로 바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수영에게 다가가 힘겹게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자 그는 고개를 가누지 못한 채 다시 채린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어휴... 세상에.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 지경이야, 수영씨." 채린이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슬쩍 바텐더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오시기 전부터 좀 취해 계셨던 모양인데 저렇게 보드카를 반 병 넘게 비웠으니... 안 그래도 택시를 부를까 생각 중이던 참이었습니다." 바텐더가 우려 섞인 표정으로 채린을 향해 말했다.

  "됐어요. 내가 데리고 가면 되요."

 종업원들의 도움을 받아 수영을 자신의 차에 태운 후 채린은 시동을 걸지 않은 채 잠시 동안 망설였다. 수영을 그의 빌라로 데려갈지 아니면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갈지 하는 선택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망설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채린은 자동차에 시동을 건 후 자신의 아파트를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좋아. 이 번 기회에 당신한테 나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김수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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