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 (22/75)

  

# 21.

  주말이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압박 붕대를 감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발목의 상태가 호전된 희원은 멤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바지런을 떨며 집안 일을 마친 이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의 결석으로 뒤떨어졌을 수업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쉬는 동안 나름대로 혼자 교재를 뒤적이며 노트 정리도 하고 수업 과정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실습도 해보곤 했지만 왠지 뒤쳐질 것만은 조바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드로잉 연습이라도 할 요량으로 무뎌진 연필을 깎고 있을 때 문득 희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엄마. 응? 내 생일? ... 내일이라고? 벌써 그렇게 됐나...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 미역국 끓여 먹는 거 안 잊어 버릴테니까 걱정 그만하구... 알았대두요. 응... 그래... 응, 끊을게요. 네에."

 큰 딸 혼자 객지에 내보내 놓고 시름 많은 희원의 엄마였다. 하지만 희원은 혼자 서울에 와서 지내기 시작한 이 후로 생일날에 맞춰 미역국 끓여 먹는 일 같은 건 생략한 채 살아왔다. 다만 자식의 생일을 손수 챙기지 못해 안타까와 하는 엄마의 심정을 생각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미역국은 꼭 끓여먹겠다고 엄마를 안심시키곤 했다.

  똑똑.

  "네에."

  "희원씨, 우리 지금 나가요."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준희의 얼굴이 보였다.

  "아, 준희오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희원이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올 것 없어요. 그냥 하던 일 마저 해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방송 시간이 6시라고 했죠. 잊어버리지 말고 꼭 봐야지."

  "후후. 그래요."

 연이어 두 곡을 가요순위 톱에 등극시켰던 레드비트의 3집에 수록되어있던 곡 중 하나가 뒤늦게 인기몰이를 하는 바람에 4집 준비에 전념하느라 어지간한 방송 출연은 자제하고 있던 레드비트 멤버들은 간만에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멤버들이 함께 움직일 때 이용하는 밴에 오른 후 차가 방송국을 향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준희가 두 형들을 향해 말했다.

  "참, 아까 우연히 희원씨가 통화중에 하는 얘길 듣게되었는데 내일이 희원씨 생일이래."

  "그으래? 그렇담 절대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생각해 봤는데 생일 선물은 각자 준비하기로 하고 저녁 때 깜짝 파티를 해주면 어떨까 싶어." 준희가 두 형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의중을 살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음... 순이한테 무슨 선물을 해줄까? 음... 예쁜 속옷은 어떨까?" 

 마치 인형 놀이를 하듯 희원을 모델로 각양각색의 속옷을 갈아 입혀보는 상상을 하며 성진이 킬킬 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그 속을 안 봐도 훤히 알겠다는 표정으로 준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선우를 향해 물었다.

  "형 생각은 어때? 뭐 특별한 이벤트나 괜찮은 아이디어 없어?"

  "글세..."

 준희로부터 내일이 희원의 생일이라는 얘길 듣고 난 직후부터 선우는 줄곧 어떤 선물로 희원을 기쁘게 해줄까하는 생각에 골몰하느라 준희의 물음에 그저 성의 없게 대꾸했다.   

  '그러고보니까 희원이가 뭘 좋아는지 하다 못해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었구나...'

 혼자 생각에 골몰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얼굴로 점점 표정이 굳어 가는 선우의 모습을 보며 준희는 티나지 않게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송 출연을 마치고 스튜디오에서 빠져 나오고 있던 레드비트의 뒤에서 누군가 선우의 이름을 부르며 뒤쫓는 이가 있었다.

  "은선우씨!"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본 선우는 순간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오늘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했던 그룹 더 버드의 멤버 중 하나인 강진우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서있던 레드비트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선 성진과 준희에게 목례를 한 뒤 선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은선우씨,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선우는 민망할 만큼 매몰차게 거절의 뜻을 표하며 돌아서서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진우는 포기하지 않고 선우의 뒤를 쫓으며 재차 잠시만 시간을 좀 내달라고 부탁했다.

  "글세! 난 할 이야기도 들을 이야기도 없다니까!"

 불현듯 선우가 멈춰 서더니 강진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복도에 나와서있던 직원들은 물론 몇 몇 연예인들이 깜짝 놀란 시선으로 선우와 강진우를 돌아봤다.

  "이런 식으로 우리 둘이 사람들 이목 끄는 거 저야 상관없지만 은선우씨는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 일 아닙니까?"

 뭐랄까 선우를 향해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강진우의 표정은 장난끼가 섞여있는 듯도 보였고 비웃음이 섞여있는 듯도 보였으며 한편으론 더할 나위 없이 서글퍼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다.

  "금방 따라갈테니까 먼저들 밴에 가서 기다려."

 잠시 성난 시선으로 강진우를 쏘아보기만 하던 선우가 다른 두 멤버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비상계단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강진우는 성진과 준희에게 다시 목례을 해보이곤 선우의 뒤를 따랐다.

 육중한 철문을 밀고 선우와 진우는 비상 계단의 층계참에 나란히 섰다. 선우는 진우의 얼굴을 외면한 채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담배 한 개피를 뽑아 들고는 굳은 입술을 움직여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용건있으면 빨리 말해."

  "엄마가 많이 아프셔."

 강진우는 자신의 얘기에 털끝만큼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 선우의 얼굴을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형이 생각보다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이 아프셔." 

  "누가 네 형이야! 일전에 분명 말했을텐데.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이야."

 줄곧 진우를 외면한 채로 서있던 선우가 성난 얼굴로 돌아보며 야수가 포효하는 것처럼 그렇게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소릴 내며 악을 썼다. 그 기세에 눌려 잠시 창백해졌던 진우의 얼굴에 묘한 슬픔이 배어올랐다.

  "엄마를 용서하란 소리 같은 건 안 하겠어. 하지만...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는 하는 게 나중에라도 덜 후회스러울 거야. 물론 엄마가 누구에게 용서받아야 할만큼 큰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해, 난. 설사 단죄 받아야 할 어떤 죄를 진짜로 지었다고 해도 이미 그 대가를 치루고도 남았을 만큼 엄마는 오늘날까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오셨어. 형도 그 사실을 이제 그만 인정하는 게 좋을 거야. 형 자신을 위해서도 말이야."

  "주제 넘는 소리하지 마, 강진우. 니까짓 게 뭘 안다고 아는 척이야. 겨우 이따위 심파조나 읊어대려고 날 불러낸 거였냐? 너 앞으로 언제 어디서 마주치게 되든 절대로 나 아는 척 하지마라."

 마치 이를 악물고 있는 사람 같은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선우가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가는 철문에 손을 얹을 때였다. 왠지 통곡소리를 가까스로 삼키고있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진우가 선우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엄마는 아직도 가끔 나를 선우라고 불러. 난 20년이 넘게 내 이름 대신 형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통해 조금이라도 형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애를 쓰는 그런 엄마와 함께 살았지. 상처는... 형한테만 있다고 착각하지 말기 바래."

 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았다. 진우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힘 주어 철문을 잡아당기고 복도로 나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때 그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피눈물을 흘렸다. 문득 누군가가... 누군가의 품이 간절이 그리워 졌다. 몹시도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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