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 (20/75)

   

# 19.

 그 날 저녁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이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하기 위해 방송국 로비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성진이 문득 선우의 팔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야, 쟤 한채린 아냐?"

  

 선우는 성진이 턱짓으로 가르키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채린 역시 출연 중인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방송국에 나와있던 참인 듯 했다. 하지만 폼새로 보아 그녀는 지금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중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주위의 동료들에게 애교 있는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 보이곤 로비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유난스레 뾰족한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로비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던 그녀와 레드비트의 멤버들이 거의 정면으로 마주보며 걷게 되었을 때였다. 분명 상대의 얼굴을 빤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채린은 어찌된 영문인지 선우에게 완전 안면몰수를 하는 것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 양 행동하고 있던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레드비트의 옆을 스치듯 지나치더니 곧장 입구를 향해 나아가던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로 채린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던 것은 그러나 성진과 준희 뿐이었다. 선우 역시 눈꼽 만큼의 표정 변화 없이 아무렇지도 않는 듯 걷고만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예 생판 모르는 사람인 양 말이다.

  "너네 두 사람... 사귀던 사이 아니었냐?" 성진이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을 굴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선우를 향해 물었다.

  "그랬지." 여전히 선우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다.

  "근데 쟤가 어떻게 저렇게 너한테 안면몰수를 할 수 있냐? 너희 싸웠냐?"

  "싸운 적 없어. 아마도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의사표시인 것 같은데. 나로썬 고마운 일이지 뭐." 

 나이트 클럽에서 희원의 팔을 끌어 잡고 나온 이 후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던 두 사람이었다. 선우는 번거롭고 구차한 과정 없이 채린 쪽에서 먼저 그렇듯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한 듯 나오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정말 쉽기도 하다." 준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짜식. 그게 원래 내 스타일 아니냐. 하지만 넌 절대 배우지 마라." 선우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장난스럽게 준희의 뒤통수를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한편, 설마하는 마음으로 선우를 무시한 채 입구로 걸어나가던 채린은 결국 선우가 걸음 한 번 멈추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복도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은선우. 정말 끝까지 나한테... 좋아. 나도 이제 너 같이 매너 없고 찬바람 도는 인간한테 진짜로 관심 끊을 거야. 새로운 타겟이 생겼거든. 너보다 배경도 빵빵하고 돈 많은 집안에 외모도 수준급이야. 거기다 매너도 죽이고, 침실 테크닉도 끝내주더라. 그리고 또... 또...... 그래, 너보다 춤도 훨씬 잘 춰. 또... 또... 뭐가 있더라......'

 채린은 로드 매니저가 방송국 앞에 대기시킨 차에 오르며 억지로 선우의 단점들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은 채린의 두 뺨에는 어느 새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짧은 교제 기간이었지만 선우를 향한 채린의 마음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자식! 나쁜 새끼... 흐흑......"

 그녀의 흐느낌 소리에 놀란 로드 매니저가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촬영 중에 뭔 일 있었어?"

  "상관하지 말고 차나 빨리 출발시켜!"

 신경질 섞인 채린의 반응에 로드 매니저는 입술을 실룩해 보이고는 두 말 않고 차를 출발 시켰다.

 희원은 쿠션 하나를 끌어안고 거실 소파에 앉아 레드비트가 출연하는 토크쇼를 보기 위해 리모콘으로 TV를 켰다. 아직 프로그램 시작 전의 TV에선  CF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도 인기가 좋아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탈랜트 한가희가 바람에 긴 생머리를 나부끼며 세상에 이보다 감미로운 맛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모 회사 초콜릿을 음미하는 광고를 마지막으로 내보낸 후 비로소 토크쇼가 시작되었다. 

 토크쇼 진행 MC 역시 이름은 모르지만 꽤나 얼굴이 낯익은 여자 탈랜트가 맡고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 멘트가 오간 후 MC는 레드비트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 가는 가을 하늘을 무색케 할만큼 그렇게 높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는 판에 박힌 얘기들을 건네고는 멤버들에게 사소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후훗. 성진오빠 좀 봐. 어쩜 저렇게 집에 있을 때랑 사람이 달라 보일까. 큭큭큭. 밖에선 아주 무게땅이 따로 없다니까. 아휴, 준희 오빠는 고개 좀 더 들고 있지.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네. 그나저나 연예인들이라 그런가. 다들 화면발 잘 받네.'

 그러나 토크쇼가 진행되는 내내 희원의 시선은 결국 선우의 모습만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 반사신경에만 작용하는 이름 모를 바이러스에 걸리기라도 한 듯 희원은 선우의 얼굴, 선우의 눈빛, 선우의 음성에 자동적으로 가슴이 설레이곤 설레이곤 했다. 그러고보니 한 집에 살고는 있었지만 그 때처럼 선우의 얼굴을 오랫동안 마음놓고 지켜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 같았다. 희원은 선우의 모습을 그녀의 머리 속에 섬세하고 생생하게 새겨두기라도 할 것처럼 TV 화면에 비쳐지는 그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주시했다. 

 얼마간의 대담을 잠시 중단하고 멤버들은 한 켠에 마련된 스테이지에서 즉석 라이브를 들려주었다. 연습실에서 세 사람이 호흡을 맞춰 연습하는 모습을 종종 봐온 희원이었지만 방송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또 다른 감흥을 선사해 주는 것 같았다.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로 그들의 노래를 따라 흥얼대고 있을 때였다. 불현 듯 쇼파 옆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분명 끊어진 전화는 아닌 듯한데 상대편에선 이상스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시라니까요?"

  달칵. 뚜우......

 결국 상대는 말 한 마디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희원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희원이 그 집에 입주하기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난 뒤부터인가 가끔씩이긴 해도 그렇게 걸어만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냥 끊어 버리는 전화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네... 왜 전화를 걸어 놓구선 아무 말도 않고 끊는 거야. 그럴 거면 아예 걸지를 말지. 그냥 장난 전화인가?'

 희원은 한편으로 그 말없는 전화가 용케 집 전화 번호를 알아낸 레드비트의 팬들 중 한 사람이 막상 전화를 걸어 놓구선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아 아무 말도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던 희원은 문득 전화기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다시 토크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 그녀는 바로 레드비트의 집 밖에서 검은 색의 철 이른 잠바를 입고 검은 모자를 눌러 쓴 누군가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꼼짝도 않고 서서 그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거실 쪽을 한동안 뚫어질 듯 주시하다 돌아서고 있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건 제 개인적인 궁금증이기도 한데요... 음... 데뷔이래 누구보다 많은 스캔들로 곤욕을 치루셨을 은선우씨한테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호호호, 분명 많은 여자분들의 관심사 중 하나일텐데요. 은선우씨, 혹 지금 사귀고 계시는 여자 친구분 있으신가요?"

 그녀의 말마따나 아주 지대한 관심이 실린 눈빛을 한 MC가 선우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없습니다." 

 덤덤한 표정으로 짧막하게 대꾸하는 선우의 모습이 점점 클로즈업 되고 있었다.

  "그럼, 이 번 역시 아주 많은 여성분들이 궁금해하고 계실 질문 하나 더 드리겠는데요 혹 은선우씨께서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이상형의 여자 스타일... 있으세요?"

  "......"

 이 번 질문에는 먼젓번 질문처럼 즉각 선우의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다만 검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선우의 매력적인 옆 얼굴만이 화면 상에 클로즈 업 되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 순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이 TV 앞에 앉아 과연 은선우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하는 궁금증에 마른 침을 삼키며 조바심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희원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심정으로 선우의 대답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뭔가 말을 꺼낼 듯 말 듯 윤곽이 뚜렷한 입술 끝을 잠시 실룩이던 선우가 문득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바로 그의 면전에 어떤 미지의 상대를 마주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 이상형은... 마른 풀 냄새가 느껴지는 그런 여자입니다."

 그 때 TV를 통해 선우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누구나가 다 그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선우의 표정이나 눈빛 그리고 말투는 꼭 누군가를 향해 진심을 고백하고 있기라도 하는 듯 묘한 설레임과 갈망의 빛이 담긴 모습이었다.

 선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TV 화면 앞으로 바싹 다가 앉아있던 희원은 그 순간 괜스레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으며 화들짝 놀라서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마른 풀 냄새라니... 성격만큼 취향도 별나지. 뭐 은은한 샴푸 냄새나 하다 못해 빨래비누 냄새도 아니고 웬 마른 풀 냄새? 근데 어쩐지 그냥 이상형이라기 보단 꼭 어떤 상대를 지칭해서 하는 말처럼 들리잖아. 혹... 선우오빠 맘 속 깊고 깊은 곳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진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그저 희원의 상상에 불과했지만 왠지 그런 상상만으로도 희원의 가슴 한 켠이 찌르르하고 아파왔다.

 질문을 던졌던 MC 역시 선우의 이상형이 다소 예상외다, 뭔가 그 안에 내포된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냐 하는 또 다른 질문으로 한동안 선우와 얘기를 더 나누다가 다시 성진에게 또 준희에게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토크쇼가 끝나고 방송 관계자들과 가벼운 술자리를 가진 후 세 멤버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꽤 밤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그들은 아마도 잠들어 있을 희원을 깨우지 않기 위해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열쇠로 문을 열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 까 희원은 TV도 끄지 않은 채 소파 위에서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구, 우리 순이가 오빠들 기다리다 여기서 잠이 든 모양이구나."

 성진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잠든 희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 같아선 당장이라도 잠들어 희원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줄 것 같아 보였다.

  "그런가 보네. 그나저나 잠이 아주 푹 들어버린 모양인데 깨우자니 참 그렇네... 선우형, 형이 좀 안아다가 희원씨 방에 눕히는 게 좋겠다."

  "뭐? 나보고 안아다 눕히라고?" 선우가 필요 이상으로 깜짝 놀라며 준희를 돌아봤다.

  "그래. 우리 때문에 여기서 잠이 든 모양인데 깨우기 미안하잖아."

  "근데 왜 하필 나보고 그러냐."

  "형 방이 희원씨 방 바로 옆이니까 그렇지. 그럼, 나 먼저 올라간다. 형이 수고 좀 해."

 그렇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준희는 선우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곤 재빨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 야아..."

  "그래라, 선우야. 내가 안아다 올려주고 싶지만 나는 술이 영 안 깨서 말야. 얼른 샤워라도 좀 해야될 것 같다. 아고, 머리야... 난 정말 술 체질이 아니라니까." 

 그의 말처럼 술이 덜 깬 듯 여전히 상기된 얼굴에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던 성진이 허적허적 걸어 제 방으로 사라지자 선우는 잠시 동안 난감한 얼굴로 희원을 내려보다 결국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알딸딸한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희원을 안아들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 순간 선우의 심장이 매우 불규칙한 리듬을 타고 요란스럽게 쿵쾅거렸다. 조금만 고개를 깊이 숙이면 그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어린애처럼 잠들어 있는 희원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자극적이고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제기랄. 심장이 아주 몸밖으로 튀어 나가게 생겼군.'

 선우는 그의 본능과 감각을 자극하는 갖가지 상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희원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때 준희는 결국 선우가 희원을 안아들고 아무리 술을 먹어도 붉어지지 않는 얼굴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희원의 방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희원에 방에 들어선 선우는 잠든 희원이 깰 까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비쳐든 달빛이 은은한 조명 효과를 내고 있던 희원의 방에서 선우는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아참, 이불... 이불을 덮어줘야지.'

 좀 더 머뭇거릴 수 있는 그럴 듯한 변명 거리를 발견한 듯 득의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선우는 이불을 끌어다 희원에게 덮어주고 다독였다. 그리고 다시 잠들어있는 희원의 얼굴을 내려다 보던 선우는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녀의 머리맡 가까이로 몸을 숙이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칼에 살며시 코끝을 대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만면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그녀에게선 기분 좋게 나른한 마른 풀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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