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 (15/75)

# 14.

 다음 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교실을 나온 희원은 친구 영서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찍고 돌아갈 양으로 학원 사무실로 향했다. 영서는 새로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찾아온 몇 몇의 학생들로부터 수강료를 접수하랴 이런 저런 문의에 대해 답변 해주랴 분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영서는 문가에 서 있던 희원의 모습을 발견하고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바쁘다는 뜻으로 살짝 눈쌀을 찌푸려 보였다. 손짓으로 먼저 가보겠다는 표시를 해 보이곤 돌아서서 학원을 나선 희원의 눈에 예의 검은 색 람보르기니가 떡 하니 학원 앞에 주차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왠지 껄끄러운 기분으로 주춤 주춤 검은 자동차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걸윙도어가 스무스하게 위로 젖혀지면서 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잘 들어갈 리가 있겠냐. 니가 날 그렇게 팽개치듯 내버려두고 가버렸는데. 아무리 팔촌 오빠가 무서워도 그렇지. 희원이 너한테 정말 많이 섭하다, 나."

  "정말 죄송해요, 선배님."

  "......"

 저으기 굳은 표정의 수영은 대꾸가 없다.

  "선배님, 죄송해요. 화 푸세요."

  "거기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니. 얼른 타라."

  "전 버스타고 가면 되요."

  "왜 선우오빠가 그러라고 당부라도 하든?"

  "......"

  "너... 내 질문에는 아직 대답 안 했잖아. 잠깐이면 돼. 일단 타라."

 희원은 하는 수 없이 수영의 차에 올랐다. 

 어디론가로 차를 몰고 있는 수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저... 와, 차가 정말 좋아요." 

  "......"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긴장 기류를 깨뜨려 보고자 희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떼어보았지만 수영은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그의 옆자리에 아무도 없는 듯 여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수영선배가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났나보네. 하긴 선우오빠 때문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야. 따지고 보면 수영선배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아휴, 어떻게 해야 선배 기분이 풀어질래나......'

 그러나 주변머리 없기가 비공인 10단쯤은 될 희원으로선 딱히 그럴 듯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야, 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승차감도 좋고..."

 괜스리 차 내부를 휘이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희원은 썰렁하기 짝이 없는 소리들만 내뱉고 있었다.

  "이런 차는... 도대체 얼마나 가요? 물론 엄청 비싸겠죠?"

  

  "......"

 하지만 희원은 나름대로 수영의 말문을 열어보고자 갸륵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어휴, 시트 쿠션도 짱이고... 와, 이제 보니까 이 시트 이거, 이 가죽이 보통 가죽이 아니네요? 역시... 패션 감각 탁월한 수영 선배랑 아주 딱이네. 딱이야."

  "......"

 여전히 무반응인 수영을 흘깃거리며 어색한 멘트를 날리던 희원이 앞에 보이는 콘솔 박스를 무심히 열었을 때였다. 순간 딱딱한 얼굴로 석고상처럼 미동도 않던 수영의 얼굴이 움찔했다. 희원이 생각 없이 열어 젖힌 콘솔 박스 안엔 줄줄이 사탕처럼 붙어있는 콘돔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크...!'

 당황한 희원은 황급히 콘솔 박스를 밀어 닫았다. 그녀는 짐짓 아무 것도 못 봤다는 듯이 멀쩡한 얼굴을 가장하고는 손바닥으로 콘솔 상단을 괜스레 퉁퉁 두드리며 말했다.

  "아하하... 참, 박스 내부도 널널한 게 아주 쓸모 있게 만들어졌네요. 하하..."

 그런 희원을 보면서 수영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작전상 아직 삐짐 모드를 좀 더 밀고 나가야겠기에 억지로 웃음을 억눌렀다. 수영은 그것이 심성 여린 희원을 교란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한강 둔치에 희원과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캔맥주를 홀짝거리던 수영의 목청이 순간 높아졌다.

  "뭐어?! 가정부?!!"

 희원이 수영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학비를 모을 때까지 그러기로 했거든요. 저 사실... 예전에 수영선배 참 많이 좋아했었어요. 하지만 지금 전 누구랑 교제같은 거... 상대가 수영 선배라해도 저 그런 거 할 처지가 못돼요. 그나마 학원에 공부하러 다니는 것만 해도 레드비트 오빠들이 많이 배려해 줘서 가능한 건데 그 와중에 제가 또 어떻게 누굴 만나고 할 수가 있겠어요."

 매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영을 향해 희원이 덤덤히 하지만 매우 또박 또박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가정부라... 가정부.. 하하, 정말 여러 가지로 얘가 날 놀래키는구만.'

 하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물러날 수영이 아니었다. 일단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끝장을 보는 성미의 수영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쉬는 날도 안주냐?"

  "음... 안 그래도 오빠들이 매주 일요일 점심 시간 이 후로는 제 맘대로 해도 좋다고 했어요. 하지만 솔직히 저한텐... 그런 시간적 여유보다 심적인 여유가 더 없기도 해요. 수영선배."

 수영은 말을 마친 희원이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뭔가 수심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심적인 여유가 없다는 말은 아마도 은선우 때문에 그런 거겠지.'

  "뭐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니가 학원에 나오는 날은 널 바래다주면서 그렇게 데이트하면 되는 거구. 일요일 오후는 특별한 일없음 또 나랑 같이 보내면 되구."

 수영이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는 고개 뒤로 깍지를 낀 채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수영 선배, 난..."

  "희원이 너 예전에 나 좋아했었다고 그랬지?"

  "예에..."

  "그 마음... 변한 거니? 다... 변해 버린 거니?"

 수영이 문득 진지한 얼굴로 희원을 돌아보며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희원은 그윽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의 시선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시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희원아... 날 좀 봐."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희원이 수영을 돌아보았다. 저녁 노을을 비스듬히 등지고 있던 수영의 실루엣은 분명 가슴 떨릴 만큼 멋있었다. 게다가 따뜻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수영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희원은 선우의 존재같은 건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수영의 손을 잡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차츰 점령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영은 여태껏 한 번도 의심의 눈초리라곤 담아본 적이 없을 것처럼 순진무구하고 선한 그녀의 눈망울이 한동안 자신을 응시하고 있자 왠지 가슴 한 구석이 덜커덩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수영에게 그것은 정말 낯선 경험이었다. 

  '뭐, 뭐지. 이 찜찜한 느낌은? 뭐하냐, 김수영! 분위기를 이쯤 몰아놨으면 입맞춤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그럴 듯한 스킨쉽으로 이어가야지.'

 수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희원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나 희원의 갈등에는 아직 종지부가 찍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그녀는 슬그머니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외면했다.

 왈왈.

 난데없이 마르티스 종 강아지 한 마리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선 꼭 아는 척이라도 하는 것처럼 짖어댔다.

  "어머나! 너 어디서 왔니? 주인은 어딨어? 아유우, 귀여워라!"

 희원은 냉큼 하얀 털복숭이 강아지를 안아 들고는 품에 안았다가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가 하며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선배, 요놈 너무 귀엽지 않아요? 아유, 이뻐라."

 수영은 좀 전까지의 심각한 분위기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다시 방글방글 모드에 들어간 희원을 조금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야, 그러고 있으니까 너 꼭 강아지랑 형제같이 생겼다."

  "아하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저 정말요 강아지처럼 생겼다는 말 무지 많이 들은 거 알아요? 하도 여러 사람이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거울 앞에서 심각하게 제 얼굴을 들여다봤는데요 정말 제가 봐도 그런 것 같더라니까요. 하하하..."

 그러고 보니 수영은 처음부터 희원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던 이유를 그제 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원의 동그랗고 선한 눈망울이 수영의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자신이 유일하게 정을 주었던 대상인 해피의 눈망울을 연상케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해피는 지금 희원의 품에 안겨있는 종과 같은 마르티스 강아지였다. 

 독자였던 수영은 어린 시절 늘 정에 굶주린 아이였다. 똑똑하고 재주 많고 그림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라고 주변 사람들 대부분 그를 왕자님, 왕자님하고 부르며 떠받들어 주긴 했지만 자기 생활에 바쁜 부모님을 포함해 누구 하나 따뜻하고 진심 어린 정을 주진 않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밖에 해결할 줄 몰랐던 그의 부모들은 어린 수영에게 혈육의 정을 제대로 쏟을 줄 몰랐던 위인들이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그들은 수영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짜 왕자를 만들기 위해 그의 작은 실수조차 용납치 않고 어떤 식으로든 혹독한 벌을 내리곤 했었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찰 만큼 잔인하고 냉혹한 벌들을 말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영은 생일선물로 해피를 선물 받았고 그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따르고 좋아하는 해피에게 아낌없이 정을 쏟으며 해피를 친구처럼 형제처럼 사랑하고 의지하며 지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당시 그는 전교 수석으로 입학하지 못한 데 대한 대가를 해피로 치뤄야 했다. 수영이 개와 어울려 노느라 시간을 뺏긴다는 이유로 부모들은 가차없이 해피를 안락사 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 당시 수영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영은 그 날부터 진심으로 자신의 부모들을 저주하기 시작했지만 겉으론 그들의 비위를 완벽하게 맞춰 주었다. 그러면서 뒤로 그들을 이용하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겉으로 누구에게나 완벽한 모습으로 어필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둘 씩 자기 기분대로 이용해 먹는 데 재미를 붙여갔던 것이었다.

  '후훗. 강아지를 닮은 얼굴이라... 재미있군.'

 수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말처럼 뇌까리고 있을 때 마르티스 강아지의 주인이 자신의 강아지를 찾으러 왔다. 희원과 강아지 주인은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동안 강아지를 화두로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원래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초면인 사이라도 금방 원활한 소통을 이루곤 한다.

  "잘가라, 이슬아!"

 희원은 마치 강아지 이름을 사람 이름이나 되는 것처럼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수영 쪽을 돌아보던 희원은 잠시 혼자 생각에 빠져 흘러가는 강물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던 수영의 옆모습을 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쓸쓸한 얼굴을.....

  "야아, 강바람 좋다. 이제 슬슬 여름도 거의 다 지나가보다. 어때 너도 좋지, 해피야?"

  "해...피?"

 의아한 얼굴로 희원이 물었다. 수영은 그녀의 동그란 눈망울과 동그란 콧망울을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얼굴로 픽 하곤 혼자 웃음을 터뜨리더니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너 집에 들어가 봐야 한다며. 그만 가자."

 수영은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희원을 내려준 후 돌아갔다. 버스정류장  까지 가는 차 안에서 그는 이 번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희원은 버스 안에서 아까 잠시 잠깐 스치듯 보았던 그의 쓸쓸한 옆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학창시절 내내 그의 주위에는 그를 선망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었다. 아마도 김수영이란 사람은 생전 외로울 짬이 없을 것처럼 보일 만큼 그렇게. 

  '하지만 아까 수영 선배의 표정은 마치......'

 마치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서 폐허가 된 오래된 사찰 터처럼 황량하고 고적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희원은 설마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이 잘못 본 걸 거라고 확신을 굳혔다.

 강변도로 쪽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 수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영은 전화를 받기 전에 찍혀있는 번호를 확인하더니 한쪽 입끝을 말아 올리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어, 채린이? 그래, 아침에 집에는 잘 들어 갔구? ... 아, 목소리가 왜 그렇게 생뚱 맞아. 밤새 만리장성을 쌓은 사이에 말이야. 우리 만나서 저녁이나 먹을까? 내가 근사한 데 알고있는데...... 응. 그래, 알았어. 내 지금 당장 그리로 모시러 가지... 오케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그의 얼굴은 대번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마치 벌레라도 씹는 듯한 표정으로 혼자 뇌까렸다.

  "싸구려 같은 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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