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이윽고 음악이 끝났다.
희원과 선우 두 사람에겐 순간처럼 찰나처럼 짧은 듯 아쉬운 시간은 음악이 잦아듦과 함께 그렇게 끝이 났다.
빠르고 강렬한 비트의 댄스뮤직이 다시 플로어를 점령하기 시작하자 마치 꿈결에서 깨어난 사람들인 양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희원은 선우에게 아무 얘기라도 좋으니 뭔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느꼈지만 결국 아무런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먼저 플로어를 내려와 수영이 기다리고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 한 컵을 원 샷으로 벌컥 벌컥 들이켰다.
'냉수 먹고 속 차리는 거야, 채희원. 절대로 착각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니?! 착각하지 말자. 착각... 응? 응?'
하지만 희원의 뇌리에선 한 쪽 팔로 부서져라 그녀를 감싸안고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선우의 두 눈동자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뭐였지? 선우오빠의 눈빛은 마치... 아아, 아니야. 아니야. 그래, 조명탓이야. 다 그 흐느적흐느적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음악 탓이야. 착각하지 말라니까, 채희원! 착각이야, 착각! 착각!'
희원은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수영의 존재는 잠시 까맣게 잊은 채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계속해서 콩콩 쥐어박았다.
수영은 맥주병을 기울이며 쓴웃음을 지은 채 생각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희원이가 저 정도로 은선우한테 푹 빠져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말야. 흠... 그렇담 나야 말로 안일한 작전 가지고는 큰 코 다치기 쉽상이겠군.'
그는 선우의 품에 안긴 희원이 블루스 타임이 끝날 때까지 어떤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고 있는 지를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상황은 수영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게다가... 희원을 바라보는 선우의 시선 역시 만만치 않았다. 수영은 선우가 그저 단순한 질투나 소유욕 때문에 자신을 훼방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해냈다. 수영은 같은 남자의 눈으로 은선우가 채희원을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전전긍긍하면서 진심으로 그녀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희원은 물론이거니와 선우 본인 자신조차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수영에게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어 줄 것이다.
'후후, 은선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웬만하면 그냥 양보해 줄 수 도 있겠는데 나도 점점 이 어리버리 쑥맥이 진심으로 좋아지려구 하거든.'
"희원아."
"네에?"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느라 잠시동안 수영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희원이 깜짝 놀라며 수영 쪽을 돌아봤다. 수영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물끄러미 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수영 선배랑 같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네. 아휴, 정말 잊어버릴 일이 따로 있지... 이 맹꽁아.'
희원은 수영에 대한 미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배시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선배님, 미안해요... 선우 오빠 때문에 기분 상하셨죠.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선우 오빠 원래는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인데 오늘은 저 때문에... 나름대로는 동생... 걱정하느라......"
뻘쭘한 얼굴로 선우를 변명하느라 여념이 없는 희원을 보면서 수영은 피식 웃었다.
'이 바보야, 니가 무슨 사정으로 그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지는 몰라도 선우는 널 동생으로 생각 안 해. 여지껏 그것도 몰랐니? 쑥맥... 이 골동품 전시관에 앉혀 놓으면 딱 알맞을 녀석아.'
"희원아."
"예에..."
"우리 사귀자."
"예에?!"
희원은 순간 자신이 수영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내를 가득 메운 음악소리 때문에 말소리 전달이 잘 안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원은 수영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목청껏 소리 높여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러자 수영 역시 희원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한 손으로 희원의 턱을 감싸쥐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희원의 얼굴을 바싹 끌어당기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 너한테 마음 있다. 우리 사귀자."
아무리 귓전을 쨍쨍 울릴 만큼 음악소리가 요란하다고 해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수영이 외친 소리를 못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희원은 너무도 갑작스런 수영의 얘기에 말문이 막힌 채로 수영의 손에 여전히 턱을 잡힌 자세로 멀뚱 멀뚱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저 자식이 이젠 또 무슨 짓을......!'
불안한 마음으로(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희원과 수영 두 사람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선우가 또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채린이 선우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의자에 도로 앉혔다.
"선우씨, 팔촌인지 육촌인지 아무튼 저 여동생도 사생활을 가질 권리는 있어. 보아하니 미성년자도 아닌 것 같은데 선우씨 이러는 거 너무 오버야. 오늘 선우씨 정말 이상하다. 자기처럼 냉소적인 사람이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 정말 낯서네. 한편으론 저기 앉은 여동생한테 질투까지 나려고 하는 걸. 선우씨를 이렇게 흥분시키다니......"
정신 나간 듯한 선우의 행동으로 잔뜩 독이 올라있는 채린을 달래기 위해 희원이 팔촌 여동생이라 신경 쓰여서 그런다고 대충 둘러댄 선우에게 채린이 짐짓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희원과 수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선우는 결국 채린의 만류를 뿌리치며 다시 일어섰다.
"채린아, 미안하지만 나 먼저 들어가봐야 겠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는 채린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냉담한 어조로 그렇게 내뱉고는 성큼 성큼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선우씨, 선우..."
눈곱만큼의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선우의 냉정한 태도에 또 다시 열이 오른 채린이 혼자 씨근거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수영은 토끼처럼 눈만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말문이 막혀있는 희원의 얼굴을 아주 재미나다는 듯 쳐다보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서, 선배님......"
"왜? 싫어?"
"저기 난..."
"채희원!"
어느 틈엔가 그들의 자리 앞에 나타난 선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희원의 이름을 불렀다.
"선우오빠..."
"시간이 많이 늦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선우는 다짜고짜 희원의 팔을 끌어 잡아 일으켜 세운 후 수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영이라고 했나? 앞으로 우리 순진한 희원이 이런 데 끌고 다닐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쨌든 만나서 반가왔다."
얼음처럼 차디찬 표정의 선우가 가시 돋힌 어조로 재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희원의 손을 끄러 잡고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오늘은!"
수영 역시 잔뜩 가시 돋힌 어투로 응수했다.
"이 쯤에서 내가 일보 양보하겠지만 앞으론 팔촌 오빠라고 해서 그냥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은선우씨."
수영의 말이 끝나자 선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선우에게 손을 끄러 잡힌 채 난감한 얼굴로 수영을 향해 꾸벅 꾸벅 인사를 하며 멀어져가는 희원을 바라보며 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은선우. 밥맛 없는 자식.'
희원은 선우에게 손을 잡힌 채 왠지 몹시 성이 나 있는 듯 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말없이 따라 걸었다. 선우의 서슬 퍼런 기세에 잔뜩 주눅이 든 희원이었지만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또 큰 잘못도 없으면서 자신은 왜 그렇게 죄인처럼 끌려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희원은 선우가 어째서 그토록 노골적으로 수영에게 반감을 드러내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한 번쯤은 선우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희원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왜?
희원은 자문해 보았다.
물어보나마나 선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그 지독히도 쌀쌀맞은 충고들이 겁났던 것일까? 수영이 바람둥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그랬다, 혹은 희원의 현재 처지가 누구랑 연애나 하고 다닐 입장이 아니잖느냐는 식의 잔소리를 듣게 될까봐서?
아니었다. 결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희원이 부질없는 희망임을 불 보듯 뻔히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가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마 선우의 입을 통해 자신의 실낱같은 희망조차 꺾어버리는 대답을 듣게 될까봐, 그로 인해 또 다시 상심하게 될까봐 그게 두려워서 묻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선우의 두카티 앞에 도착했을 때야 선우가 겨우 입을 떼었지만 그것도 단 두 마디.
헬멧을 건네면서 "써."
오토바이에 오르며 "타."
고작 그게 다였다.
희원은 묵묵히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헬멧을 뒤집어 쓰고 선우를 따라 오토바이에 올랐다.
"꽉 잡아라."
선우의 오토바이가 시원스런 소릴 내며 출발했다.
'으악!'
선우는 출발하자마자 굉장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희원은 얼떨결에 선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팔과 가슴 전체에 선우의 탄탄한 몸과 후끈후끈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또 다시 그녀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보다 더 크게, 오토바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보다도 더 선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