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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3/75)

   

# 12.

  "희원아, 너 뭐 좋아하니?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 아님... 인도 요리나 중국 요리로 할까? 것두 아님 퓨전요리는 어때?"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러니까 선배님 좋아하는 걸루 같이 먹어요."

  "야, 요즘엔 너처럼 자기 주장 없이 남자 하는 대로 따라하는 여자는 매력 없어."

  "그런가요? 음... 그래도 못 고르겠는데요." 희원이 눈쌀을 찌푸리며 난감한 듯 말했다.

  "그래, 다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난 그래도 지금 그대로의 니 모습이 좋다. 사실 요즘엔 저 잘났다고 톡톡 튀는 게 매력인 줄 아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

 왠지 의미심장한 눈길로 희원을 바라보는 수영의 시선을 의식한 희원은 갑자기 뻘쭘해지고 말았다. 그런 모습에 수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아이고 이런 쑥맥... 보다 보다 너 같은 쑥맥은 정말 처음 본다.'

 "좋아, 그럼 오늘은 희원이 너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다. 먹자는 거 같이 먹고 가자는 데 같이 가고. 알았지?"

  "음... 상황 봐서요."

  "요 녀석 봐라. 그 새 튕기네. 야, 암튼 배부터 채우자."

 수영은 희원을 이끌고 엘리베이터 있는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린 후 꼬뜨 다 쥬르란 상호의 프랑스 식당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건물 바깥쪽이 아닌 안 쪽을 향하고 있는 창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 밖을 내려다보니 수중에 환하게 불이 켜있는 커다란 풀이 눈에 들어왔다. 어스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풀 가장 자리에 서 있던 예쁜 오렌지 빛 가스등들도 하나 둘 깜빡깜빡하고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오렌지 빛 가스등 위로는 훨씬 더 농도 짙은 오렌지 빛 기운이 하늘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고 잿빛 구름, 분홍색 구름, 빨간 구름, 보랏빛 구름, 검은 구름들의 행렬이 마치 집으로 귀가하는 양떼들처럼 어디론가 줄줄이 떼지어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꼬르르륵.

 '아이고 이런...!'

 도대체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배꼽 시계가 눈치도 없이 울렸다. 그것두 아주 힘차게!

  "아, 아니 제가 오늘 아침하고 점심을 통 부실하게 먹는 바람에......"

  "혹 다이어트 같은 거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하지 마라. 난 삐쩍 마른 여자는 아주 질색이거든. 그나저나 여기 메뉴판 있다. 빨랑 골라봐라." 말을 마친 수영이 킬킬거리며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희원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얼른 메뉴판을 받아들고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주책없음을 소리 없이 궁시렁 거리며 메뉴판을 훑어보던 희원. 불어가 도통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게다가 메뉴판에서 발견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무리 메뉴판 전체를 훌렁 훌렁 넘기고 봐도 그 어느 장에서도 가격 표시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기....." 희원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입을 열었다.

  "너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나한테 대충 아무거나 시켜 달래려고 그러는 거지?!" 수영이 넘겨짚으며 씨익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구... 이 메뉴판엔 왜 가격표시가 없죠?" 희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아... 난 또...하하하. 여긴 멤버쉽제 클럽인데 1년 회원권 단위로 회비를 지불하면 식사고 음료고 아님 헬스클럽이나 골프 연습장 등 이 클럽 내 있는 건 뭐든 그냥 이용할 수 있어."

  "그랬었군요... 난 어째 메뉴판에 가격표가 없나해서 이상하다 했네... 참, 전 아무거나 선배가 알아서 맛난 걸루 시켜주세요, 그럼. 흐흐."

  "나 원 참. 채희원. 여자가 웃음이 그게 뭐냐." 말은 나무라는 투였지만 수영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희원을 바라보며 계속 히죽거리고 있었다.

 음식이 처음 나왔을 때 희원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식욕을 자제하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요 것 조 것 끊임없이 나오는 코스 요리를 먹는 동안 희원은 한결 같이 기가 막힌 음식 맛에 자제력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도 다 있나.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자니 성진오빠 생각이 절로 나네. 불쌍한 성진오빠 점심도 라면으로 떼웠는데 저녁도 못 챙겨주고.....'

 희원은 불현듯 집안에 단 둘이 남아있을 성진과 준희를 생각하니 입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 수영은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다양한 표정으로 맛을 음미하던 희원이 문득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하는 그 변화무쌍한 과정을 줄곧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와인이라도 한 모금씩 곁들이지 그래?" 수영이 자신의 와인잔을 들어보이며 희원에게도 권했다.

  "아니요... 제가 실은 알코올에 민감한 체질이라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셔요." 희원이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호오, 그래? 아주 쑥맥의 조건을 골고루 갖추었군. 그럼 내친 김에 어디 한 번 더 캐고 들어가볼까.' 

 희원은 순간 수영이 눈이 번뜩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너 키스는 해봤니?"

  "켁!" 

 난데없는 수영의 질문에 희원은 간신히 물 한 모금을 삼켜내곤 얼굴이 새빨개졌다. 오늘 새벽 벼락처럼 경험했던 선우와의 첫 키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런 희원의 반응을 실눈을 뜨고 지켜보던 수영이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섹스는?"

  "켁켁! 쿨럭, 쿨럭!"

 키스는 해봤냐는 낯뜨거운 질문에 몸둘 바를 모르던 희원이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연신 물만 들이키던 중 수영이 한결 더 낯뜨거운 질문을 해오자 그녀는 급기야 사레가 들고 말았다. 

 수영은 불에 데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사레까지 걸려 쿨럭대는 희원을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아직까지 처녀 딱지를 못 뗀 게 분명하군.'

  "서,선배... 너무 짓궂어요......"

  "내가 좀 짓궂었나? 미안 미안. 그냥 농담이었어. 그나저나 이제 배는 채웠으니 슬슬 몸이나 풀러 가볼까?" 

 수영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목에서 뚝뚝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으며 말했다.

  "예? 또 어디로..."

  "넌 오늘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지. 자, 토달지 말고 가자!"

  

  "선우씨, 갑자기 나이트는 왜...? 그냥 집에 있자더니." 

 채린이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가겠다던 선우가 불쑥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답답해서." 선우가 예의 무뚝뚝한 태도로 돌아와 대꾸했다.

  "치이... 아무튼 선우씨 변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채린은 은근히 선우와의 밤을 기대했다가 김새는 기분이었지만 더 이상 선우를 닥달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랬다간 지금처럼 선우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날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걸 영리한 그녀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매스컴이나 스캔들 따위는 아랑곳 않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팔장을 끼고 나이트 클럽 안으로 들어가 빈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맥주 몇 병하고 안주 아무거나 좀 갖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무심히 플로어를 쳐다보며 주문을 하던 선우가 불현 듯 말을 멈추었다. 플로어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돌처럼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선우씨, 왜 그래?" 채린이 그런 선우를 쳐다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처음 플로어에서 희원과 수영의 모습을 발견한 선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희원이 이런 곳에 와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트의 현란한 조명을 받고 서 있는 희원의 차림새 또한 전혀 그녀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 희원이었다. 온갖 개폼을 잔뜩 잡고 있는 원단 날나리 같은 수영이란 놈 곁에서 수줍게 웃으며 어색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분명 희원이었다!

  "저 양아치 같은 새끼가...!"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물컵을 쥐고 있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잠시동안 두 사람의 모습을 주시했다. 어디서나 눈에 띌 만큼 어리 버리한 표정의 희원을 앞에 두고 선우의 눈으로 보기에 수영은 생쑈를 하고 있었다.

 희원은 야리꾸리한(희원의 생각으로) 조명 아래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유연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는 수영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수영을 다시 만나게 된 날 희원은 생각했었다.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여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또 다른 뭔가에 대해... 바로 그의 섹시함에 대해. 확실히 어리 버리한 희원의 눈에도 그는 분명 섹시한 남자임에 틀림 없었다. 그리고 익숙치 않은 조명과 비트가 강한 음악은 희원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희원은 점차 기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리듬에 맞춰 유려하게 몸을 흔들고 있는 그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뇌쇄적이고도 관능적인 매력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도취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순진한 희원에게는 너무도 낯선 자극이었다. 그러나 그 생경함에도 불구하고 희원의 가슴은 야릇한 기분으로 울렁거리고 있었다. 희원의 시선이 문득 가슴까지 풀어헤친 수영의 셔츠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과 땀에 젖은 탄탄한 가슴의 일부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아찔함을 느꼈다. 수영에게 꽂혀드는 뭇여성들의 추파 따위는 이제 신경 쓸 겨를조차도 없었다. 자신만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수영을 제외하고 주위가 온통 하얗게 사위어 버린 느낌이었다. 희원은 그렇게 홀린 듯 수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선우의 곁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채린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줄창 희원과 수영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선우는 입 안이 바싹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희원이 넋빠진 사람처럼 수영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장육보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던 선우가 맥주를 병째 들고 벌컥벌컥 들이켜 대더니 급기야 채린의 손목을 느닷없이 나꿔채서는 플로어로 나갔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유연한 몸놀림으로 리듬을 타고 있던 수영은 손 안에 든 먹이감을 내려다보는 야수처럼 번뜩이는 시선으로 희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입끝을 말아 올리며 만족한 웃음을 흘리고 있던 그의 몸짓은 한층 더 자극적이고 뇌쇄적이 되어갔다. 

 그러나 노련한 춤꾼이었던 그의 스텝이 불현듯 꼬이면서 수영이 엉거주춤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다. 누군가 몸으로 그의 등을 냅다 밀어댄 것이었다. 순간 열을 잔뜩 받은 수영이 뒤로 고개를 홱 돌리며 날카로운 시선을 날렸다. 

  '어떤 새꺄...!'

  "이런, 미안해서 어쩌나.....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일전에 그......"

 분명 고의적으로 자신을 밀쳐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은선우였다. 수영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까무라칠 듯 놀란 장본인은 희원이었다.

  '서, 서, 선우...오빠?!'

 수영의 뒤에서 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고 있던 사람은 분명 선우였다.

  "플로어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만... 실례했수다. 그나저나 여기도 이젠 물 많이 버렸네. 어중 떠중이들이 다 들어와서 개폼을 잡으니 말이야."

 선우가 과장되게 몸을 크게 흔들어대며 은근히 조소 섞인 말투로 수영에게 말했다. 

  '이, 이 자식이... 어휴, 희원이 앞만 아니었으면 그냥 확!'

  "아니 이거 희원이 팔촌오빠 아니십니까? 여기서 뵙게다니 뜻 밖이군요."

 수영이 이를 악문 채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니가 째려보면 어쩔건데, 이 날나리야.' 

  "나도 정말 뜻 밖이로군요. 그나저나 내 기억력이 좋질 못해서 그 쪽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데......"

 선우의 비아냥거림을 눈치 못 챌 수영이 아니었다. 그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느라 뒷골이 다 땡길 지경이었다.

  '흥, 니가 희원이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날 물로 봤다간 큰 코 다칠걸.'

  "김수영이라고 합니다. 김.수.영."

  '어쭈 이 자식이 끝까지 눈 안 깔어.'

  "뭐 우리가 계속 연이 닿을 사이는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이름은 기억해 두지요."

 잠시 두 남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짜샤, 그건 니 희망 사항이구.'

  "글쎄요,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은데요."

 수영이 그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얼빠진 얼굴로 서있던 희원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응수하자 순간 선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영은 선우를 향해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희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우린 좀 쉬러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이런, 어여쁘신 여자분과 동행이셨군요. 그럼, 저흰 신경쓰지 마시고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십쇼."

 수영은 기분 나쁜 웃음을 씨익 날리더니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고 있던 희원을 끌고가다 시피 하면서 플로어를 내려갔다.

  '저 뺀질이 같은 자식이!'

 채린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고 있는 선우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

  "누구야? 저 사람들? 팔촌 오빠란 소리는 또 뭐구?"

  "그만 내려가자."

 간신히 분을 삭이며 선우가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채린을 남겨둔 채 먼저 플로어에서 내려갔다.

 한편 수영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로 돌아온 희원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내내 선우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또 그의 옆에 앉아있는 인형같은 여자도......

  '어휴, 어쩌면 좋아. 하필 여기서 맞닥뜨릴 게 뭐람. 그나저나 저 여자가 한채린? 정말 예쁘게 생겼네...'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해. 우리가 뭐 죄지은 거라도 있냐?" 수영이 짐짓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희원을 향해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야, 팔촌 오빠면 팔촌 오빠지 팔촌 여동생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할 권리는 없는 거 아냐?"

  "그야 그렇긴 하죠..."

 희원은 막상 수영에게 뾰족히 자신의 처지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선우에게 떳떳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레드비트네 집 가정부라고 해서 사생활조차 갖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오늘 그녀는 당당히 성진과 준희에게 허락을 받고 나온 것이었다.

 희원이 잠시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수영 역시 뭔가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귀가 째질 듯 시끄럽던 음악이 잦아들고 대신 느린 템포의 음악이 흐느적 흐느적 흐르기 시작했다. 블루스 타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 나가자!" 수영이 먼저 일어서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네?"

  "여기까지 와서 블루스 한 판 안 땡기고 가면 섭하지. 자, 빨리 나와."

  "아, 나 춤 못추는 거 봐서 알잖아요. 선배님." 희원이 당황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만 오면 돼. 이 선배님 실망하는 얼굴 보고싶니?"

 희원은 잠시 선우가 앉아있는 좌석을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다 못내 수영의 눈빛을 거스르지 못하고 힘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다시 플로어에 오르자마자 수영은 희원의 허리에 팔을 감은 후 그녀의 몸을 바짝 끌어당겨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선, 선배...!" 

 당황한 희원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빼려했지만 그럴수록 수영은 그녀를 더욱 바짝 끌어안을 뿐이었다.

  "쉬잇! 잠자코 있어. 블루스는 원래 이렇게 추는 거야."

 수영이 하도 희원을 바짝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은 수영의 맨 가슴에 꼼짝없이 밀착되고 말았다. 그의 향수냄새와 땀냄새가 어우러져 자극적인 체취를 이뤄내고 있었다. 희원의 눈빛이 차츰 꺼질 듯 흐려지고 있었다.

  "희원아... 희원아......" 어딘가 열에 들 뜬 듯 하면서도 쉰 듯한 음성으로 수영이 희원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네에..."

  "내 심장 뛰는 소리 들리니?"

  "... 네에......"

  "나 너한테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난 말야 널......"

  "여어, 분위기 좋은데 방해해서 미안..." 

 느닷없이 끼어든 선우의 묵직한 음성에 희원과 수영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우리 팔촌 여동생하고 부르스 한 번 춰 볼 기회가 없었더라고. 뭐 나이트에 가족끼리 놀러오는 건 우습고 이렇게 희원이랑 우연한 기회에 부딪혔을 때 아니면 언제 부르스 한 번 땡겨보겠느냐는 생각이 불쑥 들어서 말야. 미안하지만 양보 좀 하시게나." 선우가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러시죠... 저야 앞으로도 기회가 많을테니 말입니다." 수영은 쓰디 쓴 침을 삼키며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안된다고 우기는 것처럼 우스꽝스런 광경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갑자기 파트너가 뒤바뀌어 버린 희원은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선우에게 손을 포개고 그의 품에 안긴 희원의 몸과 마음은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심장이 요동치듯 쿵쾅거렸고 편하게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수영에게 느꼈던 아찔함이나 가슴 떨림과는 다른 묘한 전율감이 느릿한 템포의 음악과 함께 그녀의 전신에 휘감겨 들었다.

 문득 선우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느낌에 희원은 고개를 들어 선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깊이 있는 두 눈동자가 고요히 희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수영에게서 그녀를 떼어내고 이토록 감각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희원은 마치 미궁 속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희원은 생각했다. 그 미궁 속에서 평생을 허우적거리다 죽어도 좋으니 제발 이 순간이, 이 음악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선우는 어줍잖은 심술꾼에 훼방꾼 노릇까지 해가면서 무슨 정신으로 수영으로부터 희원을 빼앗아 끌어안고 있는지 자신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수영에게 바짝 밀착되어 안겨있는 희원을 보고 있노라니 온 몸 속의 피가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느낌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튕기듯 자리를 박차고 플로어로 올라왔던 것이다. 

 선우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지 착하디 착한 희원이 저딴 바람둥이에게 놀아나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자신에게도 그 정도쯤 간섭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그러나 자꾸만 선우의 마음은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 닿아있는 희원의 감촉을 실감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가슴께에서 슬쩍 슬쩍 스칠 때마다 그저 단순한 간섭. 단순한 의리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던 감정들은 수 천 수 만 조각의 퍼즐조각처럼 허무하게 흩어져버리고 대신 야릇한 색채를 띤 다른 뭔가로 꾸물꾸물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한편 수영은 희원과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팔촌 오빠는 개뿔...! 은선우, 정말 한 번 해보자 이거지. 좋아, 나도 시시한 게임은 흥미 없거든. 니가 날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어디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되는 지 두고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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