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 (12/75)

# 11.

 주저 주저하던 희원이 손이 마침내 선우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쓸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 사이로 촉촉하게 젖은 선우의 머리카락이 감겨들자 희원은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그 때 갑자기 선우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경직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희원을 거세게 밀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희원은 놀라움과 더불어 까닭 모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욱한 잿빛 안개 속에 침잠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 어둡고 침울한 선우의 눈빛을 마주보며 희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한동안 말없이 희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선우가 불현듯 그녀를 외면하며 지독히도 감정이 결여된 건조한 음성으로 나즈막히 말했다.

  "내가... 실수했다. 미안하다. 나 지금... 혼자 있고 싶은데... 내 방에서 좀 나가줄래."

 실수라는 말... 그리고 당장 자기 방에서 나가 달라는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희원의 가슴에 꽂혀들었다. 희원은 수치심과 비애와 혼란스러움이 뒤죽박죽된 심정으로 잠시동안 선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희원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희원이 그로 인해 얼마만큼 상처를 받았는지 볼 수 없었다. 아니 차마 볼 용기가 없는 지도 모른다.

 이내 희원은 소리 없이 일어나 선우의 방을 조용히 나갔다.

 방 밖에서 그녀가 달칵하고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을 때야 비로소 선우는 고개를 돌려 희원이 사라진 방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후우...... 은선우,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니.....'

 그는 벽에 고개를 기대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희원은 선우의 방을 나와 곧장 욕실로 달려가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세수를 했다. 두 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고 끼얹고 또 끼얹고를 수 십여 차례 반복했다. 

  '뭘 기대했니, 채희원. 응? 선우오빠는 니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성진오빠나 준희오빠처럼 네게 자상한 말 한 마디는커녕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널 이 집에 밥짓고 빨래나 하라고 고용한 가정부 이상으로 여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 집에서 먹고 자고 하니까 니가 분수를 망각했구나, 채희원. 주제파악을 좀 해라. 주제파악을.......'

 그녀는 문득 세면대 위에 걸린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토끼눈 처럼 빨개진 자신의 두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보처럼......

그녀는 다시 고개를 쳐박고 미친 듯이 얼굴에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그 날 아침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식사를 준비했는지 희원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려 쌀을 씻고 야채를 다듬고 밥통과 국냄비에 적정량의 물을 붓고 했지만 다행히도 워낙 손에 익은 일이다 보니 특별히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았나보다. 

  "야, 국물이 시원한 게 속이 확 풀어지네. 역시 순이가 끓인 무국 맛은 탁월하다니까."

 아침 식탁엔 여느 때처럼 선우도 함께 자리를 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는 기색이었다. 희원은 그렇듯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선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가슴이 저려왔다. 

 준희는 어젯밤 폭우 속에 선우가 오토바이를 몰고 나가는 바람에 희원이 많이 걱정을 했었다는 얘기를 언급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침 내내 어딘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희원과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하고 있지만 무엇 때문인지 희원에게 의도적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는 게 분명한 선우와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야, 니가 손보고 있던 악보 말야. 가능하면 오늘 내로 좀 끝내봐라. 이제 슬슬 신곡 준비에 들어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실장이 은근히 성화더라." 성진이 선우의 안색을 살피며 넌즈시 말했다.

  "나 좀 있다가 나가봐야 돼." 

  "어딜?"

  "채린이 만나러." 짦막하게 대꾸를 마친 선우는 훌쩍 주방을 나가 총총히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하여간 저 놈은 지 맘대로 라니까, 어휴. 그나저나 이번에 한채린이는 제법 오래가네. 선우녀석이 맘을 좀 잡았나." 

 딸가당.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내내 말없이 앉아 연신 맨밥만 입에 떠 넣고 있던 희원의 손에서 숟가락이 힘없이 빠져나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숟가락을 맥없이 집어드는 희원을 보며 성진이 말했다.

  "순이야, 너 오늘 어디 아프냐? 아까부터 영 기운이 없어 뵌다."

  "아, 아니예요. 아프긴요...... 어젯밤 천둥소리 때문에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봐요."

  "그래?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면 설거지는 준희한테 맡기구 올라가서 한 숨 푹자라." 성진이 자상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요, 희원씨. 안색이 많이 피곤해 보여요. 뒷정리는 걱정 말고 올라가서 좀 쉬도록 해요." 천둥소리보다 선우 걱정에 희원이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준희도 한 마디 거들었다.

  "괜찮아요. 이따가 한가할 때 낮잠 한 숨 자죠 뭐."

 희원은 그렇듯 자신을 자상하게 배려해주는 두 사람으로 인해 가슴이 뭉클해져 옴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선우에 대한 서운함이 걷잡을 수 없이 들고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새벽녘에 선우의 방에서 벌어졌던 일이 그의 실수라고 해도 마치 희원에게 들으라는 듯 한채린을 만나러 나가겠다는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선우의 태도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그의 태도는 마치 희원에게 새벽녘에 있었던 일로 엉뚱한 착각이라도 품고 있다면 당장 깨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에 선우는 결국 한채린을 만나기 위해서 집을 나갔다. 희원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뚫어놓고 그렇게 선우는 무심한 얼굴로 집을 나갔다.   희원은 선우가 누굴 만나든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하지만 온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 버린 듯한 기분은 부인할 수 가 없었다.

 선우가 나간 이후로 희원이 더욱 시무룩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준희가 성진을 부추겨 그 날 점심은 라면으로 떼우자고 제의했다.

  "라면은 몸에 안 좋아요." 

  "가끔씩은 괜찮아요. 라면 먹어본 지가 너무 오래라 먹구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라면을 먹자구요. 내가 실력 발휘 한 번 하죠. 희원씨 몰랐죠? 내가 다른 건 몰라두 라면 하나는 끝내주게 잘 끓이잖아요." 준희가 짐짓 으스대며 말했다.

  "그래라, 순이야. 듣고 보니 나도 준희가 끓인 라면 맛이 그리운데." 성진이 입맛 다시는 시늉을 했다.

 문득 두 사람이 자신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희원은 두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꼈다. 

  '정신차려, 채희원! 니 본분을 잊지 말아!'

 희원은 얼른 기운을 추스리고 준희를 도와 즐거운 마음으로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라면 냄비를 가운데 두고 서로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예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점심을 먹었다.

 희원이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다."

  "어? 수영선배...?" 뜻 밖의 목소리에 희원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아니... 전화번호를 어떻게 아셨어요?"

  "다 방법이 있지. 그나저나 오늘 일요일인데 뭐해. 나와라."

 다짜고짜 나오라는 수영의 말에 희원은 대답을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뭐야. 왜 대꾸가 없어? 나름대로 터프한 척 하면서 데이트 신청한 건데 그럼 내가 민망해지잖아."

  "데, 데이트... 신청요?" 희원이 눈이 좀 전 보다 더 커졌다.

  "그래." 수영이 짐짓 볼멘 듯한 소리로 짤막하게 대꾸했다.

  "어... 저기 전......."

  "안 나오면 집으로 쳐들어 갈 거다. 그럴까?"

  "아뇨, 아뇨! 제, 제가 나갈게요..."

  "야,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거로구만. 뭐, 좋아. 희원이 니가 귀여우니까 내가 한 번 봐준다."

  "그럼... 어디로 나가면 될까요...?" 

 수영과의 통화를 끝낸 희원이 한동안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생각했다.

  '이상해. 수영 선배가 데이트 신청을 해왔는데 정신이 까무룩 해질 만큼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왜 이렇게 덤덤하기만 할까...... 그나저나 오빠들한테 미리 허락도 받지 않고 엉겁결에 나가겠다고 했으니.....'

 희원은 자신의 방과 가까운 준희의 방으로 가서 외출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물론 괜찮죠. 냉장고에 반찬도 많고 하니까 우리 저녁 걱정은 말고 재미있게 놀다와요. 그러고 보니까 희원씨한테도 따로 휴일을 정해줬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우리 눈치 안보고 편하게 사적인 시간도 갖고 그럴 텐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네."

  "아니예요. 준희오빠. 짬짬히 노는 시간 많은데요 뭘. 필요할 땐 오늘처럼 제가 양해를 구하면 되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희원은 옷장문을 열고 그 동안 한 번도 입지 않고 옷장 안에만 고이 모셔두다시피 했던 투피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작년 여름 백화점 임시 판매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옆 매장 직원언니의 부추김에 못 이겨 그녀의 매장에서 세일가격으로 장만한 투피스였다.

 희원은 거울 앞으로 다가가 투피스를 자신의 몸에 대보았다. 연보랏빛이 감도는 하늘하늘한 샤넬라인의 실크 스커트에 제법 타이트한 라인의 연회색빛 실크 나시의 매치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명색이 수영 선배와의 데이트인데 최소한 여자처럼은 보여야 될 거 아냐.'

 희원은 옷을 갈아입은 후 거울 앞에 앉아 가볍게 피부화장도 하고 입술에는 분홍빛 립스틱을 살짝 발랐다. 평소에 늘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칼도 풀어 내린 후 정성 들여 빗질을 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참 것두 일이네.'

 서둘러 방을 나온 희원이 부랴부랴 계단을 뛰어 내려갔을 때 성진과 준희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변신에 가까운 희원의 차림새를 보더니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희원은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순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져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그렇게 파격적인가...?!'

  "저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희원은 두 사람의 시선을 도저히 더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부랴부랴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희원이 나간 뒤에야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순일아. 방금 여기서 후딱 사라진 그 아리따운 처자가 누구냐?"

  "어허허, 야아... 여자들은 역시 오묘한 존재들이야. 꾸미기에 따라 분위기가 180도씩 확확 달라지니 말이야. 음... 선우형도 방금 희원씨 모습을 봤어야 되는 건데. " 준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선우가 보고 안보고 그게 문제냐 지금! 이거 초비상 사태다. 쟤가 저렇게 이뿌게 하고 누굴 만나러 가는 거냐 근데? 이거 미행이라도 붙어야 되는 거 아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표정의 성진이 말했다.

 선우는 채린의 아파트 거실 쇼파에 길게 누운 채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졸음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 밤 몇 시간동안이나 비를 흠뻑 맞고 돌아다니곤 잠조차 제대로 못 잔 탓이었는지 머리가 묵지근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의 머리를 아니 그의 가슴까지 묵지근하게 내리 누르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뇌리에선 아무리 몰아내려고 노력을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선우를 바라보던 희원의 얼굴과 자신도 모를 강렬한 충동으로 비롯된 발작적인 키스의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시각각 더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문득 문득 선우의 코끝에서 희원이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저으기 당황스러울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폭 감싸 안긴 희원의 포근한 몸.

 그녀의 체온이 가져다주는 느낌... 

 추위에 떨다 들어와 따뜻한 목욕물 안에 몸을 담글 때 온 몸 구석구석으로 번져가는 그 평온함과 안락감은 선우가 일찍이 어떤 여자에게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선우의 머리 속엔 자신도 모르게 참으로 많은 희원의 모습과 체취들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동그란 얼굴. 동그란 눈. 동글동글한 콧망울. 어린애같이 동그랗고 도톰한 입매.

 언제나 방실대며 웃는 얼굴. 

 그러다 자신과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화들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가도 그녀는 다시 홍조띤 얼굴로 살포시 웃곤 한다.

 아무리 궂은 일을 시켜도 얼굴 한 번 찡그릴 줄 모르는 그녀.

 못된 친구에게 모욕을 당해도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일 생각도 못하는 바보 같은 그녀.  선우는 종종 희원에게서 마른 풀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충분한 햇살을 받고 따뜻하게 데워진 건초더미 위에 누웠을 때 나는 그 푸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

 선우는 불현듯 희원의 얼굴이 못 견디도록 보고 싶은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 잡혔다.

  "선우씨... 자는 거야? 여기 커피 뽑아 왔는데....."

 채린이 선우가 부탁한 원두 커피를 들고 쇼파로 다가와 말했다.

  "채린아.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선우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자기... 진심이야...?"

 채린은 설레임이 가득한 얼굴로 쇼파 위에 누워있는 선우의 조각같은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연예계의 스캔들 메이커로 불리우는 은선우 였지만 여지껏 어떤 여자 연예인과도 아니 어떤 여자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저 장난처럼 이 여자 저 여자와 데이트를 즐긴다는 것을 뻔히들 알면서도 그 시한부 상대라도 되보겠다고 선우에게 기를 쓰고 달라붙는 쪽은 여자들이었다. 

 채린도 그 중 하나였다. 그에게 특별한 여자가 못 되어도 좋았다. 일 주일이 되었든 한 달이 되었든 시한부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던 채린이었다.

 채린은 선우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당겨 그의 감은 눈거풀에 입을 맞춘 후 고집스러워서 더욱 탐나는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갑자기 선우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적극적으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깊고 깊은 키스는 계속 되었다. 채린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여지껏 선우가 그녀에게 그토록 오랜동안 강렬한 키스를 해 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채린의 관능적인 입술에 거칠고 탐닉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채린은 알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고 있었는지를.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하는 그녀와의 키스에서 그가 어떤 실낱같은 느낌을 갈망하면서 그녀의 입술과 혀를 유린했는지를..... 

 클럽 E.O.

 희원은 상호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단아한 흰 색 건물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문 앞에서 안내원인 듯 보이는 크림색 정장 차림의 남자의 제지를 받았다. 

  "멤버 십니까? 처음 뵙는 얼굴이라 그러니 죄송하지만 카드를 좀 제시해 주십시오."

  "카드...요? 전 여기 누굴 좀 만나러 왔는데요?"

  "여긴 멤버쉽제 입장이라 멤버카드가 없으시면 입장이 불가합니다. 누굴... 만나러 오셨습니까?" 사내가 희원의 차림새를 쭈욱 훑어보면서 기분 나쁜 시선으로 물었다.

  "김.. 수영씨요."

  "아, 예! 그러셨군요.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시죠." 

 김수영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사내가 화들짝 놀라더니 절도있는 몸놀림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희원은 그런 사내를 어리벙한 얼굴로 쳐다보다 그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섰다. 희원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사내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짜아식, 아주 취향도 가지 가지로군. 이젠 인형같은 애들한테 물렸나보지. 하긴 아직 물이 덜 오른 풋과일처럼 풋풋한게 색다른 맛은 있겠군.'

 문 안에 들어서자 그 안에는 커다란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달려있는 커다란 홀이 있었고 반들반들한 대리석 타일이 깔린 중앙 복도를 따라 몇 개의 입구가 보였다. 희원은 도무지 어느 입구로 들어가야 할 지 감이 잡히질 않아 핸드폰에 찍힌 수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막 건물 안으로 들어는 왔는데 도무지 어느 입구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첫 번째 입구로 들어오면 돼."

 첫 번째 입구로 다가간 희원의 눈에 'Beer Bar'라는 금속 활자가 나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이 달리지 않은 좁다란 아치형의 입구 안에 들어서자 마자 길다란 바와 함께 바 뒤편에 진열된 수 십여 종의 맥주병들이 시선을 끌었다. 

 바를 따라 걷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크지 않은 테이블 주변으로 편안히 몸을 묻히고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소파들이 배치된 좌석들이 여덟 개쯤 있었고 제일 안 쪽에 포켓볼을 칠 수 있는 다이 세 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바 안은 그닥 붐비지도 그렇다고 한산하지도 않은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영의모습을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고 있는 희원을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귀티가 아니 부티가 좔좔 흐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하나 같이 명품족임이 분명했다. 희원은 괜스레 주눅이 드는 기분을 맛보았다.

 뻣뻣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좌석들 사이를 걸어나가며 수영을 찾던 희원의 눈에 한 쪽에서 포켓볼을 치고 있던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리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흰 색 바지에 오른 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가슴께 까지 연결되는 커다란 검은 장미가 프린트된 풍성한 흰 색 셔츠를 멋들어지게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희원은 우울했던 마음으로 잊고 있었던 수영에 대한 설레임이 불현듯 되살아남을 느꼈다. 

 수영은 뭐랄까... 카리스마와 함께 묘한 불안감이 느껴지는 선우의 분위기와는 다른 뇌쇄적인 매력을 물씬 발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희원이 왔... 오우, 오늘 너 분위기 죽인다." 

 희원의 부름 소리에 돌아보던 수영이 한 쪽 눈썹을 치켜 뜨며 자못 놀란 듯 말했다. 희원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기만 했다.

  "야, 이 귀여운 여자분은 누구시냐?" 

 수영과 함께 포켓볼을 치고 있던 남자 하나가 수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다가서더니  희원을 향해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 역시 수영 못지 않게 귀족적인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넌 관심 꺼. 장차 니 형수님이 되실 지도 모르는 분이니까." 수영이 친구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밀어내며 대꾸했다.

  "야, 아직 형수님이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냐는 말도 모르냐 넌. 그리고 수영이 너한텐 이미 추종자들이 몇 트럭은 되잖아." 

 아예 희원 옆쪽으로 다가와 포켓볼 다이 위에 걸터앉은 수영의 친구는 노골적인 관심을 감출 생각도 없이 희원이 옆모습을 무안하리 만치 뜯어보며 이죽거리듯 말했다.

  '뭐, 뭐야... 이 사람은... 저렇게 노골적으로 대놓고 사람을 뜯어보다니... 으으...느끼해.....' 희원은 왠지 보이지 않는 벌레라도 온 몸을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이 자식이! 사돈 남 말 하지 말고 눈치껏 좀 빠져줄래? 아니다. 저녁 시간도 됐고 하니 희원아, 우리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자. 여기 더 있어봤자 이 녀석 추근대는 것만 상대해 줘야 될 것 같다. 그러게 왜 오늘 그렇게 이뿌게 하고 나왔어."

 수영이 희원의 팔을 끌어 잡고 앞장 서 걷기 시작하자 희원은 좀 전의 사내에게 꾸벅 목례를 하고는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희원과 수영이 바의 입구 쪽으로 멀어져가자 포켓볼을 치고 있던 두 어명의 사내들이 수영의 친구에게 다가와 물었다.

  "잰 모냐? 어디서 저렇게 독특한 캐릭터를 헌팅했대냐."

  "그야 나도 모르지." 

  "하긴 고급 음식도 맨날 먹다보면 물릴 때가 있지. 나도 가끔 저렇게 투박한 음식이 댕길 때가 있긴 하거든."

  "고것 참 풋내가 폴폴 나는 게 나름대로 삼삼한 데."

 사내들은 희원과 수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머리를 맞댄 채 계속 농담을 주고 받으며 키들거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