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 (9/75)

   

# 8.

  "어!" 

 자신을 아는 척하는 남자를 돌아보던 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람. 바로 김수영 선배였던 것이다.

  "야아, 채희원. 너 나 알아보겠니?" 수영이 희원을 향해 반갑게 웃으며 물었다.

  "아, 예에... 김수영 선배님 아니세요." 희원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말고요. 제가 어떻게 선배님을 몰라 볼 수가 있겠어요. 그나저나 선배님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이렇게 감격스러울 데가.......' 희원은 수영이 자신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채희원 너 그 동안 키도 많이 자랐지만 자칫하면 몰라볼 정도로 더 많이 이뻐졌다." 수영이 그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 웃음에 중고교를 통틀어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가슴을 설레이고 밤잠을 설쳤는지 본인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더 많이 이뻐졌다고? 그럼 예전에도 내가 이뻤다는 소린가?' 예의상 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희원은 하늘로 부웅 뜨는 기분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시원스럽게 웃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보며 희원의 마음속에선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번에 만났던 영서의 말처럼 수영이야말로 예전 보다 훨씬 더 멋있어 진 것 같았다. 원래 큰 키였지만 이젠 185센티도 더 되는 것처럼 보였고 수려한 외모에 걸맞게 더할 나위 없이 패셔너블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그는 마치 패션잡지 속에서 빠져 나온 모델 같았다. 

  "근데 너 이 학원 다녀?" 수영이 물었다.

  "네에."

  "언제부터?"

  "오늘부터요." 희원이 수줍음을 감추기 위해 배시시 웃으며 대꾸할 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래? 너 무슨 반인데?" 수영이 관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6개월 과정 B반이요."

  "이런... B반은 내 담당이 아닌데 아쉽네. 난 A반에서 일러스트 이론하고 드로잉을 가르쳐." 

  "예에." 희원은 못내 서운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학원 서무과로 달려가 반 좀 바꿔주면 안되겠느냐고 사정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수영선배가 직접 지도해주는 드로잉 수업이라니... 아쉬움에 속이 쓰렸다.

 엘리베이터 내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교실로 향해야 했다. 수영이 A반 교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모처럼 이렇게 만났는데 회포라도 풀어야지. 이따가 수업 끝나고 학원 앞에서 보자!" 

  "예에? 아 전......" 그러나 희원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영은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오빠들이 다들 집에 있어서 일찍 들어가야 되는데...... 하는 수 없지. 이따가 만나서 오늘은 시간이 안 된다고 얘기해야겠다.' 희원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B반 교실로 들어갔다.

 첫 수업인지라 과목마다 주로 오리엔테이션 식의 간단한 개념 설명만으로 그 날의 강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희원은 간단한 메모들을 필기한 노트를 가방에 집에 넣은 후 교실을 나와 학원 사무실로 향했다. 전에 만난 중학교 동창 영서를 만나 보기 위해서 였다.

  "박영서씨 오늘 월차라 출근 안 하셨는데요." 사무실 여직원 중 하나가 말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사무실을 나온 희원은 학원 입구에서 수영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남은 일이 더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희원은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빠방.

 희원이 밖으로 나섬과 동시에 자동차 클락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나던 쪽을 돌아보던 희원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 지고 말았다. 

  "와아!"

 그녀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마치 스텔스기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말 그대로 삐까뻔쩍한 자동차 한 대가 그녀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희원은 여지껏 봐온 차들 중에서 미랑의 빨강색 스포츠가 제일 멋진 차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있는 차를 보기 직전까지의 얘기였다. 

 방금 학원을 나온 몇 몇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근처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한결같이 그 검은 색 자동차에 꽂혀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서 조수석 쪽의 차 문이 부드러운 기계음을 내며 갈매기 날개처럼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엇! 말로만 듣던 걸윙도어 아냐?!'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안에 타고 있는 차주가 수영이라는 사실이었다.

  "야, 타!"

  '야, 타... 라고? 아아니, 야타족?! 에구구... 내가 수영선배를 두고 지금 무슨 생각을. 오오... 그나저나 이런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여전히 입을 헤벌린 채 침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얼굴을 하고 넋이 빠져있는 희원을 향해 수영이 채근했다.

  "채희원, 얼른 타라니까."

 수영의 채근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희원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수영선배님. 죄송해서 어쩌죠. 전 오늘 일이 있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 봐야 되요. 영서라도 시간 되면 두 사람이서라도 먼저 회포 풀으라고 할랬더니만 영서도 월차라 안 나왔다네요."

  "내가 너 보자고 했지, 걔 보자고 했냐? 섭하다, 채희원. 나 너 만나서 정말 반가왔는데. 희원이 넌 아닌가보네." 

 수영이 매우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렇게 말하자 희원은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며 대꾸했다.

  "아니예요. 저도 이렇게 선배님 만나 뵙게 되서 정말 반가와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 사정이 그렇게 됬네요... 죄송해요, 수영선배님."

  "됐어, 뭐 오늘만 날이냐. 앞으로 계속 보게 될텐데. 내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성급했다. 집이 어디냐? 급한 일이 있나본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게. 설마 그것까지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나 진짜 삐질 지도 모른다."

 희원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수영이 저렇게 까지 얘기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자신이 입주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는 집까지 그와 동행하는 것도 참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별 수 없지. 그냥 집 근처에서 대강 내려달라고 해야겠다.'

 해서 희원은 수영의 자동차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가 수영의 차에 오를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희원에게 날아 꽂힌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일 것이다.

  '오호, 차가 멋지니까 나까지 시선을... 음... 스타의식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로군. 으후훗! 희원아, 너도 별 수 없는 속물인가 보구나.'

  "우리 이게 몇 년 만이지? 나 고등학교 졸업하구부터 못 봤으니까 벌써 7, 8년쯤 되는 것 같다." 수영이 감회에 젖은 얼굴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희원은 새삼 나긋나긋한 그의 음성이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너 진짜 많이 달라졌다. 물론 그 때도 귀여웠지만 지금은 아가씨 태가 확 나는 걸." 수영이 마치 놀리는 듯한 말투로 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님은... 예나 지금이나 멋지시네요." 

 희원은 수영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마치 중학교 소녀시절로 되돌아간 듯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느라 손바닥에 절로 땀이 고였다.

 예나 지금이나 멋지다고? 아니다. 예전에도 멋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뭐랄까... 전보다 훨씬 더 여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뭔가가 있었다. 

 '눈빛? 목소리? 분위기? 음...... 섹시함!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야, 채희원 너도 나이 먹었다고 이상한 생각을 다 하는구나. 떽!' 

 아무튼 오랜만에 만난 희원과 수영은 차안에서 줄곧 중고등학교 시절 얘기와 친구들 얘기, 미술반 시절에 대한 추억과 고향인 춘천에 대한 얘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정말 십 여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차는 어느 덧 집 근처에 당도해 있었다.

  "어... 저는 저어기 저 앞 길가에서 내려주시면 되요, 선배님." 희원이 가방들을 챙겨 들며 말했다.

  "뭐야? 집 앞이 아닌데?" 수영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집 앞까지 금방이니까 걸어가면 되요."

  "여기까지 왔는데 숙녀분을 집 앞까지 모시는 게 도리지 무슨 소리야. 어느 방향인데?" 생각보다 수영이 완강하게 말했다.

  "아니 저기 집 앞은 길도 안 좋구... 선배님, 괜찮으니 여기서 내려주세요." 희원이 억지 웃음을 웃으며 안심시키듯 수영에게 말했다.

  "이쪽이니? 아... 저기 보이는 저 집이구나? 와아, 집 좋네!" 수영은 고집을 꺾지 않고 결국 레드비트의 집 쪽으로 향하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희원은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더 이상 수영을 만류하지 않았다. 

 이윽고 수영의 차가 레드비트의 집 앞에 멈춰섰다. 바로 그 때 안마당에 나와 덤벨 운동을 하고 있던 준희와 선우가 차소리를 듣고 대문 쪽으로 다가섰다.

  "와우! 람보르기니 아냐?! 근데 누구 차야? 어어, 희원씨네!" 준희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수영의 차를 내려다보다 희원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며 나즈막히 외쳤다.

  "뭐?!" 설마하는 얼굴로 자동차 쪽을 주시하던 선우가 준희의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희원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문 앞에 나와서 있던 준희와 선우의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수영에게 레드비트의 집에서 입주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기가 어려워서라기 보단 집 앞까지 남자의 차를 얻어 타고 온 그녀의 모습을 선우에게 보인 것이 왠지 더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희원을 따라 차에서 내린 수영은 대문 앞에 서있던 두 남자들을 당연히 희원의 가족이라 생각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런데 두 분은......"

 두 남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수영이 곧 레드비트의 선우와 준희를 알아보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희원을 돌아다 보았다.

  "수영선배... 이 분들 아시죠? 레드비트의 은선우씨랑 황준희씨...... 제가 실은 이 분들 집에서 입주......" 

 희원이 수영에게 자신이 레드비트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연유를 막 설명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선우가 희원에게 성큼 성큼 다가와 과격하리 만치 그녀의 어깨를 한쪽 팔로 콱 감싸안으며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안녕하쇼? 은선우라고 합니다. 희원이 팔촌 오빠 됩니다만... 그 쪽은 누구신지."

 희원은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녀 곁에 바짝 붙어서 있는 선우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물론 선우의 갑작스런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있는 건 준희도 마찬가지였다. 팔촌 오빠라니.

  "아, 예. 전 김수영이라고 희원이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나뵙게 되서 영광이네요. 저도 레드비트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특히 은선우씨 베이스 연주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희원이 친척 분이라니 놀랐습니다."

 수영이 다소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희원을 돌아다 보았다. 순간이었지만 희원은 수영의 눈빛에서 그가 자못 미심쩍어하고 있는 듯한 기색을 읽었다. 

  "그러십니까. 제 연주를 좋아하신다니 감사합니다. 오늘 희원이 바래다 주신 것도 감사하구요." 

 선우는 수영을 향해 말하는 도중 특히 희원이라는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희원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아무튼 눈꼽 만치도 고마워하고 있지 않은 기색이 너무도 역력한 얼굴로 수영에게 사의를 표한 선우는 희원을 내려다보며 돌연 역정을 냈다.

  "야, 넌 오빠들을 셋씩이나 두고 왜 남의 차를 타고 다녀! 여자가 그렇게 아무 남자 차나 함부로 얻어 타고 다니고 그럼 못써."

 희원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선우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수영의 눈치를 살폈다. 선우의 말 속엔 분명 가시가 있었다. 수영을 빗대 아무 남자라고 비하한 표현이 바로 가시였다. 그 상황에서 희원은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 지도 못한 채 속으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런 희원의 눈에 수영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럼, 아무 남자인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담에 꼭 다시 뵙도록 하죠."

 수영은 '꼭'과 '다시'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고 난 후 희원에게 보일 듯 말 듯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곤 차에 오르더니 즉시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져가는 수영의 차를 돌아보며 희원은 미안함으로 인해 마음이 천 근 만 근은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수영의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후에야 희원의 어깨에서 팔을 푼 선우가 예의 냉랭한 태도로 돌아가선 희원을 앞서 걸으며 내뱉듯 말했다.

  "순이, 너 우리 집에서 가정부 한다는 소리 아무한테나 지껄이고 다니지 마라."

  "예에..." 희원이 풀 죽은 태도로 선우의 뒤를 쫒아가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람둥이는 바람둥이가 알아보는 법이야. 너 앞으로 저 놈 차 얻어 타고 그러지 마라."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얘기를 너무도 진지하게 내뱉고 난 선우가 먼저 현관문 안으로 사라지고 그 뒤를 말없이 희원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 때까지의 상황을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준희는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 갈 생각은 않고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제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호오..... 좀 전의 그 팽팽한 분위기는 뭐지. 이거 뭔가 심상치 않은데.'

 그러나 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것은 비단 준희뿐이 아니었다.

 수영은 그의 검은 색 람보르기니 안에서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팔촌 오빠라고? 후후후. 상대가 은선우라 이거지. 이 번엔 게임이 좀 되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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