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 (8/75)

# 7.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희원은 오랜만에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희원의 엄마는 객지에 딸만 혼자 보내놓고는 하루도 걱정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더구나 제 학비에 생활비 벌어 쓰기 바쁜 딸에게 아버지 병원비다 동생들 학비다 수시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을 늘 가슴 아파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하루 등 붙이고 앓지도 못하는 엄마였다. 그런 엄마의 심정의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희원이기에 그녀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를 부여잡고 목놓아 울고 싶은 일이 있어도 꾹꾹 눌러 참고는 늘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새 직장은 지난 번 보다 훨씬 좋아, 엄마. 돈도 훨씬 많이 주고. 응. 그래. 걱정하지 말라니까. 난 나만 혼자 잘 먹고 지내는 거 같아서 미안 하구만. 그 딴 걱정은 이제 그만 하라니까. 그래. 정말이야. 정말 좋아. 응. 응. 그래, 알았어 끊어. 응. 내가 또 전화할게. 그래."

 전화를 끊고 침대에 엎드려서 희원은 춘천에 있는 자신의 집을 그려보았다. 담벼락을 온통 뒤덮은 담쟁이가 녹색의 기운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으리라. 아버지의 사업 실패 뒤에 간신히 장만한 작은 집이었지만 그 전에 살던 커다란 주택보다 훨씬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불현 듯 동생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일 다니는 엄마를 대신해 희원이 거의 업어서 키우다시피 했던 동생들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전화세 많이 나온다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동생들과 통화할 틈도 잘 주질 않았다.

  '재원아, 효진아 잘들 있니?'

 그 날은 이런 저런 사정들로 인해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하고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숙제들을 한꺼번에 받은 듯 이 것 저 것 추억할 거리들이 한꺼번에 물밀 듯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춘천 집. 가족들. 영서. 중학 시절. 미술반. 첫사랑. 김수영 선배......

 이런 저런 상념들이 온화한 물결 타고 완만하게 출렁거리다 센치하기도 하고 푸근하기도 한 포말들을 그녀의 가슴속에 잔잔히 흩뿌려놓았다. 

 딩디링...딩......디링......

 문득 베란다를 통해 선우의 방에서 울려 나오고 있는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희원은 후닥닥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 섰다. 희원이 그 집에 들어온 이 후로 처음 듣는 선우의 기타 소리였다. 준희의 표현을 따르자면 선우가 대단한 연습벌레라고 했는데 거의 매일 귀가가 늦은 탓인지 그가 집에서 기타를 잡는 모습은 생각보다 보기 힘들었다. 

  딩...딩...디리리링잉.....

  '무슨 곡일까...?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곡이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날 공연 때 그 베이스 연주도 선우오빠의 솜씨였었지. 그 때 그 연주도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저게 바로 실력일까?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우오빠의 연주들 듣고 빠져들고... 잘은 모르지만 정말 멋진 연주 솜씨야. 들을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말야. 그 날 선우오빠를 부르며 흐느껴 울던 여고생의 마음이 이젠 조금 이해가 가네. 선우오빠. 은선우. 비록 아이스맨이지만 멋진 사람이야 그는.'

 선우의 기타 소리는 그 날 밤 꽤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그의 기타 소리엔 들으면 들을수록 점 점 더 빠져들게 만드는 마법이라도 걸린 듯 희원은 선우의 연주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또 다른 곡이 시작되기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곤 했다. 

 황홀하다기 보단 그의 기타소리와 함께 그녀의 방안에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차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로 돌아와 누운 희원은 달콤한 꿈결 속으로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무지개빛 햇살이 일렁이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에겐 두 다리 대신 무지개빛 햇살처럼 빛나고 있는 긴 지느러미가 달려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듯 꼬리를 흔들며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고 있던 인어공주 희원은 문득 그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과연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일까 하고 몹시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희원은 무작정 음악소리를 쫓아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음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음률에 맞추어 희원의 가슴도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희원은 해변가 언덕 위에서 검은 가죽 망토를 두르고 베이스기타를 연주하고있는 멋진 왕자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희원은 왕자님을 보는 순간 첫 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그 날부터 희원은 왕자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온 바다 속을 뒤지고 다니면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가질 수 있는 약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원은 형수님이란 이름의 마녀가 바로 그 묘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당장에 그 마녀를 찾아갔다. 희원은 형수님이란 이름의 마녀를 처음 보는 순간 이렇게 생각했다.

  '마녀가 아니라 꼭 귀부인 같군. 어째 공주인 나보다 더 이뿌게 생겼잖아?! 고얀 것-!'

 귀부인의 얼굴을 한 마녀는 희원에게 사람처럼 두 다리를 갖게 해주는 묘약을 건네주며 이렇게 경고했다.

  "왕자님과 결혼하고 싶다면 3년 동안 왕자님의 궁전에서 요리사로 일하도록 하세요. 왕자님이 3년 동안 당신이 만든 음식에 만족한다면 당신과 결혼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족치 못한다면 당신은 공기방울이 되어 산산히 흩어져 버릴 거예요."

 요리라면 희원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공기방울로 화한다 해도 3년동안 왕자님과 한 궁전에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라 희원은 마녀에게서 받아든 묘약을 단숨에 삼켰다. 약에서 술맛이 났다.

  "딸꾹"

 다음 순간 정신을 잃은 희원은 파도에 휩쓸려 해변가로 밀려가고 운명처럼 검은 가죽 망토의 왕자가 희원을 발견해 자신의 궁전으로 업어 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입맛에서부터 성격이며 취향 하나 하나 까다롭기 그지없었던 왕자는 희원에게 3년 동안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주면 인물은 따지지 않고(그 말을 할 때 왕자의 표정은 꽤나 비장했다)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고 그녀는 기꺼이 그 제의를 수락했다. 

 3년의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마침내 희원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왕자는 3년째가 되는 날 희원의 방으로 찾아와 자신의 신부가 되어달라고 청혼했다. 희원은 뛸 뜻이 기뻐하며 왕자님과의 결혼식날 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 사람의 결혼식 날 예기치 못한 손님이 나타나 그들의 결혼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 난데없는 훼방꾼은 원래 왕자님과 약혼한 사이었던 다름 아닌 이웃나라의 공주였다. 그녀는 갑자기 식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왕자님, 그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 여자는 3년 동안 왕자님의 음식에 약을 쳐서 먹인 여잡니다!"

  "뭐, 뭐라고?!" 왕자가 경악하며 희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있었다.

  "아니예요! 전 약을 타지 않았어요-!" 희원은 눈물을 흘리며 부인했다.

  "어쩐지 음식이 너무 맛있다 했더니. 여봐라, 이 X을 당장 옥에 가두라. 대신 난 이웃나라 공주와 혼례를 올리겠노라." 

 왕자가 베이스기타를 칼처럼 공중에다 대고 휘두르며(결혼식장에 베이스기타를 왜 가지고 나왔는지 희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왕자님.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부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왕자의 바지 가랑이를 부여잡고 희원이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왕자는 싸늘한 얼굴로 희원을 외면할 뿐이었다.

  "호호호호. 분수도 모르는 계집같으니. 왕자님의 신부는 이제 나야! 오호호호호!"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왕자님의 옆으로 다가온 이웃나라 공주의 얼굴을 본 순간 희원은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미, 미랑아!"

  콰당.

  "아야야....." 침대에서 떨어진 희원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뭐야... 꿈이었잖아." 희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 걸터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후후. 꽤 재미난 꿈이었는데 막판에 미랑이 얼굴이 나타는 바람에 정말 놀랐어. 이런,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오늘 첫 수업이 있는 날인데 빨리 집안 일을 서둘러야겠다."

 희원은 탁상 시계를 내려다보곤 부랴부랴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욕실 문을 벌컥 열어 젖힌 희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우가 안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엇, 왕자님!" 희원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었다. 아마도 잠이 덜 깬 탓이었을 것이다.

  "뭐? 왕자님?" 선우가 눈이 둥그레 져선 희원을 향해 물었다.

  "아아... 그게 아니고... 저......" 희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몰래 꼬집었다.

  "니가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구나. 이젠 아이스맨이 아니구 왕자님이냐?" 선우가 피식 웃더니 멈췄던 양치질을 다시 시작했다.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이른 시각에 일어나셨어요?" 희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일어난 게 아니고 아예 밤을 샜다."

 그러고 보니 선우의 얼굴이 다소 까칠해 보였다. 눈가에도 그늘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이 어딘가 우수에 찬 듯 보인다고 생각하던 중에 희원의 가슴 한 구석이 왠일인지 덜컹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난 다 끝나가니 조금만 기다려라." 하고 말을 끝낸 선우가 물로 입안을 몇 번 헹궈 내곤 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후 욕실을 나섰다. 

 욕실 문 앞에 서있던 희원을 선우가 막 스쳐지나가려던 찰나였다. 문득 선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희원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윽!' 희원이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선우의 얼굴이 청량한 치약 냄새를 풍기며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가 가까워 올수록 희원의 눈은 점점 커지고 귓전에선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진지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와 숱 짙은 속눈썹이,

 매력적인 콧날과 물기가 채 덜 닦여서 촉촉하기 그지없는 붉은 입술이 서서히 희원을 향해 다가 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얼굴과 희원의 얼굴과의 사이가 불과 십 센티미터 남짓도 되지 않았을 때 문득 선우가 입을 열었다.

  "코털 삐져 나왔다."

  '켁!' 

 귀볼까지 홍당무처럼 빨개진 희원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세면대 서랍 안에 족집게 있는 거 알지?!" 

 라는 말을 남긴 채 선우가 유유히 자신의 방으로 사라진 후에도 희원은 한동안 욕실 문 앞에 붙박히 듯 서서 떨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첫 수업에 행여나 늦을까 희원은 좀 더 이른 시각부터 분주히 움직여 집안 일을 서둘러 끝마쳤다. 그 날따라 레드비트 멤버들이 선우와 준희가 작곡한 곡들의 검토 보완을 위해 집에 남기로 하는 바람에 희원은 졸지에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게 되었다.

  "순이야, 수업 끝나면 한 눈 팔지 말고 곧장 곧장 집으로 와야 해. 알았지-?!"

 성진은 뭐가 그렇게 맘이 안 놓이는지 희원에게 똑같은 당부를 몇 번씩 하고 있었다.

  "희원씨, 잘 다녀와요. 집안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거예요." 준희가 희원을 격려했다.

 하지만 신문을 펼쳐 들고 쇼파에 앉아있던 선우로부턴 아무런 멘트도 없었다. 희원은 행여라도 그녀의 서운한 기색을 성진과 준희에게 읽히게 될까봐 얼른 선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두 사람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한 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희원이 나가자 성진이 눈쌀을 찌푸리며 준희를 향해 말했다.

  "순일아, 그냥 학원에 공부하러 가는 건데 왜 꼭 강가에 어린 애 내놓은 것 마냥 내 마음이 불안하고 그러냐." 

  "왜. 누가 알토란같은 희원씨 확 업어가기라도 할 것 같아서?" 준희가 성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히죽 웃었다.

  "응."

  "그러니까 평소에 잘 해." 준희가 성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한편 교재와 화구 가방을 들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오른 희원은 괜스레 기분이 붕붕 뜨는 느낌이었다. 

  '등록금 마련될 때까지 공부는 빠이 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정말 기분 좋다.'

 희원은 차에서 내려 학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벅찬 가슴으로 날아오를 듯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여름의 무더위조차도 상쾌하게만 느껴질 지경이었다. 거리의 풍경들 하나 하나가 밝고 활기차게만 보였다. 

 학원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가판대에 꽂혀있던 신문 하나가 문득 희원의 눈에 띄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에 실린 사진 하나가 희원의 시선을 끌었다.

  '응?!'

 사진 속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미랑이었다. 화장이 짙어져서인지 어딘가 전에 봐왔던 미랑의 얼굴과는 조금 다른 것처럼 느껴졌지만 분명 미랑이었다. 희원은 가판대로 다가가 신문에 난 미랑의 기사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이미랑, 인기 시트콤에 출연 예정. 상대는 인기 상승중인 아이돌스타 김윤성...... 와, 오디션에 합격했다더니 이렇게 빨리 TV에도 출연하고 정말 대단하네. 얼굴만 이쁜 줄 알았는데 그동안 학원 다니면서 연기력도 꽤 쌓았나보구나. 그래, 나한테 가끔 못되게 굴긴 했어도 진심으로 축하한다 미랑아. 너도 꼭 네 꿈 이루기 바래.'

 벌써 미랑에 대한 원망 같은 건 털어낸 지 오래인 희원은 진심으로 친구 미랑의 행운을 빌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앗, 큰일이다. 한 눈 파는 새에 시간이 이렇게......'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니 수업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희원은 가방을 끌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학원에 도착한 희원은 부랴부랴 문을 밀고 들어가 황급히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갔다. 헌데 바로 그 때...

  "어?! 너......"

 희원에 앞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키 큰 남자 하나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희원을 가르키며 아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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