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 (7/75)

   # 6.

  희원은 학원 등록을 위해 간만에 시내로 나갔다. 한동안 외출이라고 해야 집 근처의 대형 마트로 장을 보러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녀로서는 정말 오랜만의 시내 나들이었다. 오후반 강의를 등록하고 수강증을 건네 받자 희원은 새로운 의욕이 마구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그 집에서 일하게 된 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던 것 같아.'

 레드비트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받는 보수는 꽤 좋은 편이었다. 거기다 그들은 희원이 공부도 할 수 있게끔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빼는 것까지도 기꺼이 양해해 주었다. 그것처럼 훌륭한 조건의 일자리가 어디 흔한가? 희원은 세 남자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여전히 한 치의 곁도 주지 않고 늘 차갑고 쌀쌀맞아 보여서 희원이 속으로 아이스 맨이라고 부르는 선우에게는 특히 더 감사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선가 박봉에도 불구하고 밤늦도록 종일 고단하게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가 시간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희원은 자신이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으로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학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 채희원! 너 희원이 맞지?!"

  "어? 영서야-!"

 막 학원을 나서던 희원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중학교 동창 영서와 너무도 뜻밖의 조우를 하게 되었다.

  "정말 희원이 맞구나. 와, 이게 정말 얼마 만이니? 너무 반갑다, 얘." 영서가 희원의 팔을 붙들고 흔들며 반가와서 어쩔 줄 몰라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갑자기 지방으로 전학 갔다는 얘기만 들었어."

 중학교에 다닐 무렵 매우 친하게 지내던 친구 중의 하나인 영서였다. 하지만 갑작스런 전학으로 소식이 끊겨 늘 안타깝게 생각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원래 울 아빠 하시는 일이 수시로 전근 발령이 나곤 하는 일이었거든. 것두 전근 발령 받으면 얼른 옮겨가야 하곤 했어. 그 때문에 너한테 제대로 연락도 못하고. 나중에 연락하려니까 너희 집도 이사를 가서 연락이 안되더라." 영서는 그 때의 안타까움이 다시 새록새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나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이사를 했지. 아, 그나저나 우리 이제라도 다시 만나게 되서 너무 기쁘다, 영서야."

 희원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영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키는 작았지만 예쁘장한 얼굴에 새침떼기 같은 외모를 가지고있던 그녀는 남녀공학이었던 그들의 학교에서 남학생들 사이에 제법 인기있는 여학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서 만난 그녀의 외모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키가 작고 예쁘장하고 새초롬하고.

  "우리가 인연이 있긴 있는 가보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나도 너무 너무 기쁘다, 희원아. 아 참, 이 학원엔 무슨 일로 온거니? 수강신청 하려구? 나 여기서 근무해."

  "그래? 그럼 이제 자주 볼 수 있겠다. 나 방금 수강신청하고 나오던 길이었어."

  "잘됐다. 정말 자주 볼 수 있겠구나. 아, 그리고 너 수영 선배 알지? 김수영 선배말야. 왜 고등학교 미술부 부장이었던. 그 선배 여기 강사로 나온다."

  "김수영 선배가?!"

 수영선배라는 말에 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희원에겐 아련한 사춘기 시절의 추억과 함께 첫 짝사랑의 대상으로 그녀의 가슴 한 켠에 고이 묻혀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응. 수영선배는 그 때도 멋있었지만 지금은 더 멋있어졌어. 너도 보면 깜짝 놀랄 걸. 학원생들한테도 인기 짱이잖아. 참, 선배가 넌 금방 알아볼 수도 있겠다. 너도 그 때 미술부였잖아. 중학교 미술부랑 고교 미술부랑은 자주 왕래하곤 하지 않았니? 섭섭하게도 수영선배가 난 잘 못 알아보더라고." 영서가 못내 서운한 듯한 투로 말을 맺었다.

  "글세... 선배가 나라고 금방 알아볼런지는 잘 모르겠네. 그 때만해도 선배 앞에만 서면 가슴만 콩닥콩닥 뛰고 입은 꽁꽁 얼어붙어 버려서 말 몇 마디도 제대로 주고 받아본 기억이 없는데......"

 불현듯 희원은 수영선배의 진지한 눈빛과 서글서글한 웃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미술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내리 비치는 햇살을 등지고 캔버스 앞에 마주 앉아 너무도 진지하게 몰입한 나머지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도 못 듣곤 하던 선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마치 마른 풀에 불을 놓은 듯 당시의 느낌들이 순식간에 화들짝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설레고 가슴 벅차고 했던 기억들과 함께. 그래서 사람들은 옛친구들을 만나면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워도 얘기 밑천이 바닥나지 않는다고들 하는 모양이었다. 가능하다면 희원도 영서의 손을 붙잡고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워보고 싶었다.

  "조금 있으면 나 근무시간 끝나는데 어디 다른 볼 일 있니? 이렇게 만난 김에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회포라도 풀면 좋은데." 영서가 물었다.

  "응. 오늘은 안 되겠다. 그림재료들도 사야하고 다른 일도 있고......" 희원이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럼 나중에 학원에서 다시 보자."

  "그래. 그 때 다시 보자, 영서야."

 영서와 헤어진 희원은 화방에 들러 필요한 그림재료들을 몇 가지 구입한 후 백화점 슈퍼로 장을 보러갔다. 그 날 저녁은 세 오빠들에게 희원이 특별 메뉴로 한 턱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를 준비하자면 서둘러야 했으므로 희원은 부랴부랴 귀가를 서둘렀다. 집에 도착해 장 봐온 것들을 대강 정리한 뒤 희원은 기획사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 순이씨. 좀 전에 다들 연습실로 내려가는 것 같던데. 연습실로 전화 돌려줄게 기다려요."

 언제나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사무실의 미스 김 또한 희원을 순이라고 불렀다. 미스 김은 희원이 서너 번쯤인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수에 맞추어 사무실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갔었던 이 후로 희원에게 특별히 더 상냥해진 것 같았다.

  "순이냐?! 왜?" 성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쨍쨍 울렸다. 

  "오늘은 특별히 늦으실 일 없다고 했죠?"

  "응. 근데 어쩌면 생각보다 조금은 늦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너 먼저 밥 먹어라."

  "그래요?" 희원이 다소 풀 꺾인 목소리로 대꾸하자 성진이 물었다.

  "왜? 뭔 일 있냐?"

  "뭐 특별한 건 없구요. 일찍들 들어오시면 오늘은 제가 한 턱 쏘는 의미에서 요리 몇 가지 더 준비하려구 했거든요......"

 성진은 요리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 듯 다시 물었다.

  "뭐, 한 턱?! 요리 몇 가지라구?"

  "예에. 별로 대단한 건 아니구 그냥 대하찜이랑 배추보쌈하구 잡채, 양장피 정도 더 준비할까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 겠네요. 그나저나 대하는 튀김이나 해먹는 수 밖에 없겠네......"

  "야! 미루긴 뭘 미뤄. 맘먹었을 때 그냥 밀고 나가는 거야. 야야야, 거기 준희랑 선우 그거 당장 접어라! 편곡은 선우 니가 그냥 집에 가서 혼자 하구. 뭐해! 빨랑빨랑들 안 움직이구!"

 수화기를 통해 울려 나오는 성진의 고함소리로 인해 희원은 수화기가 부서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이 됐다. 그러나 한편으론 맛있는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어린 아이처럼 단순한 성진이 너무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맏형의 호령은 위력이 있었는지 세 사람은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각에 집에 도착했다.

  "호오- 이 황홀한 냄새. 순이야 이쁜 순이야. 이 오빠가 우리 순이 얼마나 이뻐하는 지 알쥐이-?" 성진이 식탁 앞에 앉기 전에 너스레를 떨었다.

  "알아요. 그러니 이뻐해주시는 만큼 많이 드셔주세요, 성진오빠." 희원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 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너무 너무 행복한 거 있지. 오오, 이거 너무 맛있다."

 순식간에 양장피 서 너 젓가락을 날름 씹어 삼키고 대하찜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며 성진이 다시 말했다.

  "난 말야,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까지 몸매만 생각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돼."

  "성진오빠는 잘 먹으면서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니까 그렇게 말하죠." 희원이 부러운 얼굴로 성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완벽한 몸매란 말야 먹을 땐 열심히 먹고 또 운동할 땐 열심히 운동할 때 만들어지는 법이란다."

 성진이 짐짓 능청스럽게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자 듣다 못한 선우가 한 마디 끼어 들었다.

  "그런데 요즘엔 먹는 것만 열심이고 운동은 아닌 것 같아. 거기 아랫배 좀 내려다 보라구. 신경 좀 쓰셔야 겠는걸."

 선우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던 성진이 발끈해서 다시 말했다.

  "무슨 소리! 이건 인격이야. 그냥 뱃살이 아니라구. 나도 이제 삼십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이 정도의 인격도 없으면 사람이 너무 빈곤해 보여서 못써."

  "형, 참된 삼십대의 길을 걷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솔직히 들여다보는 법부터 배우라구."

 선우가 지지 않고 이죽거렸다. 하지만 맛있는 걸 먹을 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성진인지라 선우의 빈정거림 따위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젓가락을 종횡무진 이 접시 저 접시로 분주히 옮겨 다니는 데에 전력투구할 뿐이었다. 사실 어지간한 사람이 그랬다면 게걸스러워 보인다고 눈쌀을 찌푸렸을 지도 모르지만 희원의 눈엔 끊임없이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성진이 귀엽게만 보였다. 그건 어쩌면 희원이 동생들 둘을 거의 그녀의 손으로 거두고 키우다시피 했던 탓에 풍부해진 모성 본능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희원씨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 우리 셋 다 몸무게가 늘은 것 같아요. 안 그래, 선우형?" 우람한 체구의 준희가 여기 저기 뱃살을 꼬집어 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음, 그건 사실인 것 같다. 더불어 요즘엔 피부도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 같단 말이야."

 선우가 밥을 먹다말고 자신의 뺨을 슬슬 문질러 보더니 갑자기 희원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야, 너 음식에 무슨 약 쳤지?!"

  "예에?!" 희원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에이, 희원씨. 선우형이 지금 농담하는 거잖아요." 

 준희가 희원을 향해 킥킥대며 말하자 희원은 그제 서야 피식하고 따라 웃었다.

  "아, 형은 농담을 해도 꼭 저렇게 썰렁한 소리만 한다니까."

  "그러니까 제가 아이스 맨이라고 하죠."

 딴에는 전혀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보였던 선우의 표정 탓에 잠시나마 잔뜩 긴장했었던 자기 자신이 우스워 큭큭 거리던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아이스 맨?" 성진과 준희가 동시에 외쳤다.

  "누가? 선우가? 우하하핫!" 성진이 먼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그거 희원씨가 붙인 별명이예요? 아이스 맨... 선우형한테 진짜 딱이다 딱." 준희가 기발하다는 표정으로 희원을 향해 말했다.

  "누가 아니래냐. 아이스 맨이라. 순이가 선우한테 붙인 별명이라 이거지. 그래 선우 개성도 꽤나 독특하지. 쌀쌀맞지요, 썰렁하지요. 하하하. 여보게나 아이스 맨." 

 성진이 선우의 어깨를 툭툭치며 재미있다는 듯 웃어 제꼈다. 그 와중에 희원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뻘쭘해 있었다. 슬쩍 선우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조금 뚱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 데만 전념하는 척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말실수를 하다니...... 절대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으아아... 가시방석이 따로 없구나...'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화두를 바꿈으로서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준희였다.

  "참, 그나저나 아까 성진이형 말 중에 희원씨가 오늘 한 턱 내겠다고 했다는데 갑자기 무슨 한 턱 이예요?"

  "아아, 오늘 기분 좋은 일이 두 개나 생겨서요. 세 분 덕분에 오늘 학원 가서 수강신청 하고 왔거든요. 수강증 받아서 돌아 나오는데 오빠들 얼굴이 떠올랐어요. 너무 고마워서요. 그래서 꼭 어떤 식으로든 한 턱 내고 싶어서......"

  "아, 그랬구나.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맙다고 해요, 희원씨는."

 준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포식을 하니 기분 그만이다. 순이 요리솜씨는 정말 짱이야." 그렇게 말하며 성진이 희원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야, 겨우 그만한 일로 기분 내느라 돈 쓸 생각 말고 한푼이라도 더 아껴서 저금해라." 선우가 한 말이었다.

  "아, 너는 애가 그렇게 고리타분한 소리만 골라하냐. 순이도 기분 낼 땐 기분 내고 한 턱 쓰고 싶을 땐 쓸 수 있는 거야. 넌 도대체 왜 그러냐. 순이 얼굴 좀 봐라. 애가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잖냐."

 성진이 선우에게 면박을 주자 선우가 희원을 건너다 보며 말했다.

  "뭘? 아, 난 그냥 딴 뜻 아니고 쟤를 걱정해서 한 소리지. 야, 무안했냐?"

  "아, 아뇨. 절 걱정해주셔 하신 말씀인 줄 알아요."

 희원이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물론 희원의 낯빛이 잠시 어두워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안해서라기 보단 서운해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지나는 말로라도 다른 사람처럼 상 차리느라 애 많이 썼다, 혹은 마음이 기특하다는 정도의 얘기는 해 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마음에서 오는 서운함이었다. 

  "참, 희원씨. 좀 전에 기분 좋은 일이 두 가지나 생겼다고 했었잖아요. 그럼, 다른 한 가지 기분 좋은 일은 뭔데요?" 왠지 조금은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분위기를 이 번에도 준희가 또 다른 화두를 끄집어 내는 것으로 전환시켰다.

  "예에, 오늘 학원 앞에서 많이 친했던 중학교 동창을 만났거든요. 어쩌다 서로 소식이 끊겼었는데 우연히 오늘 다시 만나게 되서 얼마나 기뻤던지." 

 단순하기로 치면 먹는 거 밝히는 성진 못지 않은 희원, 영서를 만나게 되었던 일을 떠올리자 잠시 우울했던 기분은 금세 까먹고 기쁜 마음이 되살아났다. 

  "그래요? 와...무지 반가웠겠다." 준희가 자기 일이나 되는 것처럼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야, 걔 이뿌냐? 그럼 집에도 한 번 데리고 와봐라." 성진이 대하 껍질을 벗기다 말고 양념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더니 지대한 관심을 표하며 물었다.

  "어휴- 형은 아무튼." 준희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거렸다.

  "그리고 또... 짝사랑이긴 했지만 어쨌든 제 첫사랑이었던 선배가 그 학원 강사로 있다는 소식도 들었구요." 희원이 살포시 얼굴을 붉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런! 오늘 오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 준희가 벙글벙글 웃으며 희원의 팔을 툭쳤다.

  "첫사랑이었던 선배가 강사로 있어?! 야, 순이. 너 공부하라고 근무시간 빼준 건데 학원 가서 설마 순전 연애질이나 하는 거 아냐?"

 방금 전과는 달리 자못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성진이 뾰루퉁하게 말했다. 그러자 준희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형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희원씨가 뭐 형들이랑 똑같은 줄 알어?!"

  "뭐어?!" 성진과 선우가 목청 높여 합창을 했다.

  "야, 황준희. 왜 가만히 있는 나는 거기다 갖다 붙이냐?!" 

 선우가 준희를 향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마침 주먹만한 보쌈을 우물거리고 있던 선우의 입에서 배추 쪼가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원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야, 진짜 억울한 사람은 나라고! 준희 너 밥 잘 먹고 왜 쉰 소리냐!." 성진도 지지 않고 가세했다. 하지만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그의 젓가락질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없는 소리했나 뭐." 한치의 주눅듦도 없이 준희가 우직한 목소리로 다시 뇌까렸다.

  "까불래-?!" 성진과 선우가 한결 살벌해진 목소리로 다시 합창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