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 (5/75)

  # 4.

 또 다시 한 주가 빠르게 흘러갔다. 희원은 유치원 보조교사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밤 시간을 이용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피곤함으로 온몸이 녹초가 됐지만 그래도 자신의 힘으로 자기 학비를 벌고 엄마에게도 조금의 보탬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해서 모든 고단함을 씻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잠자리 머리맡의 서랍장을 열고 자신의 통장을 꺼내 들었다. 다음 주를 끝으로 유치원이 여름방학에 들어가면 악세사리 좌판 일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희원은 다짐했다. 여름방학 시즌이 나름대로 성수기라면 성수기라 잘만 하면 좀 더 짭짤한 수입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희원은 새로운 의욕이 솟구쳤다.

 통장을 다시 서랍 안에 집어넣던 희원의 눈에 핏빛처럼 선명한 붉은 색의 씨디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희원은 천천히 그것을 집어들었다. 

  '유성진...은선우...황준희......'

 그것은 레드비트 멤버들의 사인이 든 씨디였다. 미랑에게 우연히 레드비트의 멤버들과 마주친 날 사인 한 장 못 받아왔다고 했던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만약 그들로부터 사인이 든 이 씨디를 받았다고 곧이곧대로 말했다면 지금 이 순간 희원의 손 안에 이 씨디가 이렇게 무사히 남아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희원은 롹을 즐겨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레드비트의 음악엔 별 관심조차 없었지만 웬일인지 그 씨디만큼은 미랑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씨디를 다시 서랍장 안에 넣고 서랍을 닫으면서 희원은 뭔가 자신에게도 은밀한 비밀이 생긴 것만 같은 묘한 스릴감마저 느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녀의 머리 속엔 자꾸만 지난 일요일 오후 좌판 앞에서 벌어진 시비의 한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던 은선우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덕분에 다음 날은 푸석푸석한 눈으로 아침을 맞아야했다. 

 주말이 되어 희원이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좌판을 펴고 있을 때였다.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달리 말끔하게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 하나가 희원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아가씨가 채희원씨 되십니까?"

  "예...제가 채희원 맞는데 무슨 일이신지......?"

  "은선우씨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아가씨께 이걸 전해주라고 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내는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희원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얼떨결에 사내가 내민 봉투를 받아든 희원이 매우 의아스러워 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그야 전 모르죠. 그저 은선우씨가 채희원씨에게 이 봉투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을 뿐이니까요. 그럼, 제 일은 끝났으니 이만."

  "저기, 잠깐만요!"

 석연치 않은 기분에 사내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자기 용건은 이제 끝났다는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멀어져 갈 뿐이었다.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원은 자신의 손에 들린 흰 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 짦막한 메모와 함께 수표가 한 장 동봉되어 있었다.

  '네가 그렇게 가버려서 내 임의로 보상액을 동봉해 보낸다. 앞으로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라! 참, 너 음식솜씨 일류더라. 나중에 식당 차려도 되겠다. -은선우-'

 희원은 난감한 기분으로 동봉된 수표를 슬쩍 꺼내 보았다. 그리고 수표에 찍힌 액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큰 돈을......!'

 하지만 액수가 얼마인지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돈 천 원 짜리 한 장이라도 보상액이라는 명목으로 은선우의 돈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후사정이야 어쨌든 왠지 입안에 쓴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은선우를 찾아가 수표를 돌려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하루 장사를 포기할 형편도 아니고 해서 희원은 봉투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우선은 그 날 장사부터 다 끝내고 난 후에 그의 집으로 찾아가 돈을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방금 그 건 뭐니?"

  "앗, 깜짝이야. 어... 미랑이 왔구나."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느라 어느 틈에 미랑이 나타난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희원은 깜짝 놀라며 미랑을 맞았다. 하지만 미랑은 혼자가 아니었다. 미랑의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들 두 명이 함께 와 있었다. 그 둘 역시나 미랑처럼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는 듯 보이는 차림새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두 사람 모두 희원을 티껍다는 듯한 눈길로 흘겨보고 있었다.

  "뭐 나쁜 짓이라도 했니? 왜 그렇게 놀라?!"

 미랑이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쁜 짓은 무슨......"

  희원이 말꼬리를 흐리며 미랑의 시선을 피했다. 본의 아니게 사소한 일로나마 레드비트와 얽히게(?) 된 이후로 희원은 괜스레 미랑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희원이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니?!"

  "으응? 뭘......?"

  "지난 일요일 말야. 너 혼자 선우 오빠랑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오늘까지 나한테 연락 한 번 없었잖아. 네가 그러고도 내 친구야?!"

  "......"

 미랑이 다짜고짜 성질을 부리며 희원을 힐난해 왔지만 희원은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미랑의 입장에선 당연히 분개할 만도 했기 때문이다.    

  "미안해, 미랑아.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만 깜빡했어."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고?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야?!"

  "미랑아, 정말 미안해. 내가 진짜 진짜 잘못했다. 요즘 겹치기 알바로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정신이 없었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화 풀어라 응?"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미랑의 팔을 부여잡고 애교를 부려봤지만 미랑은 화가 아주 단단히 난 모양으로 희원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됐어. 나 오늘 너한테 그깟 사과 따위 받으러 온 거 아니구. 실은 다른 용건이 있어서 왔어."

  "용건? 장사하러 나온거 아니구?"

  "그래. 장사는 오늘 부로 끝이야. 그러니 넌 해고된 거구."

  "뭐?!"

 희원은 아닌 밤중에 왠 홍두깨냐는 표정으로 미랑을 쳐다보았다.

  "장사가 오늘 부로 끝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이 좌판 시작할 때 내가 돈 대기로 하면서 말했을 거야. 난 너처럼 푼돈이나 벌자고 이런 일 하는 거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지?!"

  "그래...그랬지....."

  "나 그저께 Y.J 신인 모집 오디션에 합격했어. 경쟁률이 몇 천대 일이었다지 아마."

 미랑이 턱을 치켜들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아무튼 이젠 굳이 허접하게 이런 일 할 필요가 없어졌어. 너한텐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니. 그렇다고 날 친구로 생각지도 않는 널 위해 내가 계속 이 좌판 장사를 밀어주며 봉 노릇을 해야 할 의무는 없잖아? 설사 내가 널 불쌍하게 생각해서 이 좌판을 그냥 주겠다고 한들 네가 순순히 받을 리도 없을 테고. 아무리 형편이 어려운 처지라고 해도 그 정도의 자존심정도는 남아있겠지? 안 그래? 그래서 오늘 정리하러 나온 거야."

 희원은 너무도 망연자실해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미랑이 아무리 변덕스럽고 괴팍스러워도 중학생 시절부터 줄곧 친구라고 믿고 지내왔던 사이였다. 그녀가 희원의 기분이나 자존심 따윈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함부로 내뱉는 말들도 그저 응석받이로만 자라 철모르는 성격 탓이려니 하고 좋게만 받아넘기던 희원이었다. 하지만 그 날 그 자리에서 희원은 미랑이 자신을 향해 온통 적의에 가득 찬 모습으로 어떻게든 희원을 궁지에 몰아넣고 모멸감을 주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다. 희원은 처음으로 미랑과의 우정에 회의를 느꼈다. 희원의 형편을 뻔히 다 알고 있는 미랑이 정녕 희원이 믿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친구라면 굳이 저렇듯 냉혹한 얼굴로 희원을 내몰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합격 축하한다 미랑아. 솔직히 나야 아쉽기도 하지만 네 말이 다 옳아. 그 동안 고마웠어. 네 도움 없이 이 장사 시작도 못했을 텐데. 그래도 갑자기 정리한다니 서운하긴 하다. 음... 그럼 지금 당장 정리 시작하려구?"

 실은 미랑에게 너무도 서운해 속으론 펑펑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희원은 꾹 눌러 참으며 담담함을 가장했다. 그녀에게도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자존심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내 친구들이 도울 거니까 넌 그만 가봐."

 끝끝내 미랑은 희원을 향해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매정한 얼굴로 짧막한 대꾸를 내뱉곤 그녀를 따라온 두 여자 애들을 향해 돌아섰다. 

  "얘들아, 혹 맘에 드는 거 있는지 골라들 봐. 그냥 다 쓸어 담아 버릴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부른 거야. 어때? 건질 것 좀 있는 것 같니?"

  "어우, 좀 그렇다 얘. 어떻게 네가 이렇게 촌스러운 물건들을 팔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안가. 아무리 봐도 뭐 하나 건질 게 없다 얘."

 둘 중 소리나게 껌을 씹고 있던 여자애가 입을 삐죽거리며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말야. 이것들 다 니가 떼어 온 거 아니지?"

 이 번엔 다른 여자애가 기분 나쁜 시선으로 희원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내가 구질구질하게 그 딴 거 떼러 다니게 생겼니? 그냥 별 수 없어서 쟤한테 다 맡겨놨더니 이 모양이다. 어쩜 보는 눈이 그렇게도 촌스러운지. 솔직히 지나는 사람 붙들고 우리 물건 좀 사달라는 소리가 차마 안 나왔다니까."

  "호호호, 정말 그러고도 남았겠다. 그러니 그 동안 네 고충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얘."

  "그래, 내 고충 너희들은 이해하겠지?"

 미랑은 희원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자리에 더 우물거리고 서있다간 아무래도 왈칵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아 희원은 그냥 말없이 돌아서서 조용히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세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에도 희원의 귓전엔 그들의 비웃음소리가 왱왱 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기분이었다. 남도 아닌 친구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참담한 기분이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는 희원의 다리엔 맥이 풀려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지하철 표를 끊기 위해 바지 주머니를 뒤지던 희원의 손에 은선우가 보낸 봉투가 잡혔고 희원은 그제서야 그에게 용무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조용조용 아침을 지어놓고 서둘러 벗어났던 그 집 앞에 다시 섰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몇 번씩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는 걸로 봐서 아무도 귀가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잘 나가는 톱스타들인데 주말 저녁이야 멋진 곳에서 보내느라 바쁠테지......'

 희원은 선우가 돌아올 때까지 문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방법밖엔 별 도리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리게 되더라도 꼭 그 날 안으로 수표를 돌려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이나 먹고 오는건데......'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희원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배고픔은 못 달래도 무료함은 달래지겠지." 

 희원은 곧 가방에서 이어폰과 작은 카세트를 찾아서 꺼내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날 따라 석양에 물든 하늘빛이 유난히도 고왔다. 

  '하늘빛 한 번 차암 곱다.'

 오렌지빛 하늘에 수놓아진 보라색 구름들이 녹음 짙은 나무들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광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희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서글픔만이 복받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희원은 콧등이 시큰해져옴을 느끼며 두 무릎을 팔로 감싸안은 채 고개를 파묻었다.

  "어, 누구지?"

 해가 완전히 저물고 사위가 캄캄해졌을 무렵 즈음 귀가한 레드비트의 멤버들은  누군가 집 앞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얼라? 아니 또 얘네. 얘가 또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서 이러고 있다냐?"

 희원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성진이었다.

  "우릴 기다리다 잠이 들었나봐 형."

 준희가 속삭거리듯 말했다.

  "그러게 말야. 하, 볼수록 아주 독특한 캐릭터야."

 성진이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안쓰럽게 이런 밖에서 잠이 들다니. 저, 이봐요..."

  "야, 잠깐 기다려 봐."

 성진이 희원을 깨우려는 준희를 불현듯 만류하며 대신 살금살금 희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호오, 음악 감상 중이셨나 보군. 어디 아가씨께서 무슨 음악을 듣고 계셨나 한 번 들어볼까."

 성진은 희원의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 한 쪽을 살그머니 빼내서 자신의 귀에 꽂았다. 자동반복 재생 중이던 카세트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푸후훕"

 이어폰을 귀에 꽂은 지 얼마지 않아 성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형?" 준희가 물었다.

  "그레고리안 성가야. 큭큭큭. 졸릴 만도 하다."

  "......" 준희도 대꾸 대신 살풋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선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이제 슬슬 아가씨를 깨워볼까."

 성진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열 손가락을 모두 펴고 관절을 꼼지락거리는 시늉을 해 보이자 준희는 즉시 걱정스러운 낯빛이 되었다.

  "어쩌려구 또."

 하지만 준희의 안색 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성진은 희원 옆에 나란히 붙어 앉은 후 한 팔로 희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개를 희원의 어깨에 묻고는 부비적 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낯선 느낌에 문득 눈을 뜬 희원이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며 성진의 머리를 냅다 밀어냈다.

  "꺄아아아악!"

 그러자 성진도 덩달아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악! 엄마야아!"

 하지만 성진은 곧 비명을 멈추고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기 시작했다.

  "와하하하핫!"

 그러는 사이 정신을 수습한 희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얼굴을 붉혔다.

  "야, 오늘은 또 무슨 용무냐? 또 우리 밥 해주려고?! 그렇다면 대 환영인데......"

 성진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 한 얼굴로 희원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 그 때까지 시종일관 묵묵히 서있기만 하던 선우에게 내밀었다.

  "이거 돌려드리려 왔습니다."

 선우는 희원이 내민 봉투를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있다가 잠시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네 거야. 가져가라."

 도대체 희원과 선우가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서 듣고만 있던 성진이 선우 대신 봉투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꺼내보더니 소리쳤다.

  "우와앙...돈이네? 이게 웬 돈이야?"

  "생각해 주시는 뜻은 고맙지만 보상받을 만큼 손해본 게 없으니 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돌려 드리는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고 생각한 희원은 세 사람에게 고개 숙여 꾸벅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혹시라도 선우가 자신에게 동정심 같은 걸 베풀고 싶어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그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겠노라 생각하면서.

  "야, 잠깐!"

 하지만 희원은 그녀를 제지하는 선우의 단호한 음성에 기가 질려 재촉하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너 할 말만 끝났다고 그렇게 돌아서 가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들어와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선우는 희원도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들어오지도 않고 가면 그냥 가면 섭하지."

 성진이 희원에게 봉투를 돌려주면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희원씨... 맞죠? 저녁식사는 했어요? 지금 우리 삼겹살 파티 하려구 상추랑 삼겹살이랑 잔뜩 사 가지고 들어오는 길이거든요. 희원씨도 삼겹살 좋아해요?"

 준희가 양손에 들고 있던 불룩한 비닐봉투를 희원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해서 희원은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을 따라 쭈뼛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집안으로 들어간 선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희원씨, 불편해 하지 말고 여기 앉아 계셔요. 선우형은 아마 옷 갈아입으러 간 모양 이예요."

 친절하게 희원을 쇼파로 안내한 뒤 준희는 주방으로 들어가고 성진 역시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동안 쇼파에 앉아있던 희원은 왠지 가시방석에 앉은 양으로 영 편치가 않아 슬금슬금 준희가 있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상추라도 씻을까요?"

  "그냥 편히 앉아 계셔도 되요. 희원씨는 손님이니까 그냥 계셔요."

 비닐봉투 안에서 상추를 꺼내고 있던 준희가 희원을 돌아보며 만류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도 전 왠지 편치가 않은 걸요. 차라리 식사 준비라도 도우면 맘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희원이 준희를 향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준희가 잠깐동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 그럼... 이 상추들... 희원씨가 씻어주세요"

  "예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내 상추를 깨끗이 씻어놓은 희원이 불판이랑 수저들을 준비하고 있던 준희를 향해 다시 말했다.

  "뭐 또 다른 일 없나요? 파무침이나 된장찌개 끓이는 거 도울 수 있는데....."

  "예에? 하하하. 저흰 그런 거까지 다 못 갖추고 먹어요. 그냥 삼겹살이랑 상추랑 해서 대강...... 사실 식당 같은데서 사서 먹을 수도 있지만... 그게 남들처럼 아무데서나 밥 사먹기도 솔직히 좀 번거로운 구석도 있구......." 

 준희가 뒤통수를 긁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희원은 곧 그의 말뜻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준희가 말을 이었다.

  "뭐 요즘엔 남자들도 웬만한 요리쯤 다들 할 줄 안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린 셋 다 요리엔 젬병이라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땐 보시다시피 이래요. 참, 지난번에 희원씨가 아침 해놓고 간 날 있죠? 와... 그 날 아침엔 감동의 도가니였다니까요. 요리솜씨가 너무 좋아서 꼭 우렁각시가 다녀간 것다고 막... 하핫. 아무튼 늦었지만 그 날 아침 정말 고마웠어요."

  "고맙기는요 뭘......"

 희원은 준희의 칭찬에 겸연쩍기도 하고 한편으론 흐뭇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처음 레드비트의 멤버들과 마주친 날 느꼈던 바대로 준희란 인물이 같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 편안함을 느끼도록 만드는 재주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반해 선우란 인물은 어딘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도.

  "재료가 대충만 있어도 무슨 찌개든 간단하게 금방 만들 수 있는데... 냉장고에 다른 야채나 아, 김치. 김치는 있나요?"

  "예. 김치는 제법 넉넉히 남았을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갈아입으러 갔던 성진이 선우보다 먼저 주방에 나타났다. 어지간한 사람이 입으면 촌스러움을 넘어서 낭패스러울 법한 꽃분홍색의 민소매 쫄티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성진을 보는 순간 희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미랑이 보다도 예쁘네 무슨 남자가...... 사람들이 꽃미남, 꽃미남 하던데 저런 사람을 두고 그런 소릴 하는 건가?'

  "어머나, 냄새 죽인다. 어? 내가 좋아하는 파무침도 있잖아?! 오오, 좋아라!"

 식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성진이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익살스럽다고 할까 장난스럽다고 할까 아무튼 재미있는 말투가 그의 개성인 듯 했지만 희원에게 있어 그의 인상은 늘 아름다운 궁전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림 동화 속의 왕자님 같기만 했다.

  "우렁각시 특제 김치찌개도 곧 나갑니다. 자자, 허리끈 풀을 준비하시고오. 아, 그나저나 선우형은 여태까지 안 내려오고 뭐 하는 거지?"

 준희가 기다리다 못해 목을 쭉 빼고 거실 쪽을 내다보는데 때마침 선우가 나타났다.

  "어, 전화 좀 받느라고 늦었다. 준비는 다 됐냐? 얼른 먹자. 배고프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질끈 묶고 나타난 선우의 모습은 동화속 왕자님같은 성진의 분위기와는 다른 매력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높은 콧대와 숱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가 누구라도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나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희원은 선우에게 특히 검은 색 옷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좌판 앞에서 시비가 벌어졌던 날도 선우는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날 시비의 한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그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마치 흑기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튼 어디서건 튈 만큼 수려한 용모의 두 사람이 나란히 식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 희원은 뜬금없이 억울하단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신은 불공평해. 남자들한테 저토록이나 수려한 미모가 굳이 뭔 필요가 있다고. 차라리 이 시간에도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인생을 비관하고 있을 그런 여자들이나 한 둘 더 구제해 주실 일이지.'

  "야, 넌 왜 거기 멍하고 서있냐? 빨랑 와서 너도 자리잡고 앉아. 고기 다 익었다."

  "예? 아, 예."

 성진의 부름 소리에 몽상에서 깨어난 희원은 그들과 합석하기 위해 식탁으로 다가갔다.

 예정된(?) 메뉴에는 없었던 김치찌개와 파무침이 곁들여져 한결 더 그럴듯해진 삼겹살 파티는 왁자지껄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인기 최정상의 톱스타들인지라 희원이 그들에게 막연히 품고 있었던 거리감을 많이 줄일 수 있게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희원에게 그들은 낯선 세계의 낯선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 좀 보자."

 식사를 마친 뒤 선우가 희원을 따로 불러냈다. 희원은 선우의 뒤를 따라 거실과 면한 테라스로 나갔다. 도심 속에서 보는 하늘과 달리 의아스러울 만치 크고 생생한 별들이 수 없이 박힌 하늘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생각해보니......"

 선우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 입장에선 내가 보상액 운운하면서 불쑥 돈을 내미는 게 언짢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희원은 잠자코 선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난 사소한 일이라도 내 책임을 대강 넘기는 짓은 안 한다. 그날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그 양아치 놈이랑 뒹굴다 네 좌판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부분에 대해선 내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아. 그러니 그 돈은 그냥 부담 갖지 말고 가져가라."

 테라스 난간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기댄 채 그가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날리며 말했다. 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의 의사가 강하게 실려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희원도 쉽사리 물러서진 않았다.

  "책임이라고 생각지 않으시면 되잖아요. 제겐 자존심 문제 이전에 그 돈을 받아야할 명목이 전혀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보상을 받을 만큼 금전적으로 손해난 게 없기 때문이예요. 그러니 이건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도로 가져가세요."

 희원이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 선우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고집이 세구나."

 선우가 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고 솔직한 대답에 잠시 선우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도지지 않고 곧 반격을 했다.

  "나도 고집 세다."

  "......"

 두 사람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우는 뭔가 뾰족한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민을 했다. 생각보다 완강한 희원의 고집도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좋다. 네가 정 그렇다면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한동안 어둠에 잠긴 나무숲을 응시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안...요?"

  "그래. 네 뜻을 존중해서 그 봉투는 내가 돌려 받지. 대신 넌 뭐든 내게 부탁 한 가지를 하는 거야.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이 얘기는 마무리하기로 하자. 어때?!"

  참으로 명쾌한 제안, 명쾌한 결론이기는 했다. 하지만 희원이 선우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갑자기 희원의 머릿속에 반짝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정말 아무거나 부탁해도 되는 거예요?"

  "내 타협안이 맘에 드는가 보네. 예상외로 솔깃해 하는 걸 보면. 물론이지. 한 입으로 두 말 안 해. 불가능한 일 빼고 다 들어주지."

 그러자 희원은 지금까지와는 짐짓 다른 태도로 마치 뭔가에 쫓기고있는 사람 같은 절박한 어투로 선우에게 말했다.

  "일 자리요! 제게 뭐든 일자리를 좀 주세요."

  

  "일자리?!" 성진이 선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응." 캔 맥주를 홀짝거리며 선우가 대꾸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 집에 들어와 가정부 노릇이라도 하겠느냐고 네가 그랬단 말이야?"

 성진과 준희가 아연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응." 여전히 선우의 대답은 짧막했다.

  "그러니까 그 앤 뭐래?" 

 시큰둥한 표정의 선우와는 달리 궁금증과 놀라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성진이 다그치듯 물었다.

  "하겠대."

  "정말?!" 성진과 준희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사실 딱히 그 애한테 소개시켜 줄만한 일자리도 당장은 없는 것 같구 해서 그냥 농담 삼아 툭 던져본 소리였거든. 근데 그 애가 잠깐동안 혼자 곰곰히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겠다고 하잖아."

 선우가 문득 피식하고 혼자 웃음을 지었다. 그 일을 하겠노라고 대답할 당시의 희원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너무도 진지한 그녀의 표정은 주먹만 불끈 쥐지 않았을 뿐 거사를 앞둔 독립투사의 그것과도 같이 처연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잘해봐라 그랬지 뭐. 대신 일만 잘하면 보수는 넉넉히 챙겨주기로 했어."

 여전히 별 일 아니라는 듯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선우를 성진과 준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응시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선우가 말했다.

  "뭐 그 얘 요리 솜씨 하나는 쓸 만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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