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 (4/75)

# 3.

 얼떨결에 선우의 손에 이끌려 그의 차에 오른 희원은 옆좌석에 앉은 선우의 거친 숨소리에 주눅이 들어 입도 뻥긋 못한 채 그저 어디론가 차를 몰고 있는 그의 옆모습만 간간히 훔쳐보고 있었다. 상기된 그의 얼굴엔 매우 불쾌한 기색이 너무도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죄송합니다. 그냥 지나치셔도 되실 일 때문에 그 쪽...에게 괜한 누를 끼치게 됐네요."

 희원이 간신히 용기를 내서 겨우 입을 떼고 모기 만한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선우의 양미간에 패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을 뿐 대꾸는 없었다. 십 여분 가량 차를 더 달리다 문득 차를 세운 선우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려."

 긴 다리로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던 희원이 당도한 곳은 꽤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그래서 아는 사람이나 알고 드나들 법한 어떤 카페였다.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카페 입구와는 달리 내부는 생각보다 넓직하고 또 절로 탄성이 새어나올 만큼 실내 장식이 특이하고 멋진 곳이었다. 희원은 조용히 선우의 뒤를 따라 군데군데 금빛 자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초록색 쇼파위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오래지 않아 꼭 외국 영화 속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우아한 여인이 다가와 귀부인처럼 우아하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선우 도련님, 오랜만이네. 그런데 이 여자 손님은 누구? 와, 도련님이 여자 손님을 다 데려오구 별 일이네."

 희원은 다소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으로 귀부인에게 도련님으로 불리우는 남자를 건너다 보았다.

  "형수님, 잘 지내셨죠? 아시다시피 여기 저기 스케줄대로 끌려 다니느라 한동안 못 왔어요. 우리 마실 것 좀... 야, 너 뭐 마실래? 아, 그러고 보니 저녁 시간이네. 형수님, 메뉴판 좀 주실래요? 아니면 형수님이 맛있는 걸로 알아서 2인분 가져다 주시던지요."

 선우가 귀부인에게 매우 친근한 어투로 말했다. 

  "아가씨 취향도 모르면서 내 맘대로 그럴 수야 없지. 메뉴판 갖다줄게."

 귀부인은 희원에게도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메뉴판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역시나 뒷모습도 우아한 귀부인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지켜보던 희원은 그녀가 선우의 진짜 형수님이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사적인 질문이나 하고 있을 분위기가 아닌 듯 싶어 그냥 잠자코 있었다.

  "휴우......"

 먼저 낮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용히 얘기하기엔 여기가 편할 것 같아 데려왔다. 아무튼 오늘... 네 말처럼 내가 괜스리 끼어 드는 바람에 일만 더 커지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입은 손해를 어떻게 보상해 주긴 해야겠는데 솔직히 말해 얼마를 줘야할지 내가 잘 모르겠어서 말야. 그러니 어려워 말고 네가 말해라."

  "보, 보상이라니요... 저희를 도와주시려다 그렇게 된 걸요."

 손해보상이라는 말에 희원이 깜짝 놀라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되려 제가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죠. 저흴 도와주려고 하신 건데...... 늦었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희원은 앉은 채로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진심에서 우러난 고마움을 표시를 했다.

  "글세. 내가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난 원래 남의 일에 나서는 일 따위는 질색하는 성미거든. 솔직히 말해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뭐에 씌웠던 것 같다. 그냥 우연이었을 뿐이니까 굳이 내게 고마워할 건 없구 이대로 네가 입은 손해를 모른 척 하면 내 마음이 내내 찝찝할 것 같아서 그러니 대강 손해액이 얼마쯤 되는지 밥 먹는 동안 한 번 생각해 봐라."  

 왠일인지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의 선우를 향해 희원이 다시 한 번 사양의 뜻을 막 밝히려고 하는데 귀부인 대신 웨이터 한 사람이 메뉴판을 들고 오는 바람에 잠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희원은 선우와 함께 웨이터로부터 메뉴판을 건네 받은 뒤 의례적으로 메뉴판을 눈으로 한 번 훑는 시늉만 했다. 그녀는 선우와 함께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은선우와  함께 마주 앉아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편치 못했던 탓에 희원은 그에게 고마움의 뜻도 분명 전했겠다 더 이상 남은 용건도 없는 것 같고 해서 눈치껏 그 자리를 벗어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희원의 눈에 문득 메뉴판에 인쇄된 가격이 눈에 들어왔다.

  

  '헉... 이거 동, 동그라미가 한 개 잘못 붙은 거 아냐?!'

  "난 랍스터로 주고... 넌 뭘로 할래?"

 선우가 자신의 메뉴판을 웨이터에게 넘기며 희원을 향해 물어왔다.

  "어 전... 사실 지금 전혀 배가 안 고프거든요. 그보다 혼자 남은 친구가 걱정돼서... 실례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희원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선우가 단호한 어조로 희원을 만류했다.

  "야,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났는데 어딜 간다는거야?! 좀 전에 내가 한 얘기 농담으로 들었냐? 잔소리 말고 밥부터 먹어. 저기 얘한테도 그냥 나랑 같은 걸로 줘요."

 그렇게 해서 희원은 꼼짝없이 발이 묶여 선우와 함께 마주 앉은 채 생전 처음 먹어보는 무지막지하게 비싼 요리를 제대로 음미할 여유도 없이 그저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기에 바빴다. 식사하는 동안 줄곧 어딘가 모르게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 한 마디 없는 선우로 인해 희원은 더더욱 식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그들의 테이블로 카페 여사장이 서비스로 보내준 환상적인 디저트를 보는 순간 희원은 그 때까지 그녀의 어깨를 마구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 따위는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와아ㅡ!"

 환상적인 디저트란 다름 아닌 작은 아이스크림 케익이었는데 색색깔의 아이스크림 블록과 초콜릿, 과자, 젤리등을 이용해서 만든 특별한 그 디저트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에 등장할 법한 너무도 예쁘고 앙증맞은 집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 예술이다, 예술이야 이건!'

 속으로 연속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신도 모르게 연신 박수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마도 선우의 따가운 눈총이 극에 달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무안함도 희원에겐 예술작품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환상적인 아이스크림을 먹게된다는 감동에 깡그리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제 눈으로만 먹지 말고 입으로도 먹지. 녹아서 흉물스러워지기 전에 말야."

  보다못한 선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 예... 실은 제가 아이스크림을 너무 너무 좋아하는데 이건 정말 예술이네요. 와아... 디카라도 챙겨왔으면 좋았을 걸......"

 희원이 짐짓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일단 한 번 먹어봐. 특별한 건 모양뿐이 아니니까. 맛도 대단히 독특할 거야. 이건 형수가...여기 여사장님이 프랑스에 있을 때 배워온 솜씨로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이거든."  

  "그래요?"

 선우의 설명에 희원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아이스크림 스푼을 들었다.

  '에고, 이 아까운 걸 어디부터 허물어야 할지......'

 마침내 벽 한 귀퉁이를 허물어 맛을 본 희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다시 한 스푼, 또 한 스푼, 또 한 스푼... 연거푸 아이스크림 집을 허물어 먹었다. 

  "어? 이상하네... 아이스크림 맛이 정말 독특하네요?! 단맛도 덜하고 특유의 진한 맛도 덜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셔벳류랑도 또 다르고..... 어 정말 이상하다......"

 희원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부지런히 아이스크림 벽을 허물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윽고 디저트 접시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을 때도 희원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건너다보던 선우의 입가에 살풋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맛있었냐? 아까 식사할 때완 완전 딴판이네. 그 땐 꼭 어디 속 거북한 사람처럼 깨지락대더니 그건 게눈 감추듯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우는구나."

  "그게 저...실은 도통 맛을 모르겠어서요. 이게 무슨 맛일까 무슨 맛일까 하고 자꾸 입에 떠넣다 보니......"

 갑자기 정신이 든 희원이 다시 수줍은 태도로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한 접시 더 주문해 줄까?"

 왠지 좀 전보다는 다소 느긋해 보이는 표정의 선우가 물었다.

  "아니요, 아니요! 됐..됐어요."

  "맛이 독특한 건 그 아이스크림에 술이 첨가됐기 때문이야. 취할 정도의 농도는 물론 아니고. 얼핏 듣기론 각기 다른 색깔마다 다른 종류의 술이 들어간다지 아마."

  '끅! 술?!! 그것도 각기 다른 종류의... 오 마이 갓! 폭탄주!'

 술이란 말에 희원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보리밭근처만 지나가도 취한다'라는 비유는 바로 그녀와 같은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일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한 방울의 알코올이 곧 마취제 주사 한 방과 맞먹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 신호가 왔다.

  딸꾹!

  '이런... 이를 어쩌지!'

 하지만 금세 얼굴은 화끈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눈앞이 핑핑 돌며 머리 속이 점점 혼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딸꾹질은 멈춰지질 않았다.

  딸꾹! 딸꾹!

 갑작스레 시작한 딸꾹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몸까지 앞뒤로 끄덕거리기 시작한 희원을 보며 선우는 금세 사태 파악이 안되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야, 뭐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이윽고 적잖이 당황스러운 어조로 선우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희원에게 그의 목소리는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아 수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웅웅거릴 뿐이었다. 희원은 침몰 직전의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매달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집에...빨리...집에 데려다...... XX동... 산 육백 오십 이 번지.... 산 육백 오시......"

  "므어이아우어어......"

 희원이 마지막으로 보고 들은 것은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진 선우의 경악하는 얼굴과 늘어질 대로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가 씹히기 일보직전에 내는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뭐라고? 야, 다시 말해봐, 뭐라고?! 산 몇 번지?!"

 의식을 잃어가는 희원의 눈엔 그렇게 비쳤겠지만 그다지 그로테스크해 보일 만큼은 아니어도 경악한 것만큼은 분명한 선우가 이미 테이블에 엎어져 정신을 잃은 희원을 붙들고 흔들며 재차 물었다. 그러나 이내 희원이 거의 졸도 상태나 마찬가지란 것을 인정하고 일단 의자에 깊숙히 몸을 파묻고 앉아 고심하기 시작했다.

  '하, 나원 참. 기도 안 차는군. 이거 정말 오늘 일진이 왜 이렇게 꼬이지? 그나저나 주소를 제대로 알아야 집에 데려다 주던지 말던지 할 거 아냐, 이 아가씨야.'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킨 선우는 차 밖으로 나가 뒤 자석의 문을 열고 힘겹게 희원을 끌어내어 등에다 들쳐업고는 현관 앞 계단을 올랐다.

 딩동ㅡ.

  "누구세요?"

 그룹의 막내 준희의 목소리였다.

  "야, 문 좀 빨리 열어!"

  "저녁 전에 돌아온다더니 어디 들렸다 왔어? 어?! 이 사람 누구야?!"

 문을 열고 선우를 맞이하던 준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하지만 선우는 준희의 물음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부랴부랴 거실로 들어가 쇼파위에 희원을 던지듯 눕혀 놓았다.

  "휴우ㅡ. 정말 억수로 일진 사나운 날이로군."

  "아니 어떻게 된 일이야? 형, 교통 사고 냈어?!"

 쪼르르 선우의 뒤를 따라온 준희가 반쯤 사색이 되어 선우와 쇼파에 눕혀진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사고라면 사고라고 할 수도 있겠지. 제기랄. 이래서 남의 일 따위엔 나서는 게 아닌데."

  "뭐?! 사고?! 누가? 누가 사고를 냈다고?!"

 타월을 터번처럼 머리에 두른 성진이 녹색의 미끄덩 미끄덩해 보이는 젤리같은 것을 얼굴 전체에 잔뜩 쳐바른 채로 방에서 튀어나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아이씨, 형은 또 그 꼴이 뭐야? 볼상 사납다고 그 딴 짓 좀 하지말랬지ㅡ. 기집애처럼 뭐야 진짜!"

 선우가 성진을 향해 성질을 부리며 말하자 다소 찔끔해진 성진이 슬슬 눈치를 보며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정말 이 여자앤 누구야? 어떻게 된 건데?"

 배고픈 것도 절대 못 참지만 그것보다 궁금한 것은 더 못 참는 성진이였다. 

  "얘 몰라? 잘 봐."

 선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반대편 쇼파로 물러나 앉자 성진이 정신을 잃고 뻗어있던 희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오오ㅡ 애 그 애지?! 어제 그 천연기념물! 맞다, 맞어!"

 성진이 손바닥까지 마주치며 놀라워하자 준희도 의아해하며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어, 정말이네?!"

  "야, 어떻게 된 일이야? 빨리 자초지종 좀 말해봐. 아니 얘가 오늘은 또 어떻게 우리 집 거실에 누워있게 된거냐?"

 성진이 선우를 채근했다.

  "그게 실은......"

 우하하하하ㅡ!

 선우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성진이 배까지 부여잡으며 커다랗게 박장대소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그런 성진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며 선우가 볼멘소리를 햇다.

  "그러니까 천하의 쌀쌀돌이가 뭐에 씌여서 남의 싸움판에 끼어 들어 오히려 더 깽판을 치다가 그 깽판을 보상해 줄 요량으로 의논차 형수님네로 데려갔는데 얘가 형수님네 특제 디저트를 먹고 갑자기 뻗어버렸다 이거지? 야아 이거 완전 히트감이네, 히트감이야. 큭큭큭."

 선우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이 상황을 너무도 재미있어 하며 성진이 말했다.

  "뭐, 형수님 말로는 알콜에 특별히 과민한 체질이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 얘가 바로 그 특별 케이스 같다고...... 나원 참. 집 주소도 모르고 그렇다고 의식도 없이 뻗어있는 어린애를 혼자 어디 호텔 같은데 팽개쳐두고 올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려왔지 뭐."

  "집으로 데려오길 잘했어, 선우형. 어린 아가씨 혼자 호텔 같은데서 깨어나게 된다면 무척 당황스러울텐데."

 언제나 착하고 무던한 성격의 준희가 선우를 거들었다.

  "사실 그 정도로 물정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선우 네가 오버하는 거 아냐? 너 답지 않게 별난 동정심을 같는 것도 그렇고 어딘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넌 안 그러냐, 준희야?"

  "성진이 형도 참. 오버는 무슨 오버야. 선우형은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누구라도 그 상황에선 선우형처럼 행동했을 거야. 나라도 당연히 그랬을 거구."

  "준희 너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선우는 다르지. 너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 안 하냐, 은선우?"

 장난기가 가득한 눈을 가늘게 뜨고 성진이 집요하게 선우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성진을 하루 이틀 봐온 사이가 아닌 선우로서는 그것이 성진의 장난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걸 알기에 가볍게 눈을 한 번 흘겨주는 시늉으로 대답을 대신한 후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선우형. 이 아가씨는 그냥 여기 이렇게 두면 되는거야? 불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2층까지 업어다 손님방 침대에 눕혀주던지. 난 샤워하고 이만 잘란다ㅡ."

 선우가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거실에 남아있던 두 사람은 다시 쇼파에 누워있는 희원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희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성진이 문득 검지 손가락으로 희원의 볼을 조심스레 눌렀다. 희원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한 성진은 맘놓고 그녀의 볼을 여기저기 꾹꾹 눌러댔다.

  "형, 뭐하는 거야?!"

 준희가 질색을 하며 성진의 손을 만류했다.

  "정말 그런 특이체질이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그 정도의 알콜 섭취로 사람이 졸도할 지경까지 가냐."

 성진이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희원의 볼을 눌러 보려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다시 준희가 그를 만류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직접 그런 사람을 보고도 그래. 아무튼 저절로 깨어날 때까지 푹 쉬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여기 보단 손님방 침대에 눕히는 게 낫겠지?" 

  "야, 얘 자는 얼굴 가만히 뜯어보니까 나름대로 꽤 귀염성 있게 생겼다. 그치? 입술도 도톰하고....."

 끈적끈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끝을 흐린 성진의 시선이 이 번엔 희원의 가슴께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준희가 재빠른 동작으로 성진의 다음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코옥ㅡ.

 성진이 다시 검지 손가락으로 희원의 가슴을 콕 눌러본 것이다.

  "성진이 혀엉!"

 준희가 큰 소리를 억누르면서도 성진의 이름을 나무라는 투로 힘주어 불렀다.

  "생각보다 가슴살도 통통하네. 호호호."

 성진이 간드러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흐뭇하게 웃었다.

  "어휴, 정말 성진이 형은 못 말리겠어. 비켜. 이 아가씨가 여기서 성진형한테 더 수모를 당하기 전에 빨리 윗층으로 옮기는 게 상책이겠다."

 희원 옆에 바짝 붙어 앉아있던 성진을 밀어내며 준희가 말했다.

  "그럼 2층까지만 내가 안고 올라가면 안될까?" 성진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성진이형은 이 아가씨가 깨어날 때까지 2층엔 접근금지야."

  "칫ㅡ."

 희원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나른한 느낌어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청랑한 새들의 지저귐 소리......

 응?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희원이 눈을 번쩍 뜨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사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방이다!'

 희원은 깜짝 놀라 자신의 옷매무새부터 점검을 해보았다. 어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입은 채였다. 희원은 일단 안도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희원은 먼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들려오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며시 제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와아ㅡ!"

 그 곳은 어딘가의 전원주택인 모양으로 창 밖으로 펼쳐진 초여름의 풍광이 유독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희원은 아직 완전히 날이 밝아오기 전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창문을 열어 젖히고 베란다로 나가 섰다. 머리 속이 한결 더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희원은 침대를 정리한 후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방밖으로 나와 섰다. 커다란 복도와 난간, 또 다른 몇 개의 방들 그리고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까치발로 아래층에 다다른 희원은 층계참과 거실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들 몇 개를 보았다. 모두 '레드비트'의 대형 사진들이었다. 

  '그래. 어제 그 사람... 은선우......'

 희원은 선우가 자신을 그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려왔음을 금세 추측할 수 있었다. 

  '어쩌지. 나랑은 무관한 사람한테 이래저래 자꾸만 폐를 끼치고 말다니.'

 희원은 아무래도 선우의 얼굴을 직접 볼 엄두가 나질 않아 차라리 메모나 한 장 남겨두고 얼른 그 곳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바지 주머니에 집에 돌아갈 정도의 차비는 들어있었다는 것이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기서 선우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비까지 꾸어달라고 해야하는 상황까지 벌여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상황이었다. 희원은 전화기 옆에서 메모장과 볼펜을 발견하고 선우에게 부랴부랴 메모를 썼다.

  '어젠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습니다. 직접 인사를 전하는 게 도리겠지만 일이 있어서 뵙지 못하고 그냥 갑니다. 정말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ㅡ 채희원ㅡ '

 희원은 다 쓴 메모지를 어디에다 둘까 잠시 고민한 끝에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가 다시 냉장고에 붙이기로 했다. 손바닥으로 메모지를 쓱쓱 문질러 고정시킨 뒤 때마침 갈증을 느낀 희원은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이런ㅡ!'

 물이라도 찾아 마실 요량으로 냉장고를 열어본 희원은 단박에 눈쌀을 찌푸리고 말았다. 햄이나 치즈, 게맛살 등등이 아무렇게나 잘라먹은 채 던져놓아 여기 저기 말라비틀어진 채 뒹굴고 있었고 원래는 케이크였을 테지만 이젠 과자나 다름없이 버석버석 해진 케이크 조각과 허옇고 퍼런 곰팡이에 온통 뒤덮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도 있었다. 간혹 멀쩡해 보이는 음식도 더러는 보였는데 그것들은 모두 진공 포장된 인스턴트 식품들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아무리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도 그렇지. 이게 사람이 살고 있는 집 냉장고가 맞아?'

 희원은 반사적으로 싱크대를 돌아보았다. 아무렇게나 개수대 안에 쌓인 그릇들과 가스렌지 옆에 널부러져 있는 라면봉지, 라면 부스러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재원이가 이렇게 살고 있다면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거야.'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희원은 불현듯 강한 의무감을 느꼈다. 

  '밥. 그래, 아침밥을 짓자!'

 희원은 냉장고와 주방 구석구석을 뒤져 아침 식사거리가 될만한 재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킁킁ㅡ. 이게 무슨 냄새야?! 어디서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는 거지?"

 제일 먼저 음식 냄새를 맡고 식탁으로 향한 사람은 성진이였다. 그의 방이 1층에 있던 때문도 있겠지만 개 코처럼 냄새에 민감한데다 누구보다 먹는 걸 제일 밝히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게 웬ㅡ"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방을 나서긴 했지만 아직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식탁 앞에 섰던 성진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진수성찬이야?!"

 식탁 위엔 오므라이스 세 접시와 구수한 냄새가 나는 감자국, 노릇노릇 잘 구워진 호박전과 예쁘장한 계란말이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밤새 우렁 각시라도 다녀갔나?"

 맨 손으로 호박전을 하나 집어 날름 입에 넣고 우물대던 성진의 눈에 식탁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메모지 하나가 눈에 띄였다.

  '어제 여러모로 폐가 많았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또 고마웠습니다. 보답의 뜻으로 부족한 솜씨지만 밥 한 끼 지어놓고 가는데 입에 맞으실런지...... 재료로 쓸 만한 것들이 거의 없어서 상차림이 빈약하지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ㅡ채희원ㅡ 

 참, 냉장고 안에 상한 음식들이 너무 많아 대강 골라버렸습니다.'

 선우는 계란 말이 세 조각을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고 우물대며 성진에게서 건네 받은 희원의 메모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야, 그걸 한꺼번에 세 개씩이나 집어 먹냐?"

 성진이 밉살맞아 죽겠다는 얼굴로 선우를 힐난했다.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은 지 얼마 못되어 음식 접시들은 금세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래 형. 지금 누구 덕에 아침을 얻어먹는 건데.'

  

 선우가 오므라이스 접시를 닥닥 긁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자 성진의 표정은 더욱 사나와졌다. 하지만 선우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딱히 맞서지는 못했다.

  "와ㅡ. 이렇게 집에서 직접 만든 제대로 된 식사가 그야말로 얼마 만이냐. 꼭 엄마가 만들어 준 거 같네. 정말 그 아가씨 음식 솜씩 끝내준다. 재료도 마땅치 않았을텐데. 냉장고 안도 봤지? 반짝 반짝한 거. 싱크대도 그렇고. 청소솜씨도 요리 솜씨 못지 않고 정말 성진이 형 말마따나 우렁각시라도 다녀간 것 같어."

 남은 감자국을 후루룩 거리며 단숨에 마셔버리고 난 후 준희는 매우 감동 받은 얼굴로 입에 침이 마르게 희원을 칭찬했다. 그러자 성진이 그런 준희를 향해 애교스럽게 윙크를 보내며 농을 건넸다.

  "그렇게 감탄스러우면 네 각시 삼지 그러냐?"

 그러자 준희는 단박에 얼굴을 붉히며 볼멘 소리를 했다.

  "각시는 무슨..... 내 각시는 따로 있는 거 잘 알잖아."

  "너 아직도 그 아줌마 만나냐?"

 성진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준희를 향해 말했다.

  "자꾸 아줌마 아줌마 하지말라니까."

 좀처럼 굳은 얼굴을 하지 않는 준희가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성진도 입을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런 와중에 선우는 두 사람의 대화는 아랑곳 않은 채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