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뭐야ㅡ?! 그럼 뒷골목으로 몰래 빠져나가던 레드비트의 밴에 웬 얼빵한 기집애 하나가 함께 타고 있었다더니 그게 바로 너였었다는 말이야?"
예상대로 미랑이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 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그녀는 좌판을 펴고 악세사리를 정리하는 일 따위엔 눈곱만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평소 때도 좌판을 펴고 접는 일, 팔 물건을 정리하는 일 등은 모두 희원의 몫이기는 했지만.
"으응."
사실대로 얘기하면 미랑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나올 지 불 보듯 뻔했지만 희원은 차마 미랑에게 어제 공연 후 겪었던 일들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고 거짓말에 서툰 희원이 어줍잖게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 혹여 이 후에라도 실수로 그 얘기가 불거져 나왔을 때의 미랑의 반응을 생각하면 차라리 일찌감치 이실직고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희원은 이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니? 네가 날 친구로 여기고 있기나 한거야?! 그런 자리라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나를 불렀어야지!" 미랑의 어거지가 시작됐다.
그녀의 얼굴은 시시각각 붉어져갔고 격앙된 언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희원은 되도록 미랑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미 장사 준비가 다 된 물건들을 괜스리 이 자리 저 자리로 옮겨놓으며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몇 번을 얘기했잖아, 미랑아. 그 때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왜 하필 그게 너야? 왜 하필 그런 행운이 너한테 떨어진 거냐구 정말ㅡ!"
급기야 미랑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분통을 터뜨리며 혼자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주변을 지나던 행인들도, 이웃한 다른 좌판 상인들도 모두 의아해 하며 미랑을 흘깃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희원은 그렇듯 격앙된 미랑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한 켠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씁쓸한 기분을 맛보았다. 물론 희원이 직접적으로 미랑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미랑이 숭배에 가까운 열정으로 푹 빠져있던 레드 비트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지만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개인적인 만남을 친구인 희원 혼자서만 누리고(?) 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녀의 울화를 돋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 정말 바보 아니니? 사진은 고사하고 어떻게 사인 한 장 안 받아왔다는 게 말이 돼. 오빠들이 속으론 얼마나 기분이 상했을까. 넌 예의란 것도 모르니?.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그런 자리에선 꼭 팬이 아니어도 사인 한 장 부탁하는 게 예의라구, 이 멍청아!"
"......"
그야말로 흥분이 극에 달한 미랑의 얼굴은 마치 빨간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희원을 다그치듯 쏘아붙이고 있는 목소리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해도 정말 너무나 불공평하다구!"
미랑이 도통 분을 삭이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씨근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그거 얼마야? 그거 여기서 파는 물건 맞지?"
우스꽝스러울 만큼 엄청나게 통이 큰 바지를 입고 꽤 껄렁껄렁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뒤통수를 치면 얼굴에서 가면 하나가 뚝 떨어질 듯 싶게 짙은 화장을 한 여자의 어깨에 왼 팔을 두르고 오른 쪽 새끼손가락으로 코구멍을 후비며 다가오더니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턱끝으로 미랑의 목을 가르켰다.
"내 여친이 말야 그게 맘에 든다는데 하나 얼마냐?"
아마도 사내가 말하는 물건은 미랑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인 듯 싶었다.
"자기야, 말만 해. 원한다면 열 개, 스무 개도 사줄 수 있어."
여친을 향해 나긋나긋 말하는 사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기름통에 열 두 번은 담갔다가 꺼내놓은 것처럼 느끼하게 돌변했다.
"이 봐요, 아저씨. 지금 이 목걸이가 여기 널린 싸구려랑 똑같이 보여요? 이건 명품라고요 명품!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니세요. 하긴 명품이 뭔 줄 알기나 하겠어."
잔뜩 독이 올라있던 미랑의 불똥이 급기야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고, 그 엉뚱한 불똥을 맞은 사내의 얼굴은 순식간에 불그락푸르락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둔갑했다. 희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미랑 앞을 가로막고 대신 사내에게 거듭 거듭 사과를 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얘가 아직 삼복 더위도 안 됐는데 더위를 먹었나......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가만 있어봐. 이거 실례는 누가 했는데 니가 나서! 야, 거기 뒤에 너 말라깽이. 당장 앞으로 나와서 사과 안 해! 이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장사치면 장사치답게 굴어야지 손님을 호구로 아나."
사내는 코구멍을 파던 손가락을 바지자락에 쓰윽 닦더니 희원의 간곡한 사과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오히려 좌판 한 구석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위협적인 어투로 미랑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살기 등등하기는 사내에게 눈꼽 만큼도 뒤지지 않을 듯 미랑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 족족 모두 사태를 점점 험악한 분위기로 몰아갈 뿐이었다.
"뭐, 장사치? 니 눈엔 내가 고작 내가 장사치로 밖에 안 보이니? 그리고 뭐 손님?! 하, 야야야, 빨리 꺼져. 너 같은 종자들한테는 나도 물건 안 팔아. 어디서 쌩 양아치같은 새끼가 꼴깝이야. 웃겨, 증말."
"허, 뭐? 쌩...쌩 양아치같은 새끼?! 꼴깝?! 이게 여자라서 대충 봐주고 넘어 갈랬더니만. 자기, 좀 뒤로 물러나 있어."
갑자기 통바지의 사내가 당장이라도 들어 엎어버릴 듯한 기세로 좌판 앞으로 다가들자 이에 당황한 희원은 무작정 사내의 팔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해요, 손님. 제가 제 친구대신 백배 사죄 드릴게요. 여자 친구분께서 원하신다면 여기 있는 목걸이든, 팔찌든, 머리핀이든 사과의 뜻으로 그냥 드릴게요. 그러니 손님, 부탁입니다. 제발 한 번만 참아주세요. 네?"
"이거 놔, 아가씨. 나도 울 앤도 그깟 나부랭이 한 개도 필요 없어. 야, 말라깽이 너 이리 안 나와! 너 같은 것들은 아주 쓴맛을 봐야 돼."
그 때 마침 문화센터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지나던 레드비트의 멤버 은선우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느라 잠시 정차하고 있던 중에 우연히 길가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에 시선이 멈추게 되었다. 어떤 좌판상 앞에서 무슨 실랑이가 벌어진 듯 보였다. 이내 무심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던 중 문득 선우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문화센터 앞에서 좌판상을 하고 있거든요..... 가정형편이 어려운 게 죄는 아니잖아요.....'
선우는 무의식적으로 뭔가 소동이 벌어지고 있던 좌판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동의 한 가운데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통바지 사내와 희원의 실랑이는 벌써 십여 분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희원이 애원하며 매달릴수록 사내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 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랑은 오히려 사내의 화를 돋구지 못해 안달인 듯 사내의 여자친구까지 싸잡아 비아냥거리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희원은 미랑의 태도에 속으로 열불이 낫지만 그걸 따지는 것은 뒷일이었다.
"이게 정말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오냐, 정말 확 뒤집어 주마!"
"손님, 부탁이니 한 번만 참아주세요..."
사실상은 그 때까지 좌판을 뒤엎을 것처럼 시늉만 해오던 사내가 마침내 진짜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양으로 이 번에야 말로 진짜 실행에 옮길 듯한 찰나였다.
"이봐, 거기. 약한 여자를 상대로 그게 무슨 작태냐! 너 깡패냐?!"
어디선가 돌연 등장한 웬 낯선자의 노호 소리에 사내는 물론이거니와 희원,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일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꽂혀들었다.
"요즘엔 깡패도 수준 있는 깡패들은 힘없는 여자들을 상대로 그 따위 행패는 안 부리는 걸로 아는데 보아하니 넌 좀 저질이구나."
커다란 선글라스가 얼굴의 반을 가리다시피 하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다소 거만한 자세로 통바지의 사내를 향해 조소를 던졌다.
"뭐, 저질?! 너 그거 지금 나보고 한 소리냐? 하, 이것들이 웬만하면 우리 자기 앞에서 소프트한 남자로 남으려고 했는데 나의 인내심에 불을 땡기는구만."
통바지의 사내가 그야말로 눈에 쌍심지를 켜코 선글라스의 사내에게 곧장이라도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한 방 날릴 듯이 씩씩대며 말했다.
바로 그 때.
"선, 선우...은선우 오빠 맞죠?"
선글라스 사내의 정체를 제일 처음 알아본 것은 미랑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주체하지 못해 손톱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잔뜩 날카로와 있던 그녀의 모습은 홀연 간데 없고 대신 선글라스의 남자를 홀린 듯 바라보며 넋이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선 그녀의 음성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은선우? 어? 정말! 정말 은선우 맞네."
"은선우다. 은선우! 어머 웬일이야."
희원과 통바지 사내의 실랑이를 줄곧 구경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도 하나 둘 씩 은선우를 알아보곤 수군대기 시작했다. 잔뜩 독이 올라 당장이라도 은선우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던 통바지의 사내도 주위 사람들의 술렁임에 잠시 동요되는 빛으로 멈칫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여자친구가 만면에 홍조 띤 채 넋을 놓고 은선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으로 사내가 입에 게거품을 물게 될 이유는 충분했다.
"야, 니가 인기 스타면 다야?! 뭔데 나서서 남의 일에 팥 나라 콩 나라 간섭이야! "
여자친구의 시선을 의식한 통바지의 사내는 인기 스타 앞에서 꿀릴 세라 선우를 향해 크게 삿대짓을 해대며 있는 대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간섭할 만 하니까 한다. 야, 빨리 아가씨한테 정중하게 사과하고 가던 길이나 마저 가시지."
"하, 니가 얘네들 기둥서방이라도 되냐? 사과 못하겠다면 어쩔건데. 엉? 엉?"
평소때 같았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은선우의 사인을 받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의 주위를 에워싸는 것이 수순이었을 테지만 그 날 그 자리 그 분위기에서 사인을 받자고 선뜻 나서는 눈치 없는 이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신 톱스타인 그와 어떤 양아치 같은 사내 사이에 붙은 시비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갈 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선은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구경꾼들에겐 그처럼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도 흔치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은선우라는 것을 알아본 후로 희원은 사실 난처함과 당혹스러움만 더욱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이 어쩐 일로 이 일엔 끼어들게 된걸까? 아휴...어쩐지 일이 점점 더 꼬여가는 기분이네......'
희원은 어쨋거나 고맙게도 나서서 한 마디라도 거들어 준 선우에게 혹여 티끌만큼이라도 누를 끼치게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잠시 얼떨떨했던 기분에서 얼른 깨어나 다시 통바지의 사내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손님, 이제 기분 좀 푸세요. 백 번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아량을 베푸셔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통바지의 사내는 설사 그러고 싶다해도 이젠 어정쩡하게 물러서기도 힘든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은선우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큰 소리 몇 번 더 치고 한 두 번 겁이나 주는 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 시비를 끝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자기 여자친구 앞에서 체면치레는 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러나 선우의 출현으로 사내는 자신이 물러갈 타이밍을 놓치게 되고 말았다. 거기서 어정쩡하게 얼버무리고 빠지게 되면 그야말로 여자친구 앞에서 그의 체면이 뭐가 되는가 말이다! 묵사발이 되는 것이다!
"야, 이것들이 아까부터 나를 아주 써라운드로 가지고 노네. 한쪽에선 개기고 한쪽에선 얼르고...흥! 니들 사람 잘못 골랐어. 저리 비켜! 안 비켜! 내가 이걸 확."
사내가 한 쪽 팔을 붙잡고 만류하는 희원을 거칠게 뿌리치는 바람에 희원이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선우가 얼른 희원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네...네..."
그러나 미랑이 재빨리 다가와 선우를 슬며시 밀치고 대신 자기가 희원을 부축하는 시늉을 했다. 그 와중에도 미랑은 희원에게 서슬퍼런 시선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이 인간이 말로는 안 되는 인간이구만. 다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좋게 말로 할 때 방금 이 아가씨한테 진심으로 사과하고 너 가던 길이나 가라. 응."
한결 격앙된 어조로 선우가 말했다.
"웃기고 자빠졌네. 너야말로 스타면 스타지 낄 때 안 낄 때 좀 가려서 나서시지. 아무데나 나서서 개폼 잡지 말고. 하긴 날나리 딴따라 주제에 여자들 앞에서 폼 잡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냐. 딴따라를 괜히 딴따라라고 하..."
뻐억.
통바지 사내의 빈정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선우의 주먹이 사내의 턱에 일격을 가했다.
"어머, 자기야 어떡해...어떡해...."
사내의 여자친구가 쪼르륵 달려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사내의 얼굴을 붙잡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여자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의 온몸에선 서슬 퍼런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이 새끼가......"
휙.
사내도 선우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려보았지만 선우는 용케도 사내의 주먹을 날렵한 동작으로 피했다. 그리고 다음 번 주먹도. 또 그 다음 번 주먹도. 하지만 계속 되는 헛손질로 인해 수치심과 분노로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내를 요리조리 피하며 선우의 주먹은 틈틈히 사내를 가격했다.
"더 덤빌래, 여기서 그만하고 사과할래?"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사내에게 선우의 얘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급기야 사내는 무기력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선우를 향해 무작정 몸을 날리더니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함께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헌데 하필이면 두 장정이 뒤엉켜 고꾸라진 곳이 희원의 좌판 위였던지라 요행이도 부러지진 않았지만 좌판의 상판이 훌러덩 뒤집어지는 바람에 악세사리들이 튀어올랐다가 길 바닥 여기 저기로 널부러지면서 주변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광경에 흥미진진해 하며 구경하던 주변 사람들도 모두가 아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해...이걸 어떡해....."
두 사내가 몸을 가누고 일어섰을 때 바닥에 널부러진 머리핀이며 목걸이, 귀걸이들을 주으며 애처롭게 울먹이는 희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선글라스를 벗어들고 망연자실 그녀와 주변에 정신없이 널부러진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봐, 은선우 맞잖아."
"어머머... 정말 은선우였잖아? 어머 어머......!"
하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 따윈 아랑곳 않은 채 그는 훌쩍거리며 물건들을 줍고 있는 희원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선우의 시선을 의식한 미랑이 얼른 희원에게 다가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희원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어줍잖은 동정심에 기사 흉내라니... 내가 뭐에 씌여도 단단히 씌였었나보군.'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희원을 내려다보던 선우의 미간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주름이 패였다. 매사에 냉소적인 편에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일 따윈 거의 없는 그가 어쩌다 잠시 안면을 익힌 희원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정신이 든 선우에겐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이해불가결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뭐에 씌였었다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하여간 선우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틈을 타 통바지의 사내가 실컷 얻어터져서 부어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선우는 가만 내버려두었다. 대신 성큼성큼 희원을 향해 걸어가 그녀를 훌쩍 일으켜 세웠다. 눈물로 얼룩진 희원이 선우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선우를 향한 원망의 빛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우의 맘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선우는 여전히 희원의 팔을 부여잡은 채 미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당신이 이 아가씨와 동업한다는 그 친구 맞죠? 미안한데 뒤 정리 좀 부탁해요."
"예?"
빠르게 말을 마친 선우는 희원의 팔을 끌고 부랴부랴 그의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미랑도 구경꾼들도 한동한 멍하니 두 사람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잠깐! 선우오빠! 잠깐만 기다려봐요, 선우오빠!"
갑자기 정신이 든 미랑이 있는 대로 목청을 높여 소리쳤지만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갈 뿐이었다.
"아아악! 내가 정말 미쳐, 미쳐! 도대체 선우오빠가 희원이 기집애만 데리고 어딜 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