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 (2/75)

  # 1.

  "칠십 사만 삼천....."

  "야, 채희원ㅡ.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해서 통장의 잔고가 요술처럼 불어날 것도 아닌데 그렇게 궁상스런 표정을 짓고 앉았으면 뭐가 달라진대니?!"

  "어...미랑이 왔구나."

 희원은 유난히 우아하고 긴 목선이 제대로 드러난 푸른 색 민소매 티셔츠를 멋들어지게 입고 서있는 친구 미랑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들고 있던 통장을 슬그머니 한 쪽으로 밀어놓았다.

  "왠일이야, 여긴 불쑥... 아직 장사 나갈 시간도 멀었구......"

 희원이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근처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었니?"

  "내가 이 동네에 볼 일이 뭐가 있겠니."

 미랑이 입을 삐죽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대꾸했다. 하긴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구질구질하기가 난민촌 찜 쪄먹게 생긴 이 동네에 완벽한 공주과인 미랑이 무슨 볼 일이 있으랴.

  "그럼... 왠일로?"

  "야아, 너 어떻게 여기서 사니? 아휴ㅡ 이 꿉꿉한 냄새 좀 봐.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작년에 왔을 땐 그래도 이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환기 좀 시켜라. 원래 지하방은 다 이러니?

 미랑이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자 희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달린 문이란 문은 모두 활짝 열어놓으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난 적응이 되서 그런지 잘 몰랐는데. 꿉꿉한 냄새가 그렇게 많이 나? 그래도 완전 지하는 아니고 반지하라서 제법 채광도 나쁘지 않고 바람도 잘 통하고 하는데."

  "그냥 지하방이나 반지하방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지 다르면 얼마나 다르다고."

 미랑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눈을 흘기며 희원에게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희원은 그런 미랑의 말투에 적응된 지 오래라 별로 개의치 않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덥지? 이젠 점점 여름 기운이 완연해 지네. 뭐 마실 거라도 좀 줄까? 냉커피 타줄까?"

  "아냐, 됐어. 나 금방 갈 거야. 박철 헤어샵에 예약해 뒀거든. 받아. 이 티켓 좀 가지고 있다가 네가 가지고 와. 공연장에 들고 갈 게 많아서 내 백은 못 가져갈 것 같거든."

  요란스레 손부채질을 몇 번하고는 미랑이 자신의 백에서 무슨 공연장 티켓 두 매를 꺼내 희원에게 내밀었다.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공연장? 무슨 공연장?"

  "문화 전시관 옆에 새로 신설된 대형 콘서트 홀 알지? 오늘 저녁 거기서 레드 비트랑 더 버드가 조인트 콘서트를 해. 넌 친구 잘 둔 거 복으로 알아라. 그 티켓이 얼마짜린 줄 알면 넌 아마 기절초풍할 걸?!"

  미랑이 가슴께까지 흘러 내린 긴 웨이브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 올리며 짐짓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 저녁? 야, 그럼 우리 장사는 어쩌구?"

  "얘는! 지금 그깟 장사가 대수니?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레드비트의 공연인데. 한동안 지방 순회하느라 몇 달 째 서울에선 그림자도 못 봤다구."

  "미랑아, 그래. 네가 그 레드 비튼지 레드 비틀즈인지의 열렬한 팬인 거는 나도 잘 아는데 하루 장사 공치면 그게 손해가......"

  사실 풍족한 집안의 고명딸인 미랑에게 문화센터 앞에서 희원과 동업으로 하고 있는 악세사리 좌판 일은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공주처럼 자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온 그녀가 기꺼이 희원의 동업자 겸 투자자로 자원하고 나선 배경은 단지 문화센터 주변에 유명 연예인들과 연예관계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나 바가 많다는 사실과 더러 그 곳에서 연예기획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연예인으로 픽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미랑은 연예계 진출을 꿈꾸며 학교까지 휴학하고 연기학원에 매달려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원에겐 사정이 달랐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오랜 동안 쪼들린 살림형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래도 자신의 꿈을 꼭 이루겠다는 목표 아래 대학에 입학은 했으나 차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랜 휴학생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지병을 얻어 자주 병원신세를 져야만 하는 아버지의 병원비와 아래로 줄줄이 딸려있는 두 동생들의 학비까지 보태야 했으니 그녀가 해결해야 할 발등의 불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지라 희원은 당연 돈 몇 푼에 울었다 웃었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휴ㅡ. 알았어, 알았어! 장사 공치는 대신 내가 그 돈 물어주면 될 거 아냐. 이제 됐니?!"

 미랑이 신경질적으로 희원에게 쏘아붙였다.

  "그래? 흐... 얼마 줄건대??"

 미랑의 태도엔 아랑곳 않고 희원이 번죽 좋게 표정을 바꾸어 웃음까지 흘리며 물어오자 미랑은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며 기가 막히다는 듯 희원을 향해 말했다.

  "야. 채희원. 너 정말 왜 이렇게 비굴하게 사니?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런 건 이해 못하고 사는 게 나아, 미랑아. 그걸 이해하는 순간 너두 고달파 진다."

 희원이 사람 좋은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거리며 대꾸하자 미랑은 오만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는 제스츄어를 연기자 지망생답게 과장되게 한 번 보여주고는 불쑥 집안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인사도 없이 불쑥 나가버렸다. 하지만 나간 지 채 몇 초가 못 되어 다시 문을 벌컥 열어 젖힌 미랑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야, 너 그 티켓 잊지 말고 꼭 챙겨서 시간 맞춰 나와. 알았지?!"

 콰당.

 그리고 다시 소리나게 문을 닫고는 가버렸다.

 친구 미랑이 급작스럽고도 요란스럽게 사라지고 난 직후 희원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별나게 납작한 그 빨강 스포츠카를 도대체 어디다 세워두고 왔을까? 여긴 동네 골목이 좁아서 주차할 때가 영 마땅치 않을텐데......'

  

 바로 그 때 언덕배기에 있는 희원의 집을 나와 자신의 차를 주차시켜 둔 곳까지 한참을 더 걸어 내려가야 했던 미랑의 뾰족한 구두굽이 거칠게 포장된 아스팔트 사이에 끼는 바람에 그만 구두 밑창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아악ㅡ! 정말 내가 미쳐요, 미쳐! 이 망할 놈의 동네에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미랑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끼야아아아아ㅡ

 콘서트 현장은 그야말로 숨막힐 듯한 열광의 도가니였다. 희원을 제외하곤 누구 하나 제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마치 집단 최면상태에 빠진 사람들처럼 다들 헤드뱅잉을 하며 노래 가사를 따라부르거나 바닥이 꺼져라 발을 구르며 미친 듯이 '오빠아ㅡ'를 외쳐대는 소위 오빠부대들의 외침소리가 객석 여기 저기서 불협화음처럼 불거져 나오곤 했다. 공연이 막 시작될 무렵까지는 희원의 옆 좌석에 그런대로 엉덩이를 온전하게 붙이고 있던 미랑은 첫 번째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팬클럽 친구들을 따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듯 했다.

 마치 모두가 한 마음인 듯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인 성원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눈에 처음부터 끝까지 별스럽게 혼자만 좌석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있는 희원의 모습이 이상스럽게 보일 법도 하건만 누구 하나 그녀의 존재를 아랑곳하는 이는 없었다. 아마도 그럴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으리라.

 미랑이 희원에게 몇 번을 주지시킨 바 대로라면 희원이 뒤로 넘어가고도 남을 만큼 값비싼 티켓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게 아깝기도 하여 얼떨결에 입장까지 하게 된 공연이었지만 평소 잔잔한 음악에나 심취하던 희원에게는 지나칠만큼 자극적이고 강렬한 레드 비트나 더 버드의 노래들보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들과 한데 어우려져 이루는 라이브 공연만의 현장감에 희원도 다소 감동을 받기는 했다. 

  '흠... 저게 베이스기타 소린가? 저 독주... 와, 상당히 인상적인데.'

 후끈 달아오른 공연장의 분위기를 잠시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듯 희원이 듣기에도 꽤 감동적인 베이시스트의 독주가 천천히 관중들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이 번에도 역시 최면에 걸린 듯 한결같이 숨을 죽이고 그 베이시스트의 연주에 흠뻑 취한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희원으로선 그 베이시스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하다 못해 무슨 옷을 입고 있는 지도 알 길이 없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높다란 벽이 그녀의 사방을 둘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레드 비트 혹은 더 버드 중의 한 베이시스트 였을 것이다. 락에는 별 취미가 없는 희원조차도 왠지 가슴이 찌릿해 질만큼 멋들어진 그의 연주가 점점 고조될 무렵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 오빠..... 흐흑..."

 아마도 그 베이시스트의 이름이 선우인 모양이었다.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하니 여고생인 듯한 그녀는 아마 선우란 이름의 베이시스트의 열렬한 팬인 것 같았다. 희원은 주룩 주룩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선 그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자기까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저 나이 때의... 저렇게 순수한 열정이라니...... 한편으론 부럽기까지 하네.'

 어찌 어찌하여 거의 세 시간 남짓한 공연이 마침내 끝나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제서야 좌석에서 일어난 희원은 거의 떠밀리다 시피하며 출구로 나왔지만 막상 복도에서 또 다시 물 밀 듯 밀려가는 인파에 의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떠밀려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문득 희원은 저 멀리서 누군가와 열심히 수다를 떨며 걸어가고 있던 미랑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미,미랑아ㅡ!"

 미랑이 알아 듣고 잠시 고개를 돌려 희원을 보긴 했으나 그녀는 다시 그녀의 일행과 수다를 떠는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희원이 그걸로 인사는 되었다고 생각하고 혼자 돌아가기 위해 공연장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걷고 있던 여학생 두 명이 하는 얘기소리를 얼핏 듣자하니 지금 희원이 떠내려가다 시피 얼결에 밀려가고 있는 방향은 출구가 아닌 가수들이 머물고 있는 분장실 쪽이란 것이었다.

  '이런...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군. 다들 가수들 얼굴 한 번 가까이서 볼까하고 그 곳으로 몰려가는 중이었구나. 미랑이도 그래서 저 쪽으로 가던 중이고.'

 어떻게든 그 북새통을 빠져 나와서 출입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던 희원은 복도 왼 쪽으로 통행인이 없어 비교적 한가해 보이는 작은 복도 하나를 보았다. 희원은 일단 인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작은 복도로 들어섰다. 지나 다니는 이가 전혀 없으니 왠지 썰렁한 느낌도 들었지만 결국은 어찌 어찌 연결되서 출구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가 미로 속도 아니고 하다 못해 주차장으로 통하는 계단이라도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몇 개의 모퉁이를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한 끝에 결국 좁다란 복도길이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아 마침내 방금 지나온 복도가 새로 만난 복도인지 아니면 좀 전에 자신이 한 번 지나쳤던 곳인지 내내 헷갈리다 결국 방향감각을 잃고 말았다.

  '이런 어쩌지... 경비 아저씨나 누구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고.'

 급기야 냉방이 빵빵한 건물 안에서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힐 지경까지 이 복도 저 복도를 맴맴 돌아봤지만 자신이 처음 들어섰던 그 복도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점점 희원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경비 아저씨가 한 밤중에 야간 순찰 같은 거 돌 때까지 헤매 다녀야 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희원은 이제 작은 문 하나라도 눈에 뜨이는 대로 무조건 다 열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전까지는 계단으로 통할 것처럼 보이는 문 외엔 조심스러운 마음에 선뜻 다른 문들은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 사람 그림자라도 좀 봤으면......'

 그러다 때마침 희원의 눈에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란 글귀가 붙은 문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란 말이 다소 맘에 걸렸지만 지금 심정으론 차라리 출입엄금을 어긴 그녀를 야단쳐 줄 누군가라도 만난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똑똑.

 희원은 일단 조심스레 노크를 두 번 해보았다. 하지만 무반응이었다. 아마도 기관실이나 뭐 그런 류의 용도로 쓰이는 장소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무슨 대기실처럼 보이는 공간 너머로 다시 다른 문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희원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 다소 낙심스런 마음으로 이 번엔 노크 없이 건너편의 또 다른 문 하나를 열어 젖혀 보았다. 

  

  "어엇! 쟨 뭐냐?!"

 뜻 밖에도 그리고 너무도 다행스럽게도 그 곳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것도 세 명씩이나ㅡ!

  "앗!"

 하지만 사실 거의 포기 상태였던 그녀인지라 희원은 세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앗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동시에 바라보던 세 사람, 정확히 말해 세 명의 남자들 모두가 웬일인지 한결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매우 의아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때문에 희원은 갑자기 주눅이 들어 길을 물어야겠다는 생각도 깜빡 잊어버린 채 입이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히야ㅡ 너 참 대단하다. 어떻게 여길 찾아냈냐? 너 무슨 추리작가나 탐정 지망생쯤 되냐?"

 마침내 세 남자들 중 유독 피부가 희고 갈색의 곱슬머리를 길게 기른 예쁘장한 남자 하나가 희원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쿡쿡. 그래, 그 정도면 자격있다. 어디다 싸인해 줄까? 뭐, 원하다면 특별히 같이 사진 한 장 박아줄 수도 있고."

 이 번엔 윤기 나는 검은머리를 보기 좋게 기르고 눈썹은 숯검댕처럼 짙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인? 사진? 이 사람들도 공연에 참여했던 사람들인가? 여기가 레드 비트 분장실은 분명 아니고 그럼...더 버드? 아님 백댄서들인가?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암튼 연예인들 인가부지. 빨리 길이나 묻고 가야겠다.'

 희원은 짧은 시간동안 나름대로 잔뜩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상황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그 들에게 길이나 묻고 빨리 그 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저...... 여기 공연에 참여하셨던 분들인가 보네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는... 싸인은 됐구요, 아하하. 죄송하지만 제가 길을... 좀 잃어서 그러는데 건물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느 방향인지만 좀 가르쳐 주시면... 안될까요?"

 촤아악ㅡ.

 희원이 어눌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간신히 부탁조의 말을 끝맺자 불현듯 그 곳엔 찬물이라도 쫘악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 것은 적잖이 무딘 희원에게도 느껴질 만큼 생생한 느낌이었으므로 희원은 자기가 무슨 대단한 실수라도 저질렀나 하여 다시 주눅이 들고 말았다.

 세 남자들은 황망한 얼굴로 잠시 동안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갈색 웨이브 머리의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희원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불쑥 희원의 코 앞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더니 이렇게 물었다.

  "관심 끌어 볼라구 지금 너 쇼하는 거지?"

  "예? 에...무슨......"

 희원은 떠듬떠듬 대꾸도 제대로 못한 채 뒤로 쓰러질 듯 한 걸음을 물러났다. 하지만 웨이브 머리의 남자는 아까보다 한결 더 가깝게 자신의 얼굴을 희원 앞에 들이대며 재차 물었다.

  "야, 너 정말 우리 몰라?!"

  "......"

  "너 외계인 아니면 간첩 맞지?!"

  "......"

 영문을 모른 채 웨이브 머리 남자의 놀림에 무안해진 희원은 얼굴만 붉히다 이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어... 몰라 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 별명이 원래 형광등, 사오정...뭐 그렇거든요. 유명하신 분들이니까 아마도 5분 후쯤이면 꼭 생각날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쉬시는데 방해가 된 것 같네요.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사과를 해야되는지 자신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과와 동시에 깊이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희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들의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사과든 뭐든 하고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상수일 듯한 분위기다. 아휴, 내가 길을 잘못 들어도 불길하게 잘못 들었구나. 외딴방에 덩치 큰 장정들 셋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혼자 조바심을 치며 황황히 그 곳을 빠져 나오려던 희원을 셋 중 누군가 불러 세웠다.

  "야, 기다려!"

 그 부름 소리에 희원은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꾸했다.

  "네?"

  "너 다른 애들한테 가서 우리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마라. 그럼 피차 피곤해진다. 알아들었지? 여긴 공연장 측에서 특별히 만들어 준 휴식 장소란 말이야."

  '에혀, 그게 지금 같아선 다른 애들 있는데 까지 찾아갈 수나 있으려는지......'

  "예에."

 아무튼 희원이 겸손히 대답을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다시 방을 막 나서려 할 때였다.

  "아냐, 잠깐. 아무래도 맘이 안 놓여. 네가 약속을 지키리라는 보장이 어딨냐? 원래 니들끼리 의리 죽이잖아. 안되겠어. 너도 우리가 여기 빠져나갈 때까지 우리랑 같이 있어야겠다."

  "예? 여기...제가요......?"

  "그래. 여기. 뭐 우리도 금방 나갈 거니까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거다."

 희원은 왠지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만 같은 써늘함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으아...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인가? 아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무사하다고 했어. 지금 보니 여기 두 사람은 잘 모르겠고 아까부터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고 있는 저기 저 사람, 저 사람은 인상이 되게 순딩이처럼 생겼으니까 여차 하면 저 사람한테 나 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려 보는 거야.'

  "근데 넌 얼굴이 왜 그리 사색이 되가지고 그러냐? 다른 애들 같았으면 좋아서 난리들 이었을텐데. 일단 거기 좀 앉지. 정신 산만하니까."

 희원을 불러세웠던 숯검댕 눈썹의 남자가 상의 주머니에서 짙은 색 썬글라스를 꺼내 쓰며 어딘지 모르게 가시가 돋힌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투로 뇌까렸다. 웨이브 머리의 남자에 비해 냉소적인 느낌이 강한 사람인 듯 싶었다.

  "야야, 건 그렇구. 이제 5분도 훨씬 넘게 지난 것 같은데 이제 우리가 누군지 기억이 좀 나냐, 형광등 아가씨야?" 

 웨이브 머리 남자가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와아, 정말 눈 크다!) 불현 듯 희원을 기습해왔다.

  "예?? 아..네...그것이...아직....."

 희원은 이 조인트 콘서트의 주인공들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를 애를 써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을리 만무한 그녀에게 당장에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기특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스스로 꽤 유명하다고 자부하는 걸 보니 이 콘서트의 주축인 레드 비트 멤버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해보았으나 게스트로 나온 또 다른 유명 그룹 더 버드 멤버들의 숫자 역시 셋이라는 것을 가만해 볼 때 자칫 입을 놀렸다간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는 결과를 초래해 오히려 화만 돋구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 희원은 차라리 그냥 잘 모르겠다로 일관하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었다.

  

  "니네 집에 TV는 있냐?"

  "네."

  "그럼 너도 TV를 보긴 하겠구나?"

  "네...가끔 필요할 때는요...오늘의 날씨...이런 거..."

  "오늘의 날씨? 푸하하하하ㅡ!"

 세 멤버들은 겉모습만 멀쩡하지 어디 오지에서 왔나 싶게 개성 뚜렷한(?) 그녀를 천연기념물 보듯 바라보며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필요할 때 오늘의 날씨 정도는 본다...? 어떤 때 필요한데?"

 그들의 장난기 어린 관심에 그녀가 표적이 되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희원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으므로 다소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꼭 그런 것까지 제가 대꾸해야할 의무가 있나요?"

  "호오ㅡ."

 그러자 멤버들 모두가 의외라는 듯 희원을 바라보았다. 여지껏 뭔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사람처럼 쭈뼛거리기만 하던 그녀가 불쾌하다는 반응을 제법 표나게 드러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태도는 오히려 결국 그들의 호기심과 장난기를 더욱 부채질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야 물론 아가씨한테 그럴 의무는 없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그렇게 발끈하면 우리가 좀, 아니 사실 많이 무안하지. 보아하니 아직 나이도 어린 아가씨인 것 같은데 이래뵈도 나이로 치면 우리가 한참 큰 오빠 뻘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우릴 무안 주면 예의가 아니지. 안 그래?"

 심성 여린 희원, 웨이브 머리의 남자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잔뜩 무게 실은 어조로 이렇게 말하자 다시 뻘쭘해지고 만다.

  "그건...오늘의 날씨가 제 아르바이트랑 관계가 있을 때가 많아서......"

  "아르바이트?"

  "토요일, 일요일에 문화센터 앞에서 좌판상을 하고 있거든요. 비가 오거나 하면 장사에 지장을 받거나 아예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좌판?"

   

  "네. 악세사리를 팔아요."

  "흠...가정형편이 어려운 모양이군."

  "네." 

 다소 민감해 질 수 있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대꾸하는 희원을 보며 감명 받은 세 남자.

  "야, 넌 좀 여러 가지로 별나구나. 웬만한 여자애들 자존심 때문에 그런 내색 잘 않으려구 하던데."

  "감춘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또 가정형편 어려운 게 무슨 죄는 아니잖아요."

 희원이 오히려 헤벌쭉 웃으며 말하자 잠시 세 남자들은 말을 잊고 희원을 바라본다.

  "그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무슨 알바를 하냐?"

 이쯤 되니 장난기 어린 그들의 호기심은 다소 누그러지고 표정도 사뭇 진지해진다.

  "유치원 보조 교사를 해요. 보수는 짜지만 애들이랑 지내는 게 재미있어서요. 하여간 그것만 가지곤 제 한 학기 학비 모으기도 빠듯해서 좌판 아르바이트를 생각해 낸 거예요."

  "그런데 아가씨 말을 듣다보니 TV도 잘 안 보고 음악도 잘 안 들으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콘서트엔 오게 되었는지 되게 궁금하네요. 티켓 값도 꽤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때까지 쭈욱 말없이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매우 순해 보이는 인상의 덩치 큰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떼고 물었다. 그는 다른 두 남자들과 달리 희원에게 매우 깍듯하게 존대말을 사용하고 있엇다.

  

  "여기 무슨 알바 자리 있다고 해서 왔냐?"

 꼭 그림동화 속에서 빠져 나온 왕자님 같은 외모의 웨이브 머리 남자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저도 음악은 즐겨 들어요. 단지 그게... 롹은 익숙치 않아서. 후후, 그리고 여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저랑 같이 좌판 알바하는 친구가 레드 비트 열혈팬이라 어찌 어찌하다 보니 정말 우연찮게 따라 오기는 했는데..... "

  "근데?"

  

  "사람에 끼여 죽는 줄 알았어요. 어휴......"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야, 근데 너 정말 아직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냐?"

 웨이브 머리의 남자는 아무래도 외모와 걸맞는 왕자병이 깊은 모양이었다. 그는 집요하게도 끝끝내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 받고 싶었는지 다시 또 되물었다.

  "어..저...사실...대강 이런 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음...좀 전에 말한 친구가 걸핏하면 제 코앞에 들이밀곤 하던 브로마이드들도 떠올려보고 하니...아무래도 세 분이...저...그...그 분들 맞죠?"

  "그 분들 누구?"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냉소적인 인상의 숯검댕 눈썹과 순딩이 인상남도 제법 호기심 실린 시선을 희원에게 고정했다.

  "레드...비트."

  "야, 다들 들었냐? 다행이 얘가 막판까지 우리 자존심을 구기진 않는구나."

 웨이브 머리의 남자가 비로소 개운한 표정이 되어 나머지 멤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자처럼 예쁘고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파워풀 하고도 흡인력을 가진 목소리였다.

  "후훗. 그러게 말야. 난 좀 전에 저 얘 입에서 혹 '그...저어... 더...버..드...아니세요?' 라는 소리는 안 나오나 괜스리 조마조마 하기까지 했다니까."

 이 번엔 숯검댕 눈썹의 남자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반쯤 벗겨 내리고 희원을 돌아보더니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야, 덕분에 스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원의 머릿 속에 번뜩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멋있다, 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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