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프롤로그. (1/75)

  

   사바스카페-레드비트 하우스

  # 프롤로그.

 그 남정네들은 그녀를 순이라고 불렀다. 

 그녀에게 채희원이라는 엄연한 이름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무튼 그들은 집에서 머무는 시간동안 내내 순이야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순이야, 빨랑 밥 줘."

  "네에."

  "순이야, 내 노랑 줄무늬 팬티 어디다 뒀어?"

  "거기 서랍장 두 번째 칸에요."

  "순이야, 나 계란 후라이 써니사이드 업으로 한 개 더."

  "네, 금방 올리겠습니다."

  "순이야, 이거 빨리 다림질 좀 해 줘."

  "이것 좀 헹궈놓고...아, 예, 곧 가요ㅡ."

  

  순이야. 순이야. 순이야......

 그들이 주는 보수 이상으로 아주 뽕을 빼겠다고 작정들을 한 모양인지 집에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밖에 있을 때도 수시로 전화해 그녀를 부려먹는다. 

  "순이야, 오늘 녹음실에서 밤늦게까지 야간 작업 있을 거니까 야식 좀 푸짐하게 싸와라."

  "야, 오늘 공개방송에 입고 나갈 의상 컨셉이 바뀌었으니까 내 알바니 선글라스 좀  찾아서 빨랑 갖고 나와라."

 그런 것쯤 그들의 코디네이터에게 다른 걸로 대처해 달랠 수도 있을텐데 그들은 희원을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인 듯 하다. 하지만 순딩이 희원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들의 요구를 묵묵히 들어준다.

 사실 순이라는 이름은 순딩이 2호의 약칭이었다. 그것은 희원이 최고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남성 3인조 롹밴드 <레드 비트>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한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한 여름날 밤에 급작스레 하사(?)받은 애칭이기도 하였다.

 그 날 저녁 세 멤버는 간만에 일찍 귀가해 희원이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포식하고 거실 쇼파에 각기 편한 자세로 널부러져 있었다. 주방에서 희원이 부지런히 저녁상을 치우는 소리를 듣고있던 그룹의 맏 형격이자 리드싱어인 성진이 둘째 선우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넌즈시 물었다.

  "야, 쟤 말야. 첫 대면부터 황당했지만 볼수록 천연기념물이란 생각 안드냐?"

  "뭐가 또."

 간만에 부른 배를 문지르며 퍼질러 누워있던 선우는 만사가 다 귀찮은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어제부터 쟤 인내심 테스트 좀 해보려구 일부러 이 일 저 일, 별 시시껄렁한   잡시부름까지 막 부려먹었거든. 너두 내 성격 잘 알잖아. 내가 원래 사람 존심 건드   는데 일각연 있는 거."

  "형, 저녁 먹은 게 뭐 잘못 됬어? 갑자기 왜 맞는 말을 다 하구 그래."

 선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췟, 니들 눈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 같아 보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나   도 내 자신이 어떤 인간인 정도는 알고 산다. 암튼 내가 쟤한테 말야 존심에 쫙쫙 기스가고 이마에 팍팍 스팀 들어올 만큼 열 받는 심부름도 몇 번씩이나 시키고 그랬는데 저 앤 도대체가 어찌 돼먹은 화상인지 내내 웃는 얼굴로 고분고분한 것이 영 요즘 애들 같지 않더라니까. 저거 저거 혹 완전 내숭 내지 이중인격은 아닐까? 우리   앞에서는 네네네 하다가 돌아서선 이빨 뿌득뿌득 갈며 우리 빨래 같은 거 막 패대기치고 하는......"

 성진은 뭇여성들의 마음을 온통 설레게 하는 그의 그윽하고 커다란 이른바 꽃사슴 눈망울을 되록되록 굴리며 고개를 갸웃한 채로 말끝을 흐렸다. 

  "성진이형, 정말 나빠. 내가 보기엔 희원씨 정말 착한 사람 같던데. 앞으론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마, 형."

 세 멤버들 중 덩치로 치면 가장 우람한 체구를 가졌지만 팀의 막내답게 아직도 이마에 여드름 자국 몇 개가 발그레하게 남아있는 준희가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자 성진이 준희의 이마에 난 여드름 자국 하나를 긴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응수했다.

  "순딩아, 넌 아직 사람 무서운 줄 몰라. 특히 여자란 존재들은 더 모르고 말이지."

  "글세... 내가 볼 때 쟤 내숭은 아닌 거 같고... 우리 준희처럼 타고난 순딩이 같어."

 선우가 나른한 듯 기지개를 켜며 무심하게 뇌까렸다.

  "순딩이?"

 역시 포만감으로 인해 나른함에 빠져있던 성진이 문득 눈을 빛내며 상체를 곧추 세웠다.

  "그럼, 우리 집에 순딩이가 둘이 됬네. 어쩌지? 우리 순딩이도 순딩이고 쟤도 순딩   이면 부를 때 헷갈리잖아. 안 그러냐, 순딩아?"

 준희가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이는 시늉을 했을 뿐 별 대꾸가 없자 성진이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양 눈을 빛내며 선우를 향해 말했다.

  "야, 그럼 이렇게 부르면 되겠네. 준희가 우리 집 순딩이 원조니까 순딩이 1호로    해서 순일이라고 부르고 쟨 그럼 순딩이 2호가 되니까...순이! 와하핫! 순이라고 부   르면 되겠다. 순이!"

  "뭐, 순이?! 하하핫. 하여간 형도 참. 근데 그거 재밌네. 순일이. 순이. 꼭 강아지    이름 짓는 거 같잖아. 하하하하."

 선우도 성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누워서 허리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선우형까지......"

 평소 맏형 격인 성진보다 무게있고 감정표현이나 특히 웃음에 인색한 선우까지 가세해 웃음보를 터뜨리자 막내 준희는 포옥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순이. 순이야ㅡ!"

 어지간한 여자들이 울고 갈 만큼 투명한 우윳빛 피부에 윤기 나는 밝은 갈색의 웨이브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성진의 외모는 남자로 보기엔 지나치게 고혹적인 자태였지만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십 년 이상을 최고의 롹싱어로 군림해올 만큼 쩌렁쩌렁한 목청을 가진 그가 짐짓 무게를 잡은 채 주방을 향해 장난스럽게 소리치자 준희가 난처한 듯한 얼굴로 그런 성진을 말렸다.

  "아 정말, 혀엉ㅡ. 순이가 뭐야. 촌스럽게. 희원씨가 들으면 분명 언짢아 할거야."

  "같은 순딩이끼리라고 편드냐, 순일아?"

  "난 뭐 형들 등쌀에 이골이 났으니까 뭐라 부르던 상관없지만 희원씨는......"

  "예? 저 뭐요?"

 그 때 마침 주방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어느 새 과일을 예쁘게 깍아서 쟁반에 담아 나오던 희원이 세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참, 그리고 순이가 누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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