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마인드-12 >
“준은 내가 모르는 걸 알아.”
진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음을 뛰어넘은 영생자일지라도 환상 속에서 살 순 없었다.
현실에서 살아야 했고, 준과 굿데이가 최강 현실이었다.
진은 사전 연락도 없이 굿데이에 왔다.
진의 국제적 지위는 영생 위원회의 총수이자, 영생의학 창시자이며, 세계 최고 아이큐 신기록 보유자였다.
“준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역시.”
진은 흡족했다. 연락 없이 왔지만, 준은 기다렸다. 대화할 때도 그랬는데, 준은 정말이지 편한 상대였다.
준은 진을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치료할 영생자가 있어서, 아일랜드에 들렀다 왔어.”
“죄 많은 영생자 하나가 소멸했겠군.”
“준은 영생자도 아니면서, 영생자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들어. 무슨 비결이라도 있어?”
“영생을 사치품으로 생각하면 돼. 왜 있잖아. 겉보기엔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여도 전혀 쓸모없는 것들.”
“그렇구나. 그 쓸모없는 것의 총수가 찾아와서 미안하네.”
“거짓말.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 자꾸 맘에도 없는 소릴 늘어놓으니깐, 사치품 취급받는 거야. 좋은 제품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
진은 수십 년 만에 혈압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격하게 화내려 했지만, 괜한 사치인 거 같아서 그만뒀다.
그는 직접 가져온 진단 킷트를 준의 손등에 댔다.
“그러네. 네거티브 맞네. 비결이 뭐냐?”
“영생의학 창시자니깐, 솔직하게 말해줄 게. 내가 너무 잘나서 그래.”
빠직-
준은 솔직하게 말했건만, 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래. 너 잘났다. 나도 잘나지고 싶은데, 가르쳐줘.”
진이 준을 찾아온 이유였다. 준은 좀비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다. 그렇기에 진단검사에서 음성이 나온다. 영생자도 좀비 바이러스 면역을 얻지 못하면, 좀비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스펙트럼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면, 좀비 바이러스 백신 개발이 가능하지 않아?”
스펙트럼 바이러스는 콜레스테롤 스펙트럼에 작용하는 바이러스였고, 인간의 피를 탐한 영생자를 갉아먹었다. 진이 디자인한 스펙트럼 바이러스는 일반인에게 영향을 안 미치고, 오직 영생자에만 반응했다.
“가능하지.”
“그런데 왜?”
“백신을 맞으면, 영생을 포기해야 하거든. 좀비 바이러스 덕분에 영생 최종 형태가 좀비로 결정되었어. 영생을 계속 누리면, 어쩔 수 없이 좀비로 변하게 된 거지.”
진은 천천히 설명하면서, 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저 새끼 알고 있었구나!’
“파라엔진 기능에 좀비 바이러스 백신 기능을 추가할 거야.”
“백신?”
“일반인용. 내가 날 좀 연구했거든.”
“영생자는?”
“굿데이는 영생 시장에 관심 없어.”
“관심 좀 가져주면 안 될까?”
진은 아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영생 시장이 커지면 다른 시장이 작아진다고. 좀비 역병을 봐도 그렇잖아!”
준은 좀비 역병을 영생 시장의 한 형태로 받아들였다. 준의 판단은 정확했다. 좀비 역병의 원인은 짝퉁 영생에서 비롯되었고, 좀비 역시 영생의 한 형태였다.
“영생자 중에는 파괴 본능을 간신히 억누르며 사는 것들도 있어. 세상이 파괴되면, 자신도 살 곳이 없어지니깐, 참는 거지. 그런 것들이 좀비로 변할 운명이라는 걸 깨달으면, 어떻게 되겠어? 다 같이 죽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파괴 본능 충만한 영생자는 좀비 역병보다 더 위험해. 그들을 구제하지 못하면, 인류가 위태로워.”
“왜 돌려서 말해? 그 영생자가 바로 너잖아?”
준은 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이야기를 내가 직접 하는 건 ···. 좀 부끄럽잖아. 그래서 간접 화법을 사용했지.”
“인류의 운명을 걸고 부끄러워하지 마.”
“그게 중요해? 어쩔 거야? 인류의 운명. 나는 준비됐어.”
“다 함께 죽을 준비?”
“그래.”
순간 준과 진의 눈빛이 충돌했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깊이 보았다.
인류의 운명을 건 눈싸움이었다.
둘 사이에 파리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눈빛에 화르르 타 죽었다.
눈빛이 충돌한 그 지점에 미니 블랙홀이 생겨났다.
“계속 고집을 피우면, 블랙홀이 커져서 지구가 사라진다.”
진은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준은 재빠르게 손가락 두 개를 세워서, 진의 눈을 찔렀다.
큭!
진이 눈을 감자, 블랙홀이 스르르 사라졌다.
“눈 찌른 거 뭐라고 안 할 테니, 도와주라.”
“한 번 더 찔러 줄까?”
준은 손가락으로 V를 만들었다. 진이 움찔했다.
“영생의학 주식회사에서 기술을 흘린 건, 영생 시장을 넓힐 목적이었지.”
준의 날카로운 질문은 대답을 노리지 않았다. 준의 클래스가 되면, 질문 그 자체가 대답이 된다.
“그래. 인구의 5% 이상을 영생자로 만들고, 노예처럼 부리려 했지. 5%이면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거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좀비 역병이라니! 준. 너에게 약속하겠다. 좀비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어준다면, 영생의학을 포기하겠어. 지금 있는 영생자만 구해주면 돼. 현존하는 영생자 이외의 다른 영생자는 없을 거야.”
준은 진의 꼼수가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짜증 날 정도였다. 오래 사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준이 죽으면, 진은 그의 세계를 확장할 것이 너무 뻔했다. 그리고 ···.
“영생의학 주식회사가 사업을 그만둬도, 이미 블랙마켓에서 영생을 팔고 있어. 사람들에게 영생은 시한부 좀비라는 사실을 알려도, 다양한 마케팅으로 영생이 팔릴 거야. 우리는 그런 시대에서 살고 있어.”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네 잘못 맞아. 영생자용 좀비 바이러스 백신은 가능하지만, 그 백신을 사용하면 ···.”
“수명이 정해지지. 그런 백신은 나도 만들었어!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영생을 지켜주는 백신이야!”
“영생이 그렇게 중요하면 ···. 좀비가 되라. 네가 좀비가 되면, 유네스코에 건의해서 국제 유물로 지정해줄 게.”
“관대하네.”
“감정지능 때문에 가끔 그럴 때가 있어. 어제는 드라마 보고 울었어. ‘헛깨비’라고 재밌더라.”
진도 헛깨비를 봤지만, 조금도 재밌지 않았다. 감정이 드라이 된 영생자에겐 드라마 감동은 불가능했다.
진은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계속 있어봤자, 놀림감만 될 뿐이었다.
다음날, 굿데이는 좀비 바이러스 백신을 발표했다. 파라엔진에 백신 기능을 업데이트하고, 좀비 진단 기능을 추가했다.
“준 대표님. 파라엔진이 보급되지 않는 곳은 어떻게 하실 거죠?”
수잔이 파라엔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제3 국가와 소수 부족을 걱정했다.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걱정을 드러내서 착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리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준에게 ‘수잔의 마음은 비단결 같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준은 뚱했다. 파라엔진 좀비 백신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좀비 역병 종결의 시작이었다. 파라엔진 백신을 받으면, 좀비 바이러스에 면역을 얻고 좀비에 물려도 좀비가 되지 않는다! 이건 혁신이었다.
파라엔진 좀비 백신 개발로 일본 종교 연합에서는 준을 신으로 인정했다. 일본 종교 연합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맥아더를 신으로 인정했던 조직이었다.
수잔은 약간 짜증스러워하는 준을 보며 신의 노여움을 떠올렸다.
준신님은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여기까지 했으면 됐지! 나머지는 너도 좀 노력해라!’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잔은 우아하게 자세를 낮췄다.
“열심히 하면 뭐가 달라져?”
준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수잔에겐 상처가 되었다. 키가 1cm 깎이는 느낌이었다.
운다.
헉!
굿데이 직원들은 이미 능력자 중에서도 최상급에 진입해 있었다. 직원 모두 수잔의 격한 감정변화를 감지했다.
‘회장님 수잔을 울렸어! 이거 누구 편을 들어야 해? 회장님 편에 서서 수잔을 혼내야 해? 아니면 수잔 편에 서서 ···.’
물어볼 것도 없었다. 준은 진리였다.
“파라엔진 버전 백신은 시장 보호 차원에서 공개한 거야. 좀비 역병 때문에 소비가 많이 줄었더라고. 수잔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 현재까지는 인간만이 좀비가 됐지만, 동물이나 식물도 좀비가 될 거야. 아마존 야생 동물이 모두 좀비가 된다면, 세상 참 웃길 거야.”
“눈물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준 대표님.”
“모든 동식물에 파라엔진 칩을 이식할 수는 없고 ···. 내 면역 정보를 오퍼 위성에 전송해서, 모든 세상에 백신 스모그를 뿌릴 게. 그렇게 되면 모든 생명체는 좀비 바이러스 음성을 보일 거야.”
“그 말씀은 준 대표님의 보혈로 세상을 정화하신다는 ···.”
수잔은 또 울려고 했다.
“울지마! 울 정도로 거창한 게 아니야! 그냥 백신 정보량을 뿌리는 거야. 생명체라는 하드웨어에 백신 정보라는 소프트웨어를 날리는 것뿐이야.”
라고 말했지만, 수잔의 귀에는 신의 복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수잔만이 아니었다. 직원들 역시 오오! 감탄을 연발했다.
“완벽하진 않아. 판타지늄 생명체인 영생자들에겐 효과가 없거든.”
“아니에요! 그래서 더 완벽해요!”
수잔은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을 눈 밖으로 밀어냈다.
진은 영생 위원회를 소집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듯이, 영생자를 위한 좀비 백신도 없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백신을 맞고 몇 년 후에 소멸하거나, 백신을 맞지 않고 좀비로 변하거나.”
“백신을 맞지 않으면, 좀비가 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있나?”
“아주 길게 잡아도 한 달이 안 됩니다. 백신을 맞지 않으면,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한 달 이내에 좀비가 될 겁니다.”
영생자들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고작 한 달이라니!
“백신을 맞으면 ···. 얼마나 살 수 있지?”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도 십 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나는 어떤가? 내가 백신을 맞는다면, 몇 년이나 버티겠나?”
일본 야마토 덴노였다.
“181일입니다.”
“181일이라 ···.”
사형선고와도 같은 대답에 야마토 덴노는 미소 지었다. 진과 다른 영생자들은 덴노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영생자의 생각은 공장 규격품처럼 똑같았다. 덴노는 자신의 없는 세상을 남겨둘 맘이 없었다. 그가 죽는 날, 세상도 멸망하길 바랐고, 그만한 능력도 있었다.
“일본 자위대가 블랙마켓에서 핵폭탄을 사들이고 있다던데, 아십니까?”
“모르오. 덴노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소.”
“야마토 덴노! 다른 영생자의 남은 삶은 보장해줍시다!”
스웨덴 왕족 샬롯 영생자였다. 그녀가 야마토 덴노에게 요구했지만, 위원회의 영생자들은 이미 덴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영생자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존재로 다른 영생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진! 우리에게 영생을 팔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시한부 생명이라니! 명백한 계약 위반이야!”
다른 영생자가 들고 일어섰다.
“제가 당신들에게 준 것은 영생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좀비가 되거나 소멸한단 말인가!”
“상품은 완벽했습니다. 서비스 기간이 끝난 거뿐이죠.”
“말도 안 되는 ···.”
“여러분이 직접 서명한 영생 계약서를 확인해보시죠. 불의의 사고, 천재지변으로 인한 소멸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좀비 바이러스는 천재지변으로 분류됩니다.”
“알겠네. 계약서를 들먹거리는 걸 보니, 자네도 궁지에 몰린 거 같군. 자네에겐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일주일입니다.”
진은 덴노와 똑같은 미소를 보였다.
가장 화를 낸 영생자는 야마토 덴노였다.
“뭐라고! 그럼 너도 핵폭탄을! 어쩐지 블랙마켓에 핵폭탄이 품귀더니만 ···.”
“그랬군 ···. 어쩐지 ···.”
다른 영생자들도 중얼거렸다. 그들도 은근슬쩍 핵폭탄을 모으는 중이었다.
“자네보다 더 짧은 사람은 없나?”
“제가 제일 짧습니다.”
진이 대답하자,
영생자들은 탁구 하듯이,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세계 멸망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