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36화 (133/141)

< 테라마인드-11 >

“달링~ 이름을 알려주오.”

듀크는 중년 여인을 홀리기로 했다. 여자의 마음을 얻어야 철장 문이 열린다!

듀크의 그럴듯한 사탕발림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직접 관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 뱃속에는 듀크의 씨앗이 자랐다.

준의 배다른 형제가 될 아이였다.

“아만다. 내 이름은 아만다예요.”

그녀의 입가에 실낱 미소가 스쳤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듀크의 특기였다.

듀크는 있는 힘껏 사랑에 빠진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필살의 기술이었다.

“사랑하오. 아만다.”

“고마워요.”

“당신을 안아보고 싶소.”

“태교에 안 좋아요. 꿈 깨세요.”

“포옹은 태교에 좋소. 세로토닌을 분비해서,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자라오. 무엇보다 ···. 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오.”

“당신이 준을 키웠다면, 준이 어떻게 됐겠어요. 당신은 그곳에 있을 때, 가장 좋아요. 우리 모두에게.”

“사랑은 남자를 변하게 하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오.”

“사랑한다면 그곳에서 사세요.”

“아만다. 이건 범죄요.”

“알아요.”

그녀는 휭하니 나가버렸다. 듀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망했다!’

앞으로 아만다가 어떻게 나올지는 쉽게 그려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탈취한 정액 양이라면, 부족국가를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녀에게 나는 이제 필요 없어. 날 없애려고 할 거야.’

아만다는 듀크의 예상대로 듀크를 죽일 계획이었다. 듀크가 살아 나가면, 아만다 아이의 소유권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만다의 아이가 준처럼 ‘리미트리스’가 되면, 듀크는 없는 게 낫다.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듀크를 처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굶겨 죽여도 되지만 ···.

‘그래도 애 아빠인데 그건 너무 잔인해. 역시 독약을 쓰는 게 낫겠어. 하지만 선택은 듀크에게 직접 맡겨야지.’

아만다는 철장 안으로 식사와 물을 넣어주었다.

“와우! 와인이라니! 오늘 내 생일인가?”

식사 메뉴에는 기름진 양고기 스테이크도 있었다.

“마지막 식사예요. 그리고 이거 ···.”

아만다는 알약 하나를 주었다.

“굶어 죽는 게 너무 고통스러우면 먹어요. 편안해질 거예요.”

“아만다! 이러지 마요. 나는 죽어 없어지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요. 날 보내주면,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믿어요. 말하지 못할 거예요. 이곳을 나가지 못할 테니깐요.”

그녀는 차갑게 나갔다.

듀크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지만, 외딴곳이었고 방음처리도 완벽했다.

듀크는 마지막 식사를 아주 조금씩 먹으면서, 기적을 기다리기로 했다.

세상은 좀비 역병 때문에 어수선했고, 듀크의 가족들도 딱히 듀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믿을 것은 오직 준뿐이었다.

‘준은 6개월 후 날씨도 맞혔어. 분명 내가 납치된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텔레파시를 보낸다면 ···.’

그는 체력을 아끼며 마음속으로 준에게 도움을 구했다.

준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 일본에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가 만났던 일본 여자는 그를 극진히 했고, 일본으로 오면 천황처럼 모시겠다고 했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 그놈의 생선 알레르기 때문에!’

듀크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준! 준! 나를 도와다오!

그는 인생 최초로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다.

준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기만을 소원했다.

음식은 모두 떨어졌고, 물도 없었다.

점차 굶주렸다.

‘이제 한계야. 오늘이 지나면 약을 먹고 끝내겠어.’

그러나 이상하게 어떤 확신이 있었다.

준이 올 것이라는! 너무 배가 고파서 헛생각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효과 좋은 독약과 희망뿐이었다.

그의 희망은 헛되지 않았다.

그날 밤 듀크의 꿈에 준이 나타났다.

듀크는 준에게 매달렸다.

“아들아! 이 아빠를 살려다오!”

“왜 갇힌 겁니까?”

“어떤 미친년이 내 정자를 ···. 흑.”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걸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죽는 건 너무 원통했다.

“저는 당신에게 받은 것을 몇 배로 갚았습니다. 하나의 정자를 받았지만, 제가 드린 것은 ···.”

“안다. 날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아들아! 부탁이다. 도와다오!”

“정자로 흥한 자, 정자로 망합니다.”

준은 사라졌다.

듀크는 허둥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준은 갔다.

같은 시간 준도 꿈을 꾸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하루 3분 정도밖에 자지 않았는데,

듀크에 관한 꿈이라니. 심상치 않았다.

“유진.”

“네! 준느님.”

유진 악마가 홀연히 나타났다.

“듀크의 최근 정황은?”

“석 달 전부터 행방이 묘연합니다.

“듀크의 정자가 거래되고 있나?”

“조사해보겠습니다. 활발하게 팔리고 있습니다.”

“주된 판매처는?”

“블랙마켓을 통한 거래라서 추적 불가능합니다.”

유진 악마가 눈을 깜빡거렸다.

준은 가볍게 고개 젖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 듀크가 싫다고 거짓말까지 할 필요 있어? 뻐꾸기의 왕관을 벗어라.”

“네.”

유진은 간단하게 듀크의 정자를 파는 인물을 밝혀냈다. 유진의 자료에는 에밀리가 가진 동영상도 있었다.

동영상에는 듀크의 이런저런 모습도 담겨 있었다.

동영상으로 듀크가 마지막 식사와 독약을 받은 것도 알게 되었다.

“오! 이런! 꿈이 사실이었어.”

“준느님! 충고하나 해도 될까요?”

“해 봐.”

“그냥 모른 척하세요. 듀크는 여기저기에 정자를 뿌리고 다녔어요. 준느님의 배다른 형제들이 이미 백 명이 넘어요. 난봉꾼 듀크 때문에 배다른 여동생도 엄청 많아요! 책임감 있는 남자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여자들이 듀크를 받아들인 이유는 듀크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준느님의 영광에 혹해서죠. 듀크는 준느님을 팔아서, 부당한 이익을 얻고 있어요.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와 관련된 소송이 산더미랍니다. 소송에 걸릴 때마다 듀크는 준느님을 참고인으로 불러대고 있습니다. 그가 풀려나는 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됩니다.”

준은 눈을 깜빡거렸다. 유진 악마는 감정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

감정이 깃들긴 했지만, 유진 악마의 충고는 합리적이었다.

준의 관심은 듀크의 ‘후속처리’가 아니었다. 유진 악마를 살펴보니 ···.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듀크가 처음 납치되던 순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또 누가 알고 있지?”

“로켈님과 에바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

“호주 정보부와 경찰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알면서도 듀크를 방치한 거야?”

“네. 모두 아만다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듀크는 굉장하군.”

“왜요?”

“모두 그가 사라지길 원하는데, 그는 아직 살아있잖아. 엄청난 생명력이야.”

“듀크에게도 감탄할 부분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듀크가 아만에게 납치되지 않았다면 ···.”

“그는 죽었을 겁니다. 호주 정보부에서 우리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제거할 계획이었습니다. 준느님. 지금 듀크를 구해내면, 아비 없는 아이를 늘리는 꼴입니다. 듀크는 준느님이 구해줬다며, 기세 좋게 떠들고 다닐 테고요. 듀크에게 혹한 여자들은 이용당할 겁니다. 준느님은 듀크에게 빚진 게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준느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배고픈 듀크는 깜빡 잠들었다.

잠에서 깼지만, 꿈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너무 허기져서 몸의 감각이 희미했다.

헛것이 보였고, 전에 없던 감촉도 느껴졌다.

‘더 미치기 전에 독약을 먹어야겠군.’

그는 독약을 찾아 더듬거렸다. 딱딱하게 느껴져야 할, 바닥이 물렁거렸다. 파도소리가 들리고, 바다 내음이 났다.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까지.

그의 눈앞에는 독약 대신 윗부분이 잘려나간 야자가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야자 열 통을 미친 듯이 마신 후였다.

그는 섬에 있었다.

‘지속 가능한 생활 공간을 선물합니다. 환경이 맘에 들지 않으면, 독약을 택하셔도 됩니다.’

독약은 플라스틱 상자에 있었다.

듀크는 무인도에 있었다.

야자수 밑, 생존 도구와 의약품 상자가 보였다.

“음 ···. 여자와 파티가 없군. 그리고 앞으로는 어쩔 수 없이 ···. 유기농만 먹어야겠군.”

그는 먼 지평선을 보며, 중얼거렸다.

“고맙다. 아들아.”

영생자 진은 아일랜드의 성에 들어섰다. 성벽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보였다.

“나타샤 공주님은 별채에 계십니다.”

집사가 진을 안내했다. 별채는 여러 겹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타샤 공주를 본 진은 고개를 돌렸다.

나타샤는 예순이 넘어서 영생을 이식받았고, 보석처럼 찬란한 젊음을 얻었다.

그녀는 영생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

영국 왕실 혈통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마귀할멈처럼 흉측했다.

그녀는 좀비가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좀비 바이러스!”

보통 사람도 잠재적 좀비였지만, 영생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폐하께서는 당신이 나타샤 공주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다.”

“치료가 절실해 보이긴 하군.”

진은 품 안에서 샷건을 꺼내, 나타샤의 머리를 날렸다. 안티 판타지늄으로 만든 총알은 풍선 터트리듯 머리를 사라지게 했다.

“나타샤 공주님을!”

집사가 뒷걸음질쳤다.

“가장 확실한 치료지. 폐하에게 전해라. 치료는 성공했지만, 생명은 구하지 못했다고.”

진의 부하들이 나타샤의 조각들을 가져갔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까지, 영생자는 완전무결했다. 유지관리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었다.

“벌써 스물다섯 건입니다. 좀비 변형 확률은 영생자가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적절한 조처를 하지 못하면, 진님도 위험하십니다.”

진의 여비서는 그를 걱정했다.

“준이 이 모든 걸 예상했을까? 그래서 영생 시장에 진출하지 않을 걸까?”

진의 관심은 그의 미래보다 준에게 쏠렸다. 준을 이해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진님은요?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

여비서의 질문에 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비교당한 건가? 영생의학의 창시자인 내가 아이큐 75에게?’

“예상은 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

여비서는 큰 눈을 깜빡거렸다. 영생자가 되면 ‘알았지만, 몰랐다?’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요빅 생태계 때문에 수많은 광산업자가 몰락했을 때, 나도 돈을 벌었지. 충분히 예측 가능했거든. 영생 기술이 알려지고, 신생 영생업체들이 난립하는 건 시간문제였지. 우리에게 나쁜 변화는 아니지. 영생 시장도 커질 테니. 젠장!”

진은 갑자기 팔 받침대를 내려쳤다.

달리던 리무진이 덜커덩 흔들렸다.

“좀비 생태계 때문에 영생 시장이 망가졌어! 아닌가? 더 커진 건가? 좀비도 나름 영생이거든. 보기 흉하고 전염성도 강하고, 더럽게 저주받은 삶이지만 유지관리만 되면 영원히 살 수 있지. 영생 시장이 커질 거로 예상했지만, 이런 형태일 줄은 몰랐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준에게 물어봐야지.”

“진님.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진님은 준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입니다. 어째서 ···.”

“테레사. 네 말이 맞다. 내가 준보다 훨씬 똑똑하지. 기네스 아이큐 신기록 보유자가 바로 나니깐. 하지만 ···.”

진은 씁쓸한 미소를 코끝에 모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