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마인드-9 >
굿데이에 매달리는 건 중국만이 아니었다.
좀비 역병은 아프리카와 호주 그리고 아메리카에서도 발생했다.
초기 대응이 중요했지만, 날뛰는 좀비를 격리할 마땅한 방법은 없었다.
헤드샷이 효과적이었지만, 좀비는 빨랐다.
조준했다 싶으면, 바로 코앞이었다.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자폭용 수류탄을 받았지만, 제때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발 빠른 좀비를 상대로 총쏘기에도 바빴고, 수류탄 안전핀 뽑을 틈은 없었다.
나중에는 원격으로도 조종되는 수류탄을 받았다. 작전 중에 죽거나 좀비가 되면, 작전본부에서 ‘최종처리’했다.
좀비 발생 지역 중에서 작전대로 격리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좀비 발생은 그 지역 포기와 같은 의미였다.
작은 위안이라면 상처를 통한 감염이라서, 안전지대가 있다는 정도였다.
초호화 유람선도 안전지대로 꼽혔다.
정밀 신체검사를 마친 상류층을 태운 유람선은 청정지역만을 누비며 다녔다.
승객들은 평생 유람선에서 살고도 남는, 상당한 재력가들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요빅 생태계의 상품 가격도 올랐다.
요빅 생태계는 금과 리튬 같은 금속도 생산했지만, 로봇 농법으로 쌀과 밀도 재배했다. 모든 것이 전자동 시스템이어서 ‘좀비 이물질’로 오염될 리 없었다.
“중세 흑사병이 돌고 나서 유럽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중년 남자는 샴페인을 마시며, 거들먹거렸다.
젊은 여자가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살랑거렸다.
“어떻게 됐는데요?”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흑사병이 수그러든 후에는 르네상스가 열렸어. 대역병 유행은 살아남은 자에겐 기회지.”
그는 여유만만했다. 갑판 수영장에는 모델 같은 여인들이 물과 햇빛을 즐겼다. 생크림 같은 구름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평화를 깬 것은 위에서 들리는 비명이었다.
쿵! 소리와 함께 누군가 떨어졌다.
승무원이 달려갔다.
피범벅이 되었고, 꿈틀거렸다.
승무원이 할 일은 없었다. 그는 주변을 안정시키고, 무전으로 의사를 불렸다.
“곧 의사가 올 겁니다. 우리 탑크루즈는 종합의료 센터와 같은 ···.”
사람들이 그를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왜?’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의 뒤에 쏠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떨어졌던 좀비가 그를 덮쳤다.
바다 한복판, 달아날 곳은 없었다.
승객들은 모든 인맥과 연줄을 동원해서, 구조를 요청했다.
발 빠른 승객들은 룸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이제 됐어! 안전해. 좀비라고 해도 문을 부수지 못할 거야.”
그가 안심하고 있을 때, ‘딩동’ 소리가 났다. 음식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였다.
좀비 특유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그와 젊은 여자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문을 열자마자 풀장에서 비키니를 입었던 여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비키니 여인은 목이 반쯤 부러진 좀비가 되어 있었다. 목이 덜거덕거렸지만, 비키니 좀비는 남자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구조대를 가장 먼저 파견한 것은 굿데이였다.
굿데이는 헤임달의 로봇 부대와 드론 부대를 급파했다.
헤임달은 요빅과 3D 프린터를 다스렸고, 요빅의 생존본능을 이어받은 인공지능이었다. 그는 요빅 생태계의 진화를 꿈꿨고, 지구 전체를 요빅 생태계로 바꾸려고 준을 죽이려고 했다.
헤임달은 유진 악마에 엄청 혼나고, 준이 가진 창대한 미래에 무릎 꿇었다.
준이 보여준 미래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테라마인드 시대’였다.
상상력이 최고 권력이 되는 시대.
헤임달이 추구하는 요빅 생태계는 테라마인드에 비하면, 조잡한 비전이었다.
헤임달의 암살용 전투 로봇은, 준에게 ‘장난감보다 낫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좀비 퇴치에 효과적이었다.
로봇은 좀비에게 물어뜯겨도, 좀비가 되지 않았다.
저공비행을 하며 조준 사격하는 드론도 빛이 났다.
헤임달의 로봇 구조대는 이미 다섯 대륙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때아닌 로봇 열풍이 세계를 휩쓸었다.
세계 기후 중앙은행이 있는 스위스도 좀비로 몸살을 앓았고, 메이드 인 헤임달 로봇의 도움을 받았다.
좀비 역병은 로봇 억제력으로 진정되는 양상이었다.
로봇 부대에는 의료용 로봇도 배치되었다.
좀비를 쳐내고, 사람을 치료하고 구하는 로봇 동영상은 인상적이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로봇의 사진이 인터넷 신문에 실렸다.
기사 제목은 ‘인간보다 아름답다.’였다.
친 굿데이 기자 리처드는 굿데이가 로봇 생태계 공개해서, 좀비 역병을 막아냈다! 라는 식의 거창한 기사를 썼다.
인류 멸망이라는 위기의식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던 사람들은 리처드의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희망적인 뉴스는 리처드의 기사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생파리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았을 때에도 파리잡이 말벌 로봇이 한몫하지 않았던가!
시민단체에서는 자발적으로 ‘준이 없는 세상은 지옥.’이라는 배지를 만들어 달았다.
준은 로켈과 함께 홍콩 지역을 누볐다. 홍콩 양로원의 좀비를 조사해서 원인체를 찾아냈지만, 치료법 개발은 어려웠다.
비가역반응 - 한 번 좀비가 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포 친화력을 높이려고 천연두 바이러스를 섞었어. 이론적으로 세포 친화력이 높아지면, 판타지늄 함량을 줄일 수 있지만 ···.”
준은 홍콩 뒷골목 좀비 시체에서 체액을 뽑아냈다. 타르 같은 검은 액체였다. 분석은 곧바로 이뤄졌다.
지붕 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좀비가 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머리 위는 인간의 사각 지역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자일지라도 위에서 떨어지는 가파른 공격에는 취약했다.
퍼드덕.
좀비의 몸은 허공에서 우왕좌왕했다.
준과 로켈의 몸에는 페르마 쉴드가 작동했다.
고농축 판타지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페르마 쉴드는 포탄도 튕겨냈다.
“삼장법사를 잡아먹으려는 요괴 같군.”
로켈은 손가락을 튕겨서, 좀비의 머리를 날렸다.
준은 폐허가 된 뒷골목에서 짝퉁 영생을 만들던 조잡한 실험실을 찾아냈다.
소형 입자가속기와 판타지늄 그리고 DNA 조합기.
피자 식당 주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준은 벽과 실험장비에 있는 지문과 DNA 채취하고, 컴퓨터에서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유진 악마가 빠르게 데이터를 뽑아냈다.
“세 명의 지문과 DNA가 확인됩니다. 세 명 모두 홍콩 대학교 학생들입니다.”
유진 악마는 학생들의 사진을 띄웠다.
사진 옆에는 은행 계좌도 조회되었다.
좀비 발생 몇 달 전부터 그들의 계좌에 큰돈이 들어왔다.
짝퉁 영생자들이 할부금을 갚기 시작한 날짜와 일치했다.
“좀비 역병을 만들어낸 게, 대학생이란 말인가요?”
로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좀비 역병으로 인류는 멸망의 절벽으로 몰렸다.
그런데 그 병을 만든 것이 일개 대학생 세 명이라니!
“사라진 천연두 바이러스도 손바닥만 한 DNA 제조기가 있으면, 누구든 만들어내지.”
“하지만 ···. 고작 아마추어 세 명이 짝퉁 영생을 만들고, 좀비 역병까지 퍼트리다니!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세상이다. 받아들여라.”
준은 좁은 실험실을 차근차근 살폈다.
유진 악마는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에 저장된 파일을 빠르게 띄웠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는 굿데이가 공개한 정보들이었다.
생체 금속 정보량과 판타지늄 테크닉.
블랙마켓에서 나돌던 영생의학 제조법도 있었다.
카지노에서 웃으며 찍은 동영상과 스포츠카를 탄 사진도 있었다.
“이놈들! 어딨어! 내가 그냥 ···.”
“로켈님이 말한 이놈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준짱! 분명 배후 세력이 있을 겁니다. 저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고작 세 명의 대학생 때문에 세상이 뒤집어지다니!”
“세포 친화력을 높여서 판타지늄을 줄이는 방법은 널리 알려졌어. 천연두 바이러스를 생각해낸 게 과감하긴 했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야. 헤르페스 바이러스로 판타지늄을 줄인 연구가 있거든. 바이러스의 병독성이 강할수록 세포 침투력이 강한 경향이 있으니깐, 최강의 바이러스를 생각해냈겠지.”
“학생들이 판타지늄을 어떻게 구했을까요?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니잖아요!”
“홍콩 대학교에 판타지늄 응용학과가 생겼어. 실습용으로 죽은 쥐를 살리는 실험이 있지.”
“헐!”
“말했잖아. 그런 세상이라고. 천연두는 낙타에 있던 바이러스야. 인간이 낙타를 길들이고 키우면서, 옮았지. 천연두는 낙타에게 별거 없었지만,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었어. 낙타와 천연두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졌지만, 인간과 천연두는 서로에게 신세계였지. 신대륙 원주민들이 유럽인에게 몰살당한 걸 보면, 신세계의 시작은 늘 폭력적인 거 같아.”
“이미 오천만 명 넘게 죽었는데, 얼마나 더 죽어야 할까요?”
“감염 속도가 주춤해졌지만 ···. 낙타의 원산지가 어딘지 알아?”
“중동 사막이겠죠.”
“아니. 아메리카야. 그것도 북아메리카의 추운 지역이지. 낙타의 신체적 특징은 사막에 적응한 게 아니라, 추운 지역에 적응한 결과야.”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좀비 역병이랑 무슨 상관이죠?”
“낙타가 사막에 적응한 것은, 북극곰이 사하라 사막에 적응한 것과 같아. 낙타가 해냈다면, 인간도 할 수 있겠지. 좀비 역병이 감기처럼 흔한 세상이지만, 적응할 거야.”
“뭔가 참 긍정적이면서도 엄청 다크하네요.”
준은 굿데이 홈페이지를 통해, 좀비 역병의 원인체와 발생 과정을 알렸다.
세상은 엄청나게 쇼크 받았다.
좀비 역병을 대학생 세 명이 만든 거라니!
그것도 거창한 이념을 추구한 게 아니라, 용돈이나 벌려고 한 짓이라니!
더 놀라운 것은 좀비 원인체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처를 통한 감염만 막으면 좀비 역병을 끝낼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굿데이는 공기를 통해 호흡기로도 감염될 것이라고 밝혔다.
수잔은 탑크루즈의 첫 번째 좀비가 호흡기 감염이 아닐까? 의심했다.
탑크루즈의 좀비 원인체는 대륙에서 발견된 형태와 좀 달랐다.
다시 말해, 숨만 쉬어도 좀비에 걸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이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진 사람들은 막 나가기 시작했다.
섹스가 인사처럼 흔해졌고, 여자들은 하루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임신한 여자는 좀비 면역력이 강해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은 좀비 역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정부가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젊은이들에겐 제대로 먹혀들었다!
호주에서도 좀비 역병이 퍼졌지만, 그 와중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준의 생물학적 아버지 듀크가 천신만고 끝에 좀비 지역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듀크의 야비한 생존전략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지만, 좀비 면역력에 혈안이 된 여자들에게 듀크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존재로 보였다.
준의 아버지이자, 좀비 지역의 생존자.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듀크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파티에서 술을 진창 먹고 맘에 드는 여자와 맘껏 놀았다. 듀크는 파티의 영웅이었고, 트로피였다.
여자들은 그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숙취가 덜 깨서 머리가 아픈 그는 습관처럼 옆을 더듬었다.
모르는 여자가 누워있거나, 과일 주스가 손에 잡혔지만, 오늘은 달랐다.
차가운 쇠붙이 느낌.
‘뭐지?’
그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일어났다.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홀츠 교도소에서 지냈던 꿈.
그는 철창에 갇혀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철창 밖에서 한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수도원의 교장처럼 엄숙한 표정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당신의 정자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당신은 하루에 한 명 정도밖에 상대하지 못하죠. 그나마 일주일 연속으로 가능하지도 않고요. 한 달에 많아 봤자, 열 명이더군요.”
“그게 무슨 ···.”
여자가 듀크에게 플라스틱 컵을 내밀었다.
“정자를 원해요. 술에 찌들지 않고, 담배에도 노출되지 않은, 유기농 건강식단으로 튼튼한 정자를 원하죠.”
“설마 ···. 내 손으로 정자를 ···.”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정액을 주면, 날 풀어줄 건가?”
“술에 찌들지 않고, 담배에도 노출되지 않은, 유기농 건강식단으로 튼튼한 정자를 준다면 풀어주죠.”
“그 말은 ···.”
“당신은 이곳에서 건강하게 지낼 겁니다. 가끔 직접 해야겠지만요.”
그녀는 플라스틱 컵을 가리켰다.
“거절한다!”
“그럼 ···. 오늘은 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