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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132화 (130/141)

< 테라마인드-7 >

도서관에 들어선 준은 전혀 다른 공기를 느꼈다.

킹스덤을 졸업했지만, 번호들은 자리를 지켰고, 준을 바라보고 대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준은 졸업한 게 아니라, 지역사회를 위해 졸업을 ‘구입’한 것이었다.

졸업이라는 변수는 준의 생활에 별거 없었다. 길거리에서 사는 커피 한 잔과 같았다.

대기업 인사팀과 헤드헌터들이 잠깐 나댔지만, 웃음거리가 됐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굿데이보다 좋은 기업은 없었고, 준은 굿데이의 회장이었다.

그 누가 준을 스카우트한단 말인가!

굿데이의 직원들은 헤드 헌터계의 성배였고, 그중에서도 준은 진리 그 자체였다.

헤드헌터들의 꿈은 준을 스카우트하는 것이었다.

꿈은 이뤄진다지만, 준은 꿈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도서관의 이질적인 공기 흐름은 한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일편단심 준만 바라보던 번호들도 그 남자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준이 들어왔는데도 그랬다.

그 남자는, 독서에 집중하는 준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맹렬함까지 갖췄다.

눈부신 젊음.

완벽한 육체.

가끔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눈웃음 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남몰래 그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사람도 많았다.

그는 준의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며 준을 기다렸다.

준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도서관의 불문율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남자에게 뭐라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앉아준 것이 고마울 정도로, 영광 가득 찬 모습이었다.

준과 눈이 마주친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끼-악!’

멍하니 그를 지켜보던 여자 몇이 돌고래 하이톤을 냈다.

“처음이네. 나는 진이야.”

영생의학 창시자 진.

그는 준을 신입생 다루듯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턱으로 출입구를 가리켰다.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었다.

도서관 사서 길버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독서 하려 들어온 준에게 곧바로 밖으로 나가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대통령도 준의 독서를 방해하지 못한다!

진이 읽고 있던 책은 ‘커피의 역사’였다.

준과 진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러웠다.

동시에 여학생들도 우르르 몰려나갔다.

준과 진을 한 번에 감상할 엄청난 기회였다.

남자들도 따라 나갔다.

도서관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시험기간인데도 그랬다.

진은 준과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하며, 스노우캣 카페에 들어갔다.

도서관에서 나오기 전부터 진의 비서가 스노우캣 카페를 예약해 놨다.

카페 전체를 빌리려고 했지만, 카페 주인이 그건 안된다고 해서, 5층만 사용하기로 했다.

준과 함께 걷는 진의 모습이 사진과 동영상으로 널리 퍼졌다.

영생의학 관련 주식이 미친 듯이 올랐다.

준과 진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진은 영생의학 창시자일 뿐 아니라, 판타지늄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너처럼 젊은 나이에 영생을 얻었어. 시한부 생명도 아니었고, 사고가 났던 것도 아니야. 아주 건강했고 죽음은 저 멀리 있었지. 그런데도 영생자가 됐어. 커피는 뭐로 마실래? 여긴 셀프지?”

진의 비서가 주문을 받으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영생자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준은 그녀가 진을 사랑하는 것이 보였다.

영생자를 사랑하는 것은 괴물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스노우캣 오리지널로 마시죠.”

“나도 같은 걸로.”

“알겠습니다.”

비서는 깍듯하게 인사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영생으로 미각이 달라진 걸 압니다. 저와 맞추려고 커피를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영생 이전처럼 커피를 즐기지는 못하지만, 그 안의 역사는 음미할 수 있어. 준은 여유가 있어서 좋아. 내 주변에는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내가 영생자가 된 이유를 말하려다가 말았지. 듣고 싶어?”

진의 말투와 표정은 준의 감정 지능을 크게 자극했다.

진은 준의 자극을 쉽게 눈치챘다.

“관심 있을 줄 알았어. 최초의 영생자는 길퍼드증후군 환자였어. 18살이었지만, 몸은 100살이 넘었지. 동맥경화, 심근경색, 알츠하이머까지 ···. 영생의학으로 치료했지. 길퍼드증후군 환자였을 때에는 참 착했는데, 영생을 얻자 달라졌지. 처음엔 좋게 생각했어. 자부심과 성취욕이 강했거든. 그 녀석이 날 증오할 줄은 몰랐어. 놈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처참하게 고문했지. 그리고 영생의학이 아니면 결코 살릴 수 없도록 독을 썼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나는 그녀를 살렸어."

커피가 왔다. 진은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 고급 와인을 대하듯 커피를 다뤘다.

준은 커피 맛이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영생자의 표정은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수단이었다.

“그녀를 살렸지만, 사랑은 잃었지. 그녀도 나를 아주 증오했어. 그녀는 스스로 영생을 버리면서, 날 저주했지.”

“그 저주라는 게 ···.”

“그래. 나더러 영생자가 되라는 거였어.”

“거짓말이 섞였군요.”

준의 지적질에 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정 넣어가면서 진실하게 말하는데, 거짓말이라니. 엄청난 실례잖아.”

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준과 진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준! 날 봐! 영생자가 사악하긴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야. 너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 진실을 말했어.”

진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꾸러기 동생을 대하듯 했다.

“그녀 스스로 죽었을 리 없어요. 영생자는 온갖 사악한 짓을 다 할 수 있지만, 한가지 하지 못하는 게 있죠. 자살이에요. 그녀는 스스로 죽은 게 아니라, 당신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예요. 그래야 앞뒤가 맞죠.”

“앞뒤라니?”

“그녀가 당신을 저주한 건 사실이겠지만, 그 저주 때문에 영생자가 됐을 리 없어요. 죄책감.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이 더해져야, 당신의 지금 모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죠.”

진은 자세를 고쳐 앉고, 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내, 커피에 뿌렸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준을 유심히 보았다.

“네 말대로야. 내가 그녀를 죽였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녀가 만들었지. 처음에는 내가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녀가 바라던 대로 영생자가 됐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죽인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죽은 게 맞아. 나는 죽음의 도구로 그녀에게 이용당한 거였고 ···. 이제 자네 이야길 해봐. 공허감의 바닥에서 살았던 시절이 궁금해.”

“살만했어요. 걱정이 많았거든요. 특히, 죽음에 대한 걱정이 큰 도움이 됐죠.”

“그렇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을 사람답게 하지. 그 공포가 사라지면, 인간은 악마가 되지. 해탈, 초월, 그런 건 헛소리야. 날 봐. 영생자야말로 죽음을 해탈하고 초월했어. 나를 보면 뭐가 보여?”

“뭘 보여주고 싶죠?”

“가능성 ···.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가 찾아주길 바래. 나 같은 영생자도 살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줘."

“가지치기해달라는 거군요.”

“역시 대화가 쉽게 통하는군.”

진은 기지개를 켜듯이 웃었다. 핵심을 꿰뚫는 준과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구원받는 느낌도 들었다.

“영생자는 특별하게 만든 판타지늄 캡슐을 먹지. 그걸 먹지 않으면, 말라 비틀어진 미라처럼 변해. 죽지는 않지만 통렬한 고통이 오지. 판타지늄 캡슐을 만들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지. 판타지늄 캡슐을 대신하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사람의 피야. 영생자의 입맛에 가장 맛깔스러운 음식이기도 하지. 영생의학 초창기에는 뱀파이어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영생자도 많았어. 특권층이다 보니, 사람을 납치해서 고문하고 잡아먹어도 꼬리를 잡히지 않았지. 안 놀라네?”

“평가 보고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아는 것과 놀라는 건 달라. 예전의 나는 같은 걸 매일 봐도 항상 놀라웠어. 지금은 따분해졌지만 ···. 평가 보고서에 없는 걸 알려주지. 마킷은 걱정했지. 영생자의 기괴한 취미가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이 가만있겠어? 중세시대 마녀 사냥처럼 영생자를 죽이려고 하겠지. 위원회를 만들어서 살인을 금지했지만, 효과가 없었지. 영생이라는 게 따분한 삶이거든. 그 삶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를 포기하는 게 쉽지 않아. 그래서 내가 바이러스를 만들었어. 콜레스테롤 분자가 사람의 지문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걸 알아? 쌍둥이의 지문이 다르듯이, 몸속의 콜레스테롤 분자도 달라. 음식이 된 사람의 지문은 문드러져서 사라지지만, 콜레스테롤

분자는 포식자의 몸속에 축적되지. 한 사람의 피를 마신 영생자의 콜레스테롤 스펙트럼은 1이야. 두 사람의 피를 마시면 스펙트럼은 2가 되지. 세 명은 3 ···. 많은 사람의 피를 마실수록 스펙트럼도 늘어나. 바이러스는 스펙트럼 5가 넘는 영생자를 공격하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영생자의 몸은 조금씩 녹슬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지. 치료법은 아직 없어.”

“그래서 최근 연쇄살인이 주춤해졌군요.”

“영생자의 증오는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해. 그들은 인류 모두가 고통받길 원하지. 권력이 있기 때문에 영생자는 더 위험해.”

“마치 영생자가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좋은 버릇이지.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거든.”

진은 기대에 찬 모습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준이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주길 기다렸다.

“바이러스 변종이 생겼고, 치료법도 만들어졌군요.”

“확실히 똑똑한 사람과 대화하는 건 편하군. 한가지 문제가 더 있지. 영생 이식 기술도 뚫렸어. 지금껏 영생의학주식회사가 독점해왔지만, 새로운 서비스 업체들이 생겨났지. 굿데이도 영생 시장에 뛰어들 계획이었지?”

“검토는 했죠. 남는 게 없더라고요. 영생 시장이 커지면, 다른 시장이 위축되는 구조라서요.”

“영생 시장이 아주 강력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영생 시장을 장악하는 자가 모든 걸 결정하게 될 거야. 영생 시장에 비하면 기후거래나 발권력 같은 건 애들 장난이야.”

“당신이라면 영생 시장을 차지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하지 않았죠?”

“하는 중이야. 그래서 널 만나고 있잖아.”

진은 커피를 모두 마셨다. 준은 양손으로 커피잔을 움켜잡았다. 진이 굿데이에 원하는 것은 뻔했다.

“굿데이가 당신의 경쟁자를 제거해주길 바라는군요.”

“역시!”

진은 준이 기특했다.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준은 단 한 번도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준은 머릿속으로 미래를 그려보았다.

영생의학 주식회사의 독점이 무너지면, 영생 가격이 낮아지고, 누구나 쉽게 영생에 접근할 수 있다.

영생이 위험하다는 평가 보고서가 나왔지만,

인간은 본디 어리석은 존재였고,

죽음 직전에 종교를 바꾸거나 신을 믿듯이,

영생을 이식받는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였다.

영생이 패션처럼 유행하는 시대 ···.

“영생 범죄라는 것도 생겨날 거야. 원치 않은데 영생을 받는 억울한 사람도 생겨나겠지. 마킷을 봐서 알겠지만, 일단 영생자가 되면 철저하게 영생자 편이 되지.”

“어쩔 수 없군요.”

“좋은 선택이야.”

진은 손을 내밀었다.

“제가 좋은 선택을 한 건 맞지만, 그 손은 틀렸군요. 당신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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