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31화 (129/141)

< 테라마인드-6 >

준은 젊음과 생명으로 팽팽한 마킷의 손을 보았다.

죽음을 도둑맞은 그의 손은 도자기처럼 매끈했다.

“내 손을 잡으면 자네도 가질 수 있네.”

마킷은 내민 손을 폈다. 손톱과 손끝에서 유리 광택이 났다. 준은 피식 웃었다.

“마킷님. 저는 공허감의 밑바닥에서도 살아봤죠. 영생은 보기엔 멀쩡하지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굿데이의 결론입니다. 마킷님도 그걸 아시기 때문에 영생을 거절하셨던 거잖아요?”

준의 말대로였다. 마킷이 영생을 원치 않았던 것은, 그 삶이 죽음보다 더 공허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영생자는 영생을 받기 전에는 시한부 생명의 심성 착한 소년이었지만, 영생자가 된 후 연쇄 살인을 저질렀다.

영생자란 그런 존재였다.

영생의학 주식회사와 영생 위원회는 이러한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애썼다.

만일 굿데이가 영생 평가 보고서를 공개한다면, 영생의학 주식회사가 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영생을 받은 영생자는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했다.

“공허감의 밑바닥이라 ···. 영생도 경험하지 못한 자네가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마킷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더 많은 세상을 살았습니다. 상상력의 힘이죠.”

“준, 자네가 믿는 상상력이 지금 도움이 될까? 죽음을 소중히 하게. 너무 서둘지 말게.”

마킷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손을 잡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경고였다.

“당신은 영생을 얻지 않으려고 했어요? 기억하시죠?”

“물론이네. 영생을 얻는다고 해서, 예전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당신의 뜻과 상관없이 죽지 못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만족하십니까?”

“내 꼴을 보게. 어쩔 수 없지 않나. 내가 다시 반복해야겠나? 나는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중이네.”

“영생을 얻지 않으려던 이유가 뭔지 아시죠?”

“준! 그냥 나와 악수하고 이곳을 떠나게. 진실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위험해.”

“영생자가 되면 정신도 바뀌죠. 순수한 사이코패스가 되는 겁니다.”

“영생은 높은 곳에 서는 거라네. 감정 구름이 깔린 낮은 곳에 사는 것과 다르지. 감정 구름을 내려다보는 곳에 서면, 생각이 달라지는 거지. 그걸 사이코패스라고 말하는 건 편견일세. 정신이 바뀌는 게 아니라, 죽음을 초월한 곳에 서서 더 넓게 바라보는 걸세.”

마킷은 부처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준은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사악함이 또렷이 보였다.

준은 사악함을 나쁘다고 여기지 않지만, 영생의 사악함은 사람을 가난하게 한다.

그 가난은 굿데이의 수익악화로 이어질 테고 ···. 준은 손해가 싫었다.

영생자는 굿데이의 시장개척과 확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었다.

“로켈, 돌아가자.”

준은 손을 내민 마킷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준과 로켈이 서재를 나오자, 하얀 옷의 능력자들이 가로막았다.

“현명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어리석으시군요.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습니다. 죽음입니까? 영생입니까?”

능력자는 황금색 주사기와 검은색 주사기를 보였다.

“꺼져라!”

로켈은 전광석화처럼 능력자를 후려쳤다.

복도에 있는 다른 능력자들이 달려들었지만, 모두 로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로켈은 이미 판타지늄 능력뿐 아니라 블랙 판타지늄의 능력까지 자유롭게 사용하는 경지였다.

로켈이 길을 열었다.

준은 여유롭게 걸어서 저택을 나왔다.

준비된 능력자들이었지만, 로켈의 상대는 못 되었다.

저택 밖 잔디밭과 나무 위에서는 스나이퍼 능력자들이 대기 중이었지만, 그들은 호세의 에어 퓨마가 이미 정리한 후였다.

크롬 광택의 흑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피부가 도자기처럼 반짝이는 걸 보니, 영생자가 분명했다.

“예전의 굿데이가 아니군. 하지만 나의 권능에는 ···.”

퍽!

강화 슈트를 입은 호세가 펀치를 날렸다.

크롬 흑인은 가볍게 펀치를 잡아냈다.

호세의 펀치는 우라늄 합금도 관통할 정도로 강했다.

그 펀치를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의 한계를 저 멀리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음을 뜻했다.

펀치를 잡은 흑인의 손에서 보라색 불빛이 번쩍거리며 호세를 밀어냈다.

호세가 나가떨어졌다.

아쿠타미 부대가 달려들자, 크롬 흑인은 큰 동작으로 손뼉을 쳤다.

굉음과 보라색 불빛이 번쩍거렸다. 손뼉을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에너지가 막이 퍼져나갔다.

에너지 막이 아쿠타미 부대원들을 모두 밀쳐냈다.

펑!

로켈이 팔꿈치로 에너지 막을 튕겨냈다.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났다.

로켈이 반격하려 하자, 준이 로켈의 어깨를 잡았다.

“초콜릿 덩어리 정도는 저 혼자 치울 수 있습니다.”

“안다. 코피 닦고 싸워라.”

준이 물티슈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로켈은 코피를 닦은 후에, 크롬블랙을 주저앉혔다.

주저앉은 크롬블랙 뒤로 네 명의 영생 능력자가 나타났다.

한명 한명이 크롬블랙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게 될 줄이야.”

네 명은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다. 그들은 영생자 중에서도 신이라고 불리는 최강 능력자들이었다.

로켈은 본능적인 부담감을 느꼈다.

확실하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긴다 해도, 진흙탕 싸움이 될 거 같았다.

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준이 앞으로 나섰다.

“준짱!”

준이 돌아보았다. 준은 작은 목소리로 ‘왜?’라고 물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래도 되지만 ···. 오늘 시간 낭비가 많았다. 강철부터 시작해서 마킷까지 ···. 빨리 집에 가자.”

영생자 사인방은 자신들을 앞에 두고 로켈과 대화는 준을 보며, 혈압이 올랐다.

“감히 우리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그들은 강력한 에너지를 준에게 방출했다.

팔랑!

준은 가볍게 손을 펴 그들의 에너지를 막아냈다. 에너지는 벚꽃이 되어 흩날렸다.

에너지를 물질로 바꾼 것이었다!

영생 사인방이 쏟아낸 것은 전차 부대도 한순간에 녹일 수 있는 고밀도 에너지였다.

그들은 준과 로켈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려 했지만, 결과는 축제처럼 날리는 벚꽃 향연이었다.

준은 흩날리는 벚꽃 속을 걸으며 다가갔다.

영생자가 되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질 나쁜 공허감만이 남는다. 사랑, 슬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바닥 없는 공허감에 갇힌다.

그들에게 남는 건 생존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인간 따위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떨어졌다. 잘린 목에서 연분홍 체액이 쏟아져나왔다.

준은 그저 노려봤을 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분노했다.

“감히!”

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흉악한 손은 준의 몸에 닿기도 전에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손을 쓰려던 영생자는 사라진 그의 팔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준의 능력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잠깐! 우리는 시킨 대로···.”

이번에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준은 앞을 가로막은 영생자를 살릴 맘이 전혀 없었다.

영생자 한 명은 도시 전체와 맞먹는 유지 비용이 들어간다.

살려두면 도시 하나가 굶주리는 셈이고, 굿데이는 도시 하나만큼 시장을 잃는다.

남은 영생자는 두 명.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쫓을까요?”

로켈이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소멸할 목숨이야. 저 둘에게 일을 맡긴 영생자가 직접 처리할 거야.”

달아난 영생자들은 살겠다고 열심히 뛰었지만, 빨리 달릴수록 최후가 빨라질 뿐이었다.

3층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킷은 전율이 일었다.

영생 능력자는 일반 능력자보다 훨씬 강하다.

닥터 칼라니티의 강화 생물학의 근원도 판타지늄이었다.

판타지늄 함량은 일반 능력자보다 영생능력자가 훨씬 높았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영생자 몸에 깃든 판타지늄은 조직 적합성에 맞게 디자인한 것이었다.

영생자는 판타지늄이 몸과 일체화된 상태였다.

일체화 상태에서 판타지늄 능력을 발휘하면, 일반 능력자는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로운 지경에 이른다.

준은 영생 능력자 중에서 신의 권능에 근접한 사인방 중 두 명을 아주 가볍게 해치웠다.

준이 맘만 먹었다면, 네 명 모두 목이 잘렸을 것이다.

“리미트리스 준 ···. 굉장한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하군. 내가 살아서 영생자가 소멸하는 광경을 직접 보다니.”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머물렀다.

마킷도 영생자였지만, 이상하게도 영생자가 죽는 모습이 반가웠다. 영생자 특유의 냉철함일 수도 있지만, 흥분되는 걸 보면 냉철함과 달랐다.

나보다 뛰어난 능력자가 망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예상과 다른 결과에 묘미가 느껴졌다.

“진.”

마킷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통신용 에어스크린이 열렸다. 스크린에는 젊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영생의학 창시자 진이었다.

“자네가 보낸 사도들이 실패했네.”

“알고 있습니다. 그 실패가 마킷님을 기쁘게 했군요.”

“영생자가 되면, 아주 따분할 줄 알았는데, 리미트리스 준이 따분한 세상에 재미를 더하는군.”

“굿데이의 영생 평가 보고서 공개를 막지 못하면. 영생자의 입지가 좁아집니다.”

“자네가 앓는 소릴 하다니, 신선하군. 자네에겐 언제나 해결책이 있지 않나?”

“기억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다음에 보세.”

“제 사도들이 실패한 걸 알리려고 연락하신 건가요?”

“아니지. 자네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아직 위기에 몰린 것 같진 않군.”

“당황하는 제 모습으로 보시려면, 정말 오래 사셔야겠네요.”

“그렇지도 않을 거 같아.”

마킷은 시선을 돌려 떠나가는 준의 뒷모습을 보았다.

굿데이의 영생 평가 보고서는 공개되었고, 그 파장은 기후 독립 프로젝트만큼이나 컸다.

굿데이가 선택한 주제였고, 직접 분석한 결과였다.

영생의학 주식회사는 영생을 까다롭게 판매했다.

일본 천황과 같은 사회적 지위와 영국 왕실 수준의 경제력을 갖춰야 명단에 이름을 넣는다.

영생자는 태생적으로 초법적인 인물들이었다. 영생 유지비용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레벨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주된 유흥은 인간의 절망감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영생자가 연쇄 살인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굿데이의 평가 보고서에는 영생자의 정신세계도 다뤘다.

‘극심한 공허감으로 가학적인 취미를 가지기 쉽다.’

굿데이의 조사는 철저했다.

영생자 중에서 사람을 납치해서, 고문하고 죽인 사건을 조사했고, 증거도 모아뒀다.

영생을 목표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굿데이의 보고서가 나오자, 많은 사람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영생의학 주식회사가 기자 회견을 했다.

마킷이 직접 기자들을 상대했다.

질문들이 쏟아졌다.

“사실입니다.”

마킷은 굿데이가 밝힌 내용을 인정했다.

“그럼 ···. 당신도 극심한 공허감과 악취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을 해치는 취미는 없습니다. 우리 회사는 더 나은 품질을 추구합니다. 영생 유지 비용도 초창기보다 많이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영생자 선정도 매우 까다롭게 하고 있습니다.”

“현재 영생자가 모두 몇 명입니까?”

“이곳에 모인 사람보다 적습니다.”

“몇 명까지 영생자를 늘릴 계획이십니까?”

“적정숫자를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굿데이에게 의뢰하려 합니다.”

영생의학 주식회사가 선택한 전략은 굿데이와 ‘한 팀 되기’였다.

에어스크린으로 생방송을 보던, 에바가 준에게 물었다.

“준 회장님. 마킷이 영리하게 나오네요. 예상하셨어요?”

“나에게 경영권을 넘길까 봐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경영권은 줄 생각이 없나 보네.”

“만일, 경영권을 넘겨받으시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훔친 걸 주인에게 돌려줘야지.”

“그게 뭔데요?”

“죽음.”

“저는 준 회장님 같은 분이라면, 영생자가 되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준 회장님은 공허감을 길들이셨잖아요.”

“그래서 죽음이 필요해. 죽음은 공허감이 돌아갈 집과 같거든. 나에게 죽음은 약하거나, 비겁하거나, 실패가 아니야. 당당한 거야. 당당함이 사라진 날 상상해봐.”

“뭔가 ···.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불길하고 끔찍해요.”

에바는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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