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마인드-4 >
스티브 교수가 준에게 졸업장을 주었다.
“졸업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준은 스티브 교수와 미소를 교환했다.
미소 교환 - 기후 독립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감정 지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상호작용이었다.
미소는 준이 더 강해졌음을 상징했고, 스티브 교수는 그 강함에 감동 받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준의 미소가 면죄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송국에서 졸업식을 생방송 했다.
미소 교환 장면도 방송되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뒷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준과 친분이 있는 사람에겐 온갖 기회가 밀려온다.
스티브 교수는 진동 메시지 중 몇 개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 의뢰라고 생각했다.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주게. 그동안 내가 어리석었네.”
준의 졸업식 날, 눈물을 흘린 것은 준이 아니라 스티브 교수였다.
준은 졸업할 이유가 없었다.
졸업보다는 중퇴가 훨씬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올곧게 킹스덤 대학에서 배웠다면, 스티브와 같은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굿데이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그런 월급쟁이가 하나 추가됐을 것이다.
대학교육은 준을 준답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에 응한 것은, 지역사회를 위한 선택이었다.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듯이, 졸업이라는 상품을 집어든 것이었다.
지역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의 대학 졸업.
준은 가벼운 마음으로 졸업에 응했지만, 세상의 반응은 진지함을 넘어 심각했다.
여러 나라에서 대표단을 보냈다.
오만왕국에서는 귀한 물건을 가득 실은 낙타 행렬이 도착했다.
호주 대표단은 준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듀크와 함께 왔다.
듀크는 사람 많은 곳에서, ‘준아! 아빠가 왔다!’ 외쳤다.
데이빗과 에밀리는 화들짝 놀랐다.
듀크는 준을 만난 후로 새로운 인생을 누렸다.
준과 같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여인들을 상대로 ‘정자기증 캠페인’을 했고, 엄청난 돈을 받고 불임 치료 클리닉에 그의 정자를 팔았다.
듀크는 ‘아빠가 여기 있다!’라고 쓴 깃발을 흔들었다.
“불법 입국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경찰관이 듀크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여기 여권이 있소!”
듀크가 주머니를 뒤졌지만, 여권이 없었다.
“어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
“따라오십시오.”
“난 준의 아버지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법입국으로 조사를 받게 되실 겁니다.”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주시오! 아직 아들을 만나지 못했소.”
“정말, 큰일 날 소릴 하시는군요! 당신이 아들을 만나면 전 잘립니다.”
경찰관은 듀크의 팔을 비틀어 순찰차에 태웠다.
호주 대표단이 항의하려 했지만, 로켈과 눈이 마주쳤다.
로켈은 눈빛만으로 많은 것을 말했다.
호주 대표는 듀크가 계속 나대면 호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호주 정부와 함께 왔어! 날 잡아가는 건 외교법 위반이야!”
듀크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경찰관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호주 대표가 듀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듀크를 풀어줘야 했다. 그렇지 않고 잡아가면, 국가 분쟁으로 일이 커진다.
“이분이 일행이 맞습니까?”
“아뇨. 처음 봅니다.”
호주 대표가 호주를 살렸다.
졸업생이 준 혼자였기 때문에, 졸업생 대표 연설도 준이 맡아야 했다.
준은 졸업식에 온 사람들을 보았다.
루이스 대통령처럼 아는 사람도 보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졸업식이 뭐라고 방송국까지 ···.’
탁 트인 하늘이 보기 좋았다.
미 기상청은 졸업식에 가장 좋은 날씨를 제공했다.
준의 눈에 특이한 존재가 보였다.
산들바람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바람과는 좀 달랐다.
바람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따듯한 곳에서 추운 곳으로 흐른다.
준의 눈에 비친 그것은 흐르지 않고 한곳에 머물렀다.
과학적이지 않은 자연현상.
에너지 뭉침 현상.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다윈의 번개 인간이 떠올랐다.
지랄발광하던 그 번개 인간 ···. 중성이나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
‘여성이었구나.’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준은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키며 준의 졸업을 축하해줬다.
‘준 회장님. 사람들이 연설을 기다리십니다.’
에바의 뇌파 통신이었다.
연설하려던 준이 산들바람에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준은 아주 짧게 소감을 말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이 모두 이뤄질 겁니다.”
짧은 준의 졸업식 소감은 뉴스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굿데이의 준 회장이 말한 것이다.
카우보이 복장의 여기자가 준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준의 발언에 어떤 뜻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모두 이뤄진다는 건, 예언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의지인가요?”
보통 사람이라면 단순 희망에 불과했겠지만, 준이라면 다를 거 같았다.
준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은 뭘 원하시죠?”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나의 남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카우보이 걸은 수줍게 웃었다.
“충돌이군요. 당신은 원하지만, 상대가 원치 않는 경우죠. 충돌없는 소원은 없나요?”
“예를 들어주시겠어요?”
“저는 당신을 잘 모르지만,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파라엔진을 보급했죠? 파라엔진 ···.”
“이식받았어요. 고맙게 생각해요. 예전에는 피곤하면 입술에 헤르페스가 생겼지만, 이젠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굉장한 남자였다.
“저리 비켜!”
한 무리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카우보이 걸을 밀쳐냈다.
도서관의 번호들이었다.
그녀들은 준에게 숫자를 주었다 ···. 그녀들의 전화번호였다.
“준 태어나서 고마워요. 당신을 알게 된 건 내 인생의 큰 기쁨이었어요.”
여자가 진실하게 말했지만, 준은 그녀가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알지 못했다.
그녀 표정만 보면 참 깊은 인연이 있었던 거 같은데 ···. 뭐였을까?
*
오렌지 시티에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었다.
‘준을 방해하지 말 것!’
그러나 관광객들은 가끔 준에게 알은척하고 귀찮게 굴었다.
프란츠의 부하와 경찰들이 잘 커버해서, 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지만, 커버를 뚫는 극성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자유국가에서 하겠다는 걸 하지 말라고 말릴 수 없지만 ···. 합법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준을 방해하지 말 것!’ 이라는 규정을 법으로 정하는 것이었다.
법은 순식간에 통과했다.
길가는 준을 만나 대화를 하려면 경찰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신청자는 폭주했지만, 허가받은 사람은 없었다.
준은 대통령 경호에 버금가는 격리 경호를 받았다.
주변 사람이 불편하면, 안되기에 격리 경호는 그림자처럼 이뤄졌다.
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가끔 집에 들러 직접 요리를 해먹곤 했는데, 현관에 선 준의 눈에 희미한 침입의 흔적이 보였다.
‘오호! 그림자 격리 경호를 뚫고 집안에 숨어들다니!’
호기심이 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면서도 스쳐 지나가는 능력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준을 노리는 능력자들은 많았다.
순수하게 능력을 겨루려는 엠벨라 족도 있었고,
암살하겠다고 나대는 킬러들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기다린 경우는 없었다.
준은 태연하게 들어가, 샐러드를 만들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에게서 건포도 냄새가 났다.
“샐러드?”
준은 두 개의 접시에 담긴 샐러드를 보였다. 놀란 것은 남자였다.
“요리 전에 알고 계셨군요.”
“모를 수가 있어야지.”
남자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지금껏 그의 기척을 미리 알아낸 존재는 준이 유일했다. 준이 경호원들에게 신호를 주었다면 .... 지금 당장에라도 그림자 경호원들이 들이닥쳐서 그를 잡아갈 것 같았다.
준은 천천히 샐러드 접시와 포크를 식탁 위에 놓았다.
“배고파서 숨어든 건 아닐 테고 ···.”
“사실 ···. 조금 일찍 찾아왔습니다. 회사 규정상 70세 이상이거나 시한부 판정을 받으셔야, 면담이 가능하거든요.”
“그런 규정이라면 ···. 영생주식회사 소속이겠군.”
“제 이름은 강철입니다. 실제 나이는 115세죠. 영생을 이식받았고, 능력도 강화되었죠. 고객 명단에 준 회장님의 이름을 올려도 될까요? 고객 명단에 이름을 올리시면, 그 순간부터 케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케어 서비스에는 경호 업무도 포함되어 있죠. 참고로 저의 능력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닙니다.”
강철이 강조하는 부분은 뛰어나지 않은 능력이었지만, 준의 그림자 경호가 뚫렸다는 사실이었다.
“영생이라 ···. 내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나?”
“나이는 아직 젊으시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과 같은 상황이시죠. 당신을 노리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 미소는 무슨 뜻입니까?”
강철은 준의 입가에서 빠르게 풀려나가는 소용돌이 모양의 미소를 보았다.
백 년 넘게 살아온 강철이었지만, 준의 미소는 처음 보는 종류였다.
“내일 오전에 영생의학의 평가 보고서를 공개할 참이었거든요.”
“우리 회사는 준 회장님의 능력을 높이 사서, 무료로 영생을 드리려고 합니다. 준 회장님뿐 아니라 굿데이 직원분들에게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안 받아.”
“네?”
강철은 놀라웠다.
영생을 원하는 자는 너무나 많았다.
영생은 ···. 모든 종교에서 지치지 않고 떠들던 꿈이 아니던가!
진시황도 누리지 못한 그 기적을 얻으려면, 단순히 돈이나 권력만으로는 부족했다.
영생 위원회의 허가가 필요했다.
영생 위원회는 영생자 위주로 이뤄진 그룹이었다.
그들은 신입 영생자를 파트너가 아닌, 경쟁자로 생각했다. 그냥 두면 사라질 경쟁자에게 기횔 줄 이유는 없다.
현상 유지 전략이 영생 위원회의 기본 방침이었다.
그 위원회가 준에게 영생을 공짜로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UN 사무총장도 얻지 못한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데 준은 너무나 가볍게 거절했다. 그냥 ‘고맙지만 ···.’ 시작되는 구구절절한 거절도 아니라, 거두절미한 ‘안 받아.’라니!
이 세상에서 제정신을 가진 인간 중에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준 회장님.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우리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도서관 열쇠처럼 녹스는 물건이 아닙니다. 영생입니다.”
“주는 게 아니라 ···. 훔치는 거지.”
“네 그게 무슨 ···.”
“영생은 삶을 주는 게 아니라 ···. 죽음을 훔치는 거다.”
파직! 강철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방금 준이 영생주식회사를 도둑 취급한 것이다.
준은 조용히 샐러드 접시 두 개를 비웠다.
“내가 요즘 좀 둔해졌나 봐. 영생 능력자인 줄 알았으면, 샐러드를 만드는 게 아닌데 ···. 줘도 못 먹잖아.”
“영생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영생의학은 완성된 기술이 아닙니다. 아직도 발전하고 있죠. 굿데이의 평가를 공개하는 것을 늦춰주신다면, 영생 대기자에 제공되는 경호 서비스를 드리겠습니다.”
“로켈!”
준이 부르자, 구석진 벽면에서 로켈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짱! 부르셨습니까?”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이다. 예의를 다해서 모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