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28화 (126/141)

< 테라마인드-3 >

카보토는 국채 상환 요구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국채는 국가가 은행에서 돈 빌리면서, 써준 차용증이었다.

현금 결핍 증후군으로 지방 정부가 파산하는 시점에서 국채 상환을 강요당하면,

국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

통화량을 줄이는 유동성 압박이 잽이라면,

국채 상환 요구는 어퍼컷이었다.

돈보다 빚이 더 많은 세상이었고, 중앙은행 밑으로는 강대국이든 선진국이든 그냥 다 빚쟁이였다.

중앙은행이 특정 국가에 국채 상환 요구를 강요하면,

국가를 파탄 내고, 다른 정부를 들일 수 있다.

지금껏 수학공식처럼 맞아 떨어졌다.

아주 지독한 독재 정권은 가끔 예외가 있었지만, 기후 독립을 외치는 국가 중에서 악독한 독재 정권은 없었다.

기후 독립은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시민을 위한 제도였다.

독재자에겐 기후 독립보다 권력 유지가 더 중요했다.

국채 상환 요구로 기후 독립 국가들을 망하게 할 수 있을까?

예전 데이터를 보면 99.99% 그렇다고 보장했다.

그러나 카보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예전에 없던 너무나 강력한 변수가 있었다.

굿데이.

현금 결핍 증후군으로 돈이 바닥난 정부 중에는 공무원 월급을 굿데이 쿠폰으로 주는 곳도 있었다.

요빅 생태계의 주인 굿데이의 재산은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중앙은행 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싱크탱크의 최종 결론도 같았다.

“몰아붙여서는 안 됩니다.”

카보토가 통화량을 줄인 이유는 기후독립 오퍼레이션을 응징하려 함이었다.

자본주의에서 발권력은 최강 권력이었고,

통화량을 죄면 누구든 항복 선언을 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굿데이가 갑작스러운 세계 경제 불황에 대한 원인을 정확하게 밝혔고, 사람들의 원망이 정부를 향하지 않고, 우리에게 쏠렸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우리가 불리합니다. 한국에서는 시민들이 물물교환이 유행입니다. 묘하게도 기본 거래단위가 촛불이더군요. 그들은 불편함을 참고 견뎌내고 있습니다. 굿데이는 솔루션 개발이 가능한 능력집단입니다. 그들의 솔루션에 따라 우리 시스템이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놀랍군. 굿데이 따위의 개인 기업이 세계은행과 맞서다니 ···. 놈들이 우리와 맞서서 얻는 게 뭐지? 다른 기업들은 우리와 한편이 되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 ···. 그래서 자네들의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낸 방법이라는 게 ···. 여기서 멈추라는 건가?”

카보토의 눈 밑이 가늘게 떨렸다.

“네. 물밑 작업을 해서, 굿데이부터 잡거나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굿데이의 준은 경제계의 히틀러입니다. 광기에 휩싸인 어리석은 히틀러가 아니라, 지독하게 똑똑한 히틀러입니다. 그와 전쟁을 벌이는 건 ···.”

“알겠네. 그만하게.”

카보토는 국채 상환 요구 카드를 내려놨다.

시스템은 한 번 무너져서, 다른 것으로 대체되면 되살리기 너무 어렵다.

그는 통화량을 이전처럼 늘려서 공급하기로 했다.

유동성 압박을 포기한 것이었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공급하자, 금리가 낮아졌다.

곳곳에 파산과 부도라는 상처가 남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을 되찾았다.

고작 30일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금융 경제는 10년 전 이전으로 후퇴했었다.

올림포스 앙리 백작은 직접 공식 발표를 했다.

“일방적인 기후 오퍼레이션은 인접 국가와 기후 갈등을 일으킵니다. 기후 갈등 해소 방법으로 기후 거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시절 기후 갈등으로 대재앙을 겪었습니다. 안정된 기후 신용 평가가 보급되어 대재앙 가능성이 무척 낮아졌지만, 기후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후 갈등을 희석할, 기후 거래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올림포스는 기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기후 독립을 지지합니다.”

서론은 길었지만, 결론은 기후 독립인정이었다.

올림포스는 기후 독립을 막을 힘이 없었다.

세계 기후 중앙은행도 실패한 일이었다.

세상은 환호했다.

그 지긋지긋한 탄소 달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올림포스의 기후 독립 인정은 항복 선언이었다.

이날, 기후 독립 국가들은 하늘 위에 무지개를 띄웠다.

미세한 물방울 입자를 흩뿌리는 방식으로 비를 내리지 않고 무지개만 만들었다.

세상은 승리와 기쁨으로 흥겨워했지만, 굿데이는 조용했다.

에바의 보고를 받은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박한 사람들이야. 사소한 것에 저렇게 좋아하다니!”

준의 기준에서 보면, 기후 독립은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기후 오퍼레이션은 예전에 완성된 기술이었고, 기후 독립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썼지만, 따지고 보면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을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대재앙 시절 때문에 올림포스가 독점했지만, 기후신용 평가모형이 완성된 현시점에서 기후 독립은 자연스러운 필연이었다.

다만, 굿데이가 거들지 않았다면 150년 넘게 걸렸을 테고,

올림포스의 어둠 아래에서 전 세계가 신음하고 고생했겠지만,

결국, 영국이 지배하던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갔듯이 기후 오퍼레이션도 국가 단위로 쪼개질 터였다.

굿데이의 역할은 시간을 앞당긴 정도였다.

그 부작용으로 유동성 함정에 빠진 기업들이 파산했지만, 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희생 없이 얻어지는 건 없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 희생을 직접 치를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인은 굿데이를 영웅이자 구원자로 칭송했지만, 준이 기후 독립을 자극했던 이유는 ···.

“준 회장님! 기후 관련 솔루션 수익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증가율이 대기권을 뚫는 로켓 같아요.”

에바의 미소는 로켓 추진 불꽃처럼 환했다.

이번 사건을 가장 큰 수익과 권력을 챙긴 것은 바로 굿데이였다.

준은 경제 정의와 발권력 독점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기후 독립 가능성을 설파했던 이유는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무엇보다 굿데이에게 큰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운 나쁜 기업이 많이 파산했지만, 굿데이가 벌어들인 수익은 총 파산액을 능가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준은 가쁜 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의 식사는 빵과 커피 그리고 버터와 토마토였다.

세계 기후 중앙은행을 이겨 먹고, 엄청난 수익을 챙기고, 권력마저 덤으로 얻은 인물치곤 너무나 검소했다.

“준 회장님. 선물로 최고급 샴페인이 몇 박스 들어왔습니다. 오늘 같은 날 한 병 정도는 따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가? 사소한 이득이긴 하지만, 기념 삼아 사치를 부려도 되겠지. 에바, 버터를 치워라.”

“버터를 왜요?”

“최고의 사치는 검소함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사치스럽게 검소해 보이겠다.”

준은 버터 없이 식사를 마쳤다.

“준 회장님. 이렇게 사시는 거라면, 굳이 올림포스와 세계 기후 중앙은행과 갈등을 빚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들을 건들지 않아도, 준 회장님이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맘껏 누릴 수 있으시잖아요!”

“풋, 에바 ···. 너란 여잔.”

준은 까닭 없이 에바의 이마에 입 맞췄다.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에바는 온몸의 피와 창자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강렬함을 느꼈다.

그녀는 뜻하지 않게 휘청거리며 신음을 냈다.

지금 이 순간 준이 옷을 벗으라고 하면, 벗을 수도 있었다. 혹시나 몰라서 미리 샤워도 했다.

‘그래! 나는 여자였어!’

에바는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준은 그녀와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사는 세상이다. 내가 움직인다.”

*

킹스덤 대학 학과장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준의 졸업을 의결했다.

준은 가끔 강의실에도 들렸는데, 그때마다 강사와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준의 지적 능력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명색이 학생과 교수 관계였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학생 질문에 제대로 답변 못 한 꼴이었다.

준은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하루빨리 준에 걸맞은 학위를 인정하고, 놔주는 게 옳았다.

지금까지 준을 졸업시키지 않은 이유는, 준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준이 다니는 대학이라는 수식어는 너무나 강력해서,

여러 대기업에서 킹스덤 대학에 프로젝트를 떠 안겨주었다.

심지어 국가 규모의 프로젝트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교수들에게 이러한 프로젝트는 명성을 드높이는 기회뿐 아니라,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돈벌이 찬스였다.

“졸업을 시키고, 석사 코스를 제안할 겁니다. 준이 석사 코스를 거절한다 해도, 도서관 골든 키를 증정해서, 도서관을 지금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할 겁니다.”

데스먼드 학과장이 브라이언 총장에게 설명했다.

브라이언 총장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 ···. 킹스덤 대학을 빛내고 오렌지 시티를 먹여 살리는 남자.

“나에겐 딸이 있네.”

브라이언 총장은 데스먼드 학과장을 힐끔 보았다.

브라이언 총장의 딸은 준과 나이가 같았다.

“총장님. 혹시 따님을 준과 사귀게 하시려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되나?”

“말리고 싶습니다. 준은 누구 맘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학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준의 졸업장은 스티븐 교수가 건넸으면 좋겠습니다. 스티븐 교수가 준을 조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화해해도 될 거 같습니다.”

“그런가 ···. 나는 졸업장 증정은 내 딸 수잔에게 ···.”

“총장님 그러지 마소. 준에게 개망신당합니다.”

브라이언 총장은 딸자식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데스먼드 학과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이번 기회에 스티브 교수가 준에게 졸업장을 선사하면, 그동안 해묵은 갈등도 눈 녹듯 사라지겠지.’

준의 졸업식 날은 특별했다.

일요일 날 일정을 잡았는데, 졸업식보다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그날 졸업생은 준 혼자였다.

기자들과 거물 정치가 그리고 장관과 루이스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보안용 드론과 무소음 헬기가 오렌지 시티 상공을 맴돌았다.

프란츠도 그의 조직을 동원해서 치안유지에 힘썼다.

이네즈가 올림포스를 대표해서 왔고, 오로토칸도 조용히 자리를 빛냈다.

오로토칸은 기후 독립 사건으로 준과 대립 관계가 되었지만, 사적인 기념일에 재를 뿌릴 정도로 옹졸하지 않았다.

“졸업을 축하하네.”

오로토칸은 준에게 고급 만년필을 선물로 주었다.

“고맙습니다.”

“잘 간직하게. 머잖아 나에게 항복 문서를 쓸 때, 이 만년필을 써주게.”

“쓸 일 없을 것 같지만, 잘 보관하겠습니다.”

“나와 좀 걸을 수 있을까?”

“그러고 싶지만 ···. 뒤를 보시죠.”

오로토칸 뒤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대표자들이 줄을 섰다.

영국식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아! 좀 빨리 좀 끝냅시다! 영국 여왕님의 선물과 편지를 전해야 하는데, 벌써 두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요!”

“솔직히 준 앞에서는 다 똑같은데, 선착순으로 합시다!”

아프리카 우간다 대표는 훈장을 주렁주렁 붙인, 장교 복장이었다.

오로토칸은 아우성이 밀려, 자리를 비켜야 했다.

준과 함께 걸으면서 나름 멋지고 진지한 말을 준비했는데 ···.

“아 좀 비켜요!”

말레이시아 대표로 온 여성이 엉덩이로 오로토칸을 밀쳐내며, 준 앞에 엎드렸다.

“말레이시아 페라투안 국왕님의 선물입니다.”

그녀는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단검을 꺼냈다.

“블랙스타로 불리는 보석입니다. 이 보석은 영생의학 창시자가 소유했던 물건이기도 합니다.”

블랙스타는 최소 2만 년 이상 된 고대 유물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페라투안 국왕님께서는 다른 선물도 보내셨습니다. 저의 춤과 노래입니다.”

그녀가 곱게 일어서며 자세를 잡자,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나라 대표들이 소리쳤다.

“아! 정말 그러지 맙시다! 간단하게 선물만 주고 끝냅시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페라투안 국왕님의 분부에 따라 ···.”

“노래든 춤이든 페라투안 국왕이 직접 하는 거 아니면, 생략합시다! 누군 능력이 없어서, 가만있나! 지금 당장,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도 데려올 수도 있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동시에 ‘우!’하며 여자에게 야유를 보냈다.

여자는 간청하는 눈빛으로 준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숨겨진 임무는 준을 꾀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레이시아 왕실의 영광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

“자! 다음!”

에바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준의 졸업식은 여러 나라와 다국적 기업 그리고 조직들의 충성 맹세가 이어지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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