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27화 (125/141)

< 테라마인드-2 >

미국은 준의 뜻에 따라, 기후 독립을 선언했다.

하와이를 포함한 미 영토에 대한 기후를 직접 설계하고 운영할 계획이었다.

기후 거래로 결정되던 기후 시장에 미국 정부가 갑자기 끼어든 셈이었다.

학자와 정치가들은 미국의 돌발 행동을 ‘기후 반란’으로 봤다.

“우리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에도 반란이라는 소릴 들었죠.”

루이스 대통령은 자신감이 넘쳐 흘렸다.

그의 뒤에는 굿데이와 준이 있었다.

정말이지 두려울 게 없었다.

기후 시장의 주도권을 쥔, 유럽 연합은 기후 안정화와 경제 혼란을 들먹이며, 미국을 비난했다.

그들은 제7함대처럼 미국도 바다 밑으로 사라지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유럽연합이 유난스럽게 삿대질했지만, 그들의 손가락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심지어 인도와 이라크까지 기후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직접 기후 오퍼레이션을 했다면, 풍성한 기후 에너지를 누렸겠지만, 기후 거래로는 어림도 없었다.

기후 거래로 풍성한 기후 에너지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거래 테크닉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탄소 달러의 부족!

탄소 달러를 얻으려면 올림포스에 빌려야 했다.

시작부터 빚쟁이로 기후 거래에 참여하는 셈이었다.

그나마 충분한 탄소 달러를 빌리지도 못했다.

기후 거래로 운 좋게 탄소 달러를 벌 수 있었지만, 이자와 수수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직접 기후 오퍼레이션을 하면 될 일을, 올림포스를 통해 기후거래를 해서 얻다 보니, 늪에 빠지는 것처럼 탄소 달러 빚만 늘어났다.

기후 난민, 기후 파산, 기후 IMF, 기후 결핍 ···. 이 모든 용어가 탄소 달러 부족을 뜻했다.

기후 독립은 들불처럼 번졌다.

올림포스의 앙리 백작은 침묵을 지켰다.

상대는 굿데이였다.

지금까지 굿데이가 하려 했던 일이 실패했던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앙리 백작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세계 기후 은행이었다.

올림포스의 기후 독점은 세계 기후 은행이 보장했다.

앙리 백작은 세계 기후 은행의 결정을 기다렸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가졌던, 오로토칸이 기후은행 회의를 진행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화폐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세상의 실질적인 주인은 은행이었고, 그 은행들을 거느리는 조직이 세계 중앙은행이었다.

세계 중앙은행이 화폐발행을 줄이면 세계 경제는 큰 불황에 빠지고, 화폐발행을 늘리면 버블 경제로 호황을 누렸다.

세계 중앙은행을 심판하는 국제 조직도 없었다.

세계 중앙은행은 그야말로 초법적인 존재였고, 세계 기후은행으로 거듭나면서 더 강력해졌다.

빵이 남아돌아도 돈이 없으면 빵을 먹지 못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에서는 돈만 있으면 하나 남은 빵도 차지한다.

돈의 파워는 강력했고, 은행은 그 돈을 뿌리고 거두는 권능을 가진 곳이었다.

돈의 창조자가 바로 은행이 아니던가!

“바보들이 바보에게 하는 말이 있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오로토칸은 유머러스하게 회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경제가 문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항상 정치였다.

은행제도의 근간도 경제가 아니라, 정치였다.

경제학에서 진리로 여겨지는 신용화폐제도와 중앙은행 시스템은 과거 정치적으로 결정된 ‘운명’이었다.

신용화폐제도와 중앙은행 시스템에서는 누구나 빚쟁이가 될 ‘운명’이었다.

아주 잠깐 돈을 벌거나, 운 좋게 후손에게 재산을 물러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양털 깎기 법칙’에 따라 결국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정치적 결정에 따라, 사람은 빚쟁이로 태어나 빚쟁이로 죽을 운명이 되었다.

운명을 바꾸려고 제아무리 경제를 주물러봐야 소용없다. 정치를 바꿔야 했다.

준은 이 운명이 명확하게 보였지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굿데이로 엄청난 돈을 벌고, 요빅 시스템과 기후신용 평가까지 해냈지만, 준은 알고 있었다.

결국엔 빚쟁이로 끝난다는 사실을.

굿데이는 은행보다 훨씬 훌륭하고 뛰어나며 대단했지만, 이 세상은 은행보다 굿데이를 더 필요로 하지만, 굿데이는 중앙은행 시스템을 이기진 못한다. 그저 오래 버티다가 빚쟁이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준이 경제적인 문제에만 집중했다면, 요빅 생태계와 같은 신기술에 몰두했겠지만, 준은 루이스 상원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미국 프로젝트를 도맡아서 정치를 시작했다.

되는대로 사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이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치밀하지 않았다면,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미국을 따라 기후 독립을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과 기타 국가들의 기후 독립 프로젝트를 평가해 준 전문집단이 바로 굿데이였다.

“오로토칸 준을 만난 적이 있지 않나?”

이탈리아 혈통을 물려받은 카보토의 눈동자는 까마귀처럼 검었다. 그의 취미는 권총 수집이었는데, 그가 아끼는 권총은 링컨을 암살할 때 사용했던 델린저였다.

세계 기후 은행의 최고 원로인 그는 일곱 자매 중 한 명이었다.

“리베아티 섬에서 준을 만났습니다. 그가 요빅 황금으로 제가 가진 금의 값어치를 떨어트린 후였습니다.”

오로토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준을 부하로 삼으려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러나 준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준도 다른 천재들처럼 매트릭스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여겼다.

준이 제아무리 뛰어난 권능을 개발하더라도, 누구나 죽는다. 남는 것은 시스템이었고, 승리자도 시스템이었다. 시스템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이 세상은 중앙은행 시스템이었다.

“자네의 제안으로 세계 중앙은행은 세계 기후 은행으로 탈바꿈했네. 그런데 ···. 지금 보니 이 모든 것이 준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카보토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예전 중앙은행 시스템이었다면, 준이 이렇게 손쉽게 반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정적인 인간은 중앙은행 시스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눈앞에 있는 몇 푼에 현혹되고,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은 시스템의 본질을 보아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준도 그랬다. 그러나 준은 이제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다.

굿데이의 제1 원칙. 받아들여라!

굿데이의 제2 원칙. 적응하고, 살아남아라!

굿데이의 제3 원칙. 뛰어넘어라!

“카보토님 준을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그가 여기까지 내다봤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많은 옵션이 있습니다. 준은 ···. 링컨과 케네디처럼 사람들에게 기억될 겁니다.”

“준이 사라지면, 세계 곳곳에서 들끓는 기후 독립의 물결을 막을 수 있겠나?”

“어느 곳이나 우리를 위해 일하는 정치가와 학자 기업인 그리고 언론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오늘 같은 회의는 소집되지 말았어야 했어. 올림포스에서 정리됐어야지! 앙리 백작은 뭐하는 거야!”

“그는 ···. 최선을 다했습니다. 준을 암살하려 했죠.”

“올림포스가 나서서 준을 죽이려 했는데, 실패했단 말인가?”

“지금 당장 시온의 능력자들을 보내게! 굿데이를 쓸어 버리란 말이야!”

“저어 ···. 시온은 굿데이에 인수되었습니다.”

카보토의 눈이 붕어처럼 동그래졌다. 시온이 굿데이에게? 왜 나는 그걸 몰랐지?

“굿데이가 시온을 인수할 때까지 너는 뭘 했느냐?”

“파산 직전의 시온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카보토님께서 망하게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시온은 구시대의 유물이라 하셨고, 미래는 기후 거래의 시대가 될 거라고 ···. 사실 세계 중앙은행이 기후은행으로 바꾼 이유도 카보토님께서 직접 지시하셨기 때문에 ···.”

카보토는 조금씩 기억났다.

처음에는 탄소배출권을 기축 화폐로 삼으려 했지만, 호응이 별로 없었다.

유럽왕실 기상청에 기후거래 시스템을 연구하도록 한 것도 카보토였다.

“확실히 ···. 내가 그랬지. 하지만 굿데이가 인수하도록 놔둔 건 ···.”

“굿데이가 시온을 인수할 때, 제가 카보토님에게 직접 보고 했습니다. 그때 카보토님께서 굿데이가 헛돈을 쓴다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랬나?”

카보토가 살짝 웃었다. 분명 그랬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엠벨라와 알파가 있었지! 시온의 능력자들은 엠벨라와 알파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졌어. 굿데이가 헛돈 쓴 거 맞아.”

그는 광대처럼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미국이 선언한 기후 독립 디데이가 앞으로 한 달 남았습니다. 그전에 준을 처리하고, 나머지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엠벨라와 알파를 소집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한다!”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긴급뉴스가 날아왔다.

“미국이 기후 오퍼레이션을 시작했습니다.”

굿데이의 추진력은 오로토칸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오로토칸과 원로들의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긴급뉴스가 더해졌다.

한국, 중국, 이란, 인도가 오퍼레이션을 시작한 것이었다.

“망할 놈들! 당장 채권 연장과 화폐 발행을 중지해!”

카보토의 처방은 현금 결핍을 뜻했다.

돈이 없으면, 빵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시스템에서 현금 결핍은 치명적인 처방이었다.

“카보토님 좀 더 지켜보는 것이 ···.”

오로토칸이 만류했지만, 카보토는 확고했다.

그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세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멍청한 놈들! 겨우 민간 기업에 불과한 굿데이 따위에 놀아나다니! 지옥을 맛보게 해주겠다! 남자들은 피를 팔고, 여자들은 몸을 파는 생지옥을 보여주겠다!”

카보토는 이를 갈았다.

현금 결핍 처방은 즉각적이었다.

요빅이 등장할 때, 세계 광산업과 상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큰 파장이 있었지만, 현금 결핍 처방은 훨씬 강력했다.

단기 자금 시장에 현금이 마르자, 금리가 치솟았다.

전 세계 국가들이 디플레이션에 대응해서 금리를 낮추던 중이었다.

이 와중에 갑자기 금리가 오르자, 자금 결제가 막히고, 연쇄 부도가 시작되었다.

정부와 기업은 돈을 구하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은행은 금고를 열지 않았다.

은행들은 비공식 라인으로, 기후 오퍼레이션을 중단하면 현금을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여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거절하오.”

연쇄 파산을 눈앞에 둔 정부가 선을 그었다.

“핵겨울에 버금가는 경제 파멸을 경험하실 겁니다.”

“알고 있소.”

비장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후 독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도 뜻을 이해해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당신을 원망하며 증오할 겁니다. 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몰릴 겁니다.”

“알고 있소.”

“아신다면서 왜?”

“우리가 굿데이에게 의뢰한 보고서에 나와 있소.”

상황이 불리했는데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굿데이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굿데이는 모든 일을 예측했고, 대응방법까지 추천했다.

현금이 급한 기업이 부도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굿데이의 존재였다.

굿데이는 홈페이지를 통해, 현금 유동성 부족이 발생한 원인과 과정을 담담하게 밝혔다.

노벨 문학상의 유진 악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구를 사용했다.

프랑스 시민 혁명에 버금가는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중앙은행 시스템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믿을 만한 대안과 해법을 제시하는 인물은 없었다.

굿데이는 달랐다.

굿데이는 중앙은행 시스템을 대신할 여러 방법을 나열했다. 개중에는 노벨상을 받은 가속도 수익 배분과 페루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소득 중심 시스템’이 있었다.

준의 관점에서 볼 때,

일자리를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 무능함에 불과했다.

판이 바뀌려고 조짐이 보이자, 약삭빠른 정치가들이 앞장섰다.

굿데이는 인터넷으로 굿데이 쿠폰을 발행했다.

현금 대신 굿데이 쿠폰으로 물건값을 주고받자는 제안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현금 결핍증의 원인은 현금 중독이었다.

현금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결핍증이 더 치명적이었다.

굿데이 쿠폰은 현금 중독을 중화하는 힘이 있었다.

은행과 대립하는 정부는 기후 오퍼레이션보다 더 충격적인 계획을 검토했다.

세금을 굿데이 쿠폰으로 받는 방안이었다.

은행에서 발행하는 현금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부가 현금으로 세금을 거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금을 포기하고, 굿데이 쿠폰으로 세금을 받는다면, 현금은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고 만다.

“굿데이 ···. 무서운 놈들이다.”

카보토는 이를 악물었다.

여러 정부에서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문을 표시했다.

정부가 돈을 만드는 방법은 돈을 갚는다는 증서를 중앙은행에 맡기고, 현금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정부는 세금을 거둬서 중앙은행에 돈을 갚았다.

하지만 이 거래를 자세히 보면, 돈을 갚는다는 증서와 현금이 교환된다.

중앙은행은 현금을 프린터로 맘껏 뽑아낸다.

만일, 정부가 직접 현금을 뽑아낸다면 돈을 갚을 이유가 없었다.

중앙은행을 통하지 않으면, 정부가 과도한 현금을 뽑아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올 위험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제력을 문제였다.

중앙은행을 통하지 않아도, 자제력만 발휘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자제력을 발휘할 것인가? 아니면 운명적인 빚쟁이가 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굿데이 덕분에 선택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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