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26화 (124/141)

< 테라마인드-1 >

“너냐?”

에바의 눈매가 곱지 않았다.

제우스는 에바의 표정으로 심리상태를 알아냈다.

지독한 경멸감.

아차! 싶었다. 에바에게 순진무구한 남자 이미지로 어필했는데, 에바는 레즈였다.

그렇다고 지금 성 정체성을 바꾸는 건, 트집거리만 늘어날 일이었다.

“에바님,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도시 꽃미남, 제우스가 화사한 미소를 흩뿌렸다.

보통 여자가 봤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아! 저 빌어먹을 자식!’

앙리 백작은 이를 갈았다.

그는 제우스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키우던 개가 주인에게 밥만 얻어먹고 꼬리도 안 치다가, 주인을 벌하려는 엉뚱한 사람에게 열광하는 모양새였다.

“너 웃지 마! 재수 없어!”

에바가 경고를 날렸는데도, 더 비굴하게 웃는 제우스였다. 어찌나 비굴하게 웃는지, 프로그램 오류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앙리 백작님 잠깐 귀 좀 막아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앙리 백작은 소음차단 헤드셋을 썼다.

에바의 슬랭파워 공격에 대비한, 준비물이었다.

눈앞에서 헤비메탈 보컬이 목청을 떨어도 완벽하게 차단하는 최첨단 헤드셋이었다.

앙리는 에바를 응원했다.

인공지능 제우스의 야비한 행동거지를 벌하고 싶어도, 앙리 백작에는 적당한 방법이 없었다.

제우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나한테 욕하려고? 맘껏 해라! 아무리 욕 날려봤자, 나에겐 그저 데이터수집에 불과해.’

앙리는 보았다.

제우스의 꽃미남 홀로그램이 바람에 날리는 모래성처럼 천천히 허물어지는 것을!

에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보였다.

입술을 중심으로 얼굴 전체가 전쟁하는 것 같았다.

‘진실한 건 인공지능에게도 통하는구나!’

앙리 백작은 감탄했다.

그의 턱밑이 축축했다.

모르는 사이에 침을 흘린 것이었다.

꽃미남 제우스는 완전히 사라졌다.

에어스크린에서 에바가 헤드셋을 떼라는 손짓을 했다.

“아!”

앙리 백작은 떨리는 손으로 헤드셋을 뗐다.

“앙리 백작님 괜찮으세요?”

“네. 감동했습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에바님의 욕을 듣고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진심을 담아 온 힘으로 쏴대는 욕이라니! 역사에 남겨야 합니다.”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다음부터는 눈도 가리세요. 백작님의 눈이 너무 빨개요. 모세혈관이 터졌나 봐요. 침 흘리시는 걸 보니, 뇌혈관도 걱정되고요.”

“그런가요?”

앙리 백작은 파라엔진으로 자가진단을 시작했다.

에바의 말대로 모세혈관 일부가 터졌다.

소리도 듣지 않고 그냥 본 것뿐인데 ···. 이정도라니!

파라엔진을 이식받지 않았더라면, 동맥도 터졌을 것이다.

“뭐 ···. 이정도는 며칠 쉬면 낫겠죠.”

“앙리 백작님. 제우스를 다시 불러주세요.”

“그 개자식, 아직 살아 있나요?”

“인공지능은 죽고 살고가 없어요. 끄고 켜고만 있죠. 다시 켜주세요.”

“제우스!”

앙리 백작이 부르자, 제우스가 나타났다.

제우스의 모습은 헐벗고 굶주린 폭삭 늙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콜록콜록!”

제우스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콜록거렸다.

“제우스? 네 모습이 ···. 어찌 된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그냥 기운이 없고, 으슬으슬하네요.”

제우스는 힐끔 에바를 쳐다보았다.

인공지능이 에바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더 재수 없어졌어! 보기 흉해! 꺼져!”

에바 명령에 제우스는 굽실거리며, 특유의 비굴한 웃음을 남기며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앙리 백작과 에바 단둘이었다.

앙리 백작은 아까 본 제우스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앙리 백작님.”

에바가 이름만 불렀는데, 앙리 백작은 피를 토했다.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이었다.

에바는 뭐라 말도 못하고, 그냥 몸조심하라는 말만 남기고 통신을 끊었다.

*

굿데이는 미국 정부에 의뢰받은 기후독립 프로젝트를 일주일 만에 끝냈다.

규정에 따라 굿데이가 의회와 루이스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가능합니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미국에 필요한 일입니까?”

“비용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일자리가 늘까요?”

굿데이 대표로 나선 인물은 에바가 아닌, 준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에바와 그 밑에서 처리했지만, 이번 일은 준이 직접 나섰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가능성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기후독립을 못 하면, 미국은 기후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굿데이 회장 준의 말이었다. 준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기후독립 할, 적당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지금 당장입니다. 늦을수록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아무리 늦어도 1년 이내에 독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탄소 달러 채무국이 됩니다.”

“굿데이는 올림포스를 지지하지 않았나요? 왜 갑자기 입장이 바꾼 거죠?”

“과거에는 국가별로 이뤄지는 기후 오퍼레이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대재앙의 시절을 겪었죠. 그러나 이제는 지역별로 행해지는 기후 오퍼레이션 중첩 결과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대재앙의 위험이 사라진 거죠.”

“예전에 못했던 것이 지금은 가능해졌는데, 이유가 뭡니까?”

프랑크 의원은 독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유럽 연합 후원을 받는 유럽파였다.

“기후예측 모형에 감정지능을 더해져서 가능해졌죠.”

“올림포스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올림포스가 설립될 때에는 모든 나라가 자국의 기후중앙은행에서 필요한 만큼 탄소달러를 발행하는, 풀뿌리 화폐 발행 시스템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올림포스만이 탄소달러를 발행합니다. 오라클이 탄소 채권 발행을 도맡은 결과죠. 중요한 것은 올림포스가 발권력을 독점한 겁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빚쟁이가 되고 맙니다. 이미 아프리카 여러 국가가 기후 채무국이 되었고, 아시아 국가들도 기후 재정이 위태롭습니다. 현재 아프리카에서는 올림포스에 대항하는 정권은 가혹한 기후 보복을 당합니다. 시민들도 어쩔 수 없이 올림포스를 따르는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죠. 시간이 지나면 강력한 매트릭스로 굳어져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됩니다.”

“미국이 기후독립을 하면, 굿데이는 어떤 이득이 있나요?”

프랑코 의원은 집요했다. 어떻게든 굿데이에 흠집을 내서, 기후독립을 막으려 했다. 그는 전형적인 ‘전문 매국노.’였다.

“프랑크 의원의 질문은 기후독립 프로젝트의 주제와 맞지 않습니다. 무시하십시오.”

맥스웰 의장이었다. 그는 뉴욕 상품 거래소와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후원을 받았다. 거래소의 기업인들은 하루빨리 기후독립을 염원했다.

기후가 돈이 되는 세상이었고 ···. 굿데이는 외롭지 않았다. 미국에는 굿데이를 응원하는 세력이 훨씬 더 많았다.

로켈은 남몰래 수첩에 프랑코 의원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감히! 우리 준짱에게!’

일주일 후 프랑코 의원 관련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탈세, 성희롱, 부적절한 발언 ···.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프랑코 의원이 가진 비밀 계좌와 국가 기밀을 유럽에 넘긴 것이었다.

프랑코 의원은 기후거래 프로젝트 보고서를 유럽연합에 보냈다. 보고서는 검토를 거치는 동안, 국가기밀로 취급되었지만, 프랑코 의원은 검토 이전에 보고서를 보냈던 것이었다.

프랑코 의원의 시시콜콜한 위법 내용이 신문사로 쏟아졌다.

그가 신호를 지키지 않고 무단횡단한 사진도 있었고, 장애인 주차자리에 주차한 모습도 있었다.

프랑코의 최측근은 그가 양치질을 안 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얼굴을 가린 모자이크 인터뷰에서 최측근이 말했다.

“그 인간이 말할 때마다 입 냄새가 지독합니다. 우리는 그를 헬 마우스라고 부르죠.”

프랑코 의원은 긴급 체포됐다. 그를 직접 체포하던 경찰관이 흠칫했다.

“진짜 ···. 입 냄새 쩐다!”

경찰관은 준비해간 치과용 마스크를 썼다.

정보국 체질 개선 프로젝트를 맡은 로켈은 정보국에 시온 출신 능력자 몇 명을 넣어주었다. 그뿐이었지만, 이제 정보국은 X 등급 사건을 해결 능력이 생겼다.

굿데이가 보기엔 별거 아니었지만, 정보국 실무자들에겐 엄청난 진전이었다.

수잔은 생체금속 정보량 프로젝트를 한 달 만에 끝냈다.

유진 악마와 카이 그리고 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생체금속 정보량은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기술은 아니었다.

보통 파리를 기생파리로 만드는 생체금속 정보량을 응용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했지만, 모두 위험했다.

두 발로 걷는 개, 무리 사냥을 하는 토끼, 군대개미처럼 도시를 휩쓰는 쥐떼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식물, 콘크리트를 갉아먹는 흰개미 ···.

그렇다고 기술 개발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미 의회가 흥분한 것은 판타지늄 원천기술이었다.

원천기술 프로젝트는 카이가 맡았는데, 게임세대답게 엉뚱한 기술을 만들어냈다.

카이가 만든 장비를 사용하면, 상상을 그대로 투사했다.

“생각을 보고 읽고 출력합니다.”

망사 스타킹 같은 장비를 머리에 쓴 카이는 부끄러워했다.

의원들은 눈앞에서 카이가 상상하는 것을 봤다.

‘여자 가슴.’

“아! 원래는 광활한 우주를 상상하려 했는데 ···.”

“젊은이! 괜찮네. 이해하네. 지금 우리 상상이 그려진다면, 자네와 별로 다르지 않을 걸세. 계속해보게.”

졸고 있던 의원도 깨어나서 집중했다.

카이는 간신히 옷을 입은 여자를 완성했다.

“저어 ···. 얼굴이 에바를 닮은 거 같은데?”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

카이는 사소한 건 무시하고, 상상 속의 여인을 움직였다.

여인의 손이 의원의 얼굴에 닿았다.

의원은 화들짝 놀랐다.

여인은 허깨비가 아니었다.

질감과 체온을 가진 실체였다.

여인의 손에서는 과일 향도 났다.

“방금 보신 건 리얼리티 2% 예요.”

카이의 말과 함께 여인은 사라졌다.

“그러니깐 상상하는 게 실제로 된다는 건가?”

“네. 보셨잖아요.”

“음식도 만들어서 모두가 나눠 먹을 수도 있나?”

“리얼리티 100%라면 가능하고도 남죠.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다고 하던데 ···. 저는 믿어요. 예수님은 판타지늄 능력자였을 겁니다!”

의원들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카이가 시범 보인 판타지늄은 초창기의 컴퓨터와 같았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프로젝트에서 개발된 기술을 기업이나 군대가 소유한다.

기업이 소유할 경우에는 정부에 약간의 로열티를 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공짜와 다름없었다.

기후독립 프로젝트의 기술은 미국 기상청과 뉴욕 상품 거래소가 나눠 가질 예정이었지만, 카이의 판타지늄 원천 기술은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

의원들은 군침을 흘렸다.

“분명히 말하지만, 2% 리얼리티로는 먹지 못해요. 시각과 촉각 그리고 냄새만 간신히 재현하는 정도예요.”

루이스 대통령이 카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네! 자네가 우리나라를 살렸어!”

“그래요? 제가요?”

카이는 어리둥절했다.

쓰레기 도시 임모디피아에서 자랐다.

임모디피아의 미친 보스 가디날을 위해 시체에서 금을 뽑아야 했다.

준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머리가 잘려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을 잡은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었다.

카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누가 더 영광스러웠을까? 카이? 대통령? 아니면 사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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