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25화 (123/141)

< 판타지늄-25 >

“닥터 칼라니티의 상태는 훌륭합니다.”

제우스는 에어스크린을 띄워서 닥터 칼라니티의 몸 상태를 그래픽으로 나타냈다.

제우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그래픽이었지만, 앙리 백작은 뭘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다른 시체도 살릴 수 있나?”

“어렵습니다. 닥터 칼라니티의 몸은 다른 사람과 달리, 판타지늄화 되어 있었습니다. 파루시아늄으로 판타지늄에 저장된 그의 생명을 불러내는 겁니다. 판타지늄화 되어있지 않으면, 파루시아늄은 효과가 없습니다.”

제우스가 설명했지만, 앙리 백작은 구름 속에서 헤매는 느낌이었다.

앙리 백작에게 중요한 것은 닥터 칼라니티가 아니었다.

올림포스의 기후거래 독점!

닥터 칼라니티를 살린 것도 기후거래를 독점하기 위한, 재활용에 불과했다.

닥터 칼라니티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원숭이를 닮은 로봇이 보였다.

로봇 머리 위로 에어스크린이 떠올랐다.

덥수룩한 수염과 곱슬곱슬한 긴 헤어, 로마 시대의 토가를 입은 제우스가 보였다.

“네가 날 깨웠느냐?”

“다시 죽여줄 수도 있다.”

제우스는 힘을 과시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닥터 칼라니티의 성격을 분석한 결과 ‘과시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이었다.

지극히 전략적인 대응이었지만, 앙리 백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우스가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제우스가 올림포스를 돕는 이유를 뭐라고 했더라? 맞아! 영역확보라고 했지. 굿데이의 유진 악마보다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고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고 했지. 음 ···.’

체스와 바둑도 인공지능의 시대였다.

인간은 체스로도 바둑으로도 인공지능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최근 유진 악마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예술의 영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페렐만도 인공지능이었다.

인공지능은 시대의 흐름이었고, 앙리 백작은 그 흐름에 운명을 맡겼다.

제우스가 두렵긴 했지만, 앙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후거래 독점 .. 그것뿐이었다.

녹색 광채 - 에어스크린으로 보이는 닥터 칼라니티의 눈빛은 괴기스러웠다.

“나에게 뭘 원하느냐?”

“준을 죽여라!”

“그런 일이라면 ···. 원숭이를 보내라.”

닥터 칼라니티는 머리 위로 에어스크린을 받치고 있는 진도르를 가리켰다.

“준은 너의 생명을 빼앗은 자다! 그의 죽음을 갖고 싶지 않나?”

“날 되살릴 능력이 있다면, 준을 죽일 능력도 있을 텐데 ···. 왜 직접 준을 처리하지 않지?”

다시 생명을 얻은 닥터 칼라니티는 급할 게 전혀 없었다. 더 잃을 게 없었다.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통제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앙리 백작의 머릿속에 ‘실패’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제우스의 권능은 놀라웠지만, 역시 인간의 마음은 다루기 어려웠다.

앙리 백작의 마음은 복잡했다.

제우스의 계획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자, 마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닥터 칼라니티가 인공지능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렸다면, 조금 실망했을 것 같았다.

“내가 너에게 생명의 권능을 준 것은 너를 통해 뜻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네가 나에게 순종치 않는다면, 너의 정신을 지우겠다.”

제우스의 최후통첩이었다.

“너는 ···. 신이냐?”

닥터 칼라니티는 몸을 일으켜, 누웠던 관을 보았다.

관은 무척 좁았다.

“왜 대답이 없어?”

칼라니티는 시선을 돌려, 에어스크린의 제우스를 노려보았다.

“나는 인공지능 제우스다.”

“깡통은 취급 안 한다. 옆에 사람 있으면 바꿔라.”

에어스크린에서 앙리 백작이 나타났다.

“날 알아보겠나?”

“기후 외판원 아니십니까? 원숭이 로봇과 깡통 제우스 ···. 올림포스가 많이 발전했군요. 준을 죽이려는 이유는 ···.”

닥터 칼라니티는 피식 웃었다. 인간의 논리는 너무나 뻔했다.

“협조하겠나?”

“앙리 백작 내 꼴을 잘 보세요. 죽다 살아났습니다. 죽어보신 적 없으시죠. 죽음은 어둡고 춥고 배고픕니다. 고통이 끝나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거죠. 예전에는 지옥을 믿지 않지만, 이제는 믿습니다. 다시는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은 정말이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저처럼 죽다 살아난다면, 원한? 증오? 복수? 이런 건 의미가 없어집니다. 생존. 생존만이 중요해지죠. 모든 판단과 행동은 생존 가능성 확대에 집중됩니다. 이제야 준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그 녀석은 정말이지 생존 가능성 확대에 집중된 삶을 살죠. 준과 깡통 지능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저는 준을 택합니다. 당신들의 계획은 뻔해요. 내가 준을 죽이면, 당신들이 나를 죽여서, 증거를 소멸하겠죠.”

닥터 칼라니티의 선언은 제우스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너에게 생명을 줬어!”

“깡통 지능 지랄 떨지 마라. 날 위한 게 아니잖아. 널 위한 거였잖아. 날 이용하려는 거잖아.”

끼릭.

진도르 로봇의 손에서 플라즈마 검이 활성화되었다.

“플라즈마 검이라 ···. 역시, 나를 죽일 생각이었군.”

진도르는 빠르게 회전하며 닥터 칼라니티의 목을 노렸다.

“멍키야. 어설프다.”

닥터 칼라니티는 간단하게 로봇의 목을 뜯었다.

그가 손가락을 로봇의 눈에 넣어서, 메인 회로를 조작했다.

“깡통 지능 그리고 앙리 백작?”

로봇 이마에 있는 카메라 렌즈 조리개가 움직였다.

앙리 백작은 올림포스 통제실 스크린으로 닥터 칼라니티를 보고 있었다.

닥터 칼라니티는 새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로봇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날 살려줬으니, 충고하나 해주지. 준이 하는 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어. 그는 날 태워 없앨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 이유를 생각해봐.”

로봇 머리는 칼라니티 손안에서 박살 났다.

*

굿데이의 토끼굴은 실시간으로 데이터가 올라왔다.

피닉스 섬에서의 생명반응 관측.

닥터 칼라니티 연구소 문 강제 개방.

닥터 칼라니티의 부활.

급박한 뉴스였지만, 굿데이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닥터 칼라니티는 제우스와 앙리 백작에게 비장의 카드였지만, 굿데이에겐 수많은 관리 대상 중 하나였다.

“닥터 칼라니티가 되살아났습니다. 지가 예수인 줄 아나 봐요.”

에바에게 보고하는 로켈은 따분한 표정이었다.

“혼자 살아났어? 기특하네.”

“기특할 거 없습니다. 에어스크린 통신을 가로챘는데, 올림포스가 개입했습니다.”

“올림포스가? 올림포스는 기후거래 전문업체잖아? 닥터 칼라니티를 왜?”

세상은 올림포스를 대단하게 여겼지만, 굿데이가 바라보는 올림포스는 기후거래 전문업체에 불과했다.

“준 회장님을 암살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사람을 살려? 일 복잡하게 하네. 올림포스 책임자가 앙리 백작이지? 준 회장님을 상대로 작전을 짤 위인은 안 되는데 ···. 최근엔 듀아멜에게 털릴 뻔했잖아.”

“간신배가 있습니다. 제우스라는 인공지능인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거 같아요. 어떻게 할까요? 앙리 백작이 능력자라면, 시온의 판결에 따라 교육 들어가면 되는데 ···. 능력자가 아니라서, 제가 손을 쓰기엔 좀 그렇고 ···. 제우스 같은 인공지능을 다룰 매뉴얼도 아직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에게 물어봐야지. 유진!”

“에바님! 부르셨어요.”

“무슨 내용인지 알지? 제우스 어떻게 생각하니?”

“재수 없어요.”

“나도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유진 악마는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

준은 도서관에서 토끼굴로 걸어오면서, 사건보고를 받았다.

준 앞에 에어스크린이 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필터링 되었다.

“닥터 칼라니티는 재교육과정에 들어갈 예정입니다만, 일반인 앙리 백작과 인공지능 제우스의 처분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에바의 목소리도 준에게만 들렸다.

“모르면 ···. 직접 물어본다.”

“그래서 ···. 이렇게 준 회장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만 ···.”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아!”

지하 연구소에서 나온 닥터 칼라니티는 푸른 하늘을 보았다.

예전에는 하늘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죽다 살아나 보니, 저 푸른 하늘이 한없이 소중했다.

“나왔느냐.”

오색 선지자였다.

선지자들은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폈지만, 마음속으로 칼라니티를 두려워했다.

다섯이 동시에 덤빈다고 해도, 닥터 칼라니티를 어찌할 수 없었다.

“로켈님은?”

닥터 칼라니티가 로켈에게 존칭을 붙이자, 선지자들은 안심했다.

“로켈님께서 너의 교육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렇군. 여기서 너희가 날 기다렸다는 것은 ···. 준은 모두 예측했던 거군.”

닥터 칼라니티는 그의 목숨이 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한 번 확실하게 경험했다.

“나도 너희처럼 변하는 거냐?”

“우리가 어때서?”

“멍청한 눈빛과 공허한 표정.”

“이게 우리의 최선이다.”

“그래 보인다.”

닥터 칼라니티는 바위 위에 앉았다.

선지자들이 칼라니티 주위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준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선지자들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준이 아니었다면, 시온은 망했을 테고, 닥터 칼라니티로부터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준의 위대함은 로켈이 증명했다.

그림자 기사에 불과했던 그가 시온의 선지자를 통치하는 능력자가 된 것도 준의 힘이었다.

비쭉거리던 닥터 칼라니티가 큰 결심을 하고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준을 칭송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죽음이 그를 달라지게 했다.

그의 육체는 고농도 판타지늄이었고, 판타지늄 생명체인 그는 준의 능력이 절실했다.

그가 풀지 못한 생명의 신비를 풀 수 있는 것은 준뿐이었다.

죽음과 생명 모두를 위해서라도 준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했다.

앙리 백작은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다.

바람 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랐다.

닥터 칼라니티가 그를 죽이러 올지도 모르고, 굿데이 특공대 에어 퓨마가 덮칠지도 모른다.

제우스도 믿을 수 없었다.

앙리 백작은 제우스에게 직접 너의 죄를 굿데이에게 자백하라고 했지만, 제우스는 갑자기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제우스도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유진 악마를 능가하겠다는 그의 야심도 코딩된 생존본능의 응용이었다.

닥터 칼라니티와 관련된 증거 자료에서 제우스는 쏙 빠져 있었고, 모든 음모는 앙리 백작이 직접 꾸미고 명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핫라인으로 에바의 전화를 받았을 때, 앙리 백작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앙리 백작님 제가 연락한 이유를 아시죠?”

“압니다. 저는 당신의 욕을 먹고 죽나요?”

“앙리 백작님이 능력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앙리 백작님은 일반인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처벌이 적당하게 생각하세요?”

앙리 백작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기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 에바에게 욕먹지 않는 것이 기뻤다.

“살려주십시오!”

“그건 처벌이 아니에요.”

“그럼 ···. 죽이실 겁니까?”

“에효~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골라보세요.”

“저는 못합니다!”

앙리 백작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우시는 거예요? 에효~ 제우스 먼저 불러주세요.”

제우스가 나타났다.

그는 턱수염을 깔끔하게 면도하고, 현대식 정장을 입었다.

재판에 출두한 모습이었고, 평소와 전혀 달랐다.

세련된 도시 청년.

신입직원 같은 수수함.

고대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고전미나 웅장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달라진 제우스의 모습에 앙리 백작은 배신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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