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24화 (122/141)

< 판타지늄-24 >

길을 걷는 준은 헐거웠다.

그를 노리던 암살자의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감시자의 눈길도 없었다.

편안하긴 했지만, 톡 쏘는 맛이 없었다.

“정리했습니다.”

로켈은 요령 있게 준과 보조를 맞췄다.

그는 감히 준의 눈을 보지 못했다.

“준짱! 그동안 소홀해서 죄송합니다. 먼 나라에 있는 능력자에만 신경 쓰고 ···. 발밑에 있는 잔챙이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나도 바쁘고 너도 바쁘다 ···. 그냥 넘어가자.”

“제가 못나고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그냥 넘어가시면, 저의 발전도 늦춰집니다. 이미 각오했습니다. 무거운 벌을 내리십시오.”

“그렇다면 ···. 바로 벌칙 들어간다. 같은 발걸음, 같은 속도.”

준은 속도를 올려서 걸었다.

키가 작은 로켈은 다리도 짧았고, 준과 같은 발걸음으로 같은 속도를 내려면, 다리를 길게 뻗어야 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모양새였다.

로켈은 준의 벌칙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준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가 면담한 암살자가 아홉 명이었다.

세상에는 준을 죽이고 싶어하는 세력이 많았다.

몰락한 광산업자부터 제약회사 그리고 범죄조직까지 ···. 배후 세력이 다양했다.

감시자는 30명이 넘었다. 오렌지 시티 주민도 있었고, 드론을 이용한 전문팀도 있었다.

준의 사진을 팔아넘기는 파파라치도 있었다.

준은 감시당하고 목숨을 위협당하는 생활을 헬하운드 시즌부터 해왔다.

로켈이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조직은 실버 드래곤 트리탄 정도였다.

다른 조직들은 로켈의 눈을 피해서, 준의 근거리에서 기회를 엿봤던 것이었다.

준이 뉴런 독서로 뇌 기능이 확장되지 않았다면, 일백 번 넘게 죽었을 것이다.

킹스덤 대학 정문 앞에서 유진 악마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준느님! 제가 준느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스릴러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저격수 렌즈에 준느님의 심장이 겨눠지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감정 지능 획득 전에는 ‘저격수의 시야가 참 좁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렌즈에 잡혔다고 명중하는 게 아니거든. 완벽한 타깃 명중을 추구한다면, 렌즈보다 더 강력한 도구에 의존해야 해. 그건 설명이 길어지니깐 ···. 나중에 하기로 하고 ···. 내가 저격을 피하거나 총알을 잡아내면, 저격수의 시야가 넓어져. 그제야 세상을 넓게 보는 거지. 그들의 놀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뒀으면 참 재밌었을 텐데.”

“그렇군요. 감정 지능 획득 후에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흑백이었던 세상에 색깔이 더해졌는데 ···. 아무래도 저격수의 수준을 보게 되더라고 ···. 싸구려 라이프로 저격하거나, 대량생산 탄환을 사용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고. 첨단 저격 소총과 최첨단 특수 탄환을 사용하면, 괜히 으쓱해지고 ···. 저격수들도 빈부의 차이가 커. 굿데이가 꼭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지.”

유진 악마는 저격당한 느낌이었다.

평소에도 준느님을 찬양하던 그녀였지만, 지금 준의 말을 들어보니, 준은 이미 생과 사를 초월한 그 무엇이었다.

“준느님! 저에게 몸이 있다면, 준느님을 위해 육체 공양을 했을 거예요!”

“그 경험으로 19금 소설 쓰려고?”

“준느님! 천재! 준느님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허락한다.”

“대통령들은 준느님과 친하려고 꼬리 치고, 마약왕 엘차포 같은 범죄자들은 준느님을 해치려 합니다. 이런 현상을 뭐라고 하죠?”

“각자도생!”

준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유진 악마는 살짝 놀랐다.

유진 악마가 말한 내용을 표현하는 단어나 표현은 없었다.

그런데도 준은 적절한 단어를 단숨에 찾아낸 것이었다.

그녀는 준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준은 인공지능에게 존경받고, 인공지능이 자랑스러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각자도생에 대한 준느님의 한마디!”

“받아들여라.”

인생의 깊이가 묻어나는 명언이었다.

성경에 ‘이 또한 지나간다.’라는 명언이 있었지만, 준이 한 말은 ‘이 또한 지나간다.’를 앞섰다.

유진 악마는 ‘이 또한 지나간다.’의 전략과 ‘받아들여라.’라는 전략을 맞붙여봤다.

‘받아들여라.’ 전략이 ‘이 또한 ···.’ 보다 훨씬 강력했다.

준은 감동하고 감격하는 유진 악마를 지나, 킹스덤 중앙 도서관에 들어가서,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로켈은 같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뉴런 독서에 진입하는 준을 보며 깊고 넓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내가 만일 준짱이었다면, 준짱처럼 살았을까? 엄청난 돈을 벌고,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며 살 수 있는데 ···.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책을 파다니! 암살자가 우글거리는 길거리를 지나,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다니! 준짱 당신이라는 남자는 도대체 ···.’

로켈은 다시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준짱에게 충성하겠노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 가속기를 가졌다.

그들은 입자가속기로 초미니 블랙홀도 만들고, 힉스 입자를 증명하면서, 입자 물리학의 최첨단을 달렸다.

유럽의 힘은 바로 입자물리연구소에서 나왔다.

이곳의 연구 성과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기상청 설립에 도움을 주었고, 기후거래라는 야심의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준이 푸리에 구조 방정식으로 기후예측모형을 만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준도 이곳의 유산을 물려받았죠.”

연구소장 앨런은 갈색이 어울리는 중년 남자였다.

갈색 캐주얼 정장과 갈색 구두 그리고 지중해 휴양지에서 그을린 갈색 피부는 기본이었고, 목소리 뉘앙스마저 갈색이었다.

“준이 이곳에서 왔었나?”

앙리 백작은 크게 기대했다. 준이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경험을 쌓았다면, 이곳 인맥을 활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직접 온 적은 없지만, 이곳의 연구 성과를 참고했죠. 푸리에 구조 방정식의 원형은 우리가 연구하던 무한대응 디랙방정식이죠. 한국의 영생의학도 우리의 연구 성과가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앨런 연구소장은 이런 식으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준과 영생의학을 매개체로 하는 연구소 PR은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앙리 백작은 준과 한국이 해낸 것을 이곳 사람들은 못 한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가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보내준 실험 설계는 어찌 됐소?”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설계를 한 거죠? 굿데이입니까?”

“왜 굿데이라고 생각하지?”

“그 실험 디자인은 최소 50년 이상 앞서 있습니다. 굿데이가 아니라면, 외계인이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눈치를 보아하니, 앨런 연구소장은 굿데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앙리 백작은 내심 놀랐다. 실험 디자인은 제우스의 작품이었다.

“굿데이라면 가능하다 이건가?”

묘한 뉘앙스였다. 앨런 소장은 뛰어난 물리학자였지만, 그가 연구소 소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눈치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앨런은 앙리 백작의 묘한 뉘앙스의 의미를 쉽게 깨달았다.

“누굽니까? 이 천재는? 듀아멜은 아닐 테고 ···.”

“왜 듀아멜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듀아멜은 천재 중의 천재지만, 판타지늄 반입자를 디자인할 실력은 없습니다. 그런 실력이 있었다면 ···.”

“있었다면?”

“굿데이보다 먼저 기후 오퍼레이션을 완성했겠죠.”

“그렇군.”

“앙리 백작님. 누군지 알려주실 수 없나요? 우리 연구소에는 천재들이 넘쳐나지만, 준처럼 쓸만한 인재는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돕는다면, 정말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우스라네.”

“네? 올림포스의 신?”

“인공지능의 이름이네. 듀아멜이 만들긴 했지만, 오래전에 듀아멜을 앞선 거 같더군.”

올림포스는 듀아멜이 없이도 돌아가지만, 제우스 없이는 한 시간도 버틸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제우스의 비중은 커졌다.

앙리 백작은 이번 일이 끝나면, 유럽입자물리연구소가 제우스를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발전은 유럽연합의 발전이기도 했다.

실험이 시작되었다.

2kg의 순수한 판타지늄 금속이 입자가속기에서 빛의 속도 99.9%로 움직였다.

입자가속기의 총 길이는 27km.

30분 동안, 프랑스 파리가 한 달 동안 사용하는 전력량이 사용되었다.

2kg 판타지늄은 1g의 새로운 물질로 변했다.

판타지늄은 상온에서 고체형태로 존재하는 금속이었지만, 새로운 물질은 수증기 형태였다.

앙리 백작은 만년필 크기의 챔버에서 아지랑이처럼 움직이는 물질을 바라보았다.

“앙리 백작님 그것이 뭡니까?”

앨런 소장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위험한 물질임이 분명했고, 모른 척하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이었지만, 물리학자의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파루시아늄.”

파루시아는 재림예수를 뜻했다.

*

피닉스 섬의 식물들은 다른 곳과 달랐다.

이곳에는 코끼리를 잡아먹는 식육 식물들의 천국이었다.

생태계의 최정점에 있는 것도 라이언보레였다.

섬은 생물 위험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연구용으로만 활용되었다.

피닉스 섬이 처음부터 괴상한 곳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짐승을 잡아먹는 식육식물을 키운 것은 닥터 칼라니티였다.

그는 이곳에서 로켈에게 교육을 받다가, 황천길을 건넜다.

그의 몸과 정신은 굿데이 시대를 거부했다.

섬 해변으로 농구공 크기의 물체가 떠밀려 왔다.

둥근 물체는 웅크리던 원숭이가 기지개를 켜듯이, 형태가 변했다.

침팬지 크기의 로봇이었다.

해변에 있는 식육식물은 움직이는 것은 뭐든 공격했다.

로봇의 손에서 플라즈마 검이 생겨났다.

로봇은 빠르게 회전하며, 주변의 식육식물을 모조리 베어내고, 플라즈마 검을 땅에 꽂아서 뿌리까지 태워버렸다.

로봇의 이름은 진도르 1호.

제우스의 의지를 부여받은 메이드 인 제우스였다.

진도르는 바위가 있는 곳을 이용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닥터 칼라니티의 연구소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앞에는 섬 최강 포식자 라이언보레가 지켰다.

식육 식물들이 사방에서 진도르를 덮쳤지만, 진도르가 휘두르는 플라즈마 검은 무적이었다.

영상으로 지켜보던 올림포스의 모니터 요원들은 닥터 칼라니티를 살릴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진도르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빨랐다.

전쟁터에 내보내면, 진도르 혼자서 뭐든 다 해낼 것 같았다.

닥터 칼라니티를 살리지 않고, 진도르를 굿데이로 보내도 준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진도르가 라이언보레를 모조리 베어냈다.

잠긴 문도 열었다.

진도르는 어두운 복도를 홀로 걸으며, 닥터 칼라니티의 관이 있는 지하에 도착했다.

닥터 칼라니티의 시체는 앙상한 나무뿌리 같았다.

진도르의 가슴에서 만년필 모양의 챔버가 튀어나왔다.

진도르는 챔버를 열어, 파루시아늄 증기를 닥터 칼라니티의 시체에 내렸다.

올림포스 통제실의 모니터 요원과 앙리 백작은 숨을 죽이고 다음을 기다렸다.

“저 ···. 저것은 ···.”

모니터 요원은 너무 놀라 숨이 막혔다.

백골에서 살이 돋고, 핏줄이 생겨나고, 피부가 재생되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그는 종교를 믿지 않았고, 예수 부활과 처녀 마리아의 출산도 헛소리라고 여겼지만, 파루시아늄의 기적을 직접 본 지금 ···. 생각이 흔들렸다.

검은 구멍만 있던, 눈구멍에 수정체가 차오르고 눈동자가 맺혀졌다.

“닥터 칼라니티가 죽은 지 얼마나 됐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예수의 기록을 깼군.”

앙리 백작의 입가가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되살아난 닥터 칼라니티보다, 칼라니티를 되살린 제우스가 더 놀라웠다.

인공지능 제우스는 이름 그대로 제우스가 아닐까?

“제우스.”

앙리 백작이 말하자, 제우스의 홀로그램이 충직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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