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늄-20 >
준이 없었다면, 듀아멜은 무난하게 그의 뜻을 이뤘을 것이다.
준이 없는 세상은 에어 드래곤 같은 듀아멜 생명체가 가득한 세상이다.
준은 듀아멜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면 된다.
듀아멜 공간은 ‘무한 진화’라는 수학적 특성을 가졌고, 그곳에서만 통하는 함수와 방정식이 있었다.
그곳은 현대 수학자들의 놀이터였지만 ···. 상상하며 노는 것과 듀아멜 공간을 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현실은 위험했지만, 듀아멜 공간은 더 위험했다.
그 위험을 듀아멜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열려고 지랄하는 것은 ···.
“커넥톰을 가졌군요.”
준은 간단하게 듀아멜의 비밀을 들춰냈다.
커넥톰은 연결체 함수였다.
듀아멜 공간은 강력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곳이었고, 연결체 함수를 다루면 모든 현상을 맘대로 부릴 수 있었다.
수학자들은 완벽한 연결체 함수를 커넥톰이라 불렀다.
커넥톰은 듀아멜 공간의 성배였다.
듀아멜은 커넥톰으로 바람무늬 1호, 에어 드래곤을 정확하게 쿠바로 보낸 것이다!
여유만만했던 듀아멜의 얼굴색이 변했다.
입고 있는 팬티 색깔을 들킨 느낌이었다.
“준!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어.”
“조용!”
준의 한마디에 듀아멜의 몸이 마비되었다.
그는 듀아멜 공간을 찾아내고 경험했고,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얻었다.
그런데 말 한마디로 몸이 굳다니!
그는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떨어트렸다.
얇은 유리잔은 ‘쨍’ 소리를 내며 깨졌다.
깨진 유리조각은 달그락거리다가 자석처럼 저절로 붙었다.
굿데이의 형상기억 유리 자석이었다.
“듀아멜 공간을 열고 괴물을 불러들여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건가요?”
“세계 정복 따윈 관심 없어. 이런 세상 몇천 개를 준다 해도, 유치해!”
듀아멜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말은 가능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흥미가 없었다. 오랜 은둔생활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의 관심은 ···.
“커넥톰으로 공간을 지배하려는 거군요.”
시공간의 지배자 ···. 완벽한 연결체 함수는 몬스터만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의 물리 현상까지 조율 가능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창조까지 맘대로 할 수 있다.
커넥톰을 가진 듀아멜은 신이 될 수 있다!
준은 모든 조각을 완성했다.
준의 차가운 눈빛을 본 듀아멜은 숨을 삼켰다.
‘아! 준만 없었더라면 나는 그 어떤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가 되었을 텐데!’
“준. 다시 한 번 제안한다. 나와 손을 잡자. 너에게 듀아멜 공간 일부를 떼주겠다.
그곳에서는 너는 뭐든 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
준에게 구미 당기는 제안이 아니었다.
감정 지능으로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 준이었다.
세상은 아름답지도 흉하지도 않지만, 의미가 있다.
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래를 바라보았다.
“듀아멜 공간은 열려요.”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냐!”
“당신이 해냈다면, 다른 누군가도 해낼 겁니다. 듀아멜 공간 오픈은 시간문제죠.”
“그래서 서둘러야 해! 다른 자가 커넥톰을 손에 넣기 전에 우리가 ···.”
“우리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과 거래하려고 만난 게 아닙니다. 커넥톰은 당신이 만들었으니, 당신 겁니다. 탐내지 않습니다. 듀아멜 공간을 여는 것도 당신 자유죠. 그 자유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면, 망하겠지만 ···. 어쩔 수 없죠. 제가 따지고 싶은 건, 기후 오퍼레이션에 손댄 겁니다. 올림포스는 저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모든 자료를 공개하겠다고요. 오퍼 위성에 사용되는 스티커 하나하나 모두 공개되도록 했죠. 그런데 당신은 몇 가지를 숨겼더군요. 오퍼 위성에 고농도 판타지늄 실린더를 장착한 것도 감췄고, 기후 오퍼레이션 프로그램에도 손댔어요. 제우스라는 인공지능도 공개하지 않았죠. 굿데이가 올림포스에 요구했던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정보 공개 ···.”
“정신 차려! 듀아멜 공간이라고! 올림포스 따위는 듀아멜 공간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아!”
“푸리에 구조 방정식, 구조 자기장 스케일, 기후 오퍼레이션을 개발하면서, 듀아멜 공간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알았다는 거냐?”
“내일 모든 자료를 공개할 겁니다. 내일이 되면, 당신이 듀아멜 공간을 열고 바람무늬 1호를 키운 사실과 커넥톰을 가진 것도 알겠죠.”
“과연 그럴까?”
듀아멜은 사악하게 웃었다.
마비되었던 몸이 풀려 있었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네놈이 똑똑한 건 알겠어! 하지만 이건 몰랐을 거다! 나는 기후 오퍼레이션 없이도 듀아멜 공간을 열 수 있어! 사이즈가 작은 것만 소환할 수 있지만 ···. 널 죽이고 이곳 모두를 죽인 다음, 모든 것을 굿데이 짓으로 만들어주지!”
듀아멜의 두 눈 사이에서 촉수 괴물이 튀어나왔다.
촉수 괴물은 듀아멜의 의지에 따라 준의 목을 노렸다.
사르르.
기세 좋게 뻗대던 촉수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듀아멜은 양손 검지를 이마에 댄 후, 준에게로 뻗었다.
그의 이마에서 온갖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열린 지옥문에서 아귀들이 뿜어진 듯했다.
준은 별다른 액션도 하지 않았지만, 괴성을 지르며 덤벼드는 괴물들은 ···. 사르르 물거품이 되었다.
듀아멜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어제 굿데이 직원회의가 있었어요.”
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예전에는 저 혼자 솔루션을 개발했는데, 요즘은 외로움을 타는지 ···. 혼자 하면 심심하더라고요. 직원회의 내용은 ‘듀아멜 공간이 열린다면, 굿데이는 뭘 해야 하나?’라는 주제였죠. 당신 이름이 많이 나왔는데, 발음이 캐러멜과 헷갈린다고, 개자식으로 고쳐 부르기로 했죠. 덕분에 회의가 아주 재밌어졌어요.”
듀아멜은 홀린 표정이었다.
그가 불러낸 ‘듀아멜 족’은 총이나 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최강 몬스터였다.
준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최강 몬스터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너 ···. 누구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괴물을 불러내고 그러셨던 거예요?”
“그래 ···. 넌 분명 준이야. 인간이라고 ···. 그런데 어떻게 ···.”
“설명하고 있었잖아요. 직원회의에서 여러 의견이 나왔어요. 수잔이 아이디어를 냈죠. 키가 좀 작은 여자인데 ···. 아부가 쩔죠! 전공은 생물학이고요. 항원항체 반응으로 듀아멜 생명체를 중화하자고 하더군요. 요즘은 돈 쌓아 둘 곳도 없어서, 돈 버는 건 좀 지겹긴 하지만 ···. 듀아멜 항체를 만들어서 공급하자는 거죠.”
“그 항체라는 게 ···.”
“네. 듀아멜 공간 생명체를 물거품으로 만들죠. 당신은 수학자니깐, 항원항체 반응보다는 역함수 개념으로 이해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 절 죽이고, 이곳에 있는 사람도 죽이고,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요 ···.”
“내가?”
듀아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이곳에 처음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기억 안 나셔도 걱정 마세요. 다 녹음했어요.”
준은 상냥했지만, 듀아멜의 걱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갑자기 준 옆에서 여인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났다.
유진 악마였다.
“준느님 상공 5킬로미터에서 거대 괴수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듀아멜을 한번 째려보고 말을 이었다. “개자식의 떨거지 같습니다.”
듀아멜에겐 이판사판이었다.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왔다고 생각하나! 네놈들이 만든 항체가 빅사이즈에도 통할 거 같아!”
“안 통해요.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반응속도 때문에 사이즈가 커지면 시간이 걸리죠.”
준은 담담했다. 수잔이 제안한 듀아멜 항체는 3미터 이하의 괴물에게 효과적이었지만, 3미터 이상의 괴물체에는 느리게 작용했다.
에어 스크린에 거대 괴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날개 달린 코뿔소였다.
크기 3킬로미터.
수백킬로미터가 넘는 에어 드래곤에 비하면 작았지만, 굿데이 본부를 초토화할 수 있는 크기였다.
“충돌까지 10초 남았습니다.”
유진 악마의 말에 듀아멜은 미소 지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를 따르겠다면, 저 괴물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그렇지 않으면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끝내주겠다.”
“잠깐만요.” 준은 손을 펴서 듀아멜을 진정시키고 유진 악마에게 명했다. “굿데이 게이트를 열어라.”
듀아멜은 에어스크린으로 분명히 보았다.
괴수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어디로 간 거지?”
“호리병 공간이죠. 공간 솔루션 서비스인데, 좌표계산이 까다롭지만, 항체보다 효과가 좋아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하셨죠? 시체도 찾지 못할 정도로?”
“내가?”
듀아멜은 턱을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걱정 마세요. 녹음되고 있으니깐.”
“이제 날 어쩔 셈이냐!”
“로켈!”
준이 명하자, 서재 구석 그림자 속에 있던 로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숨기는 그의 특기였는데, 최근 블랙 판타지늄 기술을 익히면서 예전보다 정교해졌다.
로켈은 소매에 묻은 그림자를 요령껏 털며 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준짱.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교육해라.”
“네.”
마법사처럼 괴물들을 소환하는 듀아멜이었다.
능력자 듀아멜은 시온의 좋은 관심대상이었다.
준은 시온을 인수하면서, 능력자 특별 법원과 교육기관을 시작했다.
기술은 날로 진보하고, 듀아멜 같은 능력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날 것이었다.
관리가 필요했다.
“감히! 나를 교육하겠다고! 나에게 이럴 수 없어! 그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가 없어! 아무도 나의 자유를 ···.”
퍽!
듀아멜은 로켈의 왼손 펀치를 배에 맞고, 꼬꾸라졌다.
“교육기간 동안 너의 자유는 나의 것이다.”
듀아멜은 로켈에게 끌려나갔다.
로켈은 듀아멜의 수준을 확인했다.
“너에게 빵이 있는데, 옆에 배고픈 사람이 있다. 너는 어떻게 할래?”
“모른 척한다.”
“너는 배고픈데, 다른 사람에게 빵이 있다. 어떻게 할래?”
“아는 척한다.”
“음 ···. 전형적인 이중잣대군. 보통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는데 ···.
능력자가 그런 마인드로 살면 곤란하지.”
로켈 뒤로 다섯 명이 나타났다. 로켈에게 교육받은 오색 선지자였다.
“로켈님 저희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조심해라. 듀아멜 공간에서 괴수들을 불러내는 능력이 있다.”
로켈은 선지자들에게 듀아멜 항체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듀아멜이 불러내는 사이즈는 항체로 충분했다.
상공에서 불러냈던 ‘날개 달린 코뿔소’ 괴물은 제우스의 작품이었다.
3미터 이상의 듀아멜 괴물을 불러내려면, 기후오퍼레이션 같은 과정이 필요했다.
“로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배운 대로 행하겠습니다. 자 선지자 여러분들! 시작하죠.”
청색 선지자가 말하자, 나머지 선지자들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길 잃은 어린양을 보는 우아한 시선으로 듀아멜을 내려다보았다.
듀아멜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선지자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듀아멜을 팼다.
능력자의 나쁜 기운을 빼내는 디톡스 과정이었다.
올림포스 앙리 백작은 머리가 심대하게 아팠다.
그도 듀아멜이 올림포스 일을 하는 게 이상했었다.
듀아멜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건 느꼈지만, 세상을 멸망시킬 괴수 소환이라니!
굿데이가 공개한 자료는 너무나 확실해서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듀아멜은 오퍼 위성에 고농도 판타지늄 실린더를 추가했고, 인공지능 제우스도 비밀로 했다.
이유가 어쨌든, 듀아멜을 고용한 것은 올림포스였다.
국제법상 올림포스는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피해를 배상해야 했다.
탄소달러를 마음껏 발행하는 올림포스에게 돈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신뢰도가 추락하는 건 큰 문제였다.
에어 드래곤은 기후 독립 오퍼레이션을 겨냥한 조작사건이었다.
국제 여론은 사나웠다.
“듀아멜은 어딨나!”
앙리 백작이 님프 비서에게 소리쳤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상태가 ···.”
님프의 표정이 묘했다. 너무나 오묘해서 해석 불가능했다.
듀아멜의 겉모습은 멀쩡했다.
“준 앞에서 괴물들을 소환하는 영상이 공개됐네! 자네가 무슨 마법사야! 하늘에서 굿데이를 공격하려던 괴수도 확인됐어! 자네가 한 말, 행동 ···. 모든 것이 알려졌네! 감히 올림포스를 이용해서 ···.”
“죄송합니다.”
듀아멜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앙리 백작은 갑작스러운 듀아멜의 행동에 겁이 났다.
그가 아는 듀아멜은 죽을지언정, 잘못을 인정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자네 ···. 굿데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나쁜 놈입니다.”
듀아멜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