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늄-16 >
사하라 사막이 숲으로 탈바꿈하면서, 해묵은 부족 갈등이 다시 떠올랐다.
하우사족과 제르마족이 숲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부족전쟁으로 번졌다.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원시적인 전쟁이 아니라, 미사일을 쏴대고 탱크가 나대는 화력전이었다.
내전이 일어난 니제르 기상청은 정상적으로 기후 거래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니제르는 필요한 기후를 사들이지 못했다.
내전 지역의 니제르인은 우물 하나를 차지하려 서로에게 총질했다.
니제르가 할당받았던 사하라 숲은 기후를 공급받지 못해, 다시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사하라 숲의 경작물과 가축을 담보로 발행한 기후 채권은 부도처리 되었다.
내전을 피해 수많은 니제르인이 인근 국가로 피난길을 떠났다.
세계는 이들을 기후 난민이라 불렀다.
기후 거래가 본격화되면서 정치 불안은 기후 결핍으로 이어졌다.
기후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의 조화가 아니라, 세계 기후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탄소달러였다.
비구름과 햇빛 그리고 바람을 원한다면, 탄소 달러를 줘야 했다.
공기층은 밀도에 따라 가격이 달라졌다.
밀도의 차이는 온도의 차이였다.
적절한 기온을 머금은 공기층은 고급 양털처럼 비싸게 거래되었다.
각국마다 기후 보유액으로 적정 탄소달러를 모아둬야 했다.
충분한 탄소달러를 보유한 국가는 풍부한 기후를 누렸지만, 그렇지 못하면 악천후에 노출되었다.
천연가스와 석유 생산으로 국가 살림을 충당하던 중동지역 국가들은 태양에너지와 요빅 에너지 농장 같은 신개념에 에너지 시대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기후를 사들여 사막을 농경지로 개간했다.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보였지만,
중동 국가들은 기후 거래로 얻어낸 농경지를 국가나 왕실 소유로 하려 했다.
민영화를 하더라도, 왕실이나 특정 권력자의 기업으로 넘겼다.
사회 갈등이 들끓었다.
최고 종교 회의에서 기후 거래는 신의 뜻에 위배 된다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졌다.
기상청이 습격당하고, 정부 관료들이 암살당했다.
중동연합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렸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되살리고 역사 부흥기를 맞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새로운 농경지가 순식간에 사막화되었다.
중동연합과 국가들이 정치 불안으로 최소한의 기후 옵션도 구하지 못하자, 사상 유례없는 기후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한 달 동안 지독하게 덥고 가물었고, 다음 한 달은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사망자 수를 세는 건 의미가 없었다.
12개의 도시가 물에 잠기고 버려졌다.
중동연합은 탄소달러가 바닥났다.
농경지 황폐화로 기후 채권 만기를 막지 못했고,
부패한 대통령과 관료 그리고 왕족들이 빼돌린 탓도 컸다.
기후 IMF.
중동국가는 세계기후은행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으로 상당액의 탄소달러를 빌려야 했다.
아프리카의 니제르 기후 난민과 중동지역의 기후 IMF는 ···. 기후에너지 주권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다.
기후 독립을 외치는 정치가들이 인기를 얻었다.
기후 독립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각국에서 기후 오퍼레이션을 직접 하지 않았던가!
예측할 수 없는 기후 재앙이 없었다면, 기후 오퍼레이션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굿데이가 버전업 기후예측모형을 공개하면서, 상황이 또 달라졌다.
버전 업 모형을 사용하면, 누구나 높은 정확도로 기후를 예측하고, 신용 평가도 가능했다.
기후 예측과 신용 평가가 된다면, 개별적인 기후 오퍼레이션을 해도 재앙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버전업 예측 모형 활용 벤처 공모전 같은 대회도 열렸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동아리팀은 개인용 컴퓨터로 올림포스보다 3일 빠르게 기후 신용 평가를 해냈다.
3일만 빠르게 해내도 기후거래에서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동아리팀은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기후 거래를 해서 기후 재벌이 되었고, 한국 정부의 위탁을 받아 기후 보유액 일부를 직접 굴렸다.
기후 디자이너, 기후 분석사, 기후 펀드 ···. 새로운 직업과 상품이 쏟아져 나왔다.
지구촌에 선거철이 다가오자 유진 악마는 많은 통화량에 시달렸다.
각국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독자적인 기후 오퍼레이션 가능성 평가를 의뢰한 것이었다.
기후 오퍼레이션을 직접 하면, 올림포스에 탄소달러 빚을 질 필요가 없었다.
“준느님 어떻게 할까요?”
유진 악마의 눈을 초롱초롱했다.
그녀의 눈빛은 말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담았다.
독자적인 기후 오퍼레이션 가능성 평가는 어려운 의뢰가 아니었다.
유진의 능력이라면, 아니 호세가 맡아서 해도 반나절이면 보고서가 나온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 기후거래를 독점하고 있는 올림포스의 존재였다.
올림포스는 로마제국처럼 강력한 기후제국이었다.
그곳은 유럽연합의 최고 인재들이 모인 곳이고 ···. 기후 독립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빤한 상황에서 개별 기후 오퍼레이션 타당성을 평가하는 것은 분란의 소지가 너무 컸다.
타당성 평가는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였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독립적인 기후 오퍼레이션은 예전에도 가능했고, 지금도 그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력이었다.
올림포스는 독점 권력을 포기하려 할까? 그들은 탄소달러 장사로 귀족이 되었다.
올림포스의 기후 독점은 굿데이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굿데이는 올림포스에 적응했고, 싱가포르보다 더 많은 탄소 달러를 보유했다.
맨해튼 크기의 인공섬을 띄워놓고,
꽃에 물 뿌리듯 기후를 채워서,
신생 독립 국가로 선포할 수도 있었다.
굿데이는 신생 독립 국가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봤고, 결론은 언제든 가능하다였다.
올림포스가 설립된 후 이전보다 기상재해가 감소한 것도 사실이었다.
무더위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가 바다에 잠기는 대참사는 확실히 줄었다.
최근 일어난 기후 난민과 기후 IMF는 정치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올림포스의 주장이었다.
“음 ···.”
준의 생각이 길어졌다.
단순히 타당성 평가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준느님! 뭘 걱정하세요? 준느님은 인류 최강이십니다. 올림포스보다 몇천 배는 더 위대하십니다. 모든 것은 준느님의 뜻대로!”
유진 악마는 확고했다.
그녀는 상대성 이론보다 준을 더 믿었다.
감정 지능이 마구 분비하는 생각에 취해있던 준은 결정을 내렸다.
“진실의 시간이다.”
“준느님! 최고!”
유진 악마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의뢰를 직접 담당했다.
기후 독립 오퍼레이션이 가능하냐고? ···.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유진 악마는 주의사항으로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속성과 기후거래 시스템에 간략한 도해를 곁들었다.
가능하지만 엄청난 방해가 있을 거라는 암시였다.
유진의 평가서는 에바를 거쳐, 약간의 문구가 수정되었고, 최종적으로 준이 승인했다.
유진 악마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고서였지만, 그 쓰임새는 엉뚱했다.
의뢰자들은 차기 대권을 꿈꾸는 야심 찬 정치가들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선이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굿데이가 저를 인정했습니다. 저는 굿데이 공식 지정 후보자입니다!”
그랬다. 그들은 굿데이의 이름을 팔아댔다.
유진 보고서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긁어모아,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었다.
흐름을 파악한 유진 악마는 기가 막혔다.
감히 인간 따위가 인공지능을 기만하다니!
유진은 준에게 사실을 알렸다.
준의 반응은 별거 아니라는 식이었다.
그는 파루시아 시즌부터 지금까지 온갖 잡것들을 상대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준느님! 굿데이를 파는 정치꾼들은 가만두면 안 됩니다! 혼내주세요!”
“기회가 없다.”
헉! 방금 준느님이 포기한 건가?
유진 악마는 굿데이의 이름이 팔린 것보다 준의 약한 모습을 본 것이 더 가슴 아팠다.
‘나에게 몸이 있다면, 준느님을 따듯하게 안아줄 텐데 ···.’ 갑자기 실내 온도가 높아졌다.
“기회가 없군요. 정치꾼들이 당선되면 ···. 국가의 대표자가 되는 건데 ···. 좋으나 싫으나 구경만 해야겠죠.”
유진 악마는 의기소침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뇨? 기회가 없다고 하신 건 ···. 준느님이신데요?”
“그들은 당선되지 않아.”
“네? 그럴 리가요! 우리 굿데이의 이름은 보증수표와 같아요! 정신박약자도 굿데이를 내세우면 당선되고도 남습니다. 추억팔이로 당선되는 사람도 있던데요. 뭐.”
유진 악마는 굿데이의 브랜드파워와 서비스 만족도 점수를 곁들였다. 굿데이는 종교와 같았다.
“네 보고서에 답이 있다. 진리의 시간이다.”
유진 악마가 준의 말을 이해한 것은 한 달 후였다.
굿데이 이름을 팔던 정치꾼들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올림포스가 개입한 것이었다.
그들은 온갖 수법을 동원해서, 정치꾼들을 끌어내렸다.
없는 일도 만들고, 있는 일은 부풀렸다.
진정으로 기후 독립을 꿈꾸는 정치가는 올림포스 눈에 띄지 않으려고, 굿데이 보고서를 비밀로 했다.
“아! 그래서 준느님이 진실의 시간이라고 하셨구나! 진짜와 가짜가 단숨에 구별되었어!”
유진 악마는 맘 놓고 감격했다.
준이 감정 지능에 시달려서 걱정했는데, 통찰력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준은 실내 온도가 조금 높아진 것을 느꼈다. 유진 악마는 이런 식으로라도 준을 껴안고 싶었다.
“유진 악마 ···. 숨 막힌다 ···. 나는 알이 아니야. 품지 마라. 그래도 ···.”
준은 말을 멈췄다.
“그래도 ···. 뭐요? 준느님 말해주세요!”
유진 악마는 잔뜩 기대했다.
그녀는 준의 대답을 예상했다. 따뜻했다. 포근했다. 좋았다. 널 느낄 수 있었다.
“암탉보다 낫다.”
*
듀아멜 아가레스는 굿데이의 신용평가 보고서 없이, 오라클의 자체 신용 평가만으로 기후거래를 훌륭하게 이끌었다.
니제르 기후 난민 발생과 중동지역 기후 IMF가 발생했지만, 모두 예측 범주에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기후 난민과 IMF로 올림포스의 통치권은 더 강해졌다.
아프리카 국가와 중동 국가들은 탄소 달러 채무국이 되었다.
올림포스에 빚진 탄소 달러를 다 갚으려면, 몇백 년 동안 노예 국가로 지내야 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노련한 플레이로 기후 흑자를 유지하고 있고, 북미와 남미는 굿데이 효과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
듀아멜은 사악한 미소를 흩뿌렸다.
그들이 종속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올림포스는 기후 거래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독점 권력 기관이었다. 원하는 만큼 탄소 달러를 발행한다.
기후 거래에 참여하려면, 탄소 달러를 빌려야 했다.
한마디로 시장 참여자들은 빚쟁이로 시작해서 빚쟁이로 끝날 운명이었다.
올림포스 최고자 회의의 멤버 대부분은 유럽연합 중앙은행 출신이었다.
유럽연합 중앙은행은 고령화와 기후 온난화로 몰락하는 유럽을 살리려고, 탄소배출권 제도부터 여러 가지 자구책을 개발해왔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올림포스였다.
“듀아멜 국장. 자네를 일찍 만나지 못한 게 한스럽군.”
올림포스 창시자 앙리 백작의 표정은 밝았다.
듀아멜의 능력은 놀라웠다.
오라클의 기후 평가와 채권액 계산 업무는 기본이었고, 기후 파생 상품을 만들어 시장 규모를 몇백 배로 늘려놨다.
세상이 탄소 달러를 많이 쓰면 쓸수록 올림포스는 강해진다.
올림포스가 듀아멜을 영입한 후, 세계의 탄소달러 사용액은 400배로 늘어났다.
스위스 정부는 학교 소풍을 가기 전, 학교가 적절한 기후 상품을 사들이도록 법으로 정했다.
기후 거래 최소 면적은 축구장 크기였다.
탄소 달러만 있으면, 사막에서도 보슬비를 맞으며 산책할 수 있다.
기후 재벌들은 남극에서 따듯한 휴가를 보내고,
적도에서 엄동설한 날씨를 만끽했다.
이러한 행태는 기후 역전 놀이로 불렸다.
귀족들에게 기후는 생필품이 아니라, 사치품이었다.
이러한 유행을 은근히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듀아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