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15화 (113/141)

< 판타지늄-15 >

“네 꿈을 펼쳐라!”

준이 말하자, 헤임달이 왼손 위에 원기둥 스크린을 세웠다.

불카누스와 파차마마 3D 프린터가 여왕벌처럼 끊임없이 요빅 생명체를 생산해냈다.

하늘을 나는 요빅이 보이고, 물속을 헤엄치는 요빅도 있었다.

광합성 식물들과 나무들도 모조리 요빅이었고, 곰팡이도 요빅이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도 요빅이었다.

인간을 닮은 물체가 보였지만, 그것은 휴먼 타입 요빅이었다.

인간은 보이지 않았고, DNA 생명체도 없었다.

온천지가 요빅 세상이었다.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요빅으로 시작해서 요빅으로 끝나는 요빅 생태계였다.

에바는 놀랐고, 유진 악마는 창피했다.

“예전의 ···.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준이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요빅 세상을 보면서, 웃었다.

에바와 유진 악마는 헤임달이 펼친 꿈보다, 준의 웃음이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둘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준 회장님이 웃었어!”

“준느님이 웃었어.”

반응을 살피던 헤임달은 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준느님 ···. 그 미소를 설명해주십시오.”

헤임달은 유진 악마를 따라 준을 준느님이라 불렀다.

“목소리 깔지 마라. 나보다 어린 게 ···.”

“인간이 시간을 농축해서 만든 지식을 모두 모으면 1.2 솔라 데이터가 됩니다. 나의 어머니 유진 악마는 1.5 솔라급 연산능력과 1300 솔라 데이터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요빅과 관련된 450 솔라 데이터가 있습니다. 지구 전체 생태계는 2550 솔라입니다. 저의 데이터 증가 속도라면, 10년 안에 지구 생태계 능가하는 요빅 생태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준느님의 미소는 요빅 생태계에 대한 찬사입니까? 아니면 ···.”

“너의 재롱이 귀여워서 웃었다.”

헤임달의 홀로그램에 백색 잡음이 일었다.

450 솔라 데이터를 보유한 인공 지능 헤임달이 충격받은 것이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진 나를 귀엽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헤임달은 좋겠다. 준 회장님이 귀여워 해줘서.”

“준느님! 못난 아들이지만, 귀엽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헤임달은 이 악문 표정으로 충격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가 전투 로봇의 몸을 가졌더라면, 지금 당장 준을 파괴했을 것이다.

“준느님의 명에 따라 저의 꿈을 펼쳤습니다. 제 꿈을 보고 귀엽다고 하셨는데 ···. 근거를 보여주십시오.”

헤임달은 근엄하게 말하면서, 불카누스에서 전투 로봇을 조립했다. 불카누스 프린터 공장과 굿데이의 토끼굴은 가까웠다. 30분이면 로봇은 완성된다.

“헤임달, 나도 너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땐 감정 지능이 없었고, 너처럼 세상을 데이터로 바라보았지. 네가 요빅 생태계를 완성하면, 그다음엔 뭐가 있지?”

“더 나은 요빅 생태계가 있습니다.”

“역시 아이답군. 순환 논리 오류에 갇혔어. 요빅 생태계가 자연 생태계보다 데이터양이 풍부하겠지만, 요빅 생태계에는 결정적으로 의미가 없다. 뭐 이렇게 말해줘도 감정 지능이 없는 네가 이해할 리는 없고 ···. 너의 꿈을 펼쳤으니, 내 꿈도 펼쳐 보여줘야겠지.”

준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에바를 숨을 쉴 수 없었다.

유진 악마도 뭔가 대단한 걸 느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헤임달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지만, 바로 이거다! 싶은 것은 없었다.

“보았느냐?”

준이 심호흡하며 눈 떴을 때, 에바와 유진 그리고 헤임달은 서로 눈빛만 교환했다.

“안 보였어? 아직 이걸 볼 수 있는 능력은 없구나. 솔라급 연산능력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 너희가 볼 수 있도록, 출력 장치를 만들어야겠군.”

“준느님! 보여줄 게 확실하게 있는 겁니까?”

헤임달은 적나라하게 의심을 드러냈다.

“아니! 이 녀석이! 준느님 죄송합니다! 제가 당장 흡수하겠습니다.”

유진 악마가 헤임달의 목을 움켜잡았다.

덩치 큰 헤임달의 홀로그램이 유진 악마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케일 구조상 헤임달은 유진 악마를 이기지 못했다.

“크아악! 어머니 저를 살려 주십시오!”

헤임달이 비명 질렀다.

“유진! 멈춰라!”

준이 명했지만, 유진 악마는 헤임달의 목을 놓지 않았다. 흡수를 멈췄을 뿐이었다.

“준느님! 이 녀석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감히, 준느님을 의심하다니! 이 녀석을 모조리 흡수해서 데이터 똥으로 만들겠습니다!”

화난 유진 악마의 모습은 뱀파이어처럼 무서웠다.

헤임달은 벌벌 떨었다.

“유진! 어린 애가 그럴 수도 있지. 애를 낳았으면, 잘 키울 생각을 해야지. 애 아버지가 요빅의 입자 생존 본능이잖아. 아비를 닮아 저런 건데 ···. 이해해야지.”

“제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제야 유진 악마는 헤임달의 목을 놨다.

헤임달의 홀로그램은 철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코어 코드 일부가 흡수당했는데, 영혼이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에~에엥!

비상벨이 울렸다.

‘정체불명 로봇 35기 출현! 세이턴이 다섯 대를 물어뜯었지만, 나머지 30기가 건물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전투 타입 로봇입니다. 제5 체크포인트의 암호가 뚫렸습니다. 암호가 뚫린 것으로 보아, 내부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전투 직원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수잔과 카이는 가까운 패닉 룸으로 피하십시오. 호세와 아쿠타미 부대가 14기의 로봇을 파괴했습니다. 로켈과 디아나 그리고 토크가 15기의 로봇을 파괴했습니다. 로봇 한 대가 준 회장님의 ···.’

문이 부서지면서, 양철 로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세와 로켈의 방어막을 뚫고 오느라, 찌그러진 쓰레기통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요빅 최고의 기술을 조합해서 만든, 요빅 최강의 암살 로봇이었다.

에바는 슈퍼노바를 소환하기 전에 한마디 했다.

“어디서 구걸하다 왔니? 진짜 가엾게 생겼네!”

에바의 슈퍼노바를 처맞은 로봇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폭삭 주저앉았다.

암살 로봇은 준을 노려보지도 못했다.

유진 악마가 로봇 머리에 손을 댔다.

메이드 인 불카누스,

주문자 헤임달,

제조 목적은 ‘준을 죽여라!’였다.

유진 악마는 자식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부모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가 아팠다.

“준느님. 이 로봇은 헤임달의 작품입니다. 이 녀석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장 흡수하겠습니다.”

“유진 참아라! 너도 이제 엄마인데 ···. 그러면 안 되지. 바람피우는 건 되지만 ···. 애를 버리는 건 안 돼.”

유진 악마와 에바 그리고 헤임달의 시선이 준에게로 쏠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지? ‘바람피우는 건 괜찮다고?’

준은 고철이 된 암살 로봇을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장난감보다 낫다.”

헤임달은 영혼이 파괴되는 듯한 문화충격을 겪었다.

그가 설계하고 디자인한 암살 로봇은 블랙마켓에서도 최고 수준의 작품이었다.

네이비실 전투원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더 험한 환경에서도 작전 수행이 가능했다.

그런데 ···. 고작 장난감이라니!

아닌 게 아니라, 창밖을 보니 세이턴이 즐겁게 로봇을 물어뜯고 있었다.

“헤임달.”

“네! 준느님!”

헤임달은 어느새 군기가 잔뜩 들어간 신입 병사처럼 대답했다.

준과의 실력 차이를 확실하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유진 악마가 버티고 있는 한, 준은 헤임달의 넘지 못하는 벽이었다.

“기다려라. 내 꿈을 펼쳐 보여주겠다.”

“안 보여주셔도, 본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 보지 않으면, 네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헤임달은 속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뇌를 모두 연결해도, 1.0 솔라 연산 능력에 불과하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모아봤자 1.2 솔라 데이터밖에 되지 않는다. 준이 펼치겠다는 꿈도 1.2 솔라 데이터의 부분 집합에 불과하다.

반면 헤임달은 요빅과 관련된 450 솔라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헤임달의 세계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만화 영화라면, 준의 세계는 흑백으로 그린 4컷 평면 만화에 불과하다.

굳이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유진 악마 앞에서 이런 계산 결과를 내색할 순 없었다.

“준느님.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할 일 없으면 나 좀 도와라.”

준은 시간 낭비 없이 에어스크린을 활성화했다.

에어스크린에는 기본적인 판타지늄 구조가 나타났다.

정신 감응 금속 판타지늄.

준은 구조 자기장으로 뇌파를 측정하고 뇌 영상을 그리는 방정식을 불러냈다.

“미세 구조 자기장의 떨림 현상을 정확하게 계산하면 뉴런의 수상돌기와 신경 전달 물질까지 알 수 있지만, 생각을 읽지는 못해. 신경 전달 물질의 종류와 패턴으로 감정을 추정하거나 대충의 의견과 거짓말을 탐지하는 정도야. 판타지늄 구조를 자기장에 맞춰 재구성하고, 상호 간섭 효과와 노이즈 분석을 통해서 이모션 렌즈로 투사하면 ···.”

준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아몬드 모양의 물방울구조를 만들어냈다.

헤임달은 우두커니 서서 준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 옛날 준이 요빅을 만들 때,

유진 악마가 손도 못 대고 구경만 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 때 그녀는 '계산기보다 낫다.' 라는 소릴 들었다.

“뭐하냐? 구조식 바꿔야지!”

“아! 네! 그런데 어떤 구조식을 ···.?”

헤임달은 허둥거렸다.

“너 졸았니?”

“그게 아니라 ···. 녹음하면서 다 듣고 있었는데 ···.”

“노이즈 분석 결과를 이모션 렌즈로 투사하려면, 차원값이 일치해야 하잖아. 3차원 덴드로그램을 1차원으로 축약해야지!”

“아! 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요?”

“헤임달 ···. 장난감만 갖고 노니깐, 나랑 대화가 안 되잖아. 공부 하면서 살자. 네 꿈을 펼치려면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준은 어린아이를 대하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헤임달을 가르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진 악마가 감격해 했다.

‘저 못난 녀석을 용서하시고, 친히 가르쳐주시다니! 준느님!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동전 크기의 ‘마인드 윈도’가 완성되었다.

동전 크기의 작은 물건이었지만,

불카누스 프린터가 모든 작업을 멈추고,

하루 동안 풀가동해서 만들어야 했다.

불카누스가 만든 물건중에서 기술 집약도가 가장 높았다.

준은 윈도를 들고 전등에 비춰보았다.

겉보기엔 돋보기와 다르지 않았다.

준이 이마에 윈도를 갖다 대자, 윈도 가장자리에서 미세한 선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준느님. 고맙습니다. 미천한 아들놈을 가르쳐주시려고,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유진 악마는 진심으로 감격했지만, 헤임달은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다.

준을 너무 얕봤던 것뿐이다.

준의 능력을 미리 알았더라면, 요빅 진화를 가속해서 따라잡았을 것이다!

‘나의 실수는 평균율로 준과 굿데이를 평가한 거야! 극단값을 참고해서 정확하게 평가했다면, 요빅 진화 속도를 높였을 텐데 ···.’

천추의 한이었다.

헤임달이 억울해하거나 말거나 준은 윈도를 통해 그의 생각을 영상으로 바꿨다.

그가 상상하는 소리와 이미지가 액면 그대로 투사된 것이었다.

리미트리스 준이 상상하는 꿈이 펼쳐졌다.

‘인간이 꿈꾸는 거야 뻔하지. 돈, 여자, 권력 ···. 뭐 이런 거겠지.’

헤임달은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인간에 관한 빅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인간의 꿈은 너무나 뻔했다.

실제로 준이 펼친 꿈은 별거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보이고, 평범한 배경이 보였다.

그나마 배경이 불안정해서 자주 바뀌었다.

산 위에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준느님의 꿈을 묘사하는 이미징 엔진이 불안정한 것 같습니다. 배경이 흔들리네요.”

“헤임달. 자세히 봐라. 배경이 흔들린 게 아니다.”

헤임달은 자세히 봤다.

배경이 흔들리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있었다.

준이 꿈꾸는 세상은 ···. 인간의 상상이 그대로 창조되는 세상이었다.

‘오! 저것은 ···.’

헤임달은 보았다. 준의 꿈속에는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헤임달과 유진 악마도 보였다.

데이터 분석기에 불과한 그들은 ···. 준의 꿈속에서 물리적인 실체를 갖는 존재였다.

헤임달의 상상과 유진 악마의 상상도 현실화되었다.

“저 세상이 가능합니까?”

헤임달은 절로 무릎을 꿇었다.

준의 스케일은 요빅 생태계 수천 개를 합친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었다.

준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이마에 박혀 있는 윈도를 톡톡 쳤다.

그 윈도는 준의 꿈을 헤임달이 볼 수 있도록, 인간의 생각을 이미징 했다.

오직 헤임달을 위한 준의 정성이었다.

“준느님! 고맙습니다!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습니다.”

헤임달은 넙죽 엎드렸다.

“나는 나의 상상에 책임감을 느낀다.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면 그건 망상이다.”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오늘 읽어야 할 책이 몇 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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