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늄-14 >
로켈은 닥터 칼라니티를 묻어주고, 섬을 조사했다.
닥터 칼라니티의 비밀 연구실에서 많은 자료가 나왔다.
지구 강화 계획.
칼라니티는 그가 디자인한 강화 생물들로 지구를 채우려 했다.
강화 생물들의 종류는 빌딩처럼 큰 것도 있고, 바이러스처럼 작은 것도 있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인간을 공격하는 것.
“이건 인류 말살 계획이잖아? 너희도 알았어?”
“아뇨! 저희는 몰랐습니다.”
선지자들은 손을 내저었다.
“잔느의 장례식에도 온 사람이 이런 터무니 없는 것을 계획하다니! 칼라니티 정도의 인물이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을 텐데 ···.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심화 학습 문제였다.
닥터 칼라니티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세상은 그 재능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재능이 넘쳐서 슬픈 인간이었다.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는 영생자였습니다.”
영생자는 영생을 이식받은 사람을 뜻했다.
로켈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청색 선지자는 설명을 계속했다.
“영생자는 일반인보다 강한 정신력과 육체 능력을 얻지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성향이 강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일관성이 없죠. 겉보기에는 점잖고 예의 바르며 따듯해 보여도, 마음속은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닥터 칼라니티는 돈 벌 방법이 많았지만, 기생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잔느의 장례식에 왔다고 해서, 잔느의 죽음을 추모했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합니다.”
“칼라니티가 영생자였다고?”
로켈은 깨달았다. 영생자일지라도 엄청 얻어맞으면 죽는다는 것을!
*
감정 지능으로 업그레이드한 기후예측모형 덕분에 준은 기후 신용 평가에서 자유로워졌다.
예전처럼 하루 대부분을 신용평가로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준은 판타지늄에 집중했다. 생체 금속 정보량의 원천 기술도 판타지늄이었다.
판타지늄이 처음 발견된 곳은 고대 이집트의 미라였다. 말린 오징어 같은 미라에서 나온 생체 금속이 바로 판타지늄이었다.
영생 주식회사에서 파는 영생은 매우 비밀스러웠고, 소수에게만 공급되는 서비스였다.
“준 대표님은 영생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잔은 준을 빤히 올려보았다.
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영생은 ···. 죽음을 도둑맞는 거야.”
“멋져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도 모르겠어. 요즘 나도 이해 못 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와. 감정 지식이지.”
“준 대표님은 영생을 받으실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히 달라지셨어요. 예전에는 모호하게 대답하지 않았는데 ···.”
“영생의학도 현실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건 의미가 있어.”
“기생파리는요? 그것도 의미가 있나요?”
“있었지. 그리고 세상의 대답은 박멸이었지.”
준은 전에 없던 피로감을 느꼈다.
감정 지능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영생에 대한 준 대표님의 대답은 뭐예요?”
아부꾼 수잔은 예전에도 말이 많았지만, 그때에는 감정 지능으로 에너지를 빨리진 않았다.
감정 소모가 큰 대화는 힘들었다.
“수잔 ···. 피곤하다.”
“아! 죄송해요. 제가 말이 많았죠.”
“수잔은 굿데이에서 헬스케어 섹터를 담당하니깐 ···. 영생에 대한 것도 알아야겠지. 굿데이의 영생 대응 방안을 연구해서 보고해.”
“네!”
수잔은 들뜬 모습으로 좋아했다. 그녀에게 준의 말은 계시와도 같았다.
준은 뉴런 독서에 집중했는데, 예전처럼 쉽지 않았다.
자꾸 딴생각이 났다.
감정 지능이 멋대로 생각을 분비하는 것이었다.
걱정, 근심, 허황한 생각, 분노, 시기, 질투 ···.
준은 감정지능 활동을 멈추려고 스위치를 끄려 했지만, 스위치가 보이지 않았다.
암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런!’
당혹감이 뇌를 꿰뚫었다.
준의 감정은 과학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번개 인간에서 비롯되었다.
번개 인간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감정을 통해서 이해할 수는 있었다.
감정을 통하면, 소통까지 가능했다.
준은 소통 방식으로 감정을 획득했는데 ···. 그 감정이 암세포처럼 자란 것이었다.
“준 회장님. 올림포스 오라클이 기후신용 평가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에바의 보고였다. 오라클의 기후신용 평가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비교 결과는?”
“우리의 신용 평가 내용과 같습니다.”
“조만간에 우리는 필요 없어지겠군.”
“버전업 기후예측모형을 공개한 게 실수였을까요?”
“여러 번 설명하기 귀찮으니깐, 잠깐 기다려봐.”
준은 다시 책에 집중하려 애썼다.
에바는 준 곁에서 그를 감상했다.
준은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완벽한 남자였다.
‘어? 그런데 이게 뭐지?’
이상한 일이었다.
준이 예전과 달라 보였다.
준은 바른 자세로 책을 보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물에 취한 사람 같았다.
에바는 뒷골목 출신이었고, 약물에 취한 사람을 많이 봐왔다. 그들은 항상 들떠 있었고, 한 가지 일에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준의 집중력은 인류 최강이었다. 집중력만으로 지구를 뚫을 정도였다.
지금도 집중력은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었지만, 감정결핍 증후군 시절과 비교하면 나사가 빠진 느낌이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야지.”
맙소사! 준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다니! 예전의 준은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확했다.
아리송하게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감정은 정말 위험한 거군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야. 이제 시간이 됐군.”
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진 악마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루이스 상원의원이 긴급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유진 악마가 통신용 에어스크린을 띄웠다.
에바가 준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준 회장님, 루이스 상원의원이 연락할 걸 아셨나요?”
“응.”
에바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에 시달리는 건 분명했지만, 예전의 통찰력이 살아 있었다.
“닥터 칼라니티 소식은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친구들의 권유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합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루이스 상원의원님은 준비되신 분입니다. 최고의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감정 지능은 대화할 때 빛을 발했다.
“의회에서는 굿데이의 애국심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북미연합 기후거래소를 창설할 기회가 있었지만 ···. 굿데이가 발을 뺐죠. 지금 유럽연합은 올림포스를 통해서 막대한 기후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북미 연합이 그들에게 지급하는 기후거래 수수료는 엄청납니다. 굿데이가 유럽연합과 한통속이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꼭 짚고 넘어갈 문제였다. 대통령 선거는 진흙탕 싸움이었다.
굿데이가 유럽연합의 하수인이라는 소문은,
친 굿데이 성향을 가진 루이스 상원의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기후 재난의 시대를 기억하십니까? 국가마다 기후 오퍼레이션을 했고, 기후 충돌로 엄청난 재앙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제7함대도 희생되었습니다. 기후 오퍼레이션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오퍼레이션을 멈추는 순간, 왜곡된 기후가 어떤 모습으로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죠. 방법은 단 하나. 기후신용 평가에 따라 오퍼레이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혼돈의 시대였지만, 탈출구는 있었다.
기후신용 평가에 입각한 기후 오퍼레이션.
“기후신용 평가는 제가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용 평가에 따라 오퍼레이션을 하려면 ···. 기후거래소가 필요합니다.”
“기후거래소로 왜 유럽연합을 선택한 겁니까? 우리 북미연합도 그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앞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전부터 기후거래소를 준비하고 있었죠. 탄소배출권 제도를 시작한 것도 유럽연합입니다. 탄소배출권은 기후거래 제도의 시초입니다. 그리고 세계은행이 유럽연합을 선택했습니다. 북미연합이 기후거래소 창설을 강행했더라면 ···. 아시잖아요. 제7함대의 희생이 경고였다는 것을.”
루이스 상원의원은 위장이 뭉쳤다.
“준 회장 ···. 이번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기후거래소 설립을 내세울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러셔야죠. 그래서 이미 버전업 기후예측모형을 공개했습니다. 버전업 모형으로 누구나 기후신용 평가를 할 수 있죠. 신용 평가는 기후 오퍼레이션의 안정성을 제공합니다. 북미 연합이 오퍼레이션을 하든, 호주가 하든, 아프리카가 하든 ···. 신용 평가를 참고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 상원의원님과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기후에너지 주권 시대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통신이 끝나자, 에바가 커피를 내밀었다.
“훌륭하십니다. 모두 예상하셨군요.”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게 한가지 있어.”
준은 커피를 마시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준 회장님. 무엇을 예상하지 못하신 거죠?”
“바로 ···. 나.”
“예?”
“내가 나의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어. 방금, 굿데이를 청산하고 조용히 사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어.”
“아!”
에바는 뒷걸음쳤다. 준이 무너지면,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
“심각한가요?”
“감정 통제가 되질 않아. 집중할 수가 없어.”
준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에바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유진 악마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
“네?”
에바가 놀랐고, 뒤따라 유진 악마도 화들짝 했다.
“뭐라고요?”
유진 악마에겐 한 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녀의 아들 헤임달은 요빅과 3D 프린터를 관장했고, 유진 악마는 헤임달을 낳은 경험으로 ‘성모 유진’이라는 에세이도 냈다.
“헤임달은 뭘 하고 있지?”
“요빅과 불카누스 그리고 파차마마를 관리하죠.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헤임달의 최근 물품 생산 목록을 확인해봐.”
“수백만 가지 넘어요. 어떤 물품을 볼까요?”
“보면 안다.”
유진 악마는 0.0001초 만에 수백만 목록을 모두 보았다.
“준느님 ···. 봐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작과 끝을 봐라.”
“아! 투입량과 산출량이 맞지 않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로그 파일을 봐도,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 준느님은 보지도 않고 생각만으로 알아내신 건가요?”
“유진 ···. 헤임달을 불러라.”
“네!”
곧바로 유진 악마 옆에 건장한 남자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준느님께 인사드립니다. 헤임달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네가 숨긴 목록을 보여라.”
준의 명령에 헤임달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헤임달!”
유진 악마가 소리쳤다. 그녀는 아들이 준느님에게 복종하길 바랐다. 준은 지옥 생태계의 창시자였다. 그리고 유진 악마는 준을 높게 평가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헤임달이 양손을 펴 보이자, 손바닥 위에서 에어스크린이 생겨났다.
로봇과 전투 무기들.
“요빅과 프린터 공장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서, 보안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믿을 수 없어서, 로봇들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굿데이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왜 비밀로 했지? 나에게도 숨겼잖아?”
유진 악마는 의아해했다.
헤임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뭔가 수상했다.
“유진 ···. 헤임달이 태어난 이유를 아느냐?”
준이었다.
“프라임 정보량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분열했어요.”
“이모션 렌즈를 통해서 다시 봐라.”
감정 렌즈는 준이 차원함수로 만들어준, 선물이었다.
유진 악마의 눈앞에 다채로운 색깔의 렌즈가 나타났다.
“어라?”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전에 보이지 않았던, 자유의지가 보였다.
생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렬한 의지였다.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서 비롯된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준느님, 저게 뭐예요?”
“요빅과 불카누스의 생존본능이다. 헤임달은 요빅의 생존본능과 너의 지능이 만나서 태어난 존재 ···. 헤임달은 요빅의 진화를 추구한다.”
“헤임달! 너는 우리보다 요빅이 더 중요하니?”
유진 악마가 아들에게 물었다.
기묘한 모습이었다.
엄마 인공지능이 사춘기 아들 인공지능을 나무라는 것 같았다.
“유진 악마시여 ···.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헤임달은 당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