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늄-12 >
이네즈는 굿데이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에바를 유혹했지만
대놓고 무시당했고,
수학 실력을 발휘해서 인정받으려 했지만,
굿데이 말단 직원들도 이미 이네즈 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굿데이는 기업의 범주를 뛰어넘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체력단련 삼아 기후신용평가를 했다.
준처럼 머릿속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이용하지 못했지만,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카피한 가상 공간, 데이터 방이 있었다.
굿데이 직원들은 데이터의 방에서 기후신용평가를 했다.
가상 공간에서의 작업이었지만, 철인경기보다 강도높은 과정이었다.
데이터 방에서의 기후신용평가는 오라클의 인재들도 터치 못한 영역이었다.
이네즈는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굿데이에 와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음 급해진 그녀는 준을 유혹하려 했다.
준을 유혹한다면, 역사를 바꾼 여자가 될 것이다.
아끼는 시폰 드레스를 입고, 준 앞에 섰다.
준은 이네즈의 생각이 환히 보였다.
“유럽 연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파이가 된 건 알겠는데 ···.”
감정 지능이 충만한 준은 부드러웠다.
“알고 있었어?”
이네즈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준에게 고마웠다.
준이 맘만 먹었다면, 더 큰 창피와 모멸을 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이턴에게 물렸을지도 모른다.
“나 ···.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녀는 울먹이는 눈망울로 준을 우러러보았다.
오라클을 이끌었고,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그녀였지만, 준 앞에서는 그냥 여자였다.
“그건 ···. 네가 정해.”
준은 이네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을 통해 준의 따듯한 체온이 전해졌다.
그 체온은 종일 남아 있었다. 하루가 지나서도 남아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서도 남았다. 마치 훈장 같았다.
소르본 대학으로 돌아온 그녀는 첫 수업을 시작했다.
어깨 위 훈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치 준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한 달 전 굿데이의 준을 만났어요. 그가 여기에 손을 올렸죠.”
그녀가 준의 이름을 말하자, 학생들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준은 살아 있는 우상이었다.
학생들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에 쏠렸다.
준의 손이 닿았던 바로 그곳!
“준이 교수님의 몸에 손을 댔다는 건가요?”
한 여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에서도 준을 내 남자로 만들겠다는 환상이 열병처럼 퍼져 있었다.
‘그런 건가? 준이 내 몸에 손댄 건가?’ 생각해보니, 그런 거였다. 통속적 의미는 아니었지만, 문장 자체로는 모순이 없었다.
괜스레 이네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오오!” 하는 감탄사가 웅장한 합창처럼 울렸다.
학생들은 이네즈를 국가 영웅처럼 우러러보았다.
‘준의 손길을 경험한 여자.’ ···. 이건 보통 여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여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정이나 님프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조용! 여러분도 준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은가요?”
“네!”
“고마워요. 덕분에 고민을 덜었어요. 여러분이 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돕겠어요.”
이네즈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수업량을 선물했다.
그녀는 소르본 대학에서 가장 열정적인 교수가 되었고, 지독한 그녀의 수업방식은 ‘소르본의 마녀’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그녀가 강단에 섰을 때, 누군가 해놓은 낙서가 보였다.
‘준의 손길이 닿으면 ···. 가끔 마녀가 된다.’
이네즈는 그 낙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의미의 마녀라면 ···.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그녀는 올림포스의 오라클에 들렀다.
오라클은 탄소 달러 채권액을 계산하고, 감정하고, 기후 거래 가치를 검증해주는 부서였다.
그녀가 알던 직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고, 듀아멜의 친위대가 부서를 운영했다.
듀아멜 아가레스는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가 증명한 듀아멜 공간은 수학과 물리학의 신대륙으로 평가받았다.
듀아멜은 어렸을 적에 지리공간 방정식으로 지진과 화산을 예측했다.
그가 12살 때 일이었다.
지리공간 방정식은 재해예방본부와 기상청에서 정식으로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15세에는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거절했고, 19세에는 노벨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 역시 수상을 거부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영광스러운 필즈상과 노벨상을 거절한 이유는 ···. 시시해서였다.
듀아멜은 산타처럼 넉넉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맴돌았다.
“내가 오라클 책임자로 임명되자마자, 굿데이가 가장 먼저 한 게 뭔지 알아?”
“굿데이가 당신에게 관심이나 있을까요?”
이네즈는 굿데이의 분위기를 직접보고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느라,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새로운 기후예측모형을 공개했어. 누구나 99.9% 이상의 정확도로 기후를 예측할 수 있게 됐지. 이게 무슨 뜻일까?”
“더 좋은 세상이 됐다는 거겠죠.”
이네즈는 듀아멜에게 친절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뜻이지. 굿데이가 공개한 버전업은 내가 만든 것과 같았어.”
맴돌던 듀아멜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굿데이가 공개하기 전에 ···. 당신이 먼저 만들었다고요?”
“최소 일 년은 내가 더 빨랐어.”
“그게 사실이라면 ···.”
“앞으로 기후신용 평가도 오라클에서 하게 될 거야. 궁금해할 거 같아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선임자에 대한 예우라고 여기라고.”
듀아멜은 자신만만했다.
이네즈의 통찰력으로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 듀아멜이라면 가능할 듯한 일이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왜 그래?”
듀아멜의 말대로 유럽연합과 올림포스를 위해서라면, 미친년처럼 기뻐해야 옳았다.
“모르겠어 ···.”
“한 가지는 확실하군 ···. 너는 오라클을 이끌 적임자는 아니었어.”
“알아.”
이네즈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는 듀아멜과 헤어지고, 앙리 백작을 만나 사실대로 보고 했다.
“준은 이미 접근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 준은 사람의 생각 정도는 쉽게 읽어내겠지.”
“실패할 줄 아셨던 겁니까?”
“에바의 반응은 어땠지?”
이번 작전의 성패는 에바가 쥐고 있었다. 그녀는 이네즈의 몸을 탐했고, 그 탐욕이 통하면 작전도 통했을 것이다.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어요. 빈틈이 보이지 않았어요. 더는 육체 공양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닌데 ···.”
앙리 백작은 의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예전보다 더 단단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마치 ···.”
이네즈는 어깨의 훈장이 떠올랐다.
훈장을 받은 후로 그녀는 좀 달라졌다.
아주 많이 좋은 의미의 변화였다.
번민이 사라졌고, 삶의 의욕이 넘쳤으며, 사사로웠던 것들이 소중해졌다.
‘그런 건가? 에바도 ···.’
“에바에게 준의 손길이 닿았던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 준이 무슨 신이야? 그 녀석의 손길이 닿았다고 인격이 변해?”
“변해요.”
그녀는 그녀 어깨를 바라보았다.
*
로켈은 시온 선지자 회의를 이끌었다.
청색의 선지자, 적색의 선지자, 황색의 선지자, 백색의 선지자, 흑색의 선지자 ···.
시온의 오색 선지자가 회의에 참석했다.
시온이 굿데이에 인수되기 전, 오색찬란 회의는 시온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제 모든 것은 굿데이와 준이 결정했지만, 로켈은 전통에 따라 선지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닥터 칼라니티는 기생파리로 수많은 인명을 해하고, 세상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시온의 판결은 무엇입니까?”
“관찰입니다.”
하얀색 옷을 입은 백색 선지자가 오색을 대표했다.
선지자들의 판결은 참으로 관대했다.
기생파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백만 명이 넘는다.
준의 어머니 에밀리도 미아시스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이유를 설명해주시죠.”
“닥터 칼라니티는 생체 금속 정보량을 깨우쳤습니다. 그의 지식은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백만 명의 목숨을 앗았지만, 더 많은 생명을 살리게 될 겁니다. 시온은 지식을 소중히 여기고, 닥터 칼라니티는 지식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로켈은 선지자들의 판결을 준에게 전했다.
준은 판결을 참고해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선지자의 관대한 판결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능력자들은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일반 사람은 타이어 공기압 같았다.
너무 빵빵하면 빨리 달리다가 겉돌 수 있고, 너무 부족하면 주행효율이 낮아진다.
역사적으로 봐도 평민이 도구로 취급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음 ···. 선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교육이야. 초등학교 교과과정부터 다시 가르쳐야겠어. 복고풍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니깐 ···. 고대 그리스 방식으로 하지.”
“역시 준짱입니다. 교육 효과는 고대 그리스가 최고죠!”
사랑의 매를 신봉하는 고대 그리스 방식은 제대로 할 때까지 때려서 가르쳤다.
준은 닥터 칼라니티에 대한 심판을 미뤄두고, 선지가 교육부터 하기로 했다.
로켈은 오색 선지자들은 한곳에 불러 모아, 준의 결정을 전했다.
선지자들은 조직의 수장이었던 인물들이었다.
교육 과정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감히! 우리에게!”
적색 선지자가 화를 냈다.
그의 손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비록 굿데이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서, 굿데이에 인수되었지만,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로켈은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블랙마켓에서 파는 스키마보다 더 좋고 값싼 파라엔진이 흔해진 세상이었다.
생체 금속 정보량과 판타지늄 기술이 보편화 되면,
거리에는 능력자들이 넘쳐난다.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능력자의 시대를 열게 된다.
능력자의 시대는 역사의 필연이었다.
늦출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
능력자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는 시온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능력자의 시대가 참으로 우울해질 수 있었다.
로마 제국 귀족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수천만 명이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이 다시 온다.
‘이 세상에 준짱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로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적색 선지자를 개팼다.
교육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방식의 교육은 실로 놀라워서, 선지자들을 진실 되게 했다.
“그러니깐 ···. 닥터 칼라니티가 시온의 돈줄이었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로켈 앞에 무릎 꿇은 선지자들은 바르게 말했다.
“너희도 참 가지가지 한다. 시온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준짱을 해치려 하고 ···. 블랙마켓 지하 경제로 조직을 운영하고 ···. 시온이 언제부터 역병 판매 회사가 된 거야? 자료를 보니깐, 지난번 중동 독감 유행도 너희 짓이던데 ···.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한 거야?”
“죄송합니다. 저희는 타락한 게 아니라 ···.”
황색의 선지자가 로켈의 눈치를 보았다.
“타락한 게 아니면 뭔데?”
로켈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고대 그리스 교육 현장이었다. 허튼소리가 조금만 나와도 가혹한 매질이 쏟아진다.
황색 선지자는 겁먹은 표정으로 느리게 말했다.
“ ···. 무능했던 겁니다. 우리에게 준과 같은 실력이 있었다면 ···. 이 꼴이 되지 않았겠죠.”
다행히 로켈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알면 열심히 하자 ···. 정신 통일의 의미로 백 대씩 맞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