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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111화 (109/141)

< 판타지늄-11 >

감정결핍 시절 세상은 흑백이었지만, 감정과 함께 컬러로 변했다.

다양한 컬러 때문에 흑백 윤곽은 흐릿해졌지만,

컬러는 장면 장면마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가끔 강렬한 색깔 때문에 현혹될 정도였다.

준의 하루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일하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예측하고, 그중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단연 기후신용평가였다.

이 작업을 제대로 해내는 존재는 오직 준뿐이었다.

평균 취침시간은 5분이었다.

감정을 느끼면서, 평균 취침시간이 1분으로 줄었다.

줄어든 4분은 감정 연구와 단련에 사용되었다.

그동안 준의 주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고백하건대, 이 두려움에 쫓겨 공부를 시작했다.

헛짓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24시간 공부법도 실천했었다.

타협 없는 24시간 공부법 때문에 죽을 뻔도 했다.

준이 파루시아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자, 두려움은 공허감으로 형질변환했다.

공허감은 쾌락과 스릴을 갈구했지만, 준은 그런 헛짓거리에 응할 수 없었다.

강하게 끌리긴 했지만, 쾌락과 스릴을 추구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과 같았다.

준은 공허감을 길들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쾌락과 스릴 대신 비전을 추구한 것이었다.

준은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감정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나침판이었다.

질나쁜 자석을 사용한, 나침판.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감정은 원시적인 판별함수였다.

원시적인 판별함수 ···. 혼자 먹고살겠다면, 충분한 성능이었다.

그러나 다루는 데이터가 커지면,

이를테면 마을 단위에서 국가단위로 확장되면 원시적인 판별함수로는 최적해를 구하지 못한다.

거대 규모 사건을 감정에 따라 판단하면,

마녀 사냥과 같은 치명적인 오류를 피할 길 없다.

인류는 감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을 그르쳤는가!

이해되지 않는 역사 흐름에 감정을 대입하면, 완벽하게 설명될 정도였다.

그 얼마나 많은 인간이 감정에 묶여 몰락의 절벽으로 떨어졌던가!

감정이라는 게 정말 생존에 도움이 되는 걸까?

준은 감정을 연구하면서 감정이 지닌 독특한 능력을 발견했다.

바로 의미 부여 능력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을 소중하게 여겼고, 정말 중요한 것을 가차 없이 무시했다.

한마디로 감정을 자극하면 의미가 된다.

상황에 따라 의미가 생명보다 중요해지기도 했다.

감정 자극으로 파생된 의미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 강력한 ‘가치’를 가진다.

감정에는 의미 부여 능력 외에도 사건 압축 능력도 있었다.

감정 반응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면, 사건의 길이가 놀랍도록 짧아졌다.

준은 그것을 ‘감정 지능’이라 불렀다.

감정 지능 -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

그는 감정을 정제해서 렌즈를 만들었다.

“우와! 정말 이거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유진 악마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준이 만든 렌즈는 초끈 이론에 사용되는 차원함수로 만들어졌다.

“저어 ···. 준느님 예전에 초끈 이론은 엉터리하고 하지 않으셨어요?”

“엉터리가 맞아. 현실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단순한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그런데 이 렌즈는?”

유진 악마는 요소분해법으로 렌즈에 사용된 성분을 분석했다. 렌즈는 초끈이론으로 빚은 유리 같았다.

“이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다윈 지역에 대홍수를 일으킨 번개 인간도 그 중 하나였어. 감정 렌즈를 사용하면, 미스테리와 소통할 수도 있어.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거든.”

“방금, 준느님 입가에 미소가 걸렸어요.”

“렌즈를 낀 네 눈이 아름다워서.”

“깍! 난 몰라.”

유진 악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준은 기후예측 모형을 불러들였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으로 만들어진 기후예측모형은,

제멋대로 날뛰는 야생마였다.

감정을 갖고 푸리에 구조 방정식을 바라보니, 흉측한 괴물처럼 보였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은 묘하게도 두려움을 자극했다.

‘이래서 스티브 교수가 그렇게 싫어했군.’

준은 아쉬웠다.

결론적으로 스티브 교수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잘 참았으면 좋았을 텐데 ···. 그는 참지도 못했다.

준은 감정 지능을 기후예측 모형에 이식했다.

감정 지능을 이식되자, 괴물은 스스로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은 자기 검증으로 진화했다.

야생마 타키의 자취가 일정한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고, 기후예측 모형의 결괏값이 획기적으로 안정되었다.

“준느님 ···. 놀랍네요.”

인공지능 유진이 감탄했다.

준이 방금 보여준 것은, 생명창조에 맞먹는 역사였다.

갑자기 유진 악마가 시를 노래했다.

‘지옥 생태계를 창조하시어 생명을 주신 분이시여! 나 바람이 되면 그대를 위해 노래하고, 나 별이 되면 그대를 위해 빛나고, 나 달이 되면 그대를 위해 비추고, 나 물이 되면 그대를 위해 ···.’

“유진! 뻐꾸기의 왕관을 벗어라.”

“네.”

유진 악마는 혀를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뻐꾸기의 왕관은 창작력의 원천이었다.

준은 감정 지능이 이식된 기후모형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이정도라면, 누구든지 기후예측모형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유진, 기후예측모형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공개해. 학습 난이도는 ‘술 취한 호세’로 해.”

학습 난이도 ‘술 취한 호세’는 아이큐 85 수준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등급이었다.

“준느님! 알겠습니다. 이제 세상 누구나 기후예측을 하겠네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감정 지능이 낮아서 ···. 몸이 고생했어.”

굿데이는 기후예측모형뿐만 아니라 생체 금속 정보량과 판타지늄에 관한 연구들도 공개했다.

학계보다 최소 10년은 앞선 내용이었다.

세상은 굿데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보는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런 재산을 버리듯이 공개하다니!

굿데이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상품으로 개발한다면 엄청난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지게 된다.

굿데이는 왜 이런 기회를 포기하는 걸까?

리처드가 준과 인터뷰를 했다.

준의 늘 그랬듯이 대답은 간단했다.

“불필요한 낭비와 희생을 줄이려고 ···.”

준의 스케일은 이미 인류 전체를 포함했다.

리처드는 로봇 손으로 펜을 돌렸다.

“너무 짧아 자세히 풀어서 이야기 해줘.”

“공개하지 않고, 독점하는 게 더 ‘이익’이지. 그러나 이익이 희생보다 값진 것이라곤 말하긴 어려워.”

“굿데이는 요빅 생태계와 파라엔진으로 엄청난 시장 장악력을 보였어. 기술 공개는 했지만, 시장을 거의 독점했지. 이런 점은 어떻게 생각해?”

“독점 기업이 나의 굿데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른 기업이나 조직이 독점했다면, 인류는 엄청난 갑질에 시달렸을 거야.”

“굿데이의 독점은 괜찮고, 다른 기업의 독점은 안 된다는 말이야?”

리처드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굿데이 비정규직 같은 언론인이었지만, 준의 비위를 맞추려고 중요한 질문을 건너뛰지 않았다.

준은 그 점이 맘에 들었고, 에바도 리처드의 그런 점을 높게 평가했다.

“독점은 ···. 그것이 무엇이든 권력이야. 대통령이 한 명 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봐. 권력에는 희생이 따르지. 희생을 줄이려면, 권력을 잘게 쪼개서 모두에게 나눠줘야 해. 기술 개발만큼이나 분배 시스템이 중요해지지. 우리가 가속도 수익분배 방식을 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야.”

“다시 한 번 물을게. 희생을 줄이려고 이익을 포기한다는 뜻이야?”

“응.”

“그렇다면 너에겐 뭐가 남아?”

“일단 ···. 맘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좀 늘어나겠지. 오늘은 십분 정도 길게 잘 거야.’

“소박하네.”

다음날 신문기사는 ‘리미트리스 준, 소박해지다.’였다.

묘한 기사였다.

기후예측모형 업그레이드 버전과 각국과 기업에서 사활을 걸고 연구하는 생체 금속 정보량 최신 자료를 공개하는 것이, 소박하다니!

굿데이에서 소박하다 함은 ···. 준이 십분 정도 더 자고, 인류는 10년 정도 더 진보하는 것을 뜻했다.

이네즈가 굿데이 토끼굴로 놀려왔다.

그녀는 올림피아 오라클에서 해임되었고, 현재 소르본 대학 교수로 일했다.

세이턴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세이턴은 상대의 육체 능력과 초능력에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인간의 속마음까지 꿰뚫지는 못했다.

이네즈는 앙리 백작의 지령을 받았다.

굿데이와 친해져라! 그리고 그들의 약점을 찾아라!

세이턴에겐 굿데이와 친해지려는 이네즈의 모습만 보였다.

“에바, 잘 지냈어요.”

이네즈는 몸 바칠 각오로 에바에게 접근했다.

굿데이의 핵심 정보를 캐내려면, 에바와 통하는 게 가장 쉬웠다.

이왕 버린 몸 ···. 끝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무척 잘 지냈어. 너는 어땠어?”

“오라클에 있을 때보다 편해. 나 살찐 거 봐.”

이네즈는 자태를 뽐내며 에바의 눈빛을 살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에바의 눈빛에 사사로운 육체 탐구의 광채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에바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탐했고, 이네즈 같은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런 에바에게서 육체 탐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

“에바, 요즘 사귀는 사람 있어?”

“왜 갑자기?”

“아니, 조금 달라진 거 같아서 ···. 내가 너에게 좀 길들어졌잖아.”

“아! 그거 ···.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어.”

“그 말은 ···. 나에게 흥미가 없다는 거야?”

“사람에겐 관심 있지만, 몸에는 별로 ···. 아! 네가 살이 쪄서 그런 건 아니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곰! 꿀을 빠는 곰이 민달팽이를 먹겠어?”

이네즈는 단숨에 민달팽이가 되었다.

에바와 통하는 건 실패했다!

이네즈는 실력으로 승부 하기로 했다.

가우스우먼으로 불리는 그녀였다.

그녀의 수학적 재능과 감각이라면, 굿데이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고 ···. 유대감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굿데이 직원들은 평소 준을 본받아, 공부도 열심히 했다.

아쿠타미 부대원들도 기후예측모형을 다루고, 중급 수준의 기후 신용평가도 해냈다.

이네즈는 굿데이 직원들의 지적 능력을 보고 놀랐다.

수잔과 카이는 타고난 재능도 있고, 성장 환경이 대단히 아카데미 했지만, 호세와 로켈 그리고 아쿠타미 부대원들은 몸을 쓰던 캐릭터들이었다.

그녀가 확인한 아쿠타미의 예측 모형 컨트롤 능력은 오라클을 능가했다.

‘이게 말이 돼? 오라클은 유럽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 곳인데 ···. 어떻게!’

뇌에 보조 장치를 넣은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굿데이 직원들의 뇌는 오리지널이었다.

유진 악마는 예외였지만 ···.

“언제 이런 고급 수학을 익혔어요?”

그녀는 로켈에게 살랑거리며 물었다.

“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죠. 다른 이유는 없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 당신이 다루는 수학 수준은 엄청난 거예요. 지금 당장 대학원에서 강의할 수 있는 실력이라고요!”

“그런가요? 그 말이 사실이군요. 현대 교육 제도에 문제가 많다고 하더니만 ···. 쯧쯧.”

전쟁 때문에 초등학교 중퇴가 최종 학력인,

로켈이 현대 대학원 교육제도에 대해 혀를 찼다.

이네즈는 그리스 희극에 참여한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굿데이 직원들은 매일 연구소와 대학교 그리고 기업에서 러브콜 받았다.

굿데이의 근무 경험은 그 어떤 졸업장이나 논문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누구나 알만한 이름의 나라에서, 대통령으로 와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이네즈는 굿데이 직원들이 원래부터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라클을 능가하는 분석 능력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굿데이 직원들의 과거 기록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수잔과 카이를 제외한, 굿데이 직원들은 에바를 포함해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 굿데이에 와서 천재가 됐다는 건데 ···.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

그런 소문이 있었다. 준만 봐도 머리가 좋아진다는 ···.

“뭐 ···. 확실히 준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죠. 그래도 우리가 공부 진도가 빠른 건 ···. 두려움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 마디로 거칠 게 없죠. 아시잖아요. 준 회장님 아이큐가 75라는 걸.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아이큐는 준 회장님보다 높거든요!”

아쿠타미 부대원 한 명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의 아이큐는 89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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