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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110화 (108/141)

< 판타지늄-10 >

준과 수잔 그리고 카이는 ‘현자의 방’에서 생체 금속 정보량과 판타지늄을 연구했다.

그들은 세포실험이나 동물실험 혹은 독성평가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세포 모형과 동물 모형에 판타지늄 변형체를 넣고, 그 변화를 시뮬레이션했다.

반응시간, 용량, 노출빈도 ···.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테스트했다.

현자의 방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고밀도 지식 생태계의 가상 현실 버전이었다.

준은 한 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천천히 에둘러 찾아 들어갔다.

카이와 수잔 그리고 유진 악마를 위한 배려였다.

기후예측모형 결과해석과 기후 신용평가를 혼자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가르쳐야 한다. 가르쳐서 시켜야 한다! 그래야 좀 쉴 수 있었다.

요빅이 그런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다.

준은 카이에게 요빅 설계도와 대략의 개요를 잡아주고, 카이와 호세 그리고 아쿠타미 부대를 바다로 보냈다.

준이 도서관에서 뉴런 독서를 즐기는 동안, 카이와 호세 그리고 아쿠타미는 피똥을 싸며 요빅을 완성해냈다.

돌이켜 보건대 참으로 한가로운 시절이었다.

준은 굿데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나 나처럼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굿데이를 만들 수 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데이빗 아빠의 헌신적이 노력이 없었다면 ···.’

“준 대표님! 그렇지 않아요!”

“준 형아! 전혀 안 그래!”

“준느님! 말도 안 됩니다.”

셋은 합창하듯이 목청을 높였다.

준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뇌파 통신으로 수잔, 카이, 유진 악마에게 들렸던 것이었다.

준은 생각이 넘쳐나도록 연구에 집중했다.

- 삐 -

출입문 쪽에서 알람이 울렸다.

인터폰 스크린에 로켈이 보였다.

“분석 의뢰할 게 있어서요. 마가크라는 놈인데 ···.”

로켈은 병 안에 든 검은 찌꺼기를 흔들었다.

그 찌꺼기는 한때 마가크였다.

“그게 마가크라고요?”

놀란 것은 인공 지능 유진 악마였다.

굿데이가 시온을 인수하면서, 유진 악마는 시온의 데이터베이스를 읽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능력자들의 레벨과 등급 그리고 순위가 기록되어 있었다.

마가크는 높은 전투력을 가졌다.

로켈이 이겨 먹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참 ···. 인도 승려는 죽어서 사리를 남긴다던데, 마가크는 숯검댕이를 남기네. 멀쩡할 때도 묘한 녀석이었는데, 죽어서도 그러네.”

로켈은 손끝으로 병을 돌렸다. 검은 찌꺼기에서 탁한 빛이 났다.

준은 진행하던 판타지늄 연구를 멈추고, 출입문을 열었다.

로켈이 유리병을 분석 챔버 안에 넣었다.

소형 플라즈마 분석기는 측정물질을 쿼크 단위로 분석했다.

“시온의 능력자 순위 문서는 믿을 게 못되네요. 그 문서에 의하면 마가크가 로켈님보다 훨씬 강하거든요.”

유진 악마는 분석결과를 기다리면서 쫑알댔다.

“시온의 자료는 내가 준짱을 만나기 전 데이터야. 준짱을 만나고 나서 나도 많이 컸지!”

로켈은 으쓱거렸지만, 분위기가 조금 애절해졌다.

로켈이 굿데이 직원이 되고 나서, 능력치가 확 오른 건 분명했다. 그러나 키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카이는 측은하게 로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수잔에게 돌렸다. 파라엔진이 버전 업그레이드를 거듭했지만, 그녀의 키는 ···. 국제 도량 표준으로 써도 될 정도로 변함없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 그만 봐라.”

수잔이 찌릿 카이를 째려보았다.

“수잔 누나랑 로켈 아저씨, 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 아니에요?”

카이는 꽤 멋진 발견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수잔이 카이의 발을 밟고 로켈이 카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키가 작은 거지! 사람 보는 눈이 낮은 게 아니야!”

절묘했다. 수잔과 로켈은 동시에 같은 말을 쏴댔다. 둘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에 적잖게 충격받았다.

이것이 ‘난쟁이의 한계’란 말인가!

“블랙 판타지늄입니다.”

유진 악마가 분석결과를 그래픽 했다.

로켈은 봐도 잘 몰랐지만, 수잔과 카이의 눈이 성배를 손에 넣은 수도승처럼 반짝거렸다.

‘난쟁이의 한계’로 괴로워하던 수잔이 경탄 깃든 눈으로 로켈을 바라보았다.

“블랙 판타지늄이라니! 닥터 칼라니티가 제법이네! 로켈! 어떻게 이긴 거야?”

“준짱께서 화이트 판타지늄을 이식해 주셨어. 너희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노벨상 시상식에서 준짱이 나에게 그랬거든. ‘어둠에서 나오라고.’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화이트 판타지늄을 받아들였지. 그게 나를 살렸어.”

“마가크를 해치울 땐 쓴, 로켈 아저씨의 기술 이름이 뭐예요? 빛나는 난쟁이?”

“난쟁이가 쏘아 올린 꿀밤이다!”

로켈은 요령 있게 카이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사실 ···. 카이의 말이 맞았다. 기술의 이름은 빛나는 난쟁이였다. 그러나 수잔이 있는 앞에서 난쟁이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았다.

‘기술 이름을 바꿔야겠어.’

‘추천한다. 로켈의 빛.’

준의 목소리가 뇌파 통신으로 로켈에게만 들렸다.

로켈은 바로 이거다 싶었다!

“기술의 이름은 ‘로켈의 빛’이야.”

로켈은 좀 멋지게 말했는데, 그게 수잔에게 통했다.

로켈과 수잔이 눈빛을 교환할 때, 카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블랙 판타지늄 강화 능력 이식이 기생파리 만드는 거보다 더 어려운 거 맞죠?”

“당연하지. 판타지늄 강화능력을 이식하는 것, 맞춤형 서비스야. 아주 정교한 작업이지. 그중에서도 블랙 판타지늄을 다루는 건, 현재 기술보다 최소 100년은 앞섰다고 봐야지. 기생파리는 생체 금속 정보량만 다룰 줄 알면, 초등학생도 하는 거고.”

수잔이 가볍게 정리했다.

“그런데 닥터 칼라니티는 왜 기생파리로 세상을 우중충하게 만든 거죠?”

“정신병자 과학자의 생각을 누가 알겠어?”

수잔은 아무도 모를 거라 자신했지만, 카이와 로켈 그리고 유진 악마의 시선은 공교롭게 준에게 쏠렸다.

준이라면 ···. 정신병자 과학자의 생각도 알지 않을까?

준은 이들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로켈과 수잔은 정말 모르는 걸까? 이제는 그냥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준짱의 생각이 다 들립니다.”

마가크를 이겨 먹은 로켈이 코를 훌쩍거렸다.

그는 준짱에게 쓸모 있는 로켈이고 싶었다.

그런데 준짱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니, 아직도 너무나 많이 부족했다.

“로켈! 너의 빛은 훌륭했어!”

“준짱! 늦었어요. 훌쩍.”

“닥터 칼라니티가 만든 스키마 칩을 생각해봐. 그는 기생충 전문가야. 스키마는 블랙마켓의 히트 상품이었는데, 파라엔진 보급으로 쓸모없게 됐잖아. 그래서 파라엔진으로 치료되지 않는 기생파리를 뿌린 거야. 잔느의 선데이가 기생파리 솔루션을 세상에 내놓으면, 스키마의 손해를 충당하고도 남잖아.”

“준 형아! 그럼 닥터 칼라니티가 돈 때문에 기생파리를 만들었다는 거야?”

“좋은 건 누구나 알아. 미친 과학자라고 해도, 돈맛은 아는 거지.”

“닥터 칼라니티라면 좀 더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벌이할 수 있을 텐데 ···.”

“그렇지. 하지만 파라엔진을 뛰어넘는 돈벌이는 기생파리가 딱이었지.”

“미친 과학자의 뒤끝이란 건가? ···. 정말 짠하네요.”

*

잔느의 장례식에는 굿데이 멤버가 모두 참석했다.

세이턴마저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고맙네. 내 딸이 이제 눈을 감을 수 있겠어.”

“케슬러 국장의 죽음은 유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루이스 상원의원은 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그렇습니다.”

“자네도 정치가가 다 됐군.”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랬다. 준은 굿데이 회장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이 야비하고 비열하더라도 건너뛸 수는 없었다.

준이 건너뛰면, 에바가 진창에 빠져야 했다.

“내가 기념으로 가질만한 게 없을까? 이를테면 닥터 칼라니티의 이빨 같은 거 말이야.”

“범인의 찌꺼기로 만든 블랙 판타지늄 반지는 어떠세요?”

“그게 좋겠군.”

“그리고 ···. 닥터 칼라니티는 이번 사건과 관계없습니다. 모든 것은 닥터 칼라니티의 경호원이었던 마가크의 단독 행동이었습니다.”

“칼라니티 경호원의 단독 행동?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그게 사실입니다. 잔느와 칼라니티의 관계는 동반자에 가까웠습니다. 칼라니티가 재앙을 만들면, 잔느가 솔루션을 파는 거였죠. 둘은 사업 파트너였습니다.”

“믿을 수 없네!”

루이스는 화를 냈다.

그의 기억 속 잔느는 순결하고, 순수하고 우아하고, 죄 없는 여자였다. 그러길 바랐다.

준이 갑자기 루이스 상원의원을 껴안았다.

“받아들이세요. 그래야 잔느도 편안하게 눈감을 겁니다. 있는 그대로 그녀를 보내주세요. 그래야 당신도 슬픔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 의미 없이 피를 부르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아시잖아요. 이미 핵터와 안전국 요원들이 작전 중에 목숨을 잃었잖아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준의 솔직한 말이 루이스를 울컥하게 했다.

그는 잠시 혼자 차 안에서 울다 나왔다.

“자네 ···. 감정결핍 증후군 맞나? 어쩜 말을 그렇게 가슴에 사무치게 잘하나? 감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야.”

“루이스 상원의원님. 최근에 감정을 터득했습니다.”

“감정을 터득해? 자네에겐 그런 것도 가능한가?”

루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장례식은 조용하고 잔잔하게 끝났다.

검은 개 양복을 입은 세이턴이 버즘나무 밑에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세이턴 오늘은 손님으로 오신 거다.”

준이 세이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버즘나무 밑 남자와 준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닥터 칼라니티였다.

준과 칼라니티는 조용히 눈인사만 교환하고, 각자 잔느의 죽음을 애도했다.

*

킹스덤 중앙 도서관에 온 준은 평소 안 하던 짓을 했다.

번호들에게 눈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그녀들은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준은 그동안 시선 한 번 제대로 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친근한 미소를 곁들인 눈인사라니!

눈인사만이 아니었다.

도서관 사서 길버트가 스노우캣 커피를 돌렸다.

“준이 쏘는 거야.”

그녀들은 감격한 눈망울로 독서에 몰입하는 준을 보았다.

“그동안 자리를 지켜줘서 고맙대.”

길버트는 준의 말을 전했다.

“사실, 우리가 더 고마운데 ···.”

준은 분명히 달라졌고,

굿데이 직원들과 주변 사람,

특히 번호들이 그 변화를 환영했다.

에바는 준이 약해진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동안 굿데이의 성공은 준의 냉철한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상식을 깨는 통찰력이 없었다면, 요빅 생태계는 불가능했다.

감정을 느끼면서 예전 같은 통찰력이 가능할까?

“준 회장님 오해 없이 들어주십시오. 예전의 준 회장님이셨다면, 잔느의 살인 사건을 예측해서 막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나일지라도 그런 사건까지 예측하진 못해. 닥터 칼라니티와 관련 인물 정보가 없잖아. 예전의 나였다면 ···. 장례식에는 가지 않았겠지. 에바 날 걱정해줘서 고마워.”

“말로는 안 돼요! 능력으로 보여주세요!”

그녀는 은근히 손목을 내밀었다.

“그동안 수작업을 해왔던 ···.”

에바의 귀가 쫑긋했다. ‘뭐야 그런 게 가능하다고? 오르가슴 자동 발생기? 오오!!

이건 진정한 페미니즘 혁명이야!’

“기후예측모형 결괏값을 자동으로 선택하는 방법을 만들었어.”

준은 고밀도 지식 생태계에서 길들이지 못한 야생마 타키를 길들인 것이었다.

그것은 준이 불가능으로 여겼던 과업이었다.

“에바 ···. 별로 안 놀라네?”

“놀랐어요.”

“이게 놀란 거예요.”

그녀는 새침했다.

“음 ···. 할 수 없군.”

준은 손끝으로 에바의 손목을 터치했다.

격정적인 황홀감!

에바는 준이 더 강해진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풋 에바! 정말이지 너란 여자는 ···.’

준은 느끼고 있는 에바를 사무실에 혼자 두고, 개인 서재로 갔다. 정말이지 ···.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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