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08화 (106/141)

< 판타지늄-8 >

루이스 상원 의원의 전화는 유진 악마로 연결되었다.

유진 악마의 업무에는 내용을 분석해서, 직접 처리하거나 해당 직원에게 연결하는 것도 있었다.

“루이스 상원 의원님, 반갑습니다.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해당 직원으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준 회장에게 직접 얘기하겠네.”

루이스는 인공 지능 따위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 상원 의원님 따님 때문이신가요? 잔느는 훌륭하신 분이셨어요. 그분이 블로그에서 쓴 글을 봤는데,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란 분이라고 느꼈어요.”

유진 악마는 루이스 상원 의원에게 잔느의 사진과 그녀가 썼던 문장을 보여주었다.

학사모를 쓰고 화창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졸업식 날, 아빠는 바빠서 못 왔다. 그래서 오늘 하루, 세상에게 아빠를 양보했다. 아빠의 딸이라서 많이 행복했다. 이 행복을 세상에게 나눠주고 싶다. 아빠! 사랑해요!’

루이스 상원 의원의 목구멍으로 피 끓는 슬픔이 올라왔다.

“루이스 상원 의원님 ···. 10분 후에 굿데이에서 상원 의원님에게 전화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유진 악마가 통화를 끊었다.

그녀는 그 어떤 비서보다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10분 후, 에바가 루이스 상원 의원에게 직접 전화했다.

유진 악마는 준 회장보다 에바가 이번 일을 먼저 확인하는 게 맞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상원 의원님, 내용은 들었습니다. 삼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범인을 찾고 싶소.”

“그런 일이라면 경찰이 ···.”

“이번 사건은 국가 안전국에서 X등급으로 분류했소. X등급의 의미를 아시오?”

“초자연적인 사건 혹은 능력자에 의한 사건을 뜻합니다. 일반적인 수사로는 단서도 찾을 수 없죠.”

“이번 일을 경찰도, 국가도 해결하지 못하오. 놈은 내 딸을 처형하듯이 살해했소! 은밀하게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러지 않았소. 그게 뭘 뜻하겠소?”

“경고거나 ···. 선전포고입니다.”

에바는 루이스의 말이 끊이지 않도록, 신경 쓰며 답했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유력한 차기 대통령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딸을 잃은 아버지였다.

“약속해주겠소? 범인을 잡아, 정의를 이루겠다고?”

에바가 결정할 수 있는 거래가 아니었다.

아직 상대가 어떤 능력자인지, 어떤 조직인지 알지 못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준 회장님으로 연결하겠습니다. 그전에 ···. 준 회장님은 감정결핍 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분의 판단력을 매우 냉철합니다. 굿데이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

“알겠소. 무슨 말인지 나도 아오.”

에바가 곧바로 준의 통신 채널로 루이스 상원 의원 라인을 넣어주었다.

루이스 상원 의원 통신용 에어스크린에 무덤덤한 준의 얼굴이 보였다.

준을 보자, 루이스 상원 의원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잔느는 당신을 사랑했소. 그녀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지. 당신의 관심을 받는 것 ···. 사랑받는 것. 잘 생각해보시오. 그녀가 당신에게 했던 모든 것이 관심 끌려는 어린아이같이 보이지 않소?”

루이스 상원 의원은 감출 것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잔느를 죽인 자를 찾아서 되갚아 주는 것.

그러나 그에겐 복수할 힘이 없었다.

오직 준만이 그런 힘을 가졌지만, 과연 준이 그 힘을 쓸지는 의문이었다.

준은 확고한 기준을 가진 남자고, 엄청난 특혜를 보장받는 북미 연합의 기후거래소 설립에도 손대지 않았다.

그런 준이 사사로운 복수극에 힘을 빌려줄까?

“죄송합니다.”

준은 그답지 않게 침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거절을 위한 에티켓일 것이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내 딸의 원통함은 어디서 달래야 하나?’ 그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일이 터지기 전에 굿데이로 영입해서, 보호했어야 했는데 ···. 제 불찰입니다. 잔느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국가와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인물이었는데 ···. 세상은 찬란한 빛을 잃었습니다.”

‘뭐지?’ 눈물로 얼룩진 루이스 상원 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준이 하는 말은 도저히 감정결핍 증후군으로 보이지 않았다.

“범인은 죗값을 치를 겁니다. 아버님이 허락해주신다면 ···. 신을 대신해서 굿데이가 그를 응징하겠습니다.”

준은 루이스 상원 의원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마치 잔느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한 단어 선택이었다.

“고맙네.”

루이스 상원 의원이 먼저 채널을 닫았다. 뭐랄까 ···. 그는 준에게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에바는 준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다.

준이 루이스 상원 의원과 통화하면서 보여준 모습은 절대 감정결핍 증후군이 아니었다.

만일 저것이 계산된 연기라면, 행동이라면, 작품이라면 ···. 절제미가 강조된 감정 풍부 그 무엇이었다.

준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준?”

현장을 지키는 경찰이 커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굿데이 회장이라는 자리는 한 국가의 대통령보다 무거웠다. 그런 준이 지체하지 않고, 잔느가 숨진 곳에 온 것이었다.

준 혼자 와도 놀라자빠질 일이었는데, 준 곁에는 에바와 로켈이 함께였다.

뒤늦게 온 도착한 카리 총장이 안내를 맡았다.

“사건 현장을 찍은 자료는 모두 유진님에게 넘겼습니다. 준 회장님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이번 사건을 어쩔 수 없이, 미결로 남을 줄 알았거든요.”

사건 현장은 바닥과 벽이 그리고 천장까지 뜯겨 있었다. 뜯긴 부분은 과학 수사 연구소에 초정밀 단위로 분석 중이었다.

짓다가 만 건축물처럼 황량했다.

잔느가 죽은 그 자리에서 유진 악마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그래픽으로 현장을 살리겠습니다.”

곧바로 뜯긴 부위가 그래픽으로 메워졌다.

잘린 잔느의 머리가 그녀의 발바닥 부위에 놓였다. 흥건한 피가 바닥을 덮었고, 천장에서 독특한 무늬의 핏자국이 보였다.

“로켈.”

준이 묻자, 로켈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보안시스템을 피해, 침입하는 수준의 능력자라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정도 능력자라면 잔느의 머리를 자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자료로는 범인이 누군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정보망을 펼쳤습니다. 곧 범인의 ···.”

로켈은 허공에 뜬 잔느의 잘린 머리를 보며, 침을 삼켰다.

유진 악마가 관찰하기 쉽도록 이미지를 움직였다.

절단면이 놀랍도록 깨끗했다.

피부가 밀리거나, 뼈가 으깨진 부위도 없었다.

찢긴 혈관도 없었다.

마찰로 지져진 곳도 없었다.

“정말 말끔하게 잘렸죠? 과학수사팀에서도 범행 수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칼도 아니고, 레이저도 아니고, 강한 바람이나 물줄기 같은 것도 아니라더군요. 이렇게 자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과학 수사팀의 정식 의견입니다.”

카리 총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침입 방법은 고사하고 범행 수법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건 ···. 그림자 자르기입니다.”

로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림자 자르기를 사용하는, 그림자 능력자는 단 한 명입니다. 그의 이름은 마가크, 닥터 칼라니티의 경호원입니다.”

“역시, 닥터 칼라니티 쪽이었군요.”

카리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국가 안전국 케슬러 국장은 ‘두더지 잡기’ 작전을 승인했다.

첨단 수송기 오스프리17이 미크로네시아 상공을 비행했다.

수송기 안에는 강화 슈트를 입은 작전 요원들이 명령을 기다렸다.

요원 중에는 핵터도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비키니 섬에 있는 닥터 칼라니티를 사살하는 것.

케슬러 국장은 카리 총장의 옷깃에 몰래 설치한 도청기로 잔느를 죽인 배후가 닥터 칼라니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굿데이보다 먼저 닥터 칼라니티를 처단할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그의 존재 가치가 증명된다.

특공대에 핵터를 끼워 넣은 것은 핵터의 분노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비키니 섬은 원폭 실험으로 버려진 섬이었지만, 닥터 칼라니티가 사들여서 자신의 연구소로 이용했다.

비키니 섬에서 활동하는 곤충 드론이 정보를 보내왔다.

섬은 원폭 후유증을 극복한 것 같았다.

파인애플과 야자수 나무가 번창했고, 해변에는 산호초와 모래가 깔렸다. 방사능 지수도 낮았다.

원폭의 흔적은 섬 중앙에 검게 변한 유리질 암석 정도였다.

바다거북은 아직도 이곳으로 와서 알을 낳는다.

무당벌레처럼 생긴 곤충 드론은 동굴로 위장된 칼라니티의 연구소를 찾아냈다.

비키니 섬이 칼라니티의 본거지라는 사실은 잔느의 정보 제공으로 알아낸 것이었다.

드론의 소형 렌즈에 칼라니티로 추정되는 인물이 포착되었다.

핵터는 드론이 보내온 인물 모습과 잔느가 진술한 인물을 비교했다. 일치율 99.9%

“제군들. 우리가 닥터 칼라니티를 응징하면, 최초로 국가 안전국이 X등급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 줄 아나?”

“우리가 최고라는 뜻입니다!”

요원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강화능력을 이식받지 않았지만, 그들이 착용한 강화슈트의 전투력은 에임스 탱크와 맞먹었다.

그들은 낙하산 없이 하늘로 뛰어내렸다.

급강하.

150미터 높이에서 로켓 부츠가 플라즈마를 뿜으며, 속도를 줄였다.

그들의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로켓 부츠는 허공을 날며, 곧바로 동굴로 위장한 연구소로 향했다.

바위로 위장한 출입문은 스마트 미사일 한 방으로 날려버렸다. 연구소 안으로 독가스탄과 작렬탄이 연이어 발사되었다.

10분간 화력이 집중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일지라도 기본적인 물리법칙을 벗어날 순 없다.

연구소 안에 모든 생명체는 말 그대로 증발되었다.

핵터가 앞장섰다.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녹아내렸지만, 칼라니티의 이빨 조각이라도 찾아야 했다.

하다못해 칼라니티였던 검댕이라도 확인해야 했다.

핵터가 찾아낸 것은 커다란 알이었다.

요원 한 명이 레밍턴 바주카포를 들이댔다.

“발사!”

핵터는 주저하지 않고, 명령했다.

항공모함도 꿰뚫는 미사일 탄이 거대한 알을 박살 냈다.

알 속에 있던 것이 그 무엇이든, 온전치 못하리라.

“작전 성공. 파리 대왕은 계란후라이가 되었다.”

핵터는 자신 있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케슬러 국장은 오랜만에 웃었다.

그동안 웃을 일이 너무 없었다.

이제 루이스 상원 의원에게 닥터 칼라니티를 제거했다는 소식을 전하면, 국가 안전국장의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잡음이 그의 부푼 기대를 허물기 시작했다.

“방금 저게 뭐였지?”

“갈겨!”

어지러운 총격이 들렸다.

난사, 폭발, 비명 ···.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영상 정보가 끊겼고, 음성 정보만 간간이 이어졌다.

“넌 누구냐?”

닥터 칼라니티로 추정되는 음침한 목소리였다.

“나는 국가 안전국 소속 핵터다 ···.”

“누가 널 보냈느냐.”

대화를 엿듣는 케슬러 국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닥터 칼라니티는 살아 있었고, 강화슈트로 무장한 특공대를 제압했다.

케슬러 국장은 핵터가 루이스 상원 의원이나 잔느의 이름을 대길 바랬다.

닥터 칼라니티의 표적이 되어서 좋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 네놈을 데리려 지옥에서 왔다!”

핵터는 분명 목숨이 위태로웠겠지만, 기죽지 않았다.

케슬러 국장은 안심했다.

음성 정보과 생존 신호로 판단하건대, 특공대의 생존자는 핵터뿐인 것 같았다.

핵터만 잘 버텨주면, 두더지 작전이 케슬러 국장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으악!”

핵터의 비명이 들렸다.

‘끝까지 버티던지, 루이스나 굿데이의 이름을 대라!’

케슬러 국장은 마음속으로 핵터의 빠른 죽음을 응원하며, 소망했다.

“두더지 작전 ···. 이번 작전의 이름은 ‘두더지 잡기’다.”

“그따위엔 관심 없어. 널 보낸 사람의 이름을 대라!”

“퍽큐!”

그리고 다시 비명이 났다.

‘아! 빨리 죽거나. 루이스나 굿데이의 이름을 대라!’

케슬러는 손톱 끝을 물며, 초조해했다.

이윽고 작전 영상에 핵터의 생명반응이 사라졌다.

“거기 누구 있나?”

닥터 칼라니티가 핵터의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국가 안전국 케슬러 국장이다. 말해라.”

“떨거지를 보낸 게 네놈이냐?”

“나는 지시에 따를 뿐이다.”

“누구의 지시지?”

케슬러 국장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누구라고 해야 내가 안전할까?’

답은 하나였다.

“굿데이의 준! 그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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